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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무슨 이야길가?』
그는 주머니에서 아까 정란으로부터 온 한 장의 속달 엽서를 꺼내어 또 다시 읽어 보는 것이다.
학수 씨 ─
오늘 밤 여덟 시에 다방 「백구」로 꼭 와 주세요. 저는 지금 까닭 모를 어떤 무서운 처지에 빠져 있읍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
백 정 란
문학수는 속달을 받던 그 순간부터 정란의 소위 『까닭 모를 무서운 처지──』라는 것을 가지 각색으로 상상해 보았으나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 때 문이 휙하니 안으로 열리면서 정란의 낯익은 회색 투피스가 문학수의 시선을 붙들었다.
핼쓱하니 핏기를 잃은 정란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문학수도 이유 모를 공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란의 몸뚱이는 자욱한 연기를 칼로 베이듯이 헤치고 복스와 복스 사이를 허덕거리면서 학수의 곁으로 다가와 마주 앉는다.
『이 일을 어떻게 해요.』
정란은 복스에 몸을 던지면서 방안을 두루두루 돌아다보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생겼기로 ── 왜 그리 얼굴빛이 나빠요?』
학수는 상반신을 내밀며 종이장처럼 창백한 정란의 갸름한 얼굴을 걱정하였다.
『이유가 있어요! 이유가 ──』
정란의 목소리는 떨린다.
『이유라니 ── 무슨 이유가?』
『무서운, 무서운 이유가 있어요!』
『무서운 이유라니 ── 속히 말해봐요! 뭘 그리 두려워하는게요?』
『두려워할 까닭이 있어요. 그러나 ──』
정란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공포에 쫓기는 눈동자로 또 한번 방안을 둘러본 후에
『그러나 그것을 저는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어요. 그것을 말하면 안 됩니다. 저의, 저의 목숨이, 생명이 위태하다고요!』
『목숨이? 생명이?』
그처럼 침착한 문학수는 저도 모르게 그만 목소리를 높였다.
『안 됩니다! 음성이 너무 높아요. 조용히 말씀해 주세요.』
정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애원하듯이 학수의 말을 막았다.
정란의 표정은 무엇인가를 혼자서 망설이는 것이다. 터져 나오려는 그 어떤 호소를 입술을 꼭 깨물고 참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란은 무엇을 결심한 듯이 손가락으로 핸드 ‧ 백을 열고 한 장의 붉은 봉투를 꺼냈다.
『저는 지금까지 이 무시무시한 협박장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에게 보이면 제 목숨이……』
『협박장?』
『네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면 나를……나를 죽이겠다고 ──』
정란의 눈에는 순간 눈물이 핑하고 돌았다.
『그러나 당신께 만은 ──』
정란이 핸드 ‧ 백 속에서 꺼낸 한 장의 봉투는 새빨간 봉투 ── 타오르는 듯한 주홍빛 봉투였다. 『백정란 앞』이라고 쓰인 이 붉은 봉투에는 발신인의 주소와 성명은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광화문국의 일부인이 박혀 있을 뿐이다.
『빨간 봉투?』
문학수는 부리나케 봉투를 뜯었다. 편지지도 역시 핏빛같은 주홍빛이다.
정란, 너는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나의 명령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나는 까닭이 있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너에게 내리노라.
오는 초열흘 오후 두 시부터 공작부인과 백영호 씨의 결혼식이 부민관에서 거행된다. 그리고 그 때 행복스러운 「웨딩 ‧ 마 ─ 치」를 칠 사람이 백정란 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정란, 나의 명령을 잘 알아두어야만 한다. 처음 신랑 신부가 입장할 때는 물론 너는 「웨딩 ‧ 마 ─ 치」를 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물을 교환하고 식이 끝난 후 신랑 신부가 퇴장할 때 너는 절대로 「웨딩 ‧ 마 ─ 치」를 쳐서는 아니될 것이다. 너는 그 때 그 행복스러운 「웨딩 ‧ 마 ─ 치」를 치는 대신, 「쇼팡」의 「퓨 ─ 네랄 ‧마 ─ 치(葬送行進曲[장송행진곡])」를 쳐야 한다. 인생의 최후를 애도하는 장송행진곡을 쳐야 한다!
백정란, 이는 나의 절대적인 명령이다! 네가 만일 이 명령에 거역한다면 그것은 그대로 네 손으로 너의 하나 밖에 없는 아름다운 목숨을 끊는 것과 같은 결과를 맺으리라. 내가 너를 위하여 장송행진곡을 칠 것이다.
다시 말하노니 정란! 나의 명령은 절대다! 쇼팡의 「퓨 ─ 네랄 ‧ 마 ─ 치」를 완전히 치고 나는 순간까지 너는 이 비밀을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는 다른 피아니스트를 대신 세워도 아니 된다. 너는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그날 꼭 「쇼팡」의 장송곡을 쳐야 할 운명에 사로잡힌 자다.
공부작인에게 칼을 던진 「도화역자」로부터
『퓨 ─ 네랄 ‧ 마치!』
괴상한 명령서를 읽고 난 문학수는 얼마 동안 묵묵히 앉아서 정란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들여다 보다가 마침내 굵다란 신음소리로 중얼거렸다.
『결혼 행진곡 대신에 장송행진곡! 장난이라고 할진댄 너무나 악착스런 장난이다!』
무서움에 벌벌 떨고 있는 정란을 보아서는 자기는 하하 하고 쾌할하게 웃어 보이고도 싶었으나 어쩐지 문학수는 웃을 줄을 몰랐다.
『어떻게 하면 좋아요?』
정란의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하옇든 심상치 않은 일이다. 한시 바삐 이 일을 경찰에 알릴 수 밖에 없소.』
『안대요. 안 돼요!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서는 안 돼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문학수의 손을 잡고 정란은 애걸하듯 끌어 앉히었다.
『정란 씨!』
『──?』
『아무 염려 마시요. 말하자면 이것은 한 개의 장난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니까 ── 그러나 장난치고는 좀 지나친 장난이기 때문에 만일을 염려해서 경찰의 보호를 받도록 하는 것이 제일 무방하지 않아요? 입 밖에 내면 죽인다고 하는 것도 결국 위협에 지나지 못하니까. 하옇든 나하고 같이 이 길로 경찰서에 가서 자세한 것을 이야기하고 만일 위험하다면 경찰의 적당한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공연히 무서워만 해도 안되니까 ──』
이리하여 문학수와 백정란은 그 길로 ×× 경찰서 임경부를 찾아가서 자세한 사연을 이야기하였으나 그들에게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편지에 묻은 지문을 감정해 보았으나 물론 그런 것을 남겨 둘리는 만무한 일이다. 결국 정란이 대신 다른 「피아니스트」를 세우기로 하였을 뿐이었다.
-葬送行進曲[장송행진곡]
그런 일이 있은 지 한 주일 후, 마침내 백영호 씨와 공작부인의 결혼식 날인 오월 초열흘은 다가 왔다.
그날 ── 부민관 앞뜰에는 마치 가마귀떼 처럼 몰려드는 자동차, 자동차, 자동차의 행렬이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고 정각 새로 두시를 기다리는 이층 중강당 넓은 「홀」에는 화려한 화환의 행렬과 함께 사람의 물결이 넘칠듯이 흐느적거렸다.
축복하는 사람, 선망하는 사람, 시기하는 사람 ── 사실, 젊은 공작부인과 늙은 백영호 씨와의 이 결혼식은 무지개와도 같이 가지각색의 색채를 띄고 그들의 눈에 비쳤으리라.
정각까지는 아직 이십 분 ──
문학수는 맨 앞줄 가족석에 앉아있는 정란의, 어쩐지 창백해 보이는 얼굴을 멀리서 바라보고 남모를 불안에 가슴을 두근거리었다.
그리고 정란은 지금 「피아노」 앞에 묵묵히 앉아있는 그의 동무 마리야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바라다 보는 것이다.
마리야는 지금 두 손을 가만이 건반에 얹고 그럴상싶어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긴장된 눈동자로 악보를 드려다보고 있다.
그 마리야의 옆 모양을 멀리 내빈석에서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 저 사법주임 임경부가 또 한 사람 있다.
그는 지금 「포켙」에 쓸어 넣은 오른편 손으로 정란에게 온 주홍빛 협박장을 어루만져 보면서 물결처럼 흐느적거리는 이 수많은 손님들 가운데 그 정체 모를 마인 ── 백영호 씨와 공작부인의 결혼식을 장송곡으로 축하하고저 하는 무서운 악마의 눈동자를 자기 얼굴 위에 감각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만일을 염려하여 「홀」 앞문과 뒷문에 사복한 경찰들을 파수시켜 놓고 뜻하지 않은 재화가 돌발하는 순간 「홀」 문을 앞뒤에서 꼭 잠가버릴 작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고 임경부는 자신에게 타이르는 것이다. 왜 그러냐하면 그는 조금 아까 「피아니스트」 김마리야 양을 불러다가 혹시 이상한 편지를 받은 적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김마리야는 그런 적은 없다고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던 때문이었다.
정각이 가까왔다.
팔십이 넘은 듯한 늙은 주례자가 기침소리와 함께 등단하여 이제부터 백영호와 주은몽의 결혼식을 거행하겠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신랑 백영호 씨가 둘러리들을 곁에 세우고 천천히 입장하였다.
뒤를 이어 신부 주은몽이 공작의 꼬리처럼 활짝 펴진 면사포를 끌며 「웨딩 ‧ 마 ─ 치」와 함께 행복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다.
사람들은 웅성웅성 떠들기 시작하였다. 「웨딩 ‧ 마 ─ 치」는 조금도 거침없이 두 사람의 원앙처럼 다행다복한 앞길을 축하하며 장엄한 「톤」 「리듬」을 가지고 계속된다. 이윽고 주례자의 기나긴 상투적 교훈과 축하의 말이 끝나자
『이제부터 신랑은 신부에게 예물을 주는 것으로서 선량한 남편되기를 서약하고 신부는 신랑으로부터 예물을 받음으로서 정숙한 아내가 되기를 선언 하겠읍니다.』
이리하여 예물을 주고 받은 다음 각계 명사의 축사가 있고 축전 축문의 낭독이 있은 후 신랑 신부가 팔을 끼고 퇴장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란은 지금 「피아노」 앞에서 백납처럼 낯빛이 변한 김마리야의 얼굴을 발견하고 전신이 오싹함을 깨달았다.
『마리야!』
정란이 놀란 상반신을 의자에서 일으키며 그렇게 불렀을 때, 그러나 다시 「홀」 안을 울린 것은 행복에 찬 「웨딩 ‧ 마 ─ 치」 그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찌된 셈인지 마리야의 양손이 흰 건반 위에서 죽은듯이 움직일줄을 몰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피아니스트」에게로 쏠렸을 때, 마리아의 손가락은 다시 「키 ─」를 『콰앙』하고 눌렀다.
순간, 사람들은 자기들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것은 독자제군도 이미 예상하고 있는바 저 재 (灰[회])빛에 쌓인 음침하고도 애도를 품은 「쇼팡」의 장송행진곡 그것이 아닌가.
마침내 불안과 공포와 초조에 떨고 있던 정란의 예감은 명중하였다.
행복의 길을 열어야 할 결혼행진곡이 죽엄의 길을 찾고 있는 장송행진곡으로 변하였다는 이 무서운 사실, 이 불길한 사실을 눈앞에 보는 군중은
『이게 무슨 곡조냐?』
『장송곡이 아닌가?』
『빨리 피아노를 멈춰라!』
하고 저마다 떠들기를 마지않았으나 마치 납인형(蠟人形)처럼 핏기를 잃은 「피아니스트」 김마리야의 손가락은 아직도 미친듯이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리야! 고만둬! 피아노를 고만둬!』
하고 부르짖는 정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비로소 마리야는 악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구슬땀이 비오듯 흐르는 얼굴을 한번 번쩍 들었다가 그만
『와악! ──』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정란의 품 안에 쓸어지고 말았다.
바로 그 때 ── 그렇지 않아도 수라장처럼 어지러워진 화려하던 홀 안을 시꺼먼 공포의 장막으로 둘러 싸 버린 무서운 사건이 또 한가지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저 신랑 신부가 실로 이 뜻하지 않은 불길한 음악 소리에 행복의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숙였던 머리를 번쩍 들어 어지러워진 식장 안을 휘 돌아보던 그 순간이었다.
신부 주은몽의 눈동자가 불현 듯 군중의 일각(一角)을 바라보자 그만
『악!』
하고 고함을 치며 신랑 백영호 씨의 팔목에 새파랗게 변해 버린 얼굴을 묻으면서
『악마! 악마!』
하고 부르짖었던 때문이다.
백영호 씨는 깜짝 놀라 신부의 몸을 껴안으며
『뭐, 악마? 누가, 누가, 악마란 말이요?』
하고 부리나케 물었으나 극도의 공포를 느낀 듯한 신부는 얼굴을 파묻은 채 군중이 어물거리는 오른편 쪽 한 모퉁이를 손가락질 하며
『저기, 저기 이제 방금……』
하고 간신이 입을 떼는 신부 공작부인의 목소리는 마치 십리 밖에서 들려오는 모기소리처럼 가늘다.
그때 임경부의 벼락같은 목소리가 식장안을 흔들었다.
『여러분 조용히들 하시요! 그리고 대단히 미안합니다마는 아무리 바쁘신 분이 있더라도 식장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떠들지들 말고 약한 시간만 기다려 주십시요. 한 시간 후에는 경찰관이 여러분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드릴 것입니다.』
그 때는 벌써 사복한 경찰들이 「홀」 문을 물샐 틈 없이 잠가버렸다. 뚜껑을 덮은 커다란 모말안에서 지금 수백 명 군중은 벌떼 처럼 떠들고 있을 뿐──
『이처럼 경사스러운 날 이렇게 상스럽지 못한 취조를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경찰관의 고충을 헤아려 주십시오.』
임경부는 먼저 신랑 백영호 씨의 허락을 은근이 구한 후에 아직도 사지를 바들바들 떨고 있는 신부 주은몽을 향하였다.
『오늘 이런 심문을 하는 것을 널리 용서해 주시요. 그리고 신부께서 이제 보신 그 악마란 자를 이 가운데서 골라내 주지 않으면 안 되겠읍니다.』
그러나 공작부인은 백영호 씨의 팔목에 매어 달린채 무서움에 찬 눈동자로 수 많은 군중을 노려볼 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생겼소?』
백영호 씨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신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한참 동안이나 식장 안을 휘둘러 보고 있던 신부는
『보이질 않아요. ──』
하면서도 시선으로는 이 구석 저 구석 군중을 헤치며 그 어떤 무서운 그림자를 쉴새없이 찾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임경부는 신부를 출입구 옆에 놓인 교의에다 앉히우고 한 사람씩 그 앞을 지나서야 홀 밖으로 빠져나가는 손님들 가운데서 악마의 정체를 골라내기를 신부에게 청하였다.
손님들은 하는 수 없이 자기의 필적과 주소 성명을 남기어 놓고 한 사람 한 사람씩 마치 시험관 앞을 지나는 수험생처럼 공작부인 앞을 지나서야 밖으로 빠져나갔다.
한명 두명 열명 수무명 ── 이리하여 식장안에는 가족 몇 사람을 남겨놓고 손님들은 모두 무사히 시험관 앞을 통과하였으나, 아아 이 어떻게된 노릇인가……
『없어졌어요! 보이질 않아요.』
하는 신부의 목소리와 얼굴빛은 한층 더 떨리었으며 한층 더 창백해진다.
『그럴리가 있나?』
『그럴리가 있겠소?』
바람같이 나타났다 바람과 같이 자취를 감춘 악마였다.
『이상한 일입니다.』
『없을리가 있나?』
누구보다도 혀를 차며 놀란 것은 임경부와 백남수다.
『이상해요. 이제 방금 보았는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신부는 또 한번 텅 비인 식장 안을 돌아다 보는 것이다.
『음 ──』
하고 임경부는 한번 신음한 후에
『실로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신비로운 사건이다. 인력으로는 도저히 엿볼 수 없는 요술사의 재주다!』
하고 한 번 더 혀를 찼다.
『그가 귀신이 아니고 사람인 이상 앞뒷문을 꼭 닫아버린 식장안 어느 구석에서 필연적으로 신부의 눈에 안 띌리가 없을 터인데 ──』
하는 백남수의 말에 임경부는
『하옇든 이상한 사건입니다. 저번 날밤 이선배라는 화가가 막다른 골목에서 연기처럼 없어지고, 이제와서 또……』
『사실 우리들은 이번 사건에서 과학(科學)과 이성(理性)을 완전히 잃어버리고야 말았읍니다.』
사실 백남수는 허황한 백일몽(白日夢) 속에서 헤메고 있는 자신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대체 이제 신부께서 보신 그 악마라는 사람은 누굽니까? 조금도 숨김없이 세세히 말씀해 주시요. 저번 날밤 부인을 해하고저 단도를 던진 그 도화역자와 동일한 인물에 틀림이 없겠는데 ──』
그때 정란이가 「피아니스트」 마리야의 손으로부터 석장의 붉은 봉투를 받아 임경부에게 내주면서
『이것을 보다면 마리야가 왜 「웨딩 ‧ 마 ─ 치」를 도중에서 끊고 불길한 장송곡을 치지 않으면 아니된 까닭을 잘 아십겁니다.』
『빨간 봉투?』
임경부는 그렇게 외치며 신부에 대한 질문을 잠시 정지하고 먼저 마리야의 자백에 귀를 기우리었다.
임경부가 받아 쥔 세개의 빨간 봉투 ── 발신인의 주소 성명이 써 있지 않은 이 석장의 편지는 저번 정란이가 받은 그것과 대동소이한 내용을 가진 무시무시한 협박장이다.
역시 주홍빛 편지였다. 그 중 한 귀절을 여기에 소개해 보자.
(마리야! 이번이 세 번째의 명령이다. 네가 만일 백정란이 한달 후 피뭉치로 변해버릴 운명에 있다는 사실을 미리 짐작한다면 너는 결코 떠들지 말고 조용히 나의 명령에 복종함이 좋으리라. 한 달 안에 나는 정란의 사령(死靈)을 위하여 장송곡을 칠 터이다. 마리야! 너도 만일 목숨이 아깝다고 생각하거든 꿈에라도 나의 경고를 헛된 협박이라고 믿어서는 안 되리라. 그리고 너는 경찰의 힘을 빌 생각을 하여서는 안 된다. 무슨 연고로…… 경찰의 위력도 나의 이 철석과 같은 의지를 추호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며 온전치 못하리라. 나의 이 위대한 힘, 자연을 초월한 마술사의 재주를 너는 저 백영호 씨와 공작부인의 결혼식장에서 목격할 것이다. 과연 이 대담하고도 무시무시한 마인의 선언은 지금 수백 명 군중 앞에서 훌륭히 실행되지 않았는가!
임경부는 이 어리석은 마리아의 행동을 픽 하고 코웃음을 치려는 자기 입술을 꽉 깨물고 신부를 향하였다.
『그러면 아까 보신 그 악마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시요.』
공작부인의 입으로부터 간신히 흘러나온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그것은 주은몽이 열 여섯 살 되던 여름이었다.
어렸을 때 양친을 잃은 은몽은 그 해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할머니와 함께 금강산 백도사(百道寺)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던 그 때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고 ──
수 많은 절간이 산재해 있는 금강산에서도 이 백도사라는 절은 가장 초라하였으며 손님이라고는 은몽이네 둘 밖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매미소리와 해를 보내는 적적한 절간 생활 ── 육십 고개를 넘은 늙은 주지 한 사람과 열여덟 살 먹은 소년승려(少年僧侶) 해월(海月)이 이 백도사의 주인공이었다.
은몽의 할머니는 늙은 주지와 옛말하기를 즐겨 하였으며 어린 은몽은 홍안 미소년 해월이와 매일 산골짜기로 싸돌아 다니기를 무엇보다도 좋아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은몽과 애기승 해월이가 어렸을 때 부모를 여위었다는 공통적인 쓸쓸한 신세는 그렇지 않아도 타기 쉬운 소년 소녀의 연약한 가슴 속에 기름을 부었다.
『해월아!』
『은몽아!』
그들은 이렇게 부르며 불리우기를 좋아하였다. 하나가 쫓기는 척 하면 하나는 반드시 따랐다. 하나가 따르는 척 하면 하나는 반드시 쫓기었다.
이리하여 그들 앞에는 「아담」과 「이브」의 그림이 그림 그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해월은 「아담」이 아니었고 은몽은 「이브」가 아니었다.
저녁노을을 머리에 이고 해월이와 은몽이 바위 위에서 나란히 앉은 어떤 날──
『내년 여름에도 꼭 와야 해!』
『꼭 오고말고! 내가 뭐 거짓말 할라고?』
『일 년이 몇 일인지 너 아니?』
『아이 참. 삼백예순다섯 날이지.』
『삼백예순다섯 날? 아이구!』
『뭐가 아이구야?』
『꼭 와야 한다! 안 오면……』
『안 오면?』
『너를 찾아 가서……』
『나를 찾아 와서?』
『너 정말 꼭 와야 한다!』
『꼭 온대도 그래?』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