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3: 12. 더 가까운 친족이 있다. - 룻 3: 13. 기업 무름에 대한 약속
룻 3: 12. 더 가까운 친족이 있다. -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
보아스는 경우에 맞게 모든 일을 처리하려 했다.
1]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 네 기업을 무를 자
여기서 보아스는 자신의 소욕대로 행동하지 아니하고,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다는 사실을 룻에게 일러줌으로써, 그에게 먼저 '고엘'의 의무를 물어야 함을 일깨워 주었다.
따라서 보아스의 이러한 조치는 율법의 정도(正道)를 따르는 신중하고 분별 있는 행동이었다.
2]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 가까운 친족
기업 무를 자의 우선순위는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왜 나오미는 더 가까운 친족을 두고 보아스로 하여금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수행하라고 요구했는가?
이에 대하여 혹자는 나오미가 오래 동안 타국에가 있었던 관계로 남편의 가계(家系)를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Matthew Henry).
그러나 4장에 나타난 보아스와 룻의 가까운 친족과의 대화를 살펴보면 그 가까운 친족은 기업을 무를 만큼 덕망이나 재산을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4: 1-6).
이것을 미리 알았던 나오미는 그 사람보다는 보아스 쪽이 더 확실히 '고엘'의 의무를 다하리라 확신했고, 따라서 처음부터 그렇게 행동했던 것 같다.
룻 3: 13. 기업 무름에 대한 약속 -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울찌니라. )
보아스는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면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그에게 행할 것을 약속했다.
1]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이때는 시간상으로 한밤중이었으므로 이미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따라서 룻이 지금 보아스를 떠나가면 그곳은 들판이기에, 그녀가 마땅히 들어가 쉴만한 곳이 없었다.
이러한 룻의 형편을 잘 알고 있는 보아스는 룻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했다. 이러한 보아스의 사려 깊은 언사는 이미 이삭줍기의 과정에서도 잘 나타난 바 있다(2: 15-16).
2] 아침에
날이 새면 모든 사람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
날이 밝자마자 먼저 기업 무를 자의 책임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3]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 책임
그 사람이 가까운 친족이므로 룻에 대한 기업 무를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옳은 일이므로 그가 책임을 이행하면 좋겠다고 한다.
룻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는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는 행위이다.
4]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 면피
그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룻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승계하게 된다.
따라서 누가 이의를 제기한다 하더라도 법적인 하자가 없게 된다.
5]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 맹세
이것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행해지던 일반적인 맹세의 방식이다. 그리고 이렇게 맹세하는 것은 맹세한 자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전 인격을 걸고 그 맹세한 내용을 반드시 실행할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또한 이 맹세 속에는 이를 어긴 자의 증인되신 여호와께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라는 엄숙한 암시도 포함되어 있다.
6]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 내 책임
다른 근족 사람으로부터 파생하는 문제가 해결되면 보아스가 모든 책임을 지고 룻에 대한 기업 무름을 실천하겠다는 언약이다.
7] 아침까지 누워 있울지니라. 하는지라. - 아침까지
이제는 룻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아침이 올 때까지 편히 쉬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 말 속에는 위로의 뜻이 강하다. 지금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수고한 모든 고난을 보아스가 알고 있다.
또 날이 밝으면 법적 제한도 모두 해소시켜 기업 무름의 책임을 완수하겠으니 그 때까지 불안해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쉼을 얻도록 권하고 있다.
8] 책임지는 생활 : 최성규 목사 ( 3: 13 )
룻기 3장 13절에는 “책임”이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 이행했습니다. 그 결과, 기생 라합의 아들이었던 그가 다윗 왕의 증조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갔습니다. 책임 없는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자유와 책임, 권리와 책임이 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책임질 것을 가르치고, 각자가 책임 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책임지는 생활에 대해 알아봄으로, 우리 모두 이기적인 방종의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랑의 삶을 살아갑시다.
첫째, 기독교인의 책임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전도해야 할 책임, 교회를 바르게 세워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 것은 모든 인류와 민족을 복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창 18:18).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역시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주기 위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성경을 바로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고, 성도들은 성도대로 성경적인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한 빛입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십자가를 지고 낮아짐의 삶을 살아갑시다. 그리하여 세상을 바꾸는 주인공이 됩시다.
둘째, 부모의 책임
에베소서 6장 4절에는 부모의 두 가지 책임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녀가 노여움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부모는 기분에 따라서가 아니라, 일관성 있게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양은 올바른 태도와 가치관에 관한 학습입니다. 훈계는 그릇된 태도에 관한 교정입니다. 지식 교육보다 인격 연마가 먼저입니다. 자녀에게 신앙심을 심어주고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시다. 효를 가르침으로 자녀의 인격을 바로 세웁시다.
셋째, 자녀의 책임
자녀가 어릴지라도 자신이 해야 할 책임에 대해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에게는 효를 행할 책임이 있습니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기성세대뿐만 아니라, 신세대도 책임질 일은 책임져야 합니다. 요구만 하거나 보호받기만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자녀 때문에 어른들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자녀가 효의 마음으로 부모, 어른, 스승을 모시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맑고, 밝고, 깨끗해질 것입니다.
넷째, 스승의 책임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말은 바꿔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스승은 잘못된 그림자를 남겨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선생은 있으나, 스승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스승은 제자들을 인정해주고, 이름을 불러주고, 모든 것을 전수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의 이름을 불러주셨고, 인정해주셨고, 세워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을 닮아 갑시다. 참된 스승이 있는 곳에 미래의 꿈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다섯째, 제자의 책임
고려청자의 맥이 끊긴 것은 준비된 제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지식만을 배우는 자가 아니라, 스승을 배우는 자, 곧 스승을 닮는 자입니다. 제자는 스승과 공부하기 전에, 동행해야 합니다. 삶을 나눔으로 인격을 연마해야 합니다. 인격 없는 지식은 죄를 짓기 위한 도구밖에 되지 않습니다. 진정 성공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다면, 스승을 통해 바른 인격과 바른 삶을 배웁시다.
여섯째, 기업가의 책임
오늘날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장사꾼이 아니라 기업가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업가는 돈이 아니라, 사람을 키워야 하고, 나라를 위한 회사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꿈을 팔고 문화를 팔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업가 정신이 필요합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를 향해 도전해야 합니다. 실패를 무릅쓰고 도전할 때, 고용 증대, 경제발전이 이루어지고, 함께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일곱째, 근로자의 책임
경제가 어려운 것은 근로자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근로자는 일을 덜 하려고 하지 말고, 더 하려고 해야 합니다. 쉽게 하려고 하지 말고, 더 잘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할 때, 예수님께 칭찬받고, 사람에게 인정받습니다(마 25:23). 두 달란트 가져간 종이 네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 가져간 종은 열 달란트를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셨고 더 큰 일을 맡기셨습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여덟째, 사회 운동가의 책임
많은 사회 운동가와 단체들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많은 일을 합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새 시대를 맞는 이 시점에서 사회 운동가들은 스스로에게 ‘사회 운동 그 자체도 변화되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남에게만 변화하라고 하기 전에 자신부터 변화해야 합니다. 사회 운동가와 단체들 스스로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변화가 따르지 않는 외침은 허공을 치는 공허함입니다. 또한 변화하려면 비판만 하지 말고 함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많은 사회 운동들이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아홉째, 국민의 책임
국민은 대통령과 정치인들에게만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내가 대한민국을 책임진다는 의식으로 살아갈 때, 나라가 바로 섭니다. 그럴 때, 정치 지도자들이 아무렇게나 일하지 않습니다. 부정을 저지르지도 못합니다. 아이는 부모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 것처럼,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잘 못하고 있다면, 국민인 우리가 잘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국민 모두 책임의식을 가짐으로, 나라를 건강하게 만듭시다.
열째, 국가 지도자의 책임
국가 지도자는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았고,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본이 되었습니다(고전 11:1). 국가 지도자는 말하는 것보다 행동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에 모든 것에 본이 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이 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나가야 합니다. 국민은 그런 노력을 다 알기에, 조금 실수해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응원해줍니다. 본이 되는 지도자를 선택하고, 또한 그들을 끊임없이 응원해줍시다. 살 맛 나는 나라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책임지는 일은 우리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성령이 도우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임하셔서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주시고, 책임질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맑고 밝은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