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께로 돌아가자(3)
호 6:1-4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 6:1-3 / 남 호 목사
고통은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만이 아니고 여러 가지 교훈을 안겨다 줍니다. 고통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싫어할 것도 아닙니다.
고통은 자기자신을 알게 하기도 하고, 자신을 생각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계시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고 고통 이후에 주어질 보화를 생각하고 차분하게 고통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옵니다. 훈련해서 정금같이 사용키 위해서 오기도 하고, 죄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고통이 오기도하며, 자신의 실수로 인하여(과로, 과음(음식), 부주의) 고통이 오기도 합니다.
우리나라가 6.25 대란을 맞아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동족간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 부상의 아픔, 부모형제가 한평생 떨어져 그리움만 안고 살아야 하는 고통, 공들여 일구어 놓은 사업과 가정이 파괴당하는 고통, 또한 복구하는 고통이 너무나 큰 고통입니다. 이런 고통은 강대국간의 이익과 지도자들의 욕심과 야욕을 벗어나지 못한 결과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통은 실수에서 오는 고통도 아니고 정금같이 쓰기 위한 단련의 고통도 아니고 자신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오는 고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살아왔던 죄악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실과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저주와 살인과 사위(거짓말) 투절(도적질) 간음과 강포하여(경계를 파괴하다)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율법과 규례를 지키지 않고 강도나 살인을 목적으로 폭력행위를 일삼는것) 이런 죄 때문에 땅이 슬퍼하며,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의 새가 쇠잔할 것이며 바다의 고기가 없어지리라(4:1-3)
그 나라 지도자들의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합니다.
지도자들의 죄 : ① "음란한 마음" 성적 타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매력적이고 좋게 생각하고 따라가는 마음을 말합니다.
② "교만한 죄" 이런 죄가 지도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소떼와 양떼를 이끌고 여호와를 찾아가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이미 하나님은 그 백성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③ "여호와의 정조를 지키지 못하고 사생아를 낳음" 이것은 믿음에서 떠나 우상과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쳤다는 말입니다. 자기만 아니고 다른 사람들까지 하나님을 떠나 우상과 세상사람으로 만들었으니 이 죄가 얼마나 큰 죄일까요?
죄가 있으면 반드시 보응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모든 고통이 죄로 인하여 온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죄 때문에 고통이 올 수는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지도자의 죄 때문에 고통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이 왔을 때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해결책을 찾고 은혜와 복이 되시기 바랍니다.
Ⅰ.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들만 골라가면서 하자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고통을 주셨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깨닫고, 떠났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치료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찢으셨으나 낫게 하시고, 치셨으나 싸매 주실 것이라."
찢으셨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곳곳에 흩어져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땅 자기 나라에서 살지 못하고 각각 흩어져 살아야 하는 서러움이란 대단한 고통입니다.
흩어져서도 말을 안듣고 제고집대로 하니까 다시 하나님이 치셨습니다. 직접 하나님이 고통을 가하신 것입니다. 이런 고통 속에서 돌아오면 하나님은 낫게 하시고 싸매 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즉, 고통과 서러움 속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은 회복시키시고 정상적인 괴도에 세우신다는 말입니다.
지난번에 남북 고위 당사자들이 만나서 회담이 잘 되었습니다. 흩어져서 그리움에 젖어 살던 부모형제를 상봉할 날이 점점 가까워옴을 피부로 느낍니다. 사람들에게 회답은 일시적입니다.
성경이 주는 회답은 남과 북이 여호와께로 회개하고 돌아올 때 이산가족 상봉뿐 아니라 우리의 소원인 통일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사람을 앞에서는 좋게 보일 수 있으나 자신들의 이익만 채우다가 끝날 것입니다.
백성과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섬기고 교만하고 믿음떠나 사생아를 낳음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민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고통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지금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이 낫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치셨으나 싸매주시고, 상처를 아물게 하고, 이틀 후에 살리시고, 삼일 후에 일으켜 하나님 앞에 정상적으로 회복시킨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여나 하나님을 잘못 섬김으로 당하고 있는 고통이 있습니까?
사업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직장 때문에, 자녀들 때문에, 물질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삶의 허탈과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까? 질고로 고통 당합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그대로 살아가면 고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마26:24- 가롯유다가 예수님 팔아 먹을 마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상을 마련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자가 나를 팔리라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라고 경고했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계획대로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겼습니다. 결국 그는 그의 죄값을 르게 되었습니다.
요일서1:9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느리라"
눅15: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나간 날부터 대문 앞에서 기다렸는데 그런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재산낭비하고 거러지 모양으로 돌아온 아들을 반갑게 맞아주며 욕시키고 가락지 끼우고 잔치를 베풀고 잃었던 아들 찾았다고 즐거워했습니다.
아버지 말 안듣고 나가서 재산 탕진한 아들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아버지는 회복시킵니다.
본인은 부끄럽고 양심이 있으니 아들이라 하지 말고 종으로 사용해 달라고 했으나 당당한 둘째 아들은 회복이 된 것입니다.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이 하나님을 잘못 섬긴 죄 때문에 온 것이라고 하면 지체말고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내 어디 가리까?
내죄를 씻기 위하여 피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앞에 옵니다."(338)
성경은 회개하는 자에게 복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욥22:23 / 네가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네 장막에서 불의를 버리면 다 흥하리라.
잠28:13 /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겔18:28 / 회개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않으리라.
눅15:7 /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눅 24:47 / 죄 사함을 받으리라.
행3:19 / 유쾌한 날이 주님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서 고통을 받고 있다면, 지체치 말고 주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치료의 역사가 있고 살아나는 축복이 있고 싸매는 일이 일어납니다.
Ⅱ. 힘써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깨닫고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잠시 고통을 주시는 분입니다.
3절에 우리 하나님을 두가지로 설명합니다.
① 새벽 빛과 같이 일정하신 분입니다. 밤이 지나면 반드시 새벽이 오듯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베푸시는 은혜는 확실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은혜를 언제든지 베푸시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독일 사람들이 유태인 말살 정책으로 수많은 유태인이 죽어갔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행한 행적들을 모아 진열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당시 독일 의사들은 독일 사람들과 신체구조가 닮은 유태인들이 많았음으로 생쥐로 인체실험하지 않고 직접 유태인들로 실험했다는 것입니다. 생체 실험입니다.
한 진열장에는 유태인들의 이빨에서 빼낸 금붙이를 모아놓은 곳이 있고 다른 곳에는 비누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화장시킬 때 흘러내린 기름으로 만든 비누라고 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유태인들의 얼굴에서 벗겨진 안경을 모아 진열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나온 어떤 이는 "그때 그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셨는가? 그들은 부활할 것인가? 믿기 힘듭니다. 600만명의 가혹한 전멸을 보고도 어찌 유태인들은 아직도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그 민족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약속 대로 축복하셨습니다.
과학자중 우수한 사람들은 유태인입니다. 문학·예술·경제·정치·종교 모두다 그 민족이 으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일정하고 변함없이 돌보시는 분입니다.
② 하나님은 이른비와 늦은비 같이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이른비는 12∼2 파종할 때 내리는 비를 말하고 늦은비는 3∼4월에 내리는 비로 곡식을 여물게 하는 비로 축복을 상징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할 때 있어야할 때 일게 하셔서 우리를 풍성케 하시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부요하고 풍성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남이 싫어하시는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삶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내리는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고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운동이 민족과 이웃과 개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살길이 있고, 풍성함이 있고, 싸매고 치료함이 있습니다.
교회의 개혁적 과제
호 6:1~3, 계 2:1~6 / 이성희 목사
1517년 10월 30일은 우리 교회가 기억할 날입니다. 성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하여 건축 기금을 모금하는 가운데 면죄부라는 기발한 모금 방법을 교황청은 구상하였습니다. 도미니칸 수도사인 테첼이 면죄부를 팔려고 독일에 와서 루터와 마주쳤습니다. 이것이 루터가 개혁적인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내걸고 개혁을 시작한 동기였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고 지난 487년 동안 교회는 수없이 변화하고 개혁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혁명과 개혁은 다릅니다. 혁명은 다른 사람을 쳐서 고치는 것입니다. 개혁은 자기를 쳐서 고치는 것입니다. 개혁의 실제적 중심은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과 교회개혁은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켜 성경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은 항상 고통이 따릅니다. 자기를 고치려는 것은 남을 고치는 것보다 힘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 가운데 얻은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오래 전 남 프랑스 미아레산의 세벤느산(des Sevennes)의 사막박물관(Musse du Desert)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오래 전 개신교인들이 천주교인들에게 박해를 받았던 흔적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 이상으로 천주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종교개혁은 이런 박해 가운데서 새로운 교회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정말 사막 박물관에 가보면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신앙의 위대함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값진 진주를 발견한 진주장사가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진주 하나를 사는 심정을 가지게 됩니다. 새로운 교회가 탄생되기 위하여 이런 희생을 겪게 된 것입니다.
최근 한국은 온통 개혁이란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개혁을 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라를 뒤덮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삭이란 인물은 전통과 개혁을 조화 있게 이룬 사람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그의 아버지가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을 때 이삭은 아버지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습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그 일을 하셨기 때문에 돌을 꺼내고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나 물이 나오지 않을 때는 과감히 그 우물을 버렸습니다. 샘의 근원이 우물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을 지키되 그 속에서 샘을 얻지 못할 때는 또 다른 우물을 파야 할 것입니다. 버릴 것과 유지할 것을 취사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전통만 고수하지 말고, 무조건 개혁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새롭게 함’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아나카이노스’는 사고의 중대한 개혁을 암시합니다. 사고의 개혁이 있어야 새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교회를 새롭게 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가 개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종교개혁기념주일에 교회 개혁이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다시 한번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교회의 개혁은 돌아가는 일입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중세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는 중요한 사건들입니다. 르네상스는 인문주의 입장에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종교개혁은 신앙적 입장에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의 그림은 매우 큰 화폭이 필요했습니다. 그림으로 묘사하는 장면들 가운데는 사물을 내려다보는 수많은 천사들을 포함시켰습니다. 삶을 보다 넓은 안목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중세 암흑시대로부터 빠져나올 출구를 찾았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넓게 보면 인간 본연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르네상스는 인간 본질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라고 합니다. 라틴어로 ‘ad fontes’라고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은 다른 말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ad biblia’라고 합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이런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신앙적 르네상스라고 합니다.
개혁은 어떤 새것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새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은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합니다. 전도서 1: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고 합니다. 하늘의 것 외에는 새 것이 없습니다. 하늘의 것만이 새것입니다.
훼손되고, 오염되고, 변질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은 원래말씀으로 돌아가고, 원리로 돌아가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개혁(改革)이란 한자말은 ‘가죽으로 바꾼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경험한 첫 개혁은 나뭇잎을 가죽옷으로 갈아입히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엮어 만들어 입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그것 대신에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것이 개혁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혁은 하나님이 주체이십니다. 개혁도 사람이 하려고 하면 실패하지만 하나님이 하시게 해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벧엘에서의 경험은 정말 개혁적 생활입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선언 받습니다. 파괴되고, 깨지고, 상한 마음이 위로를 받습니다. 야곱의 벧엘은 회복운동이었습니다. 창세기 35장에 보면 그가 다시 벧엘로 올라갑니다. 그의 가정에 큰 위기가 생겼습니다. 식구들을 데리고 형 에서를 만나고 오는 도중에 세겜에서 이유 없이 장기 체류합니다. 거기에서 세겜 사람들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고 아들들은 화가 나서 할례를 이용하여 세겜 사람들을 죽입니다. 이런 가정적 위기가 있을 때 야곱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창 35:3)라고 선언합니다. 그의 회복은 벧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옛날 하나님이 만나주시고 복을 주시던 곳으로 다시 찾아가는 회복운동입니다. 지금도 종교개혁은 회복하는 운동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보세요. 요시야 시대에 성전을 수리하던 중 발견된 모세의 두루마리가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발단이었습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성전에 쳐박혀 있던 두루마리가 제사장 힐기야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된 두루마리는 서기관 사반에 의해 전달되었습니다. 요시야는 두루마리가 발견되었을 때에 철저한 회개와 더불어 전면적이고 파격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유다왕조에서 만연했던 이방종교를 금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일월성신을 숭배하는 것을 타파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야훼 예배를 회복하였습니다. 모든 비 야훼적 가나안 종교와 전통을 배격하였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찰스 피니 목사님은 ‘한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믿는 것도 중요하나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본래의 위치로 돌아오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신앙의 회복이 중요합니다. 이 회복이 개혁입니다. 이것이 생활의 개혁이고, 심령의 개혁이고, 신앙의 개혁입니다. 모든 개혁이 본래의 모습,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면 제일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른 삶을 살고 싶다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을 바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개인의 개혁은 회개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 없이 어떤 한 사람이 개혁될 수는 없습니다. 개인에게는 회개가 곧 개혁입니다.
회개의 히브리어는 ‘테슈바’, 즉 세상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개인의 회개는 개인 개혁의 기초입니다. 교회의 회개는 교회 개혁의 기초입니다. 국가의 회개는 국가 개혁의 기초입니다.
‘좋은 씨앗’이란 출판사에서 최근 레너드 수윗의 ‘모던 시대의 교회는 가라’(Aqua Church)라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의 교회 리더십을 다룬 책입니다. 저자가 맨 먼저 다루는 것이 “북극성을 향해 방향 맞추기”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전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깊게 나침판 관찰하기”입니다. 이 말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성경중심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를 위한 교회의 개혁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성경 없이는 개혁이 불가능하고 무의미합니다. 개혁은 어느 시대에나 본질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둘째, 교회의 개혁은 다시 사는 일입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일이 개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우리를 살리시며, 우리를 일으키시리니”라고 하십니다. 돌아가면 삽니다. 개혁하면 살리십니다. 개혁하면 일으키십니다. 개혁은 사는 길입니다. 내가 깨지고, 내가 죽고, 내가 변화되는 것이 개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찢으셨으나 낫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찢다”라는 말은 ‘타라프’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사자가 먹이를 찢는 것처럼 처절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한국교회의 찢겨진 모습을 보세요. 최근 몇몇 대형교회들의 다툼이 언론에 회자됩니다. 교회들이 찢겨지고 있습니다. 찢겨진 교회가 비판을 받습니다. 교회가 쇠락해 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교회이지만 돌아오면, 개혁하면, 회개하면, 낫게 하십니다. 다시 살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치셨으나 싸매어주십니다. 치는 것도 사랑입니다. 싸매는 것도 사랑입니다. 한국교회를 하나님께서 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싸매어주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돌이키면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몸이 병들었습니다. 의사들은 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죽기를 작정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을 간호하시던 사모님이 또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집안의 건강하던 아이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되고 이제는 완전히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편찮으실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아이가 죽고 나니 완전히 절망 속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외면하시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고, 일으키시고, 낫게 하시고, 싸매어 주셨습니다. 세상 떠난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제는 건강하시고 훌륭한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완전한 회복입니다. 욥의 회복은 완전한 회복입니다. 배의 축복을 받은 회복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회복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돌아가면 삽니다. 돌아가면 낫습니다. 돌아가면 회복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개혁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다시 삽니다. 개혁은 교회가 사는 길입니다.
16세기 전설에 보면 영성가 프란시스 드 살레에게 어떤 여인이 찾아와서 묻습니다. “얼굴에 분을 바르는 것이 죄인가요?” 드 살레는 “글쎄요. 어떤 학자는 괜찮다고 하고 어떤 학자는 안 된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여인은 좀 더 명확하게 대답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드 살레는 “중도 노선을 따르지요. 한쪽 뺨에만 분을 바르세요”라고 하였답니다. 우리의 사소한 일상에서는 중도가 필요하고, 중도가 유익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거는 일에는 중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서 중도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개혁이란 생명이 걸린 일입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루터는 생사의 결단을 하고 종교개혁을 하였습니다. 그가 만든 찬송 가운데는 “천하에 누가 당하랴, 반드시 이기리로다”라는 결연한 자세가 나타나 있습니다. 중간에 서기 싫다는 결단입니다. 반드시 산다는 확신입니다. 반드시 이긴다는 자신감입니다. 이것이 개혁정신입니다. 지금도 독일 에르푸르트에 있는 루터의 동상에는 이런 성경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시편 118:17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한국교회도 개혁하면 삽니다. 살기 위하여 개혁해야 합니다. 개혁은 사는 길입니다.
셋째, 교회의 개혁은 하나님을 아는 일입니다.
개혁이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일입니다. 왜 죄를 짓고 삽니까? 왜 하나님의 교회가 쇠퇴합니까?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3절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모토 가운데 하나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입니다. 하나님 외에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잠언 9:10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똑똑한 삶입니다. 똘똘한 사람은 하나님을 압니다.
이사야 11:9에는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교회가 개혁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로널드 롤하이저는 “현대인은 교회에 관해서는 휴가 중이다. 하나님 나라는 원하지만 교회는 원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예배를 원치 않습니다. 교회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야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전 세계가 교구라는 복음의 야망을 품고 1735년 12월 10일 225명의 승객과 함께 3개월 여정으로 시몬즈호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엄격한 훈련과정을 강조하는 감리교도들과 함께 배를 탔습니다. 항해 도중 파도가 치고, 큰 물결이 배를 엄습합니다. 모두들 배가 난파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웨슬리도 “죽는 것이 두려워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웨슬리를 영적 딜레마에 빠지게 한 것은 모라비안 교도들의 자세였습니다. 진젠돌프 백작 아래의 26명의 남녀 신자들은 손에 손을 잡고 떨림이 없이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물어보았습니다. “아니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죽음이 두렵지 않거든요”라고 그들은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모습에 웨슬리는 당황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삶은 당당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삶이 참 심령의 개혁입니다. 개혁은 살게 합니다. 개혁은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교회가 개혁되어야 하나님을 알고, 위풍당당하게 삽니다.
결 론
루터, 칼빈 같은 개혁자들은 진실된 교회를 표시하는 몇 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을 진실로 가르치고 설교합니다. 둘째는 성례전에 대해 올바르게 관리합니다. 셋째는 교회 치리를 올바르게 행사합니다.
우리 나라도 교회도 개혁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가 개혁의 주체입니까? 개혁의 대상입니까? 성경의 힐기야 제사장은 개혁의 대상이었습니다. 두루마리에 먼지가 쌓이도록 권력만 행사하고 안일하고, 방치하고, 영력이 쇠퇴하였습니다. 요시야왕은 개혁의 주체였습니다. 요시야는 백성들에게 명하여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만 하고 행사만 한다면 개혁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다면 우리가 개혁의 주체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다시 살고 다시 하나님을 아는 우리 교회, 우리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 6:1-3 / 박상훈 목사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치시기도 하시고, 때때로 우리를 찢으시기도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지 못하고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치셨다가도 싸매어 주시고 우리를 찢으셨다가도 도로 낫게 해주십니다.
우리 나라와 마찬가지로 독일도 오랫동안 분단된 나라였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드디어 독일은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 배후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믿음이 독실한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 날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면서 깊이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그의 마음 속에 깊은 감동을 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마17:20의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그는 이 말씀을 읽는 가운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신실하신 분이 시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붙들면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이런 확신이 그의 마음에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로 많은 준비를 하고서 베를린 장벽으로 뛰어갔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성을 질렀을 때,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그는 이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무너져라!"
그런데 아무리 힘껏 소리쳐도 베를린 장벽은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 왜 무너지지 않을까?"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금 말씀을 펴놓고 기도하면서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에게 깨달음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만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네가"라고 하시면서 한 사람을 가리켜 말씀하시지 않고, 복수로 "너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하, 내가 혼자서 소리쳤기 때문에 안되었구나!"
그는 기도하면서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믿음의 동료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기도로써 단단히 준비하고 이제는 여러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다함께 큰 소리로 "무너져라!"고 함성을 질렀습니다. 이번에는 당연히 무너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베를린 장벽은 끄떡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마음에 실망이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왔습니다. 다시금 말씀을 펴놓고 기도했습니다.
"주여, 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도 못해서 그렇습니까?"
그에게 또다시 깨달음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당장 옮길 것이요"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옮길 것이요." 미래형으로 써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제야 그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렇구나. 때와 기한은 주님의 손에 달려져 있구나! 우리는 그때를 바라보면서 간절히 기도하면 되는구나!"
그는 이것을 깨닫고 그때부터 조국의 조속한 통일을 위해서, 베를린 장벽이 속히 무너지기를 바라면서 더불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번져 나갔습니다. 동서독을 막론하고 여기저기에서 조국의 통일과 베를린 장벽이 속히 무너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저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나는데는 그다지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1989년 11월 9일에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려 주셨습니다. 그리해서 독일은 통일된 나라가 된 것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뒤에 방금 말씀드린 독일을 비롯해서 월남, 예멘, 이런 등등의 여러 나라가 분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 통일국가가 되었습니다. 지구상에 우리 나라만 남북으로 분단된 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기도를 저버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분단된지 55년만에 남북의 정상이 처음으로 평양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한 공동선언문을 작성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민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셔서 속히 우리에게도 통일국가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해서 백두산에서부터 한라산까지 이 땅에 평화가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한강과 대동강에 번영의 물결이 넘쳐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6·25동란 50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 전체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되신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 역사의 주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속히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편의상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바르게 깨우치시기 위해 사랑의 매를 드십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하나님을 잘 섬길 때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다스렸습니다. 나라에 평화가 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방의 여인들을 아내로 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그 여인들의 꾀임에 빠져서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그는 이방의 신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치셨습니다. 그를 대적하는 무리들이 양 사방에서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결국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 나라가 둘로 쪼개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를 찢으신 것입니다.
북방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북쪽의 단이라는 곳에 두고, 하나는 남쪽에 있는 벧엘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금송아지를 섬기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할 때 하나님은 앗수르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멸하셨습니다.
남방 유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므낫세, 아몬 등등의 왕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바알을 위한 신당을 만들었습니다.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했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바벨론을 들어서 남방 유다를 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남방 유다를 완전히 멸하지는 아니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70년간 포로로 끌려가서 고생하고 난 뒤에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금 이스라엘로 되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이방의 신을 섬기고 우상을 숭배할 때 사랑의 매를 드시고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때 우리 나라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려질 만큼 경건한 도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많았던 도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북녘 땅에 사탄의 앞잡이라고 불려지는 공산정권이 들어서게 되었습니까? 이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1938년 9월 9일, 평양의 서문밖 교회에서 장로교 총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무엇을 가결했습니까?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의 죄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애국적인 하나의 국가의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솔선수범해서 신사에 참배하자!"
그것을 총회에서 결의했습니다. 그리고는 목사와 장로들이 그 즉시 신사에 가서 참배를 했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어느 교회사가는 이렇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 비극의 27회 총회. 이것이 바로 이가봇이로구나(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렸다는 뜻입니다.)! 이때 어느 선교사는 '나는 하나님께 상소하리오!'라고 소리치고 형사에게 끌려가니 울음이 터졌다. 통분, 통분하도다!"
물론 그때 우리가 잘 아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그 자리에 없으셨습니다.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시다가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뒤인 1939년 12월 25일, 주기철 목사님과 그가 시무하셨던 산정현 교회가 소속된 평양노회의 임시노회가 남문밖 교회에서 열렸습니다. 그 노회가 열린 목적은 주기철 목사님을 제명 처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주기철은 자기 혼자 천당에 가려고 교회와 양떼를 버리고 감옥에 가서 공짜 밥을 먹고 있으니 그는 삯군 목사요, 직무를 유기한 자이므로 제명한다!"
그리고 자기들은 신사에 참배할 망정 교회와 양떼를 지키기 위하여 충성을 다한 복음주의자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그런 파렴치한 궤변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습니다. 해방직후에 평북노회가 열렸습니다. 거기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노회원이 손을 들고서 정식으로 발의했습니다.
"우리가 일정시대에는 일제의 압박에 굴복해서 어쩔 수 없이 신사에 참배하면서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합시다!"
그러자 다른 노회원이 정면에서 그 의견을 묵살시켜 버렸습니다.
"왜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의 죄요? 총회에서 분명히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의 죄가 아니라고 가결했지 않소! 그저 애국적인 하나의 국가의식이라고 총회에서 가결하지 않았소?"
그러면서 회개하자는 그 의견을 묵살시켰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었습니다. 1949년 의산노회에서는 이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것도 신의주와 의주군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지역에 속한 노회였습니다.
"일정시대에 총회의 결의을 무시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에 갔다온 출옥 성직자들은 율법주의자들이므로 강단에 세우지 말도록 한다!"
이것을 가결해서 산하 지교회들에게 통보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사참배를 하면서 우상숭배를 하는 목사들은 계속해서 목회를 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감옥에 끌려가 고생 당하다가 나온 목사님들은 강단에 세우지 못하도록 가결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 민족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솔로몬이 이방신을 섬길 때 하나님은 그 나라를 찢어버리셨습니다. 북방 이스라엘이 황금 송아지를 섬길 때 하나님은 앗수르를 통해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남방 유다가 바알 신당을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할 때 하나님은 바벨론을 들어서 남방 유다를 심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북녘 땅이 중심이 되어 신사를 참배하면서 우상을 숭배할 때, 하나님은 공산주의를 들어서 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참된 신앙을 위해서 이곳에 순교의 피를 흘리셨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남녘 땅을 남겨놓으셨습니다.
이처럼 이 민족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사랑의 매를 드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우리를 찢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도로 낫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남쪽에서 애굽이 쳐들어오면, 북쪽 앗수르나 바벨론에 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반대로 북쪽에서 쳐들어오면, 남쪽으로 가서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이 우리의 구세주가 아닙니다. 주변의 강대국들이 우리를 다시 고쳐주지 못할 것입니다. 이 민족이 살길은 오직 하나,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6·25동란을 "승리를 목적으로 한 전쟁이 아니고, 소모 전쟁이었다!"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 미국은 일본과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생각하기에 1948년 정도까지는 전쟁이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기를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중간에 원자탄이 발명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상했던 것보다도 3년 앞당겨서 일본은 1945년에 항복을 했습니다. 그러니 미국은 그 동안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 놓았던 무기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하나의 작은 전쟁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6·25동란이었던 것입니다.
소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차 대전 후에 쓰고 남은 무기가 많이 남았습니다. 또 어려운 경제를 회생하기 위해서라도 하나의 작은 전쟁이 필요했습니다. 이렇듯 소련과 미국이 서로 목적이 맞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바로 6·25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소련은 애당초부터 김일성을 앞세워서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의도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러했더라면 UN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을 행사해서라도 유엔군이 파견되지 못하도록 막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소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소련 수상 스탈린은 당시 UN주재 소련의 대표였던 말리크에게 이런 지령을 내렸습니다.
"안전보장이사회의에 참석하지 말아라! 이것은 명령이다. 이유는 묻지 말아라!"
그래서 말리크가 참석을 안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나머지 회원 국가들이 결의해서 16개국의 유엔군을 파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미국은 우리가 잘 아는 맥아더 장군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전쟁을 하는 도중에 중공군이 개입했습니다. 그때 맥아더가 만주를 폭격해서 전쟁을 빨리 끝내버리자고 작전을 세웠습니다. 미국이 놀랐습니다. 맥아더를 해임하고 리지웨이 장군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북진해서 빨리 승리를 속결하자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러자 또 미국이 놀라서 리지웨이 장군을 해임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소모전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는 클라크 대장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해서 3년 동안 한국의 전쟁이 지루하게 계속 되게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재고로 남아있던 미국과 소련의 무기들이 다 소모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6·25동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3·8선을 중심으로 휴전을 시키고, 미국과 소련은 뒤에서 구세주 노릇을 하면서 조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미국이 한국을 조종하는 것을 풍자적으로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한국의 대통령으로 시킬 사람이 결정이 되면 일단 미국으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과 악수를 하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임명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대통령 선거를 치르지만 그것은 하나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 그를 또 미국으로 초청을 합니다. 그것을 인준식이라고 했습니다. 그 뒤 돌아와서는 어김없이 아시아 5개국을 순방합니다. 그것은 공표식이라고 했습니다. 역대 우리 나라 모든 대통령이 다 이 수순을 거쳤습니다. 미국이 뒤에서 조종하는 것입니다. 어디 정치뿐입니까?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IMF가 터진 것도 우리 나라가 미국에 대해서 괘씸죄에 걸려서 그런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해방 직후에 민족의 지도자였던 고당 조만식 선생님은 우리 민족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조선 사람들아, 조심해라! 미국 사람들을 믿지 마라! 소련 사람들에게 속지 마라! 일본 사람들은 다시 일어난다. 중국 사람들(그때는 되놈이라고 불렀음)은 되나온다! 그러니 조선 사람들아, 조심해라!"
선견지명이 있는 말인 줄 압니다. 미국이 우리 나라의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어떠한 강대국이라도 우리를 다시금 싸매어 줄 수 없습니다. 나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의 참되신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갈 때만이 하나님이 우리를 싸매어 주시고, 우리를 다시 낫게 해주십니다. 이 민족이 살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그들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사무엘을 위시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큰 우뢰를 발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민족의 기도를 외면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1950년 6월 25일, 그 날도 역시 주일이었습니다. 휴일을 맞이해서 많은 국군 장병들이 휴가를 떠났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전쟁의 위협이 있다고 전방에서는 계속해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작전권을 쥐고 있던 미국은 그것을 다 묵살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만 쳤습니다. 헛소문만 퍼뜨렸습니다. 아마 나이드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전쟁이 터져? 전쟁이 터지면 까짓것 서울에서 아침먹고, 평양에서 점심먹고, 저녁은 신의주가서 먹으면 되지!"
우리 국군으로 하여금 전쟁에 대비하지 못하도록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에게는 전쟁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무기를 소모해야 되었으니까요. 드디어 전쟁이 터졌습니다. 우리 국군은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곧 인민군들이 밀물 듯이 밀려 내려왔습니다. 낙동강 이남으로 다 밀렸습니다. 잠시 잠깐 뒤면 우리 민족들은 자기 발로 부산 앞 바다로 빠져야될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했습니까? 해운대 바다 앞 모래사장에 다 모였습니다. 그래서 한 주간동안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기도회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회가 끝났을 때, 놀랍게도 그처럼 쏟아져 내리던 폭우가 멎고 하늘이 깨끗하게 개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민족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끼나와에 있던 미국의 폭격기들이 이륙할 수가 있었습니다. 낙동강 근처에 집결해 있던 인민군들을 향해서 엄청나게 폭격했습니다. 때를 맞추어서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했습니다. 그래서 인민군들은 어쩔 수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민족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일천 만이 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시겠습니까? 반드시 들어주실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하나님은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밤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긴 밤이 지나고 나면 새벽 빛은 일정하게 비추이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땅에 구원의 빛을 발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땅을 뒤덮고 있는 모든 어두움을 물러가게 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절하게 내려 주셔서 풍요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해서 백두산에서부터 한라산까지 이 땅에 평화가 가득하고, 한강과 대동강에는 번영의 물결이 넘치도록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의 주인이 되신 이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이 민족이 살길은 오직 한 길,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모든 것을 회개합시다. 하나님 이외에 우리가 섬기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떨쳐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섬기십시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 옛날 이사야 선지자가 사2:4에서 예언했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속히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사2:4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마음
호 6:1-6 / 임덕순 목사
서점에 가면 날마다 새로운 책들이 산더미같이 쏟아져 나오고, 인터넷을 뒤지면 별별 정보가 가득합니다. 초등학생들도 배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학교가 끝나도 학원을 도느라고 해지도록 집에 돌아오지 못합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쓸데없는 정보들을 겉핥기로 섭렵하다가 정작 필요한 정보를 놓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일컬어서 지식의 홍수시대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꼭 알아야할 참된 지식은 도외시하는 시대입니다. 저를 낳고 길러준 제 부모를 몰라라 하는 시대이며, 자기의 육체와 영혼과 환경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을 외면하는 시대입니다. 인생이 참으로 알아야 할 근본적인 지식은 인간 자신에 관한 지식이요 인생과 천지만물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실험실의 연구나 명상이나 사색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붙어서 사는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흔적은 발견할 수 있으나, 그분의 본질을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말씀인 성경에서만 하나님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순종해 보면,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할 수 있고 그 체험만이 나의 진정한 神지식이 됩니다. 사람의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비례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신앙이 깊어지고 바로알지 못하면 신앙이 맹목이 되고 얕고 흔들립니다. 그의 신앙이 흔들리면 그의 삶에도 안정이 없고 흔들리게 됩니다.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얼마나 아느냐 하는 神지식은 그의 신앙을 좌우하고, 그의 신앙은 그의 생활을 좌우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을 몰라서 우상숭배의 생활로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한다." (4:14)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4:5)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6:3)라고 외쳤던 사람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잘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체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그의 하나님은, 참사랑의 하나님 이셨습니다.
때는 솔로몬 왕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던 시대입니다. 솔로몬 왕 때부터 고된 노역에 시달린 백성들이, 르호보암 왕에게 노역이 너무 고달프니 시정해 달라고 건의했더니 경험 없는 르호보암은 경험많은 참모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젊은 참모들에게 묻고는 그들이 하라는 대로 "내 새끼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나는 부왕보다 더욱 강하게 다스리겠다고 선포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왕을 싫어했습니다. 이때에 여로보암이라는 건달하나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에게서 떠난 민심을 모아 이스라엘 열두지파 중에서 열 지파를 데리고 사마리아에 가서 괴뢰정부를 세웠습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져 두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에 괴뢰정부를 세운 여로보암은 백성들을 다스리기가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해마다 유월절이나 오순절이나 장막절이 되면 백성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드리고 돌아오기 때문에 언제 백성들의 마음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아갈지 몹시 불안하기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북쪽의 여로보암은 악한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둘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벧엘과 단에 산당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선포하기를 "이 송아지가 너희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신이다. 구태여 예루살렘 까지 가서 여호와를 섬기지 말고 이제 여기서 이 신을 섬기자" 고 권장하며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처음엔 백성들의 마음에 신앙이 남아있어서 반발도 하였지만, 산당에서 금송아지를 섬기는 예배가 남녀가 어울려 신나게 마시며 춤추며 쾌락을 나누는 순서였기 때문에 이들 모두는 이내 그런 예배를 좋아하게 되었고 우상숭배와 음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영적간음을 행하였고, 육신적으로도 방탕과 간음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짓는 죄악이 어떤 죄인지도 알지 못했고, 앞으로 다가올 재난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멸망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북쪽 이스라엘에 사는 브에리라고 하는 사람에게 호세아라는 경건한 아들이 총각으로 있었는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그 호세아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방탕하고 음란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고멜 이라는 여자와 결혼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인지라 할 수없이 그 여자와 결혼하였습니다. 경건한 호세아와 음란한 고멜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짝이었고 매사가 맞지 않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함께 살았고 얼마 후에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 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그 뜻은 "내가 이스라엘 나라를 멸망시키겠다." 는 뜻이었습니다.
그 뒤에 호세아가 집을 떠나 얼마동안 여행을 다녀온 사이에 고멜은 옛날 버릇대로 다른 남자를 집안으로 끌어들여서 그 남자의 딸을 낳아놓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 딸의 이름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라는 뜻의 "로루하마" 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에 고멜은 또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잉태하고 또 딸을 낳았습니다. 호세아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었습니다. 남들은 호세아보고 병신이라고 수군거렸고 호세아의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멜과 그 애들을 함께 쫓아내려고 했더니 하나님께서 말리시면서 그 애의 이름을 "내백성이 아니다." 라는 뜻을 가진 "로암미" 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참기 어려운 분노를 참으며 남의 씨들을 키우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쁘지도 않은 어린것들을 다 놔둔 채 값나갈만한 물건을 다 싸가지고 고멜이 집을 나간 것입니다. 이 동네 저 동네 다 찾아보았지만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오랜 후에 들으니까, 고멜이 먼 도시 어떤 남자에게 첩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창녀가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호세아는 젖 달라고 울며 보채는 남의 자식을 달래려니 부끄럽고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한편 그런 여자와 한 평생을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잘 되었다 고 생각하면서 그 여자를 찾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호세아에게 들려왔습니다. "호세아야 너는 왜 네 아내를 찾지 않느냐, 그가 창녀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남의 노예로 팔려가 종살이를 하고 있으니, 너는 어서 가서 그를 돈을 주고 사다가 다시 사랑해주어라."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니 하는 수가 없었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 때문에 내 신세 망쳤다고 생각하면서, 은 다섯 개와 보리 다섯 가마니 반을 가지고 노예가 된 고멜을 찾아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나와함께 지내고, 다른 남자를 따라가지 말라. 나도 너에게 그리 하리라" 고 타일렀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고멜은 주먹 같은 눈물을 두 눈에서 흘리며 호세아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호세아에게 임하였습니다.
“호세아야 내가 너에게 왜 그런 생활을 하라고 한줄 아느냐? 경건한 너에게 왜 음란하고 못된 여인과 결혼하게 하고, 창녀가 되고 노예가 된 그를 왜 다시 구해오고 사랑하게 한 줄을 아느냐? 내가 사랑하는 이 백성 이스라엘이 고멜과 똑 같기 때문이다. 나는 이스라엘을 사랑하는데 그들은 우상을 섬기며 못된 생활만 하니 내가 그들을 버리고 싶다마는 그래도 내가 몇 번이고 타이르고 달래서 내 품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너에게 그런 일을 시켰느니라. 버림받아야 마땅한 고멜을 끝까지 사랑하는 네 행동을 보고 방탕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는 내 마음을 깨달으라고 그런 것이다." "너는 이제부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네가 경험한 일을 말하면서 음부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죄인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말하면서 이스라엘을 향한 나의 사랑을 만민에게 알게 하여라” "내 사랑을 알고 돌아오면 그들이 살고 사랑을 받겠지만, 나의 사랑을 무시하고 끝내 거역하면 결국 망한다고 경고도 하여라."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호세아는 그제야 하나님이 자기에게 고멜과 결혼하라고 하셨던 뜻을 알았습니다.
호세아는 뜨거운 마음으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아 하나님을 알자! 하나님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자, 사랑받을 수 없는 자, 이해 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끝내 거절하는 자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란다. 우리가 어서 여호와를 알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호세아는 말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생활 전체로 보여주었고, 체험에서 얻은 뜨거운 마음으로 백성들에게 외친 선지자입니다. 2장 6절에서부터 보면 사랑하는 자가 다른 남자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는 남편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간부에게로 가는 길을 가시로 막고, 담을 쌓아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며, 저가 연애비용으로 쓰고 다니는 내가 준 것들을 도로 빼앗으면 결국 본남편에게로 돌아 올 것인가"하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주신 평안 때문에 하나님을 외면하고 방탕 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건강과 물질과 환경들에 재앙을 내리면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지 않겠나 하시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있었던 실제 상황 이었습니다. 방탕하기 이를데 업는 고멜의 모습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면서도 세상만을 사랑하고, 일주일 내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도 아니하고 세상의 일들만 생각하며 살고 있고,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이 주신 재산, 재능, 맑은 정신, 건강, 아름다움, 자식, 시간들을 가지고 열심히 세상만 섬기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호세아의 고멜 사랑은, 그런 인생들을 아직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멜은 본래 부정한 습성을 가진 여자입니다. 그는 결혼 전부터 이미 여러 남자를 상대한 여자입니다. 우리 인생도 본시부터 부정한 핏줄을 타고 났습니다. 나면서부터 선한 말, 선한일 보다는 악한 말 악한 일을 먼저 배웠으며,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벌써 돈, 세상쾌락, 명예부터 알았고 그것에게 이미 마음 바친 사람들 입니다. 믿음으로 살겠노라고 하나님과 약속하고도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세상에 마음이 끌리는 그런 한심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같으면 그런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순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경건한 호세아를 보고 정조를 버린 고멜에게 장가가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를 부정한 인생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게 하시고 그들의 남편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향한 정조를 버렸음에도 끝까지 용서하시고 부르시는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 하고도 다시 방탕했으며, 남편의 것을 갖고 다니며 부정한데 쓰는 악한여자였습니다. 그는 결혼해서 남편의 몸이 된 뒤에도 남의 자식을 둘씩이나 낳은 부정한 여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주님의 것이요 성전 된 몸인데도 세상을 사랑하는 일에만 지치도록 혹사할 뿐이고, 주님을 섬기는 데는 사용하기 싫어하며 주신 시간과 재능과 물질들을 하나님 섬기는 일과 이웃사랑에 사용하지 않고 주님이 싫어하시는 명예와 쾌락과 권세 얻기 위해서만 사용하기에도 모자라 하고 있습니다.
고멜은 아예 가출해서 남의첩이 되고 창녀를 거쳐 노예로 전락한 버린 구제불능의 여자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들의 모습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구제불능 상태인 죄인들을 구원해서 너희는 내 것이다. 너희는 이제 나의 백성이요 나의 신부라고 사랑하시는데도 또다시 옛 습관과 죄악의 노예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한심한 모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호세아 에게 그 고멜을, 다시 돈을 주고 사오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지긋지긋하게 보기 싫고 분이 끓어오르는 여자를 돈까지 주고 다시사서 사랑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들을 오늘까지 참아주셔서 아직도 교회에 다닐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우리 같았으면 당장에 이혼했을 것이고 위자료를 청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런 고멜을 버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호세아서는 우리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놀라운 계시입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참사랑의 실체를 보여주는 놀라운 계시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용서받지도 사랑받지도 못할 형편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무지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도무지 사랑받지 못할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도무지 도움 받지 못할 자를 도와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만의 아가페의 사랑이십니다.
전혀 자격이 없는 자에게 쏟아 부어지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사랑을 바로 알기를 바라십니다. 지식으로만 알지 않고 자신을 돌이켜 봄으로, 말씀을 순종하여 체험을 함으로 깊이 알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하는 사랑과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누구나 상대방의 자격과 조건과 가치를 따집니다. 신혼부부들이 처음에는 상대방이 몹시 좋아 보이고 훌륭하고 사랑할만해서 사랑하지만, 결혼 후 얼마가지 않아서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상대방에게 기대했던 기대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기대에 바탕을 둔 사랑은 식어만 갑니다. 그래서 냉랭한 관계가 지속되고 서로 외로워지고 후회되고 이혼도 생각하며 실제로 이혼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혼하지 않은 사람들도 그렇게 몇 년을 지내노라면 상대방이 불쌍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체념도 하고 이해도 하면서 그럭저럭 살다보면 늙어서 죽음 앞에서 헤어집니다. 이것이 이 세상 사랑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기대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월이가도 변할 수 없는 것이며 죄인들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진실 되고 과분한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의와 공평과 은총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진실한 사랑을 예단삼아 우리에게 장가를 드셨습니다. 우리는 가장 좋은 신랑과 결혼한 주님의 신부입니다. 그분은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들이 정절을 지키지 못한 신부요, 하나님을 두고도 늘 세상만 사랑하는 부정하고 괘씸한, 고멜 같은 사람들이지만, 주님은 우리들의 자격을 따지지 않고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변치 않는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맺힌 세월을 사셨습니까? 외롭고 슬픈 세월을 사셨습니까?
무언가 갈증이 깊어서 시원한 것을 얻어 보려고 방황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진실한지, 그 사랑을 체험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갈증이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둠을 깨는 새벽빛같이 그동안의 슬픈 세월을 잊게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뭄을 해결하는 장마비 처럼 맺힌 한을 풀게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목마름을 해결하는 시냇물과 같이 인생을 흡족하게 합니다. 이 사랑을 알면 외롭지 않고 고독하지 않으며, 이 사랑을 알아야 남을 이해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만 합니다. 이 사랑의 맛을 보면 더 이상 그 무엇인가가 아쉬워서 또 다른 것을 향하여 헤매는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의 맛을 보면 다시 방황하거나 갈증을 느끼지 않고 주님 안에서 참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변질된 적은 없었습니까?
열 번도 더 변덕을 부리면서 세상으로 가는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쫓겨난 자에게도 은혜를 베푸셨고, 멸망 길을 헤매는 우리를 추적하며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아왔습니까? 어디에 마음을 팔았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삽시다. 호세아로 드러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사는 성도가 됩시다.
신앙인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진짜 성도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 참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면, 진정으로 그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도 이웃에게 나가서 하나님을 알자,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외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고마운데도, 이웃들이 그 사랑을 모른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며,
진정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