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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 10 세상에 계셨으며 - 요 1: 12 영접하는 자
요 1: 10 세상에 계셨으며 -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사람으로 출생하여 세상에 계셨고 세상에서 약 33년 사셨다. 그러나 그는 실상 세상을 창조하신 자이셨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던 분이시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그가 없이 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요 1: 2-3).
그런데도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요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세상이 그를 몰랐던 것은 이 세상을 주장하는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 3-4에서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라고 말하였다.
1]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엔 토 코스코 엔)
1절에서는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면, 본문에서는 이 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기간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다는 사실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 창조 이후 성육신하기 전까지 영(靈)으로서 세상에 계신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Godet, Westcott).
Ⓑ 성육신부터 승천하시기까지의 예수의 생애를 가리킨다는 견해.
전자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뒷 문장에 착안한 견해인 반면에 후자는 9절의 말씀과 연관시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취할 수 있는 방편은 본 절의 문장을 중심으로 하고 9절과 11절의 연관 관계를 살펴보는 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본 절은 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의 본 문장을 일단 차치하고 본 절의 전체 의미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1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의 소유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10절과 11절은 문장의 전체 의미에 있어 일치한다.
그러므로 본 절의 처음 문장은 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9절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앞의 두 학설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2]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의 만물은 성 삼위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창조물이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단절은 하나님을 알아보는 데 어려움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상은 지으신 조물주를 알 수 없게 되었다.
3]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세상의 창조주이자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를 보여준다.
어둠에 잠긴 죄악 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
(1) 목수의 아들
* 마 13: 55 -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2) 귀신 들린 자에 불과하였다.
* 마 12: 24 -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 막 3: 22 -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더구나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도 예수를 기적 행위자 내지는 정치적 메시야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연상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함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알지'(*, 에그노)는 '알다'(*, 기노스코)의 3인칭 단수로서
(1) 감각적인 지각(*, 아이스다네서다이)
(2) 사물들에 대한 지식(*, 도케인),
(3) 선천적인 지식(*, 에이도)등을 나타내는 용어들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기노스코'는 후천적, 객관적 관찰로써 온갖 대상(사물, 인간, 불변하는 영원한 실재)에 대해 파악하는 지식까지도 포괄하는 용어이다. 특히 마 1: 25에서는 남녀 간의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구약성경의 뉘앙스(창 4: 1. 민 31: 17)를 살림으로써 이 용어가 인간 간의 긴밀한 관계를 통한 '앎'까지도 표현함을 알 수 있다.
* 마 1: 25 -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 창 4: 1 -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 민 31: 17 - 그러므로 아이들 중에서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아는 여자도 다 죽이고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이 용어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것이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도 '앎'이며, 예수와 성도들의 관계도 역시 '앎'이다(10: 14-15).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생명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길이다(4절. 5: 26. 17: 3).
이러한 '앎'은 사랑에 의해 평가되고, 사랑을 매개로 계속 유지된다.
* 요일 4: 7-12 –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결국 '알지 못함'과 '앎'은 '미움, 다툼'과 '사랑', 그리고 '영원한 심판'과 '영생'으로 귀결된다.
요 1: 11 자기 땅 -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예수께서는 자신이 만든 온 세상에, 특히 자신이 특별한 소유로 택한 유대 땅에서 탄생하셨다. 그는 마태복음 2: 1의 증거대로 헤롯 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그는 유대 땅에서 그의 생애를 보내셨다. 그러나 그의 백성 된 유대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복음서들이 증언하는 대로, 유대인의 공회는 그를 사형에 합당한 자로 정죄하였고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으로 넘겼다.
거기에서 유대인들은 지도자들의 충동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러 외쳤고, 마침내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게 하는 불의한 판결을 내렸다.
하나님의 옛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거절하였다.
1] 자기 땅에 오매
헬라어 '타 이디아'(*)는 '자기 자신의'(*, 이디오스)라는 형용사의 중성 복수형으로서 19:27에도 '자기 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자기 소유의 거처'를 가리킨다.
세상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거처이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되었고 사단의 세력이 흥왕(興旺)할지라도 세상의 궁극적 소유권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2] 자기 백성이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다.
* 창 18: 19 -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 신 32: 9 -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이 세상의 죄악을 감당하고 사탄의 권세와 싸울 제사장 나라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 출 19: 6 -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그러나 타락된 세상 속에 휘말려버린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본래 그리스도의 소유인 선민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극난하게도 십자가 처형을 자행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영광스런 특권을 상실하였다.
이와 같은 '소유'(*, 타 이디아)라는 관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예수의 제자들(13: 1)로 넘어간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특권은 영생과 아울러 영원한 것이다.
* 계 20: 6 -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이렇듯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신앙은 가혹하고도 잔인한 로마 제국의 박해에서도 더욱더 성도들을 강건하게 하였음을 볼 때, 현대의 물신주의(物神主義)와 기타 세속적 이데올로기(ideology)가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군사로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확신과 긍지를 소유함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3]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다'의 헬라어 '람바노'(*)가 주로 개인적인 영접을 의미하는 데 비해 본문의 '파랄람바노'(*)는 집단적 공동체적 영접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서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본문의 내용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특히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逃走), 유대 당국자들의 모의와 재판,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는 군중들의 함성,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군중들의 조롱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한편 저자 요한은 '깨닫지 못하더라.' (5절), '알지 못하였고' (10절), '영접하지 아니하였더라.'(본 절)라는 세 구절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이 세상의 죄악과 부조리(不條理)를 폭로하고 있다.
이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사 1: 3)라는 과거 이스라엘의 실상과 대동소이한 현상이다.
따라서 예수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 37)라고 탄식했으며, 스스로 선민이라 자부하던 자들을 '마귀의 자식이라 선언하셨다(8: 44).
요 1: 12 영접하는 자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1] 영접하는 자
원문상으로는 역접 접속사 '데'(*), '그러나'를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반응과 성도의 반응을 극명하게 대립시킨다(5, 10, 11절).
주지하다시피 11절의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가 집단적 공동체적 거부를 의미한다면, 본문에서 '람바노'의 3인칭 단수 부정 과거형인 '엘라본'(*)은 개인적인 영접을 시사한다.
즉 구원이 하나님과 개인과의 단독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저자 요한은 보여준다. 그리고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뢰하다'(trust)라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표현으로서, 한 개인이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어떤 신비적 주문을 외우거나 어떤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에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믿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 곧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가 주어진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자녀였으나 범죄한 후 마귀의 자녀가 되었다. 죄인들은 죄의 종들이며 마귀의 종들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라고 말씀하셨다(요 8: 44).
사도 요한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불렀고 그들을, 의(義)와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구별하였다.
* 요일 3: 10 -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2]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 문장은 자체 내에 파격(破格)구문을 가지고 있다. 즉 '아우토이스'(*, '자들에게는')가 선행 관계적을 서술하는 여격으로 쓰여져 있다. 이는 헬라어 문장에 아람어적 관용 어법이 침투한 경우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저자가 아람어 문화권과 헬라어 문화권의 양대 지류에 속한 상황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주(본서에서 27회) 발생하는 파격 구문인 것이다.
또한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서 그리스도를 '이름'으로 칭한 것도 히브리 전통에 입각한 아람어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을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믿는다'(*, 피스튜오)의 현재 능동태 분사 여격인 '피스튜우시'(*)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부터 끊임없이 계속되는 강력한 신앙'을 나나낸다. 따라서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생애와 그의 구원의 능력 그리고 그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믿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개인마다'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테크나 데우 게네스다이)이란 표현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영접한 자의 신분 규정이다.
즉 '어두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놀라운 변화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본문은 명시한다.
여기서 '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다이'(*)는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생겨나서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역사적 시점에서의 신분의 변화가 초역사적 지평에까지 열려져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녀'에 해당하는 원문은 출생과 직결되는 용어인 '테크논'(*) - 이와 유사한 의미로서 사용되는 '휘오스'(*)는 '상속자'라는 뜻을 내포한다(갈 4: 5-6) - 인바, 이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을 성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 갈 4: 5-6 –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러한 본질적인 변화를 통해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중생으로만 가능하다.
* 요 3: 3-9 –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 벧전 1: 3, 23 –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한편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권세'를 부여받음이다. 여기에서 '권세'란 헬라어로 '여수시아'(*)이다.
'여수시아'는 성경에서 주로
(1)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나타낸다.
* 눅 12: 5 -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 골 1: 13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부여해주신 절대적인 권한과 힘을 나타낸다.
* 요 17: 2 -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 마 28: 18 -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막 2: 10 -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 막 3: 15 -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 눅 4: 36 -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 도다. 하더라.
성도는 이와 같은 권세를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는다.
* 고후 10: 8 -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 계 22: 14 -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따라서 이와 같은 권세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죄와 어둠의 세상에서부터 자유롭게 됨을 의미하며, 이 자유로운 권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에 사용되어야만 한다.
* 고전 9: 12, 18 –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하나님 자녀의 특권은 참으로 귀하다. 부모는 자녀의 영광이다.
* 잠 17: 6 -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귀한 부모의 자녀들은 부모의 존귀를 함께 누린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녀들의 존귀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영광스럽다. 그것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이다.
또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과 언제든지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과 응답하심을 받아 누린다. 그들은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 17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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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잃고 오는 세상을 얻습니다.
💖오늘 하루도 삶이 잔잔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은 쉽게 성내지 않고 쉽게 흥분하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고요했으면 좋겠고,
괴롭고 슬픈 일이 있어도 표 내지 않고 혼자 간직하다 이내 평온해지는
그러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즐겁고 좋은 일 많은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잃고 오는 세상을 얻습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잃고 오는 세상을 얻습니다.
너무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