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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8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마태오 2,13-18
자유의지도 없이 죽임당한 아기들이 어떻게 순교자가 될까?
아기가 태어나려면 엄마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 피 흘림이 아기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됩니다.
어떤 생명이든 피의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 흘림은 본인들의 선택입니다.
반면 오늘 아기 순교자들은 본인들의 선택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본인들이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순교자로 인정될 수 있는 걸까요?
그렇다면 구약의 모세가 파라오의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일강에서 죽어야만 했던 아기들도 순교자라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들은 모세의 길을 닦았습니다.
어떻게 본인의 선택이 아닌데도 하느님께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는 데도 그 피의 길이 필요 없었을까요?
가장 먼저 순교의 길을 가셨던 분이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그다음이 베들레헴의 아기들입니다.
그들은 헤로데가 메시아가 죽었다고 믿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는 엄마의 역할을 한 이들입니다.
누구나 하느님 참 생명의 길을 자기 피로 포장하는 이들은 구원받습니다.
단지 그들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칼뱅이 주장하는 대로 심판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은 없습니다.
‘터미네이터’(1984)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SF 영화입니다.
줄거리에서는 터미네이터로 알려진 사이보그 암살자가 사라 코너를 죽이기 위해 2029년부터 1984년까지 과거로 보내집니다.
사라는 미래의 아들인 존 코너가 종말 이후의 미래 기계에 대항하는 저항군을 이끌게 될 것이기
때문에 목표가 됩니다.
한편, 인간 쪽에서도 존 코너는 자기 어머니 사라를 보호하기 위해 군인 카일 리스도 과거로
보냅니다.
영화는 터미네이터가 사라를 끈질기게 쫓는 동안 긴장감 넘치는 추격전을 펼치고, 카일은 그녀를 보호하고 미래의 위험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과정에서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카일은 결국 자신도 모르게 자기 상관인 존 코너의 아버지가 됩니다.
카일 리스는 사라 코너를 보호하기 위해 터미네이터와의 마지막 대결에서 자신을 희생합니다.
이 행동은 사라를 구할 뿐만 아니라 기계에 대한 저항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존 코너의 미래 탄생을 보장합니다.
존 코너가 자신을 과거로 보낼 때 카일 리스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이력을 알고 있는 존은 자신의 존재도 보장하는 임무를 위해 리스를 선택합니다.
이는 리스의 과거 여행이 미래의 존 코너 탄생에 필수적이라는 역설을 형성합니다.
존 코너는 카일 리스를 보며 이미 과거에 자기 어머니를 위해 희생할 존재로 여기고 그를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 눈엔 잠깐 나타났다가 죽는 존재들일지라도
하느님은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 무언가가 있어서 선택받았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교회를 박해한 것은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자비를 입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3)
모르고 한 일이라면 용서받기 쉽습니다. 그래도 바오로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1티모 1,15-16)
분명히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합당한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죄인인 줄 알기에 부르심을 받았고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려는 목적으로 선택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나에게 직무를 맡기셨습니다.”(1티모 1,12)
바로 ‘성실성’입니다.
이 단어는 ‘믿을만한’이란 뜻입니다.
하느님께 충실하여지려는, 옳은 일이면 목숨을 바치려는 충실성을 보고 주님께서 바오로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미리 정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심판받는다면 그 가장 중요한 기준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가’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러한 ‘착한 뜻’을 가진 이들에게 평화가 주어집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28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마태오 2,13-18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갔고,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헤로데 가문은 BC 55년부터 AD 93년까지 팔레스타인과 인근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여러 왕들 가운데 대(大)헤롯이라고 불리는 헤로데 대왕(재위 기간 BC 37~4)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임명되었습니다.
헤로데 대왕은 수많은 성채와 수로, 극장과 공공건축물을 건설하며 유다를 발전시켰지만,
말년에는 정치적 음모와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중심 인물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헤로데 대왕은 당연히 로마에 충성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마음대로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만, 로마의 눈밖에 벗어나면 폐위될 가능성도 있었기에 언제난 눈치를 봐야했습니다.
외교 정책도 로마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기에, 온전한 왕이라기보다 제한된 권한을 지닌 군주 정도라 할 수 있었습니다.
헤로데 대왕에게는 10명의 아내가 있었으며, 14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한 아들에게 권력을 몰아준 것이 아니라 세명의 아들에게 영토를 골고루 상속해주었습니다.
놀랍게도 세명의 아들들은 모두 이복(異腹) 형제들이었습니다.
헤로데 대왕의 아들들이 어린 시절부터 보고 배운 것이라고는 무자비한 살상이요 불륜, 방종과 타락한 생활이었기에, 헤로데 왕조는 오래 가지 않아 막을 내리게 됩니다.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헤로데 아켈라오는 십년도 지나지 않아 로마로부터 파면당합니다.
북동부 지역을 다스리던 헤로데 필립보는 AD 34년에 죽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 역시 AD 39년에 파면되어, 모든 영지는 로마 총독 관할로 귀속되고 말았습니다.
잔악하고 무자비하기로 소문났던 헤로데 가문으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만, 헤로데 대왕에 의해 죽임을 당한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순교한 세례자 요한이
대표적입니다.
자신의 왕권이 위협받는 것이 두려워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헤로데 대왕은 인류 역사 안에서 씻을 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를 범했습니다.
당시 자행되었던 대 학살 사건의 정황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환히 그려집니다.
당시 남성중심의 부계사회였던 유다 문화 안에서 사내아이들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당시 사내아이들은 가문의 혈통을 잇는 보배요 가정의 미래요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동네 아기란 아기들이 모조리 목숨을 잃었습니다.
집집마다 흘러나오던 아기들의 울음소리 대신 아기 잃고 슬퍼하는 부모들의 통곡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혹시나 해서 아기의 볼을 꼬집어보고 가슴에 귀를 대어 봐도 이미 상황은 되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불행한 예언이 헤로데 시절에 이르러 정확하게 실현된 것입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이지만 성 쿠옷불트데우스 주교는
이렇게 아기들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갔고 그들의 부모들은 죽어가는 순교자들을 보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 못하는 그 아기들을 자신의 합당한 증거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말을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했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정권욕과 사리사욕에 눈이 먼 지도자들,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정신 나간 지도자들, 인간미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야수 같은 지도자들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어간 아기 순교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무엇인가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개념 없는 지도자, 정신 나간 리더들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움직이는 것,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는 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 참 정의, 참 진리의 길을 따라 움직이는 신앙인이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까요?
뿐만 아니라 더 요구되는 행동이 있습니다.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희생자들을 치료하기, 통제불능인 자동차를 멈추게 만들기.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강론>
(2023. 12. 28. 목)(마태 2,13-18)
<베들레헴의 아기들>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3-18)”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유다인들의 임금’이 태어나셨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마태 2,2)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다인들의 임금, 메시아’를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즉 다윗 왕조를 회복하고,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킬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헤로데의 입장에서는 메시아 탄생 소식을 두려워했을 텐데, 그는 로마 황제가 임명한 왕이었고,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족 후손이어서
백성들의 지지를 못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었을까?
헤로데는 갓난아기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그 아기를 메시아로(임금으로) 모시고 반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 반란을 미리 막으려면 메시아로 태어나셨다는 아기를 죽이면 된다는 것이 헤로데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의 방문’ 이야기를 보면, 당시 사람들이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깜짝 놀랐다는 말만 있고, 기뻐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동방박사들의 말을 안 믿었던 것 같습니다.
메시아께서 태어나실 고을이 베들레헴이라고 말했던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것도, 동방박사들의 말을 안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일반 백성들은 어쩌면 그런 소식 자체에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먹고사는 문제만 신경 쓰느라고 그랬는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잃을까봐 그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메시아 탄생 소식에 관심을 갖고,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인 사람은 헤로데뿐이었다는 것은,
메시아를 갈망하고 기다렸으면서도, 진짜로 메시아께서 오셨을 때에는 반기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순된 모습, 또는 어리석은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 때문에’ 죽은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순교자로 생각하면서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아기들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나?
아닙니다.
아기 예수님이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천사가 미리 알려주고 피신시켰기 때문이지
베들레헴의 아기들 ‘덕분’은 아닙니다.
천사는 요셉에게만 알려 주고 다른 집에는 말을 안 했을까?
다른 집에도 알려 주었을 텐데, 어떤 집은 그 말을 믿고 피했을 것이고, 어떤 집은 안 믿고 가만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요셉 성인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마태 1,19), 혼자서만 알고 자기 식구들만 데리고 몰래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고, 할 수 있는 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알렸을 텐데, 그 말을 믿은 사람들은 피했을 것이고, 안 믿은 사람들은 비웃으면서 안 피했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학살당한 일은 ‘하느님의 뜻’이었나?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간의 범죄’입니다.
우리는 아무 일에나 다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적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베들레헴의 아기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몰랐으니까 안 믿었고,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 아기들의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들레헴의 아기들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 대신에’ 죽은 것도 아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해석은 너무 지나치게 억지스러운 해석입니다.>
오늘날에도 억울하게 죽는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많습니다.
세계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전쟁들, 테러들,
독재자들의 인권탄압, 여러 가지 사건들과 사고들,
그런 일들 때문에 아무 죄 없이 죽는 아기들과 어린이들은 모두 ‘베들레헴의 아기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이런 세상을 그냥 지켜보기만 하실까?
구경하듯이 지켜보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회개하기를, 그리고 인간들이 스스로 선한 길을 찾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아파하시고 슬퍼하실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심정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지만, 헤로데 같은 자들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그런 자들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의 모든 일에 전부 다 직접 개입하신다면, 그래서 어떤 죄를 지을 때마다 곧바로 천벌을 내리신다면 그 세상이 과연 인간 세상일까? 하느님 나라일까?
그 천벌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