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2)
이윽고 윤동주와 송몽규의 생가가 있는 화룡현 명동촌(明東村)에 도착한다. 명동촌은 ‘한반도를 밝힌다’라는 애국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단다. 사방이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고요하고 한적한 동네로 윤 시인의 조부가 지었다는 남향 기와집이다. 윤동주는 명동촌의 유복한 집안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지 명동촌은 그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데, 마을의 정신적 리더이자 목사인 외숙부 김약연은 민족지도자를 양육한 인물로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마을 입구에 김약연의 흉상이 서 있다. 고종사촌이면서 독립유공자인 송몽규, 민족주의자 문익환 목사도 명동촌 출신으로 윤동주와 함께 자랐다.
마을 안 골목길로 들어서는데 빨간 앵두가 유난히 많이 열려 있다. 탐스런 앵두를 한 움큼씩 따서 맛을 본다. 그 옛날 윤동주 선생도 이렇게 앵두를 따 먹었으리라. 별 모형의 높은 구조물이 보인다. 윤동주의 시에는 ‘별’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여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별은 여기서 이상과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
생가 안으로 들어선다. 여러 종류의 예쁜 꽃들이 방긋방긋 우릴 반긴다. 상당히 넓으면서도 비교적 보존 관리가 잘 되어 있다. 윤동주 부친은 당시 소학교(초등학교) 교사로 부유한 가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당 여기저기 그의 명시(名詩)들이 새겨진 시비(詩碑)가 서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序詩)’에는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지식인 윤동주의 고뇌가 있다. 도덕적 순결성에 대한 고뇌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현실의 어둠을 견뎌 내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았다.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했다. 이 시를 통해 우리 민족은 희망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 배웠다. 우리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며 애송하는 시가 바로 이 ‘서시’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다.
그 바로 옆에는 고종 사촌형제인 송몽규 생가가 있다. 그 집 입구에서 어느 할아버지 부부가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비롯하여 조선족 동포들의 생활상을 소개한 소책자들을 판매하고 있어 나도 명동촌 방문 기념으로 한 권 구입했다.
잠시 펼쳐보니 북한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이 많았고, 문체와 어투도 낯설었다. 하지만 낯섦이 더욱 정겹고 따뜻하게 느껴지고, 내용도 생소한 게 많아 더욱 흥미를 끈다.
우리가 이곳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 정부는 ‘윤동주 생가’와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폐쇄했다는 매스컴 보도가 있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적지 두 곳이 잇따라 문을 닫은 것이다. 폐쇄한 표면적 이유가 시설 보수 공사라지만 결코 아니다.
외교적으로 껄끄러워진 한·중 관계의 영향 때문이다. 중국의 동북 3성(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은 일제시대 우리 조상들의 항일 독립운동 근거지였다. 지금도 우리 민족의 뿌리가 있고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돌아오는 길에 차창 너머 저 멀리 산 위에 멋들어진 정자(亭子) 하나가 보이는데 항일의지의 상징 일송정(一松亭)이라 한다. 시간 관계상 차창 밖으로만 구경한다. 또 한참을 달리다 다리 건너편에 비석 하나가 보이는데 ‘간도 15만 원 탈취기념비’라 한다.
1920년 1월,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김강 등은 일제가 식민지 약탈 목적으로 한 철도 부설을 위해 자금 15만 원을 운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기습하여 자금을 탈취하였다. 이후 무장투쟁을 위한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밀정의 신고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조선은행 자금을 직접 탈취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높은 사건이다.
그리고 근처에 위치한 ‘3.13 반일 의사릉’을 직접 찾아간다. 1919년, 3.1운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 뜨거운 함성은 두만강을 건너 만주 지역에도 전해져 태극기 휘날리며 만세의 함성이 퍼져 나갔다. 이 들끓는 항일운동을 일제가 도외시할 리 없었다. 간도 일본총영사관에 이르러 가두시위가 격화되자 깃발을 빼앗고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했다. 순식간에 13명이 즉사하고, 30여 명이 중상을 입는 등 수많은 사상자(死傷者)가 발생했다.
그날의 함성과 비보가 만주 전역으로 퍼졌다. 북간도에서만 54회에 달하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날의 참상은 만주지역 항일운동의 성격을 바꾸어 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 일행은 그 의미를 되새기며 의사릉 앞에서 참배하고 사진도 찍는다.
두 시간 동안 달리고 달려 백두산 아래 첫 동네 이도백하에 도착한다. 이도백하(얼다오바이허)는 백두산 북쪽 비탈에 위치한 마을로 행정구역상으로는 진(鎭)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쑹화강 얼다오바이허 강변에 위치하여 이런 지명이 붙었다.
백화구 전동마을에서 가마찜과 오리요리로 냠냠 저녁식사를 한 후 금수학 호텔에서 1박을 한다. 백두산 기슭의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밤하늘 가득한 별들과 함께 색다른 추억을 만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