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대에 올라
창원컨벤션센터 곁에 시티세븐이 있다. 모두 4개 동 최고 40층으로 된 창원에서는 가장 높은 주상 복합 공간이다. 입주민과 하루 유동인구가 대략 3만인 것으로 안다. 이 숫자는 내 고향 의령군 전체 인구와 맞먹는다. 농촌의 인구 감소를 여실히 보여주는 지표다. 국회는 국민의 의사를 대신하는 기구다. 어느 정도 편차는 인정하지만 인구수에 따라 지역구 국희의원 정수를 정한다.
의령은 인접한 함안과 창녕과 밀양의 4개 지방자치단체가 결합해 1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된다. 반면에 부산에 인접한 동부경남 양산은 인구가 무려 50만이 넘어섰다. 의령 인구의 무려 15배가 넘는다. 인구수 따라 국회의원이 정해지니 그곳은 1개 시에서 2명의 지역구 국회의원이 있다. 현행대로라면 앞으로 전국에서 사라질 기초 지방자치단체가 수두룩하다. 멀지 않은 장래 일이다.
신년 벽두 밀양 지인이 트레킹을 제안해 왔다. 둘은 일 주 전 연말에 운문사 계곡으로 들었던 적 있다. 방학 때 시간을 같이 맞추어보자고 했더니 조금 이르게 연락이 왔다. 나는 지인보고 그대는 밀양서 출발하고, 나는 창원서 출발해 양산 어디쯤서 만나자고 했다. 거기서 낙동강 강변으로 뚫린 자전거 길을 따라 걷자고 했다. 양산은 근래 인구가 급격히 불어 날로 달라지는 도시다.
일월 첫 주 금요일 아침 지인은 경부선을 타고, 나는 경전선을 타고 물금으로 향했다. 진영역을 지날 때면 늘 좌측 10시 방향 사자바위가 눈에 든다. 그 아래는 노무현 대통령 생가와 무덤이 있다. 노 대통령이 뛰어내린 부엉이바위는 사자바위를 돌아간 지점이라 열차에서는 보이질 않는다. 차창 우측 화포천 습지는 생태 환경 교육장으로 잘 활용한다. 겨울 철새들이 간간이 보였다.
한림정에서 낙동강을 가로지른 철교를 건너 삼랑진이었다. 삼랑진부터는 부산 구포까지 강변에는 철로와 함께 자전거 길이 생겼다. 그 아래 하단과 다대포까지는 산책로를 겸한 자전거 길이다. 원동역을 지난 물금역에 내려 밀양에서 먼저 온 지인을 만났다. 물금역은 현대화 역사 이전에는 영화 세트장처럼 운치 있는 간이역이었는데 시대 흐름에 따라 철골과 유리벽으로 바뀌어졌다.
예전 물금 들판은 상전벽해였다. 신도시 아파트단지와 상가들이 들어서 시야를 가렸다. ‘물금(勿禁)’ 지명 유래는 수금(水禁)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강이 범람하면 저지대라 침수가 잦았다. 그래서 물이 지겨워 물을 금하고 싶은 마음에서 ‘수금’이하 했다. 한자 ‘수(水)’를 우리말로 바꾸니 ‘물’이다. 이 물을 기존 한자어 ‘금’과 결합하면서 다시 한자어 말 ’물(勿)‘이 쓰여 물금이 되었다.
나는 주변 지형을 훤히 알고 있다. 오래 전 오봉산도 올라 본 적 있다. 지인을 인도해 철길 지하도를 지나 물금취수장을 지났다. 그 즈음 전날 을숙도를 출발해 안동댐까지 걸어간다는 한 아낙을 만났다. 그쪽에서 먼저 물금에서 하루 묵고 출발하는데 다음 숙소가 어디가 될지 물어왔다. 날 저물기 건 수산이나 본포 어디쯤 닿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굴다리 밑을 지나 용화사로 갔다.
비탈진 데크를 따라 산등선을 하나 더 넘어 임경대(臨鏡臺)에 이르렀다. 산언덕에서 굽이쳐 흘러오는 낙동강을 조망하기에 절묘한 지점이었다. 천 백년 전 풍운유수처럼 산천을 주유하던 최치원이 7언 절구를 남길만한 승경이었다. 근래 세운 임경대에 올라 곡차를 들며 잠시 옛적을 회고했다. 그 언덕엔 고운 이후 여러 시인 묵객이 남긴 한시들을 빗돌에 새겨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토교마을에 이르러 다시 강변 자전거 길을 걸었다. 강둑 너머 화제 들판은 낙동강 파수꾼 요산 김정한의 작품 배경이자 그의 처가 동네다. 쉼터의 푸드 트럭 젊은이 속 좁은 행실은 못 본체 넘기고 원동역까지 무념무상 걸었다. 섬진강 청매실 농원만큼 알려진 순매원과 영포마을 매실단지다. 면소재지 하나 뿐인 중국집에서 지인은 자장면, 난 우동으로 요기를 하고 상행선 열차를 탔다. 18.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