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서시 (國土序詩)
조태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 시집 <국토> (1975) -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격정적, 참여적, 민중적, 반복적
◆ 표현 : 동일한 통사구조의 반복
반복법과 점층법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새 살이 돋도록, 새 숨결이 열리도록
→ 국토와 민족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과 강렬한 생명의지가 집약됨.
* ~ 수밖에 없는 일이다
→ 이것의 반복은 강조와 점층적 집약 효과를 지니며, 국토에 대한 맹목적 사랑이
필연적이면서 당위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 야윈 팔다리 → 고난의 역사와 현실에 억눌린 민중의 모습이 함축된 표현
* 풀잎, 돌멩이, 이름없이 스러져 간 혼
→ '민중'의 표상으로, 버려지고 고통받고 스러지는 것은 숱한 민중의 삶의 초상인 것이다.
* 4연 → 부정적 현실에 대한 강한 저항의 태도
* 5연 → 혼신을 다한 삶의 의지와 국토에 대한 애정을 잃지 말자는 단호한 목소리
◆ 주제 : 국토애(민족애)와 새 역사의 도래에 대한 소망
[시상의 흐름(짜임)]
◆ 1 ~ 3연 : 우리 민족이 처한 부정적이고 척박한 현실(숙명적 현실)
◆ 4 ~ 6연 : 현실적 과제 환기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1970년대는 우리 시단에서 순수 서정시라는 오랜 틀(전통)을 깨고, 민중의 과감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의 혁명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렵을 주도해 온 많은
시인들 가운데 조태일은, 왕성한 시창작과 실천을 통하여 70년대라는 군부 독재의
칼날을 온몸으로 맞받아 나갔던 시인이다. 그러한 시인의 시적 실천 가운데서도
단연 앞자리에 놓이는 작품이 이른 바 <국토> 연작인데, 이 시는 그 연작의
서곡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 시는 우리의 땅과 하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숙명과,
그러한 숙명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민중의 끝없는 생명력, 그리고 국토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단호한 목소리로 노래한 작품이다.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삶을 포기하지 말고, 민중들이 주체가 되어 국토와 민족에 끝없는
애정을 가지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결해 나가야 한다는 민중적인 국토애와
새 역사의 도래에 대한 소망을 표현한 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발바닥 - 우리의 땅', '숨결 - 우리의 하늘', '팔다리 - 우리의 가락' 등의
구조적 질서와 '~(없는) 일이다'의 규칙적인 구문의 반복은 국토에 대한
애정과 민중들의 의지를 강조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문체라 할 수 있다.
당대를 지탱했던 민중사관을 뿌리로 하여 창작된 이 시에는, 지배하는 것 ·
군림하는 것 · 높은 것들에 대한 부정의식과 더불어 지배당하는 것 ·
짓눌리는 것 · 낮은 것들에 대한 애정이 흠뻑 배어 있다. 풀잎과 돌멩이
혹은 이름없이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져간 숱한 민중들에 대해 보내는 시인의
애정은 그러므로 소박하고도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땅 위에 먼저
흩어져간 민초들의 숨결에 우리들의 숨결, 우리들의 삶 전체를 보태야
한다는 시인의 주장 또한 선명하다. 다스리는 자의 국토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내 발로 걸어서 답파해내는, 살아있는 국토만을
진정한 국토라고 생각하는 시인의 진지성이야말로, 그 후의 시대적 변화무쌍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여지껏 시이게끔 만드는 주된 요소라고 하겠다.
[작가소개]
조태일 : 시인
출생 : 1941. 9. 30. 전라남도 곡성
사망 : 1999. 9.
수상 : 1995년 제10회 만해문학상
1991년 제1회 편운문학상 성옥문화대상
경력 :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
호는 죽형(竹兄). 1941년 9월 30일 전남 곡성 태생. 1966년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 시 전문잡지 『시인』 주간을 지냈으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등을 역임했다.
제10회 만해문학상, 편운문학상, 전라남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아침 선박」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이듬해 시집 『아침 선박』을 간행하였고, 계속하여 『식칼론』(1970),
『국토』(1975), 『가거도』(1983), 『연가』(1985), 『자유가 시인더러』(1987),
『산 속에서 꽃 속에서』(1991), 『풀잎은 꺾이지 않는다』(1995),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1999) 등을 발간했다.
한편 평론집 『살아있는 시와 고여있는 시』(1981), 『김현승 시 정신 연구』(1998) 등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의 초기 시는 원시적인 삶에 기반을 둔 상상력에 의하여
삶의 순수성을 보여주는 세계상을 그리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는 삶에 대한
순결성이 철저하게 파괴된 현실 앞에서 진실을 은폐하려는 기도에 당당히 맞서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시를 통해 민중적 연대감을 획득하고자 한다.
1970년대 참여시의 한 성과로 주목되었던 연작시 「식칼론」은 삶의
순결성을 유린하는 제도적인 폭력에 맞서서 시인의 자세와 역사의식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여기서 ‘식칼’은 단순한 싸움의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아를 일깨우며
자극하는 무서운 자기 확인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모두가 서로를 위해 공유할 수
있는 삶의 공통 수단으로서 그 의미가 확대된다. 시집 『국토』(1975)는
분단 현실의 폭력성과 허구성을 고발하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충만해 있는데,
이는 분단을 극복하고 남과 북을 아우르는 건강한 민중성에 기반을 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시집 『가거도』(1983)에서는 민중적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보여주고, 삶의 내적 충일을 통한 역동성을
발견하고자 주력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태일 [趙泰一]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