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천윤자
아무래도 중독이 된 것 같다. 결 고운 황톳길이나 모래밭을 만나면 때를 가리지 않고 불쑥불쑥 벗고 싶은 이 충동을 어찌하랴. 맑은 날도 좋지만 비 오는 날이면 더욱 좋다. 우산을 쓰고 꽃무늬를 그린 깜장 고무신을 신고 집을 나선다. 집 근처 대학 내에 조성된 민속촌을 지나 솔숲 길로 들어서면서 신발을 벗는다. 먼저 온 분들이 벗어 놓은 신발이 여럿 보인다. 빗물에 젖은 황톳길의 감촉이 발바닥에 그대로 느껴져 흐뭇하다.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미 원시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먼 옛날 맨발로 농토를 일구고 초원에서 말달리던 유전인자가 내 핏속에도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다. 가끔 자제력을 잃은 내 행동에 제동을 거는 친구도 어느 사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뒤따르고 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는 기분이다.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 흙은 좋은 놀이도구였다. 농사짓는 부모님을 따라 논밭에 나가면 아무렇게나 자란 풀꽃과 흙을 만지며 놀았다. 갈아엎어 놓은 밭고랑의 고운 흙을 만질 때 느껴지던 감촉, 그 반가운 친구를 다시 만났다.
지난해 여름밤 중산지를 걷다가 맨발족을 처음 만났다. 고향 떠나 온통 콘크리트 벽 속에 갇혀 살다시피 한 내 눈에 기이한 모습으로 보였다. 태풍이 지나가고 무더위가 시작됐지만 해거름이 되자 저수지 둘레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이와 함께, 부부가 함께, 그리고 친구끼리 수돗가에 마련된 거치대에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 놓고 걸었다. 가끔씩 무리 지어 걷는 동호회 회원들도 보였다. 양손에 스틱을 짚고 걷는 이, 양말을 신고 걷는 이, 운동화를 신고 걷는 이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맨발이었다.
옛 공장 부지였던 곳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시민 휴식처로 바뀐 중산지. 둘레길을 자연 그대로 둔 덕에 인근 주민들이 맨발로 걸었다. 어둠이 내리면서 색색의 조명등이 켜지고 화려한 음악분수 쇼가 열렸다. 혼자 걷는 중년 여성에게 슬며시 다가가 맨발로 걸은 지 얼마나 됐냐고 물어봤다. 2년 넘게 맨발로 걷는다던 그는 이후로 잠이 잘 오고, 혈액순환과 소화력이 좋아지고, 어깨 결림도 사라졌다고 자랑했다. 어떤 이는 무좀이 나았고, 또 어떤 이는 족저근막염이 치료됐다고 했다. 심지어 안구건조증과 이명이 사라지고 암세포마저 사라졌다며 온갖 병이 나았다는 경험담이 이어졌다.
유도선수 출신의 맨발학교 지회장이라는 한 남성은 운동을 오래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늘어나는 체중과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같은 성인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단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 준 것은 다름 아닌 맨발걷기였다고 했다. 체중을 10㎏ 감량하고 먹던 약도 끊었단다. 황톳길은 면역력을 키워주고, 마사토길은 두뇌 자극으로 치매 예방에 좋고, 바닷가 모랫길처럼 물에 젖은 길은 우리 몸의 활성산소를 배출시켜 준다며 길마다 특징이 있다고 전문가답게 설명했다.
맨발걷기 예찬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중산지 맨발학교 회원이 200명이 넘는다고 했다. 회원들은 단체 카톡방에 그날의 자기 활동을 올리고 100일째 되는 날이 되면 맨발학교에서 격려의 상장도 수여한단다. 맨발학교는 5무 학교라고도 했다. 건물, 교사, 시간표, 등록금, 시험이 없는 학교란다. 누구나 자유로운 시간에 나와서 걷는 학교, 입학하면 얻는 것은 건강이라고 했다. 걸은 지 일곱 달 됐다는 또 다른 사람은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맨발걷기로 건강해졌다고 했다.
귀가 얇은 나도 솔깃해졌다. 어릴 적 흙의 촉감을 기억하는 나의 발바닥도 뇌세포를 충동질했다. 그날 바로 운동화와 양말을 벗었다. 단단히 조여 맨 신발 속에서 해방된 발가락이 꿈틀했다. 조심스럽게 몇 발짝 움직여보니 발바닥이 따끔거렸다. 그런데 걸을 만했다. 건강을 위해 얼마나 좋을지 확신이 들지는 않았지만, 신발을 벗고 맨땅에 발을 내디딘 것만으로도 단단히 옥죄고 있던 마음 한구석을 내려놓은 듯 시원했다. 그때 내가 느낀 해방감만으로도 이미 중독될 것이라는 걸 알았던 것 같다.
주변에서는 나의 이 중독 증세를 염려하는 이들도 있다. 발가락을 다치기라도 하면, 흙 속의 온갖 해충이 옮겨붙기라도 하면, 발바닥에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나 못이라도 박히면, 파상풍에 걸리면 어쩌려고 하냐며 말린다. TV에 나온 의사가 맨발걷기의 위험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듣기도 했다. 그러나 중독이라는 병이 어디 쉽게 고쳐지던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제풀에 지쳐 그만둘 날이 올 때까지 나는 맨발의 원시인 놀이를 계속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