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서 75년 만에 재등장한 트램… 도심공동화 해법으로 활용
3일 오후 일본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시 우쓰노미야역 노면전차(트램) 승강장에서 시민들이 트램을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우쓰노미야역은 올 8월 26일 개통한 트램 우쓰노미야∼하가 LRT 노선의 기점이다. 일본에서 새 트램 노선이 들어선 것은 75년 만이다. 우쓰노미야=이상훈 특파원
《3일 오후 일본 도치기(栃木)현 우쓰노미야(宇都宮)시. 도쿄에서 북쪽으로 130km가량 떨어져 있지만 고속철도 신칸센으로 48분이면 갈 수 있어 준(準)수도권으로 평가받는 도시다. 이 도시의 관문인 우쓰노미야역에 도착하자 말끔하게 새로 단장된 정거장이 눈에 띈다. 8월 26일 개통한 노면전차(tram·트램) 우쓰노미야∼하가(芳賀) LRT 노선이 시작되는 곳이다. 출퇴근 시간과 상관없는 오후 2시였는데도 열차에는 빈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승객이 많았다. 개통 한 달이 막 지난 터라 새로운 열차를 신기하게 구경하며 사진을 찍는 시민도 적지 않았다. 한 60대 주부는 “노란색 도색도 예쁘고 승차감도 좋아 즐겨 탄다. 도시에 신기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생겨서 좋다”고 말했다.》
언뜻 보면 평범한 대중교통이지만 일본에서는 위기에 처한 지방 도시의 도전적인 실험으로 주목받고 있다. 우쓰노미야시는 새로 개통한 트램을 중심으로 도시 전체를 ‘네트워크형 콤팩트 시티’로 리모델링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자가용족’ 많아 교통난 심각
도치기현 현청 소재지 우쓰노미야시는 면적 417㎢에 51만 명이 살고 있다. 만두가 특산물이라 매년 열리는 ‘만두 축제’ 등으로 알려졌지만 외지인이 즐겨 찾아오는 이름난 관광 도시는 아니다. 1982년 이곳과 도쿄를 잇는 신칸센이 개통된 뒤 사실상 수도권으로 편입됐고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산업도시로 자리매김했다. 캐논 카메라 공장을 비롯해 과자 업체 가루비, 뒤퐁 로슈 같은 외국계 기업의 공장이 대거 자리 잡았다.
도쿄와 가깝고 경제 기반이 탄탄해 일본의 다른 지방보다는 사정이 낫지만 우쓰노미야시 역시 저출산 고령화의 영향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2018년 52만 명을 정점으로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어린이가 줄고 고령자는 늘어가고 있다. 지방 도시 특유의 높은 자가용 의존도는 도심 공동화와 교외로 인구가 유출되는 현상의 원인이 됐다. 중심 시가지 보행자 통행량은 1985년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시가지가 무질서하게 교외로 확대되는 스프롤 현상도 생겼다.
대규모 공단은 도시 경제 주축으로 부상했지만 공장이 증가하고 통근 인구가 늘면서 고질적인 교통난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다 보니 평소 30분이면 갈 거리가 출퇴근 시간이면 1시간 반 이상 걸린다. 한국의 많은 지방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 대부분을 우쓰노미야시도 안고 있다.
고민 끝에 우쓰노미야시가 선택한 것은 트램이었다. 1993년에 시가지와 공단을 잇는 궤도형 대중교통 신설을 검토하기 시작해 트램 도입 결정, 주민 설득, 국비 확보 같은 절차를 차근차근 밟았다. 2018년 공사에 착공해 5년 만인 올해 8월 개통했다. 꼬박 30년이 걸린 셈이다.
안보 마사히토(安保雅仁) 우쓰노미야시 LRT 정비과 실장은 “철도나 지하철은 공사비가 트램의 10배에 달해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버스는 교통난을 해소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며 “시간표에 맞춰 제시간에 도착하고 도시 규모에 맞는 수준의 사람을 수송하는 데는 트램이 최적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정부-지자체 사업비 분담
일본은 전국 철도 노선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이용객도 많아 ‘철도 왕국’으로 불린다. 다만 도쿄 오사카를 비롯한 대도시 전철이나 고속철도에 비해 지방 철도는 갈수록 사정이 어렵다. 인구가 줄고 자가용 보급이 늘면서 지방 철도가 없어지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특히 차로에 설치되는 트램은 차량 통행에 방해가 된다며 애물단지로 꼽힌다. 1950년대 전국 총연장 1400km에 달했던 트램 노선은 상당수가 사라져 이제 206km만 남았다. 도쿄 역시 단거리 2개 노선만 남아있다.
우쓰노미야 트램은 일본에서 75년 만에 신설된 트램 노선이다. 우쓰노미야와 유사하게 트램 노선을 콤팩트 시티 정책 중심으로 삼은 도야마(富山)시의 경우 화물 철도를 정비해 트램 노선을 깔았지만 우쓰노미야는 차로에 새 철로를 깔고 전기선을 달아 운영에 나섰다.
이 때문에 재원 조달이 가장 큰 난관이었는데 친환경 대중교통이라는 트램의 특성이 해결책을 가져다줬다. 총사업비 684억 엔(약 6207억 원) 중 절반은 국비로, 나머지는 기초 및 광역단체가 분담했다. 트램이 운행할 때 탄소를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이산화탄소 배출 억제 대책 사업 보조금’을 받은 것이다. 철도 및 열차 소유와 정비는 지방자치단체가 맡고 운행은 민간 운영사인 우쓰노미야 라이트 레일㈜이 맡는 이른바 ‘상하(上下) 분리’ 방식을 도입했다.
트램은 3량 1편성으로 총 길이는 29.5m다. 19개 정류장 노선 14.6km를 최고 시속 40km로 44분에 달린다. 출퇴근 시간에는 6∼8분마다, 낮에는 12분 간격으로 다닌다. 신칸센 역이 기점이어서 신칸센 첫차와 막차 시간에 맞춰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운행한다. 요금은 구간별로 150∼400엔(약 1360∼3630원)이다. 좌석 50석에 입석까지 160명 정원이다.
3일 오후 일본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시 우쓰노미야역에 정차한 노면전차(트램) 객차 내부. 출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빈자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 우쓰노미야=이상훈 특파원
개통 한 달 만에 트램은 하루 1만2000명가량 이용하는 인기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우쓰노미야시 관계자는 “출퇴근 시간에는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고 귀띔했다. 평일 낮에도 빈자리보다 승객이 앉은 자리가 더 많이 눈에 띄었다. 설계 단계부터 교통 약자를 배려해 정류장과 트램에 계단이나 턱을 만들지 않아 휠체어로도 어려움 없이 타고 내릴 수 있다.
다만 지역에서 반대 목소리도 없지는 않다. 트램 노선을 개통할 돈으로 복지 예산을 늘리는 게 낫다는 주장이다. 적자 우려가 큰 대중교통 대신 승용차가 다니기 편하게 도로를 늘려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지방서 드문 역세권 효과도
트램 노선 주변에는 지방에서는 드물게 역세권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개통 전부터 새로운 고층 아파트가 잇달아 지어지고 단독주택 택지 조성도 활발해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재택근무가 확산하면서 주거비가 비싼 도쿄를 떠나 이곳으로 이사 오는 사람도 늘었다. 기존 공업단지 근무자에 이주자까지 늘면서 2년 전에는 26년 만에 초등학교가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인구 감소 추세인 일본 지방에서 새 초등학교 개교는 매우 이례적이다.
아오야기 유타카(青柳裕) 우쓰노미야시 인구대책·이주정주 추진 실장은 “트램 개통 후 매일 운전하지 않아도 수도권으로 편하게 통근할 수 있고 대도시 못잖게 병원이나 쇼핑몰 등이 갖춰졌다는 장점이 드러나면서 이주 문의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우쓰노미야시는 장기적으로 트램 노선 중심으로 도시 구조를 재편하는 콤팩트 시티 정책에 더 힘을 쏟을 계획이다. 우선 트램 정류장 인근에 버스정류장, 주차장, 자전거 보관소를 갖춘 환승센터를 설치해 트램 이용률을 높일 예정이다. 이어 기존 시내버스 노선은 트램 정거장을 거점으로 하는 순환 노선으로 재편한다. 트램이 도시 교통의 동맥을 담당하고 시내버스는 모세혈관처럼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그물망 시스템으로 바꾸겠다는 구상이다.
―우쓰노미야에서
이상훈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