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촉을 평등과 관련해서 설명한 적이 있다.
솔직히 이 금촉이 정말 그런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른다.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을 자천의 순서적이고 경지 오름으로 설명하려고 임의로
내가 설정한 것이라서 아마 억지가 있을 것이다.
금촉을 왜 자천 수준으로 가장 위에 두었냐 하면 사실 이것이 지감, 조식과 연관해서는
그나마 제일 위라고 하는 의미다.
자천하다 보면 평등을 알게 되는 때가 온다.
단순히 공空사상이나 무아無我와는 다른 의미인데 가치나 의미기준과 관련한 것이다.
어쩌면 공의 공으로 메타공일 수 있겠다.
천태종 사상의 공空, 가假, 중中에서 중에 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곳에서 이런 의미로 쓴 것은 아니니 같다고 할 수만은 없으나
자천 순서상으로 이렇게 되는 부분도 있다.
공空은 소승 같아서 개인의 자천을 위주로 하며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며,
가假는 이 현실이 공이지만 그래도 현실을 가로 하며(짐짓 가설로) 인정하면서
일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현실 참여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중中은 공이든 가이든 공에 너무 빠지거나 가에 너무 빠져서 깨달음만을(공) 추구하거나
현실에(가) 유혹될 수도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니 이런 것을 모두 떠나
공의 공도 알아야 하고 가의 공도 알아 중에 머무는 것이다.
자천하다 보면 점점 의미체계나 가치관이 달라진다.
그전에 가치 있고 의미 있어 보였던 모든 것들이 의미나 가치가 달라지는데 이것이 평등해짐이다.
볼펜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선물이고 하나는 그냥 흔한 볼펜이다.
그러면 당연히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 받은 볼펜이 의미와 가치가 더 클 것인데
이런 의미가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갑자기 어느 날 의심이 들 수도 있다.
정말 이 볼펜이 더 소중한 것일까? 왜?
그것은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 받아서인데 예전 같은 감정의 이끌림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
이성적으로는 과거의 의미로 회귀해야 한다고 한다.
당연히 소중한 사람이 선물한 볼펜이 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내 감정이 예전 같은 감정이 아닌 것을 내가 알게 된다.
그러면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 안 되는 것일까? 그렇다.
여기도 감정의 흔들림이 생긴다. 예외는 없다. 사실 또 예외가 없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 자식, 부모, 그 어떤 사람이든 사물이든 무엇이든
이런 평등의 감정에서 자유롭지 않아서 예전과는 다른 내 감정에 당황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로 ‘완전하게 그 감정이 사라지냐?’ 이렇게 묻는다면
이런 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사라지듯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어느 정도 과거와 다른 것을 내가 알 정도다.
대단히 강한 심리적 경험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완벽한 것은 정말 흔하지는 않다.
다만 내가 말하자는 것은 이 약간의 차이가 생기는 그것이 엄청난 것이며
이 중요성이 무엇보다 크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부동심이나 마음 가라앉기나 평등심이나 중용이나 중의나 열반과 멸진정처럼 이해한다.
진여의 마음과 여래의 마음들도 이런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대개는 그나마 우리나라에 얼마 안 되는 가르침을 주는 곳에서의 마지막 가르침이다.
솔직히 우리나라 수련 단체 중에는 없다.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차이나의 천선정리天仙正理나 혜명경慧命經을 토대로 수련한다면
그리고 양신陽神이나 그와 비슷한 것의 출신이 전부라면
허공분쇄虛空粉碎나 이상한 말로 그 위를 말해 봐야 의미가 없는 공허한 말이며
그 방법과 유용성도 없고 무엇인지 정확한 의미 규정이 안된 것은 자천할 수 없는 것이라서
그냥 말뿐인 것이다.
그 외 수도에서 신인합일神人合一이나 선정禪定이나 뭔가 기특한 것을 말한다 해도
그것은 초보적 단계지 여기와는 천양지차다.
이 금촉의 평등을 경험해야 한다.
이것을 이치로 이해해서 뭔가 알 것 같다거나 억지로 이런 것을 수도해서 안다 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러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나중에 알게 되는 것 같기도 해서 내 몸에서부터 변해오는 것이다.
감정과 분별 이전에 이미 이러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가치관을 설정하는 것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방편이라는 말의 의미를 안다.
이것을 모르면서 방편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 나는 속으로 욕한다.
이 평등의 진여가 있어야 그 위에 다시 가치와 의미 규정을 새롭게 한다.
그래야 내가 정하지 않은 개념이나 관념이나 습관이나 의미들이 내 안에 있는 것을 잡아내고,
잡아내야 나의 심층의식을 가려낸다.
즉 불교에서 미세한 번뇌를 알아내려면 이 평등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미가 사라진다고 했는데 이때 모든 사물이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볼펜은 쉽게 소중함의 정도가 떨어지는 것을 경험하지만 그것을 준 사람은
그렇게 안 될 수도 있고 될 수도 있고 그렇다.
즉 평등함이 일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런지,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더 있어서 왜 이것은 다른 것보다 더 의미가 큰지,
그리고 쉽게 없어지거나 변화시킬 수 없는지 살피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사례다.
이런 사례가 다가 아니라 일상에 모든 것들을 이런 식으로 보기 시작하면 그 안에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것을 억지로 수련 초기부터 사람에게 마음을 비우라고 하거나 번뇌를 가지면 안 된다고 하거나
감정을 이기라고 하거나 참회하고 뭐하고 하면서 억지로 하려고 한다.
번뇌도 종류가 있고 사람마다 또 다른 것도 있고 그렇게 억지로 할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해야 하는데
막무가내로 한다면 학대이거나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는 무지일 것이다.
평등은 수련 기술이나 방법이나 연습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공부와 닦음으로 저절로 완숙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래야 또 다른 자천으로 간다.
이 평등을 경험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과정 중의 하나라는 것이며,
그 다음에 다시 의미를 세우고 가치관과 세계관을 정립해야 한다.
내가 목 터져라 말하는, 자기가 의미를 세우고 주체성을 가지며, 정체성을 갖고
독립하여 자유로움이 있다는 것의 모든 의미가 바로 여기에서부터다.
잘못된 가르침 중에 평등에서 감정과 번뇌가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이것은 공에 빠진 것이다.
공도 다시 공인데 이걸 모르고 공에 빠지면 완전히 깨우친 듯 거만한 생각과 행동이 있게 되며
더 이상의 나아감을 막는 원인이 된다.
또 현실에 나와서는 일상의 감각적 유혹과 권력, 돈, 명예 등의 갈등과 번뇌가 끊이지 않는 생활에서
자기의 주체성과 뜻을 견지할 수 있어야 하니 그 중을 갖는 것이 입지이고 의미 세우기이다.
다시 의미를 세운다는 것이 가假가 되어 다시 현실과 중생 곁으로 나오며,
세상에 이로움을 주기 위한 삶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만 매몰되어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퇴행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니 그 중이 된다.
현실의 일상생활에서 내가 자천하기 전과 후의 세상보기나 가치관의 기준이 다르게 되는데
거기서 세상에 이익을 주고 남들을 일깨우기 위한 인위적 가설 설정인 방편을 만들고
사람마다 상황마다 짐짓 해야 하는 행동들이 있다.
이 방편이 어렵고 무서우며 방편이라고 하지만 죽기보다 힘겨운 운명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다.
짐짓이고 인위적이며 가설이지만, 거짓이 아니고 억지도 아니며 진실이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을 알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이 단계를 가봐야 안다.
평등과 그 위의 설정적인 방편과 그것들이 모두 진실인 그 묘함을…….
하나하나 다시 가치를 세우고 의미를 주게 되는데, 주위 사람들과
사물과 사회의 변화와 법칙들을 살피고 연구하면서 다시금 정립하는 관념체계가 있어야 한다.
나의 심층을 해부하면서 검증하고 검열하면서 인위적으로 내가 일일이 가치와 의미를 주는 것이다.
이 인위적으로 가치를 주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천 초기부터 자천법을 선택하라고 하여 그런 준비를 하게 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인위적 행위이니 과거에는 거짓 가假를 써서 말한 것이었나 보다.
거짓이라기보다 깨달음이 있으니 깨닫기 전과는 다른 일상생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인위적 행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무위적 삶으로 간다.
중용이고 중의며 보살행인데 인위적 가치구분이며 이 배경에는 평등이 있었다.
이것이 오연(적정)이라고도 하는 것인데 이 힘이 크다.
오연(적정)으로 자기화하고, 내가 살아가기 위한 들임과 내보내기를 하며, 평등으로 의미해소가 되고,
여기서 다시 의미주기가 되어 불평등을 인위적으로 만들며, 이 불평등은 평등의 힘 위에 세운 것이라
평등도 불평등도 아닌 파연이 된다. 평등도 불평등도 아닌 파연이 되기 전의 과정들이 적정이다.
이런 것이 관찰이고 성찰이다. 하지만 이것을 하는 사람이 없는데 왜 없을까? 이상하다.
의지! 의지가 문제다.
제대로 의지를 정했다면 의지에 해당하는 의미나 번뇌들은 평등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지는 이정도 자천 경지에서 의미가 사라질 것을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 의지는 이때 적정적인 평등에서 다시 의미주기 할 때 그 기준으로 준거 틀이 된다.
의지는 감정적 발현도 아니고 억지로 세운 개념도 아니며 내 실존적 삶의 의미이기 때문에
의지는 운명과도 비슷하다.
평등을 알고 다시 의미주기를 해가면서 더 깊이 들어가다 보면 평등의 평등 또다시 평등처럼
내려가고 다시 의미주고를 반복하다 보면 깊은 곳 어딘가에서 나타난다.
그곳 어딘가에 명命이 있다.
이것을 알면 공부 잘하는 것이다. 이러면 사명을 입에 올려도 된다.
지천명知天命이라고나 할까. 나는 이제 불혹인데 언제 지천명인가?
이것이 나이로만 이해할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지천명이 지나야 이순耳順이 된다. 이순이 돼야 천이통天耳通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닌데 이것을 쉽게 말한다면 이것을 모르는 것이다.
불혹이 평등과 같은 경지이고 또 마이고 진여인데 여기까지라도 온 사람을 내가 본 적이 없다. 왜일까?
천이통이 멀리 있는 것이나 모든 소리를 듣는 것을 말한다고 하면 그것을 어디에 쓸려고 하는지 묻고 싶다.
보살행에 도움이 되나? 깨달음에 도움이 되나?
내가 타인이나 사물에게 귀 기울이며 들어주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가 많을까?
멀리 있는 소리를 듣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가 더 많을까? 무엇이 더 근본적인 문제일까?
천이통 하나도 제대로 열린 사람을 역시나 이 사회에서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이것도 이상적인 것일 뿐 실제가 아닐 수도 있다.
이순이 넘어야 바로 거기가 사람들이 이상으로 여기는 도 닦는 사람들이 말하는 도인들의 표상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 없다. 어디 있나? 있으면 감옥에 가 있을 것이다.
지금 윤리나 법으로 안 된다.
의미가 다르다고 할지 모르는데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지나 이순을 거쳐 오면 그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도 그리고 나중에 여기 온 사람들도 이것을 동경할 것이다.
그러면 아마 지독한 고독에 빠질 것이다…….
가 (假 ) : 왜 이 가라는 말로 이론을 세웠는지 모르지만 별로 맘에 안든다.
모두 현실이고 진짜인데 애써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득도해서 열반하고 대각해도 모두가 진실인 세상이다.
현일 박재봉 著 [하늘공부3]
p 543~549
첫댓글 나무아미타불...()()()...우리 공부에서는 기본을 본성과의 만남으로 정리하여 '성통(性通)'이라 하였습니다....다양한 영적 가리개를 걷어내고 '성통'하지 않으면,그것이 '맛있는' 이해나 설명이라 하여도 그동안 겪어온 상식과 지식의 세계에서 맴돌 뿐입니다...그리고 또다른 '나'를 창조하고 맙니다....고맙습니다...
그에게서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현상으로서 그를 이해하는...()() 감사합니다.
예전 단학을 열심히 공부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