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13. 큐티
마태복음 9:9 ~ 13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관찰 :
※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시고, 바람과 바다를 다스리시며, 영적인 세계를 통치하시는 주님이 죄를 사해주시는 권세가 있으심을 증거한 마태는 이제 자신이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시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 마태
- 9절.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 마태는 레위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웠습니다(막 2:14; 눅 5:27). 레위 지파이기에 레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패오가 레위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모르고 아들에게 그 이름을 지어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레위지파는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지파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을 섬기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특별히 세움을 입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레위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마태가 하나님을 향하여 구별된 삶을 살 것을 기대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이 갖는 것과는 장반대의 길을 걸어온 마태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레위는 백성에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탐욕에 의해 동족을 고통스럽게 하는 세리의 자리에 앉아있었던 것입니다.
- 예수님은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주님은 마태에게 매우 단순 명료한 부르심을 베푸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주님은 마태의 갈등과 번민을 아셨던 것이다. 동족을 사랑하지만 동족의 등을 쳐서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지 못한 자신의 삶에 대한 번민이 있었던 자가 마태였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는 이 주님의 명령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2) 마태의 반응
- 10절.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 마태는 자신의 집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그 자리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더불어 함께 했습니다. 마태의 의도는 자신이 얻은 구원을 증거하고자 함이었을 것이고, 그 자리에 자신의 동료들을 불러 모은 것입니다. 그 자리는 부담스러운 자리였을 것이지만 예수님은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잡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들과 교제하시면서 천국 복음을 증거하셨을 것입니다.
- 마태는 자신이 받은 은혜로 인한 기쁨이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쁨으로 알고 그것을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3) 바리새인들의 반응
- 11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 바리새인들이 왜 마태의 집까지 따라와서 예수님의 행적을 지적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은 좋은 시비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낫고 자신의 침상을 들고가는 것을 목격한 이들은 감히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시비를 걸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힐난을 하고 있습니다.
- 바람과 바다를 다스리시고, 군대 귀신도 다스리시고, 중풍병자도 낫게 하시는 분이 하시는 일에 대해 신뢰가 아닌, 경외가 아닌, 힐난의 자세와 태도를 보이는 이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죄가 이들의 눈과 귀와 마음을 닫아 놓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4) 예수님의 반응
- 12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 13절.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의원은 병든 자에게 쓸 데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부드럽게 훈계하시는 방법을 선택하고 계십니다. 엄히 혼내셔도 될 일이지만 이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깨달을 자들이 아니기에 교훈을 주시는 방법을 선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깨닫게 되는 기회를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호세아 6:4~11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주시는 교훈입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아는 참된 지식에서 우러나는 사랑,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참 사랑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고, 이런 내용이 빠진 형식적 제사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은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의 가르침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행위로 구원에 이르겠다는 바리새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메시지였음이 틀림없습니다.
-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 너희들도 결코 의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는 한 주님이 부르시는 구원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엄중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자신들을 의롭다고 생각한 바리새인들의 가장 큰 착각에 대해서 주님은 이제 교훈이 아닌 경고를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가르침 :
1) 마태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 자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돌이키게 된 기쁨으로 자신의 동료였던 세리들과 기타 죄인들이라 자신을 인정하는 자들을 불러모아 잔치를 벌이고 간증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를 배설했습니다. 이 은혜의 자리에 그 자리가 그런 은혜의 자리인줄도 모르고 도리어 그러한 모임이 의롭지 못하다고 지적하기 위해 참석한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은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들을 위하여 주님이 오셨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자신이 죄인임을 진실하게 고백하는 이가 참된 구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세상의 죄악에 대해서도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의 구원하여 주심이 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교만은 언제나 패망의 앞잡이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경건생활이야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것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최선이 의라고 스스로 규정한 그 착각이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엄한 경고를 듣지 못하는 교만의 나락으로 빠지게 만든 것입니다.
3)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주님 앞에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자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통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적용 :
1) 주님은 오늘도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나는 주님 앞에 부족하고 더러운 죄인에 불과한 자입니다. 어찌 주님 앞에서 내가 잘난 것이 있다고, 잘한 것이 있다고 뻐길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도 그저 무익한 종이 할 일을 했을 따름인 것이고, 대부분의 것들은 죄에 물들어서 부족하고 더러울 따름임을 고백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주님은 그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나는 오늘도 그 은혜를 사모합니다.
2) 주님의 은혜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제 삶의 진정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갈망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동행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