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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천도 629주년 기념 및 1394.11.29 新遷都後 조선왕조 역대군왕 수명
< B.C. >
194년-고구려, 진대법 실시
3세기초-공손씨, 대방군 설치
209년-고구려, 국내성에 도읍
260년-백제(고이왕), 16관등과 공복 제정
313년-고구려, 낙랑.대방군 격파
371년-백제, 고구려의 평양성 공격, 고국원왕 살해, 백제, 한성에 천도
372년-고구려, 불교 전래, 태학 설치
382년-신라 내물왕, 전진에 사신 파견
384년-백제, 불교 전래
405년-백제, 일본에 한학 전함
427년-고구려 장수왕, 평양성 천도
433년-신라, 백제 군사동맹 성립
475년-백제, 웅진성(옹주)에 천도
502년-신라, 우경 실시
520년-신라, 율령반포, 백관의 공복을 제정
527년-신라, 불교를 정식종교로 공인
536년-신라, 연호 사용
538년-백제, 사비성 천도
545년-신라, 국사편찬
552년-백제, 일본에 불교 전래함
586년-고구려, 장안성에 천도
612년-고구려, 살수대첩
624년-고구려, 당으로부터 도쿄 전래
645년-고구려, 안시성 싸움 승리
647년-신라, 첨성대 건립
660년-백제 멸망
668년-고구려 멸망
676년-신라 김유신 장군, 삼국통일(三國統一)
682년-국학을 세움
685년-9주 5소경 설치
698년-대조영, 진국 건국. 발해의 등장
722년-신라, 정전 지급
751년-불국사와 석굴암을 세움
788년-독서삼품과 설치
828년-장보고, 청해진 설치
834년-백관의 복색제도를 공포
888년-신라, 삼대목 편찬
900년-견훤, 후백제 건국
901년-궁예, 후고구려 건국
918년-왕건, 고려 건국
926년-발해, 거란에 멸망. 유민, 고려 투항
935년-신라 경순왕, 고려에 항복. 신라 멸망
936년-고려, 후백제를 멸하고 통일 성취
956년-노비안검법 실시
958년-과거제도 설치
976년-전시과 실시
982년-중앙관제 정비
992년-국자감 설치
996년-철전(건원중보)주조
1009년-강조의 정변
1019년-귀주대첩
1076년-관제개혁, 전시과 개정
1102년-해동통보 주조
1107년-윤관, 여진 정벌
1123년-이자겸, 정권 장악(~26년)
1135년-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1145년-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1170년-무신정변
1179년-경대승, 도방 정치
1196년-최충헌, 정권 탈취(~1258년)
1198년-만적의 난
1219년-몽골과 통교(국교=수교)
1231년-몽골의 제1차 침입
1232년-강화 천도
1234년-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 간행
1236년-고려대장경 새김(~1251년)
1270년-개경으로 환도, 삼별초의 對몽골 항쟁
1274년-여, 원의 제1차 일본 정벌
1359년-홍건적의 침입(~1361년)
1363년-문익점, 원에서 목화씨 들여옴
1376년-최영, 왜구 정벌
1377년-최무선의 건의로 화약 무기 제조(화통도감 설치), 직지심경 인쇄
1388년-이성계 위화도 회군 및 실질권력 장악
1389년-박위 쓰시마섬 정벌, 고려34대 공양왕 즉위
1391년-과전법의 제정
1392년-공양왕 폐위 및 고려왕조 멸망, 이방원 정몽주 제거 및 태조 이성계 조선왕조 건국선포 07.17일자=양력08.05일자 & 개성 수창궁 초대 군왕 즉위/07.18일자 태조 이성계 명나라 사신 파견 및 신왕조 교체사실 통보 / 07.19일자 신왕조 교체사실 승인요청 사신 잇따라 파견 신왕조 사신 접견 명태조 주원장 한반도 정권교체, 이성계 군왕즉위 인정 및 국호개정 관련 빠른 시일내에 알려 달라반응 “배신 (陪臣 ) 조임 (趙琳 )이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와서 삼가 예부 (禮部 )의 자문 (咨文 )을 가지고 왔는데 , 그 자문 지면상 ,
[‘삼가 황제의 칙지를 받들었는데 그 내용에 , 이번 고려에서 과연 능히 천도 (天道 )에 순응하고 인심에 합하여 , 동이 (東夷 )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변방의 흔단 (?端 )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면 , 사절 (使節 )이 왕래하게 될 것이니 , 실로 그 나라의 복이다 . 문서가 도착하는 날에 나라는 어떤 칭호를 고칠 것인가를 빨리 달려와서 보고할 것이다’].
명나라의 승인에 기뻐한 이성계는 문무백관들 도당 모아놓고 국호 개정을 의논하게 하였고 도당내 왕조의 국호로 조선 (朝鮮 )과 화령 (和寧 )을 추천했다 .
한반도내 신 왕조측에서는 단군조선 관련 문화와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도였는데 반하여, 대륙내 명나라 측에서는 기자조선 의식하고 조선이라는 국호 관련 쾌히 동의했고 즉 논어에 등장하는 은(殷) 나라의 현인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망명하여 백성을 교화 시켰으며, 이에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 하였다는(한서지리지)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단 의미므로 명 태조 주원장 기준상 조선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임을 인식 한듯했다. /
08.13일자 태조 이성계 신천도 공식선포 및 건국 · 혁명1등공신-정도전 &국사=왕사-무학도사 동행 개성 => 신도읍지 및 적임 천도지 물색목적 · 목표 출발
8월 13일 : 임금이 都評議使司(최고 정무기관으로 후일 의정부)에 도읍을 漢陽으로 옮기도록 명하다.
8월 15일 : 三司右僕射 이염을 한양부로 보내어 궁실을 수즙修葺)케 하다.
9월 3일 : 배극렴 등이 한양의 궁궐과 성곽이 완성된 후에야 신도로 이전하자고 청하니 윤허하다.
1393년- 1월 2일: 胎室證考使 權仲和가 태실의 吉地와 新都 후보지(鷄龍山)의 지도를 바치다.
1월 19일: 안종원 등과 계룡산에 가서 신도 후보지를 살펴보려 하다.
1월 21일: 전국의 명산 대천 성황 해도의 신에게 봉작을 내리다
2월 1일: 신도 후보지인 계룡산으로 행차 도중 의견을 말하다. 즉, “내 자신 대에서 새 도읍을 정하고자 하며, 後嗣될 嫡子가
비록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도읍을 옮기려 하더라도, 대신이 옳지 않다고 저지시킨다면, 후사될 적자가 어찌 이 일을 하겠는가?”
2월 8일: 계룡산 밑에 이르렀다.
2월 13일: 임금이 계룡산을 떠나면서 김주(金湊) 등에게 신도의 건설을 감독케 하다.
3월 24일: 계룡산의 신도를 중심으로 畿內에 81개의 州縣, 部曲, 鄕所 등을 획정하다.
12월 11일: 풍수지리에 밝은 경기도 관찰사 하륜(河崙)이 “도읍은 마땅이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되오나,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서 동서북면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지금 계룡산은 산은 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에서 간다 하오니 ---”라 하며 계룡산이 신도의 입지조건이 맞지 않다고 상언하자, 계룡산의 신도 건설을 중지하고 천도할 곳을 다시 물색하도록 명하다.
단군조선 관련 문화와 전통 · 정신 을 계승한다는 목적 및 의도 기반하여 국호 관련'조선 (朝鮮 )'이라 결정 / 태조 이성계 건국 · 혁명1등공신-정도전 & 국사=왕사 - 무학도사 일행 개성
=> 신도읍지 및 적임 천도지 물색과정 진행기간[1단계 물색지: 충남 계룡산 신도안 對 한양-한강 이북] =>
[2단계 물색지: 무악=신촌 對 북악]
1394년 - 2월 18일: 조준, 권중화 등 11인에게 書雲觀(기상관측 관서)의 員吏들을 거느리고 풍수에 관한 비결책(地理秘錄撮要)을 가지고 가서 무악(毋岳, 서울 연희동)남쪽을 천도지로 살펴보게 하다.
2월 23일: 권중화, 조준이 무악 천도를 반대하나, 하륜만이 무악의 명당이 비록 협착(狹窄)한 듯 하나 송도의 康安殿과 평양의 長樂宮보다 조금 넓다며 찬성하자, 임금이 직접 가서 결정하겠다고 함.
6월 27일: 서운관 관원이 “신이 배운 바로는 무악이 도읍으로 정할 곳이 아닙니다”하니, 다른 곳을 물색하게 하다.
8월 11일: 임금이 毋岳을 둘러보고 유숙하다. 천도할 장소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송도의 지덕이 이미 쇠하였다 하여 여러 번 상서하여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하였으나, 근래에는 계룡산이도읍할 만한 땅이라 하여 민중을 동원하여 공사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이제 또 여기가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여 와보니 한우 등의 말이 좋지 않다 하고 도리어 松都가 명당이라 하며 서로 논쟁하고 국가를 속이니 일찍이 징계하지 않은 까닭이다.
8월 12일: 임금이 도읍터를 잡기 위해 王師 自超(무학대사)를 부르다.
임금이 여러 재상들에게 분부하여 각각 도읍을 옮길 만한 터를 글월로 올리게 하니,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이 말하였다. "이곳이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漕運)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한스러운 것은 한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안으로 궁침(宮寢)과 밖으로 조시(朝市)와 종사(宗社)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으니 왕자의 거처로서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말씀에, ‘어릴 때에 배우는 것은 장년이 되어서 행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평일에 배운 바로써 말하겠습니다. 〈주나라〉 성왕(成王)이 겹욕(郟鄏)에 도읍을 정하니, 곧 관중(關中)으로 30대 8백 년을 전하였습니다.
11대손인 평왕(平王) 때에 이르러 주나라가 일어난 지 4백 49년 만에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진(秦)나라 사람이 서주(西周)
옛땅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주나라는 30대 난왕(赧王)에 이르러 망하고 진나라 사람들이 이를 대신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30대 8백 년이라 하는 주나라의 운수는 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나라 고조(高祖)가 항우(項羽)와 함께 진(秦)나라를 칠 때, 한생(韓生)이 항우에게 관중(關中)에 도읍할 것을 권했으나, 항우가 궁궐이 다 타버리고 사람이 많이 죽은 것을 보고 좋아하지 아니하니, 어느 사람이 술수로 항우를 달래되, ‘벽(壁)을 사이에 두고 방울을 흔들면 그 소리는 듣기 좋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니, 부귀(富貴)해진 뒤에는 고향 산천(山川)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하니, 항우가 그 말을 믿고 동쪽 팽성(彭城)으로 돌아가고 한 고조는 유경(劉敬)의 말에 의하여 그날로 서쪽 관중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항우는 멸망했으나 한 나라의 덕은 하늘과 같았습니다. 이후로 우문씨(宇文氏)의 주(周)나라와 양견(楊堅)의 수(隋)나라가 서로 이어가면서 관중에 도읍하고, 당나라도 역시 도읍하여 덕이 한나라와 같았으니, 이것으로 말하면〈국가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盛衰)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8월 13일 임금이 왕사 자초와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다. 임금이 왕사 자초에게 물으니, 자초가 대답하기를 “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 결정하소서”하여 여러 재상에게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였다.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좋습니다“고 하윤이 홀로 말하였다.
8월 24일: 도평의사사에서 “한양의 안팍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예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고 아뢰니 王旨로 아뢴대로 하라 하였다.
고려34대 공양왕 승하, 09월 무렵 [3단계 물색지: 인왕 對 북악]태조 이성계 일행 한양 - 한강 이북지역 도달
9월 9일: 정도전등에게 한양의 종묘, 사직, 궁궐, 시장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무학대사 : (풍수를 따져봤을 때) 서산(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백악산(북악산)을 좌청룡으로 하고, 목멱산(남산)을 우백호로 하여 궁궐을 동쪽을 향하도록 짓는다면북악산 용맥으로 연결되는 좌청룡과 남산으로 연결되는 우백호가 조화를 이뤄 왕조는 태평천하를 얻은 것으로 한 마리 커다란 용과 호랑이가 궁궐을 양 옆에서 지켜 보호하는 형태일 것입니다.
무학대사가 간곡주장 · 호소했던 유좌묘향(酉坐卯向)論 => 유방(酉方)을 등지고 묘방(卯方)을 향한 좌향. 서좌동면西坐東面=서좌동향西坐東向즉 집터 따위가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있는 것을 가리켜 의미하고 일컫는다.
주산(主山)인 인왕산(仁王山; 338m)관련 후덕하고 수려하여, 정치수완 순탄· 출중급-훌륭한 후덕현군들 대부분, 左靑龍 &右白虎인 북악산=표고342m과 남산=표고270m 좌우 높이 & 균형 일치 · 동향 바라봐 북악산-殺伐殺氣 對관악산-强熱火氣모두 막아내고 피하며 右白虎비하여 左靑龍좀더 강하고 높아 장손 흥왕형국이다.
▼ < 하늘에서 바라본 무학대사의 인왕산-주산론=>仁王山-主山論 >
정도전 : 그 무슨 궤변이오! 옛날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고 정치를 하여 천하를 다스렸소! 동향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소!
“제왕이 남쪽을 바라봐야지, 어찌 동쪽을 보고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중국의 모든 역대 황제들이 궁을 남향으로 지은 데는 이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정도전이 밀어붙이고 극력 주장했던 임좌병향(壬坐丙向)論 => 임방(壬方)을 등지고 병방(丙方)을 향한 좌향.
제왕남면帝王南面=제왕남향帝王南向=북좌남면北坐南面=북좌남향北坐南向즉 북서방향을 등지고 남동방향을 바라보는 방향 가리켜 의미하고 일컫는다.
남산=표고270m이 높은반면, 낙산=표고125m이 매우 낮고 허한만큼 최고군왕 - 군주 항상 불안하며, 左靑龍, 右白虎인 낙산=표고125m과 인왕산=표고338m의 높이가 불균형하여 항상 불신· 불안정된 정국 & 형국이다.
사진 그대로 등지고 있는 북악산-殺伐殺氣악영향 정면받고 남향 바라봐 관악산-强熱火氣관련 정면 노출상태에다 左靑龍비하여 右白虎한결 강하고 높아 차손 흥왕형국이다.
▼ < 하늘에서 바라본 정도전의 북악산-주산론=>北岳山=白岳山 -主山論 , 낙산이 매우 낮음 >
9월 23일: 한양에서 정도전등은 돌아오고 심덕부와 김주는 남아서 관리하다.
10월 25일: 한양으로 서울을 옮기었다. 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송도에 머물러 있게 하고 최영지와 우인열 등으로 分都評議使司로 삼았다.
10월 28일: 신도에 이르러 옛 한양부 客舍를 임금의 離宮으로 삼음.(至新都 以舊漢陽府客舍爲離宮)
11월 3일: 도평의사사에서 종묘와 궁궐과 성곽공사를 독촉할 것을 상신하다.
說明 : 조선왕조 개국 · 건국초기 군주 및 측근세들은 북좌남면=제왕남향 원칙화했다. 조선대표 법궁 경복궁,그리고 창덕궁을 보면 쉬운 납득· 이해된다. 그 무렵· 시절,명나라 사대주의 빠져있어 사실상 제후국임을 천명한 이성계는 중국 주나라 주공 저술[주례고공기]기반하여 정도전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무엇보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해야 궁궐을 남향(南向)으로 배치할 수 있다. 임금은 남쪽을 바라봐야 한다”는 정도전의 명분에 힘이 실렸습니다. 당시 실권자 · 건국1등공신였던 정도전 혁명세력들은 신왕조 궁궐방향 관련 서쪽으로 둘 수 없단 이유에서였고 정도전을 위시한 중국식-유교세력들 견해 및 주장 관련 무게 실리고 힘을 얻음으로서 조선왕조 정궁-경복궁 관련 북악산 세력권 아래 놓이고 들어서며 앉혀지게 됐습니다. 무학대사의 말대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는다면 궁궐은 동쪽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도전도 자신 앞날 관련 몰랐기 때문인지 그로부터 4년 후 1398년 08월 26일 심야 새벽2시대 수송방(現在종로구청 부근)에 살고 있었던 정도전은 중학천 계곡에서 시(詩 )한 수 읊으며 술이나 한잔 하자는 혁명동지 남은 전갈을 받고 송현(松峴-現在한국일보 부근)에 있는 남은 애첩 누각에서 남은, 박이, 장지화 등과 함께 한잔 술을 마시다가 이방원 일파에게 참살되고 말았다. 각기병 & 복창 합병증세 앓았던 정도전은 이방원 면전"예전 태조 즉위년 정안군께서 이미 나를 살린만큼 지금도 또 다시 살려 주시오."그믐달 가까워오는 칠흑 같은 밤. 이방원 앞에 무릎 꿇은 정도전 위와 같이 애원했다. 예전이라 말하는 것은 지난1392년 태조 이성계 조선 초대 즉위년 정도전이 정몽주 세력한테 죽을 위기에 처했을 당시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4월 26일자 정몽주를 정리-제거함으로서 살아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단호했다. 역성혁명(易姓革命 )을 처음 계획, 설계하여 이성계 중심 조선 건국을 가능케 한 반면 자신 아버지 이성계를 군신으로 대하지 않고 동지 및 정치 라이벌로 생각하는 정도전. 이복동생 방석을 옹립하여 후대를 도모하려는 정도전. '사병혁파'라는 미명 내세워 자신의 수족을 잘라내던 정도전. 이방원에게는 살려둘 수 없는 존재였다. 이방원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흐르는 듯하더니 이어"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었는데 그리도 부족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 이 지경까지 이를 수 있느냐?"일축하며 즉시 목을 치라는 추상같은 명령 내렸다. 따라서 정몽주와 정도전 경우 '조선건국 & 신천도=兩大國事' 사이에 두고 6년 4개월 간격으로 이방원 의해 제거된 것이다. 평상시 정도전은 한(漢) 고조(高祖)가 장량(張良)을 이용한 것이 아니고, 장량이 고조를 통하여 천하를 얻은 것이라고 얘기하며 자신을 장량에 비유하며 자신을 치켜세움으로서 겸손하지 못한 그의 성격이 주변으로부터 질시와 시기를 야기·초래했으며 이성계와의 관계를 군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혁명동지로 인식했다는 것이 그의 최대 부덕이었다. 이러한 그도 정몽주 일파로부터 처형위기 직면시 이방원이 구해줬고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맞은만큼 결국 정도전의 목숨은 이방원의 수중 있었던 셈이다. 또한 정도전 본인이 그토록 두렵다고 설파한 골육상쟁이 현실로 나타났다. 정도전이 죽던 날 세자 방석이 이복형 이방원에 의하여 주살됐고 조선왕조 역사상 제1차 왕자의 난(또는 무인정사=戊寅靖社)이라고 일컫는다. 1392년 7월 건국 당시 조선 군대는 일체화 결집되어 있지 못했고 각 절제사들이 시위패를 거느리는 형태로 이뤄져 있었으며 원래 시위패는 공민왕 시절 궁궐을 지켜 , 국방을 안정 시키기 위해 마련된 조직인데 , 조선 건국 무렵에는 그 시위패들을 절제사들이 사병처럼 활용하고 있어 당시 절제사들은 국가의 명령 없이도 시위패를 지휘할 수 있었 기 때문에 사병이나 마찬가지라 이런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세력은 정안군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과 건국공신 세력들이었다.
역사 가정법 없다해도 "제왕남면帝王南面 =제왕남향帝王南向=북좌남면北坐南面=북좌남향北坐南向=>임좌병향(壬坐丙向)論者" 정도전 관련 태조 이성계 조선건국· 초대즉위 후 개성 다음가는 신왕조 적절-천도지 물색전 시점 이방원 세력 의한 제거되지 않고1392년 08월 중순/말~1398년 08월 26일까지 무렵 6년간 늦춰진 사실 좀더 구체표현 한다면 이방원측 정도전 심중[부친 이성계 향한 군신관계 비하여 건국1등공신 신분 내세워 동지· 라이벌 생각· 인식하고 이복동생 방석 왕위옹립 및 후대 도모하며 사병혁파 & 병권 집중화운동 목적상 이방원 수족 잘라냄=사실 정도전, 남은세력들은 조선건국 초기부터 요동정벌계획 세우고 있었고 이를 위해 병권을 집중 시키고 있었다.
※정도전 세력 병권 집중화 운동은 이렇듯 이방원을 포함한 여러 왕자들과 사병을 거느리고 있던 유력한 신하들에게 깊고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기에 사병이 혁파되고 병권 오직 삼군부 귀속 된되면 혹 자신들이 일시 제거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며 결국 1398년 08월 중순무렵 이성계 명령 의한 왕자들의 시위패가 폐지 되었다 .다만 세자의 친형 방번이 거느린 시위패만 유지 시켰고 더군다나 방번의 군대만이 유지되고 있었기에 한씨 소생 왕자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어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과 사병 세력은 병권 집중화에 주력하고 있던 정도전 세력들 제거기회를 엿보게 되었다]대하여 한결 민첩-신속감지· 파악했거나 조선건국 이후8월 중순~말(=조선건국 후 ~ 신천도지 물색 전)시점내 만일 잠재화근 가능성 대비목적 정도전 정리·제거 못해내어 조선왕조 태평천하 유일무이-호시기 놓침으로 불행 및 비극역사 연속전락 · 타락현실 진정의미상 대단히 아깝고도 아쉬운'늦춰진 놓쳐버린6년'세월 아닐 수 없는데다1392년내 4월 정몽주 제거와 7월 조선건국 선포 후 7~8월중 제왕남향 & 북좌남면-임좌병향론자 정도전 제거 실현됐어야 했다. 그야말로 1392년 7월 조선왕조 건국 이후 2년 6개월채 안 되는 기간내 1394년 시점발 한 사람의 깊고 크나큰 조선왕조 정궁 배후· 주산 관련 판단착오식 결정 비롯한 전반 불행·비극역사 이어 내려온 것으로서 성씨별 표현하면 왕조 태평천하 제안자 왕사 죽산 박씨 - 박자초 = 무학 견해 대하여 왕조 건국 · 혁명실세 친명사대주의 정책 기반/입각자 봉화 정씨 - 정도전 극력반대 의해 초대 군주 전주 이씨 - 이성계 궁극결정 의한 불행역사 씨앗 심어져 내려온 것이었다. 백성들을 위한 재상정치를 꿈꾸며 가슴에 품고 있던 웅지를 다 펼치지 못하고 죽은 정도전 시신은 오늘날까지 찾을 방법 없고 묘소 자체도 없다. 경기도 평택 위치 봉화정씨 진위면 은산리 산대마을=집성촌 정도전 묘역 존재반면 실제 시신이 묻혀져 있지 않은 實質공묘空墓=허묘虛墓불과하다. 후대 비슷 · 유사사례로는 대한제국/구한말 시대 안중근 의사 · 일제강점 시대 유관순 열사등을 들 수 있다.
인왕산을 배후산=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左靑龍 · 右白虎삼자는 국사=왕사'계월헌'무학대사(本名:박자초) 유좌묘향(酉坐卯向)기반화 제안 비하여<북악산을 배후산=주산으로 삼고 낙산과 인왕산을 左靑龍 · 右白虎삼자는 중국 명나라 자금성 방향식 기반화 제안자 건국 · 혁명1등공신-'삼봉'정도전 임좌병향(壬坐丙向)論 궁극수용 / 09월 27일(음력 08월 24일)도평의사사 상신(上申)따라 한양-한강이북 지역 수도 결정/11.26일자 개성출발~ 11.29일자 한양 도착 및 공식천도 단행 되어짐.
1395년 - 6월 6일: 한양부 => 한성부 개칭. 9월 29일: 신 궁궐 준공
윤9월 10일: 정도전으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성곽공사 준비시킴.
윤9월 26일: 종묘의 移安을 고유하다.
10월 7일: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전각이름을 짓게하니, 새 궁궐 景福宮이라 하고, 勤政殿, 思政殿, 康寧殿등 전각이름을 지었다.
북악산을 배후산=주산으로 삼고 낙산과 인왕산을 左靑龍 · 右白虎삼는 중국 명나라 자금성 방향식 기반화 임좌병향(壬坐丙向)論 의하여 대략10개월간 걸친 전국 사찰의 승려들과 1만 5천여 백성들을 적극동원된 국가공사 끝09월말~10월초순 무렵 한양부 -> '한성부' 개칭 · 경복궁 준공 및 조선왕조 실질정궁 경복궁 완공
첫째로,서울은 백호와 안산(案山)에 비해 청룡이 너무 낮고 허하다. 풍수지리에서 청룡은 남자와 장자(長子)및 지손을 관장하고, 백호는 여자와 차자(次子)등 지손(支孫)을 관장하는데,조선왕조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장자보다는 지손=차남 · 삼남들이 한결·훨씬 잘 되었으며 여인(원경황후 & 명성황후etc)들과 외척(민씨일가etc)의 발호가 드세었다. 또 동쪽이 허(虛) 하다보니 동쪽에 있는 외적(일본-무장왜구)의 침략 및 침입 관련 약했다.
둘째로, 황천방(黃泉方)이라고 하는 건방(乾方) 즉,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인 자하문 고개가 푹 꺼져있어 황천풍(荒天風)을 받아 험한 일을 많이 당하고, 서북쪽(중국-무장오랑캐)에 있는 적들 군사침입 관련 속수무책이었다.
셋째로, 좌향(坐向)이다.궁궐의 좌향을 남향으로 하느냐 동향으로 하느냐를 가지고 유학자인 정도전과 승려 무학대사는 의견을 달리 했는데 왕은 남향을 하여야 한다는 정도전의 말에 따라 서울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을 하였다. 만약 무학대사가 주장했던 유좌묘향(酉坐卯向) 으로 동향을 하였다면 자왕향(自旺向)으로 부귀왕정(富貴旺丁)하는 길한 방향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제일 큰 문제점은 인왕산 대신 북악산(북현무)을 주산으로 삼아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우백호인 인왕산(높이 330m)에 비해 좌청룡인 낙산(높이 110m)이 너무 허약하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동쪽 대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만 옹성을 쌓고 허약한 좌청룡의 지기를 돋우기 위해 산맥 모양의 之자를 넣어 이름을 네 글자로 지었다.
다른 한 가지는 경복궁이 살기 내뿜는 북악산을 등졌으며 남면(南面)하고 있어 관악산의 화기(火氣)에 정면으로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사진으로 보는 것 같이 끝 봉우리가 불꽃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어 풍수지리학 차원火山으로 관악산은 오행상 불=火해당되어 그 불기운 관련 궁궐을 누름으로서 화재가 빈번발생 할 것이라고 예언됐다. 이런 불의 기운 악영향 궁궐내 불이 날 것 예방목적 광화문 좌우양쪽 해태상을 세웠다.
1396년-한양 천도완료 및 4월 한성부 행정구역 설정 · 9월 각 도성 및 문루들 완성, 정도전 요동정벌
9월 15일 임금이 儀仗과 호위를 갖추고 경복궁으로 옮기다.
※각종 자료에 의하면 한양 천도일 1394년 음력 10월21일, 10월 25일, 10월 28일등 서로 다르나,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394년 10월 25일(양력 11월 26일) 한양으로 서울을 옮기었다”, “10월 28일(양력 11월 29일) 임금이 신도[신도읍지 : 한강 이북지역 북악산 아래]에 이르러 객사를 이궁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지난1994년 11월 29일 14th김영삼 문민정부가 서울천도 600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한 것으로 보아 태조가 한양에 도착하여 이궁離宮에 들어간 입궁 / 입궐일 기준상 천도일을 결정내린 듯함.
※ 1399년(정종 즉위1년)왕자의 난 의한 잠시 개경으로 수도를 옮긴반면, 1405년(태종 즉위5년)에 다시 돌아와, 이후 한성은 조선수도로 확정되고, 세종 재위시절에는 대략20만 인구를 가진 대도시로 성장.
※비극성 2차례 왕자의 난 즉 양대-骨肉相爭(골육상쟁)좀더 나아가 骨 肉 相 殘(골육상잔)살육전-극단파국 사태에다 태종 슬하 차자-충녕대군 의해 밀려난 적 장자-양녕대군 왕위 폐위까지 부정전례 본뜬 수양대군 중심측근세력들 의한 계유정난까지 더해져 '장자 왕위계승 · 후덕정치-토착화'비하여 한양-한강이북 신천도 이후 1910년 08월 국권피탈 즉 망국시점까지 27명 군왕등극 반면 서울은 우백호와 안산(案山)에 비해 좌청룡이 너무 낮고 허하다. 풍수지리상 좌청룡은 남자와 장자(長子)및 지손 관장, 우백호는 여자와 차자(次子)등 지손(支孫) 관장, 조선왕조 전체역사를 통해 분석시 장자 비하여 지손=차남·삼남들이 한결 잘 됐으며 장손 즉위자7명 그쳐 전체26%불과했단 사실.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왕조 역사 도합27명 임금 중 단 7명만 적장자 출신 군왕였다.
그 중에서도 단종과 숙종은 그 아버지까지 적장자 출신만큼, 정통성으로 따져보면 조선왕조 양대축 대열이다.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는 물론 왕조자체 건국 인물만큼 적장자 관련 논할 필요가 없고 조선왕조 초기 역대 군왕 적장자 출신은 3명 불과했고 중~후반기 적장자4명까지 포함,적장자 출신 군왕들 재위기간 도합20년 채 되지 않았으며 반강압=반강제식-퇴위 및 폐위, 질병 · 건강악화나 약화 의한 단명·병약· 요절 혹은 폭군행태재위자 대부분였단 사실이다.
<이씨 조선왕조 역대군주 계보도>
▲<청룡포를 입은 태조 어진>
*대한민국의 국보 제317호
풍수지리상 표현 · 해석시 한양은 완벽 도읍지였다. 풍수지리상 주변에 큰 산들이 있어 도성을 보호하고 중앙에서부터 강이 흘러 교통로 역할을 해야 명당으로 꼽았기 때문에 실제로 한양지리 주변에는 인왕산과 남산은 물론 북한산과 도봉산, 관악산 등 높은 산들이 자연 성벽을 이루었고, 도성 안의 작은 지천들이 한강으로 흐르는 구조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양을 도읍지로 결정즉시 궁궐과 성곽을 쌓아 경복궁과 숭례문을 비롯한 사대문이 이 당시 앉혀 지어졌다.
한강은 중요 교통로였고 지방의 특산품을 비롯한 여러가지 물품이 한강의 물길을 따라 운반됐고, 국외발 방문 온 해외상인들이 한강의 포구에 머무르기도 했다.
[새로운 도읍지가 필요한 조선]태조 이성계는 새롭게 출발하는 조선 왕조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새 정치를 펴나갈 새로운 도읍이 필요했고 초기 신도읍지 관련 계룡산으로 정해진 반면 지면적 좁고 남쪽에 치우쳐 있어 지금의 서울지역 한양이 결정됐다. 한양은 한반도의 가운데 위치있어 비옥한 남쪽지역과 근접했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적을 방어목적상 괜찮고 좋았다. 또한 강이 흐르고 바다가 근접 영향상 교통이 편리하여 신도읍지로서 손색 없었다.
[왕씨들의 비극]
조선은 고려의 왕족인 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남아 있으면 반역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씨들을 모아 배에 태운 뒤 배를 바다 한가운데에서 가라앉혀 버렸다. 이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왕씨들을 죽이려 했다. 이러한 위험 속에서도 살아남은 왕씨들은 성을 옥씨나 전씨 등으로 바꾸어야 했다. 이성계도 이런 일들을 해나가며 마음이 편안 않았던 것 모양이다. 꿈에 왕건이 모습을 나타내어 보복한다 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결국 개경을 버리고 천도를 결심했다.
풍수설에 의하면 북쪽은 양이고 남쪽은 음이다. 한양 의미란 한강 이북 의미다. 한강 이남 한음(漢陰)이다. 한음 관련 대표적 고장은 송파다. 선조 재위시절 오성과 한음의 우정으로 유명한 한음 - 이덕형은 자신 태생지를 호(號)로 정했다. 사실, 한양은 757 년 신라 35 대 경덕왕 재위시절 지명개정 의하여 주어진 지명으로 조선시대 한양의 공식 / 정규명칭 한성(漢城)이다.
*제1대 태조
청심원을 다 삼키지 못하고, 중풍으로 74세 승하
※1392.07.17조선건국 및 개성[現휴전선 북반부 : 북한지역]수창궁 초대즉위 후 1개월 채 안 돼 개성 => 한양 = 한강 이북지역 천도과정기간[1392.08~1394.11.29]王師무학[박자초 = 계월헌]서좌동향 = 유좌묘향론 기반'배후 = 주산 : 인왕산 & 좌청룡 : 북악산 & 우백호 : 남산'기반화 제안 비하여 건국 · 혁명세력 정도전[삼봉]북좌남향 = 제왕남향 = 임좌병향론 기반'배후 = 주산 : 북악산 & 좌청룡 : 낙산(타락산) & 우백호 : 인왕산'기반화된 제안 따라 왕조정궁 = 궁궐[대략1395.08~10월 완공시기'경복궁'작명]앉혀 짓는 결정차원 심대형 비극 / 불행초래 오판내림.
(재위기간 아들 태종 의한 1 & 2차 왕자의 난 및 태종간 마찰 / 불화 비롯 화병 관련 그 원인 중 한 가지)
능은 건원릉 동구릉내 있다.
* 제2대 정종
오복(五福;수,부,강녕,유호덕,고종명)을 다 갖추고 63세 승하(상왕으로 물러난 후 편안하게 살면서
제일 많은 자식을 둔 왕임) 조선역대왕 가운데 유일무이 북한지역 위치있는 후릉(경기도 판문군 영정리)
* 제3대 태종
즉위 전 1차 · 2차 왕자의 난 일으킴. 2차 왕자의 난 과정상 건국 · 혁명세력 정도전 제거 / 척살.
재위기간내 장손 : 양녕대군 폐위 및 차손 : 충녕대군 보위 이양 / 인계 선례남김
상왕으로 물러난 후 태종은 폐렴으로 56세 승하
부인민씨도 학질로 56세졸 능은 헌릉
* 제4대 세종
대식가로 당뇨병으로 54세 승하
(고기를 매우 즐긴 왕.. 식단에 항상 고기가 있었음, 그런 영향상 종기가 많이 났음)
(그리고 여러 부인들을 둔 만큼 성병도 있었다고 함)
소형왕후 심씨와 내외간 합장함으로서 조선왕조 최초 합장릉. 능은 영릉
* 제5대 문종
등창으로 39세 승하, 아버지 세종을 빼닮아 몸이 허약했음
능은 현릉
* 제6대 단종
수양대군 중심 세력 의해'계유정란'으로 17살 때 실각. 서인(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에서 사사됨. 숙종때 단종으로 복위. 능은 장릉
* 제7대 세조
최측근 · 측근세력 제안 의한'계유정난'일으켜 실질집권 및 즉위
악업으로 문둥병과 '병자사화' 비롯된 심리고통 · 괴로움 · 불면증 의한 52세 승하. 능은 광릉
* 제8대 예종
20세 복상사 하여 승하
안순왕후 한씨 정사를 즐기다 승하했으며,
형 의경세자(성종의 아버지, 덕종)도 20세 급사
능은 창릉
* 제9대 성종
등창과 폐병으로 38세 승하
28명의 자식을 두었고 주색을 즐긴 카사노바였다.
능은 선릉이며,임진왜란때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에태워지는 수모를 격는다.
* 제10대 연산군
즉위 후 '무오사화' & '갑자사화' 일으킴.
이후 일어난 '중종반정' 의한 왕위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 유배 강화도에서 괴질 31세 요절
아들 넷은 강화도에서 사사됨 묘는 서울 방학동
* 제11대 중종
거머리로 등창을 치료하다,울화병 &
노환으로 57세 승하 재위 39년
능은 정릉
* 제12대 인종
이질로 31세 승하(문정왕후 의한 독살설도 있다.)
하늘이 낳은 효자로 알려져 있으며, 후사 없다. 능은 효릉
* 제13대 명종
재위기간 '을묘왜변' & 해서대적 '임꺽정의 난' 겪음
지나친 방사로 34세 승하
문정왕후의 아들로 마마보이 로 성장 하였으며,
무수리출신 장씨와지나친 방사로 인한 졸지에 승하
어머니 문정왕후한테 회초리도 맞았다고 함
능은 강릉
* 제14대 선조
끔찍 양대왜란 '임진왜란' & '정유재린'겪음.
왜란 침략 당하며 피신 후 대규모 방화 의하여
왕조건국 및 천도200여년 접어든 시기 근정전 포함
경복궁 상당부분 전소· 소실 피해 겪음.
이후 왜란 종전 후 복궁 및 중풍으로 57세 승하
영조 다음으로 41년간 재위. 능은 목릉
* 제15대 광해
제일 불운한 왕,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후 유배
그 뒤 십 수년을 더 살다가 제주도에서 67세로 졸
( 유배 생활기간 시중 드는 사람이'영감'
이라고 불러도 꿋꿋하게 견뎠다 함)
이 시대 담배가 일본에서 들어옴
* 제16대 인조
청나라에게 항복 '삼전도의 굴욕'겪은 후 화병 걸림. 신하들 손아귀에서 울화병으로
55세승하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한(?) 왕으로 보고있으며, 재위기간 늘 그 것 때문에
신하들에게 시달려 왔으며 능은 장릉
* 제17대 효종
봉림대군 수전증있는 어의 실수인한 출혈사 41세 승하
강한의지 앞세운 북벌정책 마무리 하지 못하고 승하했으며,
능은 영릉
* 제18대 현종
청 황제에게 벌금형 받은 임금으로 학질 & 과로로 34세 승하
'하멜'에 의한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능은 숭능
* 제19대 숙종
어린 시절 천연두 후유증, 노인병, 등창 심한 당파싸음으로 인한
스트레스 60세 승하(인현왕후, 후궁 - 장희빈간 문제도 있었을듯) 풍류를
즐겼던 숙종은 봄이면 3000후궁을 거느리고 큰 잔치 별리려 했다. 능은 명릉
* 제20대 경종
게장을 먹다 급사하여 37세 승하
장희빈이 사약을 받기전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하자 거절하다
인정에 끌려 세자를 데려오자 갑자기 경종의 하초 잡아당겨
성기능 상실 내시와 같이 되었다 한다. 능은 의릉
* 제21대 영조
장수명 및 조선왕조 최장기 재위하였으며 치매증세 83세 승하
사도세자를 폐위하여 서인을 강등 후 뒤주내 가둬 굶어죽게
한 일 & 나이늙어 노망 부린 것이 오점으로 남았으며,
일본에서 '조엄'이 고구마를 처음가져왔다. 능은 원릉
* 제22대 정조
개혁성향 군주, 사도세자(장조)의 아들 등창으로 49세 승하
(독살설도 있지만, 최근 자료로 보아 등창으로 승하한 것 맞다고 봄)
안경을 처음 쓴 임금. 능은 건릉
* 제23대 순조
매독3기 45세 승하 이 시절 나라는 콜레라 창궐했으며,
안동김씨 세도가 시작되었다. 능은 인릉
* 제24대 헌종
23세에 술 & 여자들 시간 보내다 폐결핵으로 승하. 능은 경릉
* 제25대 철종
세도정치에 의해 졸지에 왕이 된 강화도령 33세 폐결핵으로 승하 강화도를
그리워 하며, 안동김씨 세도 · 영향력하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살았다. 능은 예릉
* 제26대 고종
선대시절 전소 / 소실 경복궁 및 근정전 중건 · 재건 및 복구작업
對일본 의한'강화도 조약'강요 및 강압체결 당함.
구식군대 반란 의한[임오군란]겪음.
왕조궁궐[경복궁]완공500년 겹치고 맞물리며 접어든 시기 일제군경· 낭인패 의해 본처 =
명성황후 피살사건[을미사변]겪음
'을사늑약 강압 · 부당체결'겪은 후 네덜란드 헤이그[밀사3인 특파]사건으로
일제 탄로 · 발각되어 강압실각 /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되어
67세 승하. 능은 홍릉
* 제27대 순종
몸이 허약했고, 남성 구실을 못했다 함.
부친 = 고종황제 일제 의해 강압실각 후임 즉위 및 일제 의한 대한제국 국권 · 주권상실 겪음.
1926년, 라디오 들으면서 심장마비로 53세 승하. 능은 유릉
- 의친왕
독립운동을 했던 고종의 아들,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형
그의 아들 이우 왕자가 얼짱 왕자로 유명해졌다.
현재 의친왕의 아들과 손자들이 다수 생존해 있다.
1955년, 6.25전쟁 중에 걸린 영양실조로 79세 서거
묘는 홍유릉 내의 의친왕 묘(합장묘)
-의민황태자 영친왕
어릴 때 일제에 볼모로 잡혀간 비운의 황태자다.
1963년 뇌혈전증으로 귀국해 7년간 병상에서 생활하다가
1970년 74세 나이로 서거. 왕비 이방자 여사는 자선 활동을 하다가
1989년 서거. 능은 홍유릉 내의 영원(합장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