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서 만들 ‘한국형’ 선박, 저성장시대 해법 될 기술수출
사우디아라비아 동부의 주바일항 인근 킹살만 조선산업단지에는 연간 40척 이상의 선박을 만들 수 있는 사우디 합작조선소(IMI)가 막바지 공사 중이다. 독 3개짜리인 이 조선소의 부지 규모는 약 500만 ㎡(약 150만 평)로 축구장 700개 크기다. 2016년 12월 사우디 국가사업으로 확정된 후 내년 완공 때까지 투입되는 자금만 5조 원에 이른다.
IMI는 세계 최대 석유기업 아람코를 포함한 사우디 기업 3곳과 HD현대가 합작해 만든 회사다. HD현대 지분은 20%. 울산에서 세계 최대 조선소를 운영하고 있는 HD현대의 노하우가 중동으로 건너간 것이다. 게다가 2019년 맺은 ‘설계기술 판매계약’에 따라 IMI에서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한 척이 건조될 때마다 HD현대는 기술 라이선스 비용을 챙기게 된다. 1971년 영국 조선업체 스콧리스고로부터 설계도면을 임차해 첫 선박 건조에 나선 지 50여 년 만에 거꾸로 설계기술을 수출하게 됐다.
HD현대는 또 2020년 아람코 자회사인 사우디아람코개발회사, 사우디 산업투자공사인 두수르와 3자 합작으로 선박엔진 제조사 마킨(MAKEEN)을 설립했다. HD현대의 독자개발 중형 선박엔진 ‘힘센엔진’의 첫 라이선싱 사업이다. 마킨은 올 6월 IMI 인근 부지에서 착공식을 가졌고, 2025년 양산에 들어간다.
사우디는 1970년대 건설 역군들의 첫 땀이 서린 곳이다. 1976년 현대그룹이 수주한 주바일 산업항 공사는 9억4000만 달러 규모로, 당시 한국 국가예산의 4분의 1 수준이었다고 한다. 많은 아버지들이 중동으로 건너가 외화를 벌었고, 경제 고속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이제 그 사우디에 건너가는 사람들은 짐을 이고 나르는 대신에 첨단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른바 ‘두뇌 수출’이다.
한국 조선업은 여전히 잘나가고 있다. 수주 호황에 힘입어 ‘빅3’ 모두 3년 치 일감을 확보해 뒀다. 현장 생산인력 부족으로 오히려 수주 속도를 조절할 정도다. 문제는 현재가 아닌 미래다. 국내 생산가능 인력은 나날이 감소하고 있다. 외국인으로 메우는 데도 한계가 있다. IMI와 마킨은 이런 한계를 벗어날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른 제조업이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다. 대규모 노동력을 투입하는 생산중심 제조업은 지금의 한국을 있게 한 1등 공신이지만, 미래 한국까지 책임져주진 못한다. 한 제조업체 임원은 “이제는 완제품이나 반제품을 배에 실어 보내는 대신 그동안 축적해온 기술력을 자산으로 활용할 때가 됐다”고 했다.
이달 중순 삼성 현대자동차 한화 HD현대 등 대기업 총수들이 일제히 사우디를 방문할 예정이다. 사우디 최대 프로젝트 ‘네옴시티’가 가장 큰 관심사다. 단순히 도로를 깔고 건물을 짓는 걸 넘어 대규모 도시를 ‘창조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매력적인 만큼 경쟁도 치열할 수밖에 없다.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 수준을 제대로 가늠해볼 기회이기도 하다.
제2의 IMI 사례들도 함께 쏟아져 나오길 기대한다. 이러한 기술수출이 중동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할 때 한국도 지긋지긋한 저성장 기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김창덕 산업1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