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
주급 20달러로 살아가는 가난한 젊은 부부 짐과 델라의 생활이 외형적으로는 너무 가난하고 연약하여 마치 물에 젖은 신문지처럼 눈만 흘기면 처질 것만 같이 보인다.
1주일 방세 8달러짜리 셋방에 사는 가난한 샐러리맨의 아내 델라가 남편 짐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 살돈은 불과 1달러 87센트가 전부다. 이 부부는 가난하게 살면서도 부부의 사랑이 너무나 진실하였다. 남편에게는 보물처럼 여기는 시계가 하나 있었는데 시계줄이 없었다. 아내 델라는 멋진 시계줄을 달아 조끼에 늘어뜨린 남편 짐의 모습을 보는 것이 평소의 소망이었다.
한편 남편 짐은 아내의 금발 머리에 예쁜 머리핀을 꽂으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일까 하는 것이 평소의 바램이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델라는 멋있는 시계줄을 사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같이 아끼는 머리를 잘라서 판다. 또한 남편 짐은 아내에게 아름다운 머리핀을 사기 위해서 소중한 시계를 판다.
징글벨 캐롤속에 두 사람은 상기된 얼굴로 선물을 줄때의 감동을 상상하며 마주 선다.
하지만 아름다운 머리핀을 꽂을 델라의 머리도, 멎진 시계줄을 달 짐의 시계도 두 사람에게는 없었다.
짐! 델라 !
『이 시계줄과 이 머리핀은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너무 훌륭하고 소중하여 당장 쉽게 사용할 수가 없군요!』
이 글을 쓰는 필자도 항상 얇은 월급봉투를 아내에게 내밀고 있다.
1주간 방세 8달러보다야 나은 생활이지만 식구 수에 비하여 넓지 못한 단칸방에서 카시미론 이불 하나에 다섯 식구가 들어가 잠결에 서로 이불귀를 당기면 우리부부중 한사람은 등이 나오고 어떤 놈은 발가락이 나와 생강처럼 오므라져 있었다.
다행히 부족한 중에서도 온 가족이 건강하여 이것저것 잘 먹고 부족함 탓하지 않고 웃고 살고 있으니 이것이 큰 행복 아닌가 !
지난번 내 생일 때는 애들이 용돈 모은 돈으로 양말 한 켤레와 붓을 한 자루 선물로 받았다.
아마 아내가 시킨 것이라 짐작이 된다.
그때의 찡하던 감동이 지금도 남아 있는 몽당이 붓을 보면 생각난다.
이것이 사람 사는 것이구나 !
이하 생략 -----------
위의 글은 약 35년 전 국민소득이 아마 3~4천불 되던 시기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된 교직자인 내 친구가 가정이 어려워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야간학교를 설립한 후에 교내 신문을 발행하면서 필자에게 글을 하나 써 달라고 부탁하기에 미국 단편 소설가 오 헨리(O. Henry) 의 단편소설 “현자(賢者)의 선물”을 읽고 독후감을 쓴 내용의 일부분 입니다.
어그제 막내아들이 고마운 분들의 축하 속에 혼인을 하고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지면으로 축하하여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혼기가 늦어서 내심 마음의 짐이 되었는데 귀한 규수가 내 아들을 구제 해준 것입니다.
병실 침대에 누운 어머니를 두고 입대 영장을 받고 열두 번도 뒤돌아보며 동작역을 향하던 철부지 막내가 어른이 되었습니다.
저는 자식들이 가정을 이루면서 부자로 살기 보다는 “현자(賢者)의 선물”에 나오는 부부처럼 서로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밥먹여 주나” 하는 유행어도 있지만 돈 많은 부부가 이혼하는 것은 보아도 사랑하는 부부가 밥굶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두 며느리가 아들과 교제중일 때 제 며느리될 아가씨들과 데이트를 각각 두 번씩 했습니다. 첫째 며느리는 반포 고수부지에서 두 번, 이번에 막내며느리는 보라매공원을 두 번 거닐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누는 대화 내용은 “현자(賢者)의 선물” 이었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했습니다. “오늘 나와의 데이트는 시아버지가 죽기 전까지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고 마음속에만 간직하여라”
예식장에서 저에게 인사를 하고 껴안으면서 “아버님 말씀대로 잘 살게요” 하였습니다.
신혼여행을 떠나고 하루가 지났습니다.
『어머니 힘드셨죠. 내일 출근 때문에 갈께요. 다음 주에 올께요.』
미혼이지만 독립시킨 큰놈도 둘째 놈도 다 저희들이 사는 구멍으로 돌아갔습니다.
또 밤이 찾아 왔습니다.
아내가 뒤척이어 잠을 깨었습니다.
새벽 두시 정도 되었을까요.
집안이 이상하리 만큼 조용했습니다.
마루로 나와 습관적으로 평소에 막내가 쓰던 방을 기웃거렸습니다.
숨 쉬는 소리하나 없이 괴괴할 만큼 고요합니다.
방에 슬며시 들어서서 불을 켰습니다.
침대가 텅 비어 있었습니다.
“회사일이 바빠서 밤을 새우며 아직 안 들어 왔나?”
--------! !
주인 없는 침대 끝에 가만히 걸쳐 앉았습니다.
눈앞에 요즘에는 찾기 힘든 오래된 철제 캐비닛 옷장이 있습니다.
실강대에는 빈 옷걸이만 걸려 있습니다.
항상 복잡에게 리드선이 엉켜있던 콘센트도 말끔합니다.
반쯤열린 캐비닛 문을 열어 봅니다.
삐꺽 하는 소리 속에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 인라인타실 때 땀이 식어 차가우면 이 방풍(防風) 등산복 입으세요.』
하고 남기고 간 푸른색 잠바입니다.
나도 모르게 코에서 긴 숨소리가 납니다.
『매일 노래하듯 정리정돈 좀해라』
하던 잔소리도 이제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왠지 한쪽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꼴딱” 하고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
3년전 손아래 동서가 딸을 시집보낼 때 눈시울을 훔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남의 일이라 그냥 “서운한가 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딸도 아닌 아들을 장가보냈는데 왜이리 허전할까요.
나는 주변머리가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식구 다섯과 한 번도 떨어져 살아 본적이 없습니다.
나는 늙어가면서 바보스럽게도 이것을 행복이라 생각했습니다.
거기다가 내 안사람이 건강이 좋지 못하여 20년을 병상 생활을 하는 동안에 우리 가족은 좋은 일 궂은일 격으면서 정서적으로 연대감이 있었습니다.
혼인도 모든 사람이 다 맞이하는 삶의 일상적인 연기(緣起)에 따른 순환(循環) 과정인데 나는 왜 축복받은 이날 밤 세상이 잠든 빈 방안에서 혼자 상념(想念)에 젖을까요.
나도 한 부모의 아들에서 가정을 이루어 세자식의 아버지가 된 것은 생각 못하고 새로운 가정을 만들기 위해 출발하는 또 하나의 천륜(天倫) 앞에 이런 청승을 떠는 것을 보면 나이만 먹었지 나사가 덜 조이고 모질고 다부지지 못한 덜 익은 인생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아내와 둘만 남았습니다.
왠지 34평 아파트 거실이 너무 넓게 느껴집니다.
온기 없는 빈방도 너무 냉정합니다.
가족 수에 비하여 공간이 너무 크면 인체의 기운을 빼앗긴다는 한의학적 기학론(氣學論)이 기억납니다.
아내와 의논하여 우리부부 잠잘 방 하나와, 한권 두권 모여 4000여권 된 손때 묻은 친구 같은 책은 버릴 수 없어 쌓아둘 공간 하나면 충분할 15~18평되는 집으로 옮길 생각을 합니다.
이제 앞으로 할 일은 기회 되는대로 무거운 것들을 버리고 가벼워지고자 합니다.
걸음도 천천히 걷고 앞이 가로 막히면 돌아가고, 철제 캐비닛도, 헌옷가지도 웬만한것은 다 버리고, 서운함도 바램도, 할 수만 있으면 내 마음 까지도 다
내려 놓고 싶습니다.
첫댓글 홀로, 외롭게, 가볍게 가는 길이 人生이라는데.. 몸소 실천하시는 것이 무척 좋아 보입니다.
그리고 농월선생님 섭섭합니다. 막내녀석 결혼식 전에 함 문래트랙에 오셔서 알려주셨더라면..
물론 선생님의 성격을 다소 좀 알아서 안하신 걸로 암니다만.. 그래도..
축하드립니다. 이제는 가까운 산이 있는 곳으로 이사하십시오. 공기 맑은데로요..
의료.문화혜택 때문에 시골로 가신다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무한한 싱글(자식다 지짝에게 보냄) 사모님과 함께 축하*^^*드립니다. 저는 언제?...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