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사골
반선에서 화개재 9.2km
'검은별'을 아는 사람은 산 깨나 다닌 사람이다. '검은별'은 1990년대와 2000년대 등산인들 사이에 아이돌급 인기를 누린 등산인 황소영씨의 인터넷 닉네임이다. 1990년대부터 꾸준히 '검은별의 지리산 산행기'를 올렸고, 큰 인기를 얻었다. 지리산을 사랑하는 진정성 있는 글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월이 흘러 여행작가이자 유튜버로 거듭난 검은별의 지리산 이야기 연재를 시작한다. 지리산 구석구석을 애정 어린 눈길로 오래도록 누빈 장맛 같은 깊이를 기대한다. _ 편집자 주
맑은 물이 인상적인 이곳은 과거 멧돼지가 와서 목욕했다는 돗소다.
오래된 것들은 버려진다. 차마 버리지 못한 것도 많지만 한정된 공간에 모든 걸 놓아둘 순 없다. 오래된 기억도 마찬가지다. 간만에 지리산 책들을 거실 가득 펼쳤다. 머릿속에 헝클어진 산의 길과 계곡, 흙 내음을 소환하기 위해서였다. 오래전 지리산을 찾았던 그들이 남긴 기록은 여전히 펄떡대는 호흡으로 살아 있다. 기록은 사라지는 기억을 보완하는 좋은 장치다. 손으로 짚어 가며 몇 줄을 읽다 재빨리 배낭을 싼다. 빛바랜 사진 한 장이 훅, 가슴 한쪽으로 흘러든 까닭이다. 지리산. 오늘은 물길 시원한 뱀사골로 가야겠다.
천년송과 와운마을. 와운의 여인들은 이 나무 아래서 솔바람 태교를 했다.
이무기도 뱀도 죽어 나갔다
코로나 이후 시외버스 승객이 부쩍 줄었다.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버스 회사 입장에선 얼씨구나 배차를 줄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남원역 앞에 하루 6번, 정령치까지 가는 버스가 있는데, 다행히 그중 절반이 들머리인 반선을 지난다.
일반 버스보다 창문도 작은 25인승 버스. 그 작은 창으로도 지리산의 너른 품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뱀사골이 가까워질수록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계곡에 물은 적었지만, 물소리는 정규방송 끝난 옛 TV처럼 귀가 아플 정도로 우렁찼다. 깊고 너른 지리산 품에서 축복 같은 물줄기가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여기 왼쪽 골짜기가 뱀사골인데 소승이 쌍계사에서 송림사를 오갈 때 다니는 산길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단풍 경치는 달궁보다 뱀사골이 낫지요.'
반야봉 근처에 위치한 비밀의 암자 묘향대.
'예전엔 반선마을에도 꽤 사람들이 살았어요. 그런데, 해마다 호환이 생기다 보니까 다들 아랫마을로 내려가 버렸지요. 특히 호랑이는 여자를 좋아한다는데 여자를 먹고 나면 비녀밖에 남는 게 없다는 말도 있지요.'
기축옥사를 배경으로 한 최학의 장편소설 <고변>에 잠시 뱀사골이 등장한다. 2019년에 쓰였으니 작가 역시 구전을 토대로 이야기를 꾸몄을 터이다.
국립공원공단에서 세워둔 이정표에 뱀사골 지명 유래가 적혀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약 1,300년 전 뱀사골 입구에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매년 7월 백중날 스님 한 명을 신선바위에서 기도하게 했다. 그리고 그 스님들은 모두 다음날 사라졌다.
늦가을의 뱀사골. 떨어진 낙엽 옆으로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이걸 기이하게 여긴 한 스님이 그해에 뽑힌 스님 옷자락에 독약을 묻혔는데, 날이 밝고 신선바위에 가니 이무기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뱃속에는 스님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곳은 뱀이 죽은 골짜기라는 의미의 뱀사골이 됐고, 이무기의 제물이 되었던 스님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계곡 입구 마을 이름을 '절반의 신선'이란 뜻의 반선으로 지었다고 한다.
뱀사골엔 뱀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1970년대의 이야기다. 한 재벌은 버스 한 대 값을 주고 뱀을 샀고, 공급량이 딸려 가짜 뱀술까지 유통됐다고 한다. 스님을 잡아먹던 이무기의 후손들이 톡톡히 대가를 치렀던 시대였다. 하지만 요즘은 뱀탕을 먹으려는 사람도 없고, 땅을 보며 돌 밑을 헤치던 땅꾼들도 명맥이 끊겼다.
단풍철엔 피아골과 연계해 산행하는 것도 좋다.
구름도 누워 가는 산중마을 와운
계곡 데크길(뱀사골 신선길)은 와운교 앞에서 끝난다. 다리를 건너면 해발 800m에 위치한 '구름도 누워 가는' 와운마을이다. 이곳에는 할머니 소나무로도 불리는 천년송(천연기념물 제424호)가 있는데 이걸 보기 위해 트레킹하는 사람도 많다. 마을 아낙네들은 이 나무 아래서 솔바람 태교를 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1990년대 쓰인 뱀사골 관련 서적 어디에도 (적어도 내가 본 책들 중엔) 천년송 이야기나 태교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탕, 술, 찜 등으로 이 마을에서 운명을 달리한 뱀 이야기만 가득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무는 여전히 근엄한 자태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와운교 앞에서 행선지를 정해야 한다. 시간이 있다면 왕복 2km쯤 걸어 소나무를 보고 돌아와도 된다. 하지만 화개재를 지나 성삼재로 하산하거나 연하천대피소로 가려면 시간이 넉넉지 않다. 자, 와운으로 갈 것인가. 화개재로 갈 것인가. 아니, 산중암자인 묘향대를 지나 반야중봉 혹은 주능선으로 갈 수도 있고, 심마니능선을 오를 수도 있다. 물론 불법이다.
시원한 물줄기를 뽐내는 뱀사골. 귀가 아플 정도로 우렁차다.
와운마을에도 연하천대피소까지 닿는 등산로가 있다. '4년 전 겨울, 혼자 넘던 토끼봉 어드메서 너무 힘들어 걸음을 멈추고 하얀 능선에 몸을 눕힌 채 소리 없이 흩날리는 함박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20대 중반의 쓸쓸한 기억. 잿빛 하늘 가득 깊은 숨을 토해내던 그 겨울이 그리워, 나는 봄이 되기 전까진 지리산에 가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가 결국 입산 통제를 사흘 앞두고 그곳으로 떠나게 되었다'라고 2001년의 나는 기록하고 있다.
그해 겨울엔 어찌나 눈이 많이 내렸는지,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와운골을 타고 능선엘 올랐었다. 때론 눈 위를 엉금엉금 기어가기도 했다. 전날 출발한 한 사내는 결국 하루 종일 걸어도 연하천에 가지 못했다며 산 중턱 한쪽에서 비박했다가 우리를 만났다. 치밭목, 벽소령, 연하천 같은 산장에서 잘생긴 개를 키우던 시절이었다. 개 짖는 소리 덕에 대피소로 방향을 잡고 간신히 눈 속을 벗어났었다.
반선에서 와운마을까지는 왕복 약 5km 거리다.
그러고 보니 뱀사골에서 본류를 버리고 묘향대로 갈 때도 폭설이 쏟아졌었다. 가슴을 설레게 했던 눈은 이끼폭포를 지나면서 지긋지긋한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선두는 그리고 후미는 지금쯤 어디들 있는지 산자락 중간에 나 홀로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곧게 뻗은 길 위에 검은 그림자가 보인다. 휴우, 나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그러나 서둘러 가면 아무도 없다. 찬바람에 몸을 떠는 나무만 드리워 있을 뿐.'
장염을 막 털고 길을 나선 일행은 결국 종착지인 노고단대피소에서 탈진해 쓰러졌다. 그렇게 원 없이 쏟아지던 눈은 이제 이 높은 산에서도 귀한 몸이 되었다.
뱀사골 산행이 부담된다면 와운마을까지만 가볍게 다녀와도 좋다.
불법 토벌로 얼룩진 길
반선에서 화개재까지 약 9km에 달하는 뱀사골 계곡엔 석실, 요룡대, 탁룡소, 뱀소, 병소, 병풍소, 제승대, 간장소 외에도 선인대, 포암소, 단심폭포, 통천폭포 같은 이름이 더 있었다. 삼차나 막차 같은 지명도 있는데, 둘 다 산판도로와 관련이 깊다. 자유당 말기 때만 해도 뱀사골 곳곳엔 벌목 작업이 횡행했다. 후생사업이란 명목하에 무법천지가 벌어진 것.
전쟁 직후 폐허가 된 집을 다시 지어야 했고, 철도 침목을 만들거나 숯도 구워야 했다. 나무는 주로 큰 산에서 조달했고, 남원처럼 철도 이용이 편한 곳은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뱀사골 상류까지 찻길이 뚫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뱀사골 등산로는 비교적 넓고 무난하다. 폭포가 많지 않고 경사도 낮다. 하지만 길이가 길어 마냥 쉽지는 않다. 계곡미는 탁룡소에서 금포교까지가 절정이고, 간장소 이후론 투박한 돌길이 이어진다. 옛날엔 돌이 많은 상류를 '들돌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뱀사골은 태고의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남해의 소금과 해산물, 남원 내륙의 농산물을 지고 넘었던 주능선 화개재에서 아래로 200m, 뱀사골 최상단엔 초록색 지붕을 얹은 뱀사골대피소도 있었다. 1977년 무인 산장으로 지어져 버려지다시피 한 것을 10년 후쯤 유인 산장으로 탈바꿈했는데, 계곡 오염 등의 이유로 2007년 최종 철거됐다.
대피소를 헐어낸 자리에 무인 시설을 다시 지었지만, 그마저도 문이 잠긴 채 방치됐다. '어둠 깔린 새벽 산장 안엔 일찍 깨어난 일부 등산객들의 툭탁거리는 소리만 요란하다.' 1997년 9월, 나는 뱀사골대피소의 아침을 이렇게 적었다. 텅 빈 자리엔 잊힐 듯 잊히지 않는 추억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