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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지 [列國誌] 669
■ 2부 장강의 영웅들 (325)
제10권 오월춘추
제 41장 춘추(春秋), 덧없는 사라짐이여 (1)
- 해냈다! 마침내 오왕 부차(夫差)는 꿈에서 조차 그리던 맹주가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월왕 구천(句踐)이 침공해와 오(吳)나라 영토를 유린하고 있지 않은가.
세자 우(友)까지 죽었다고 했다.하루 빨리 귀국하여 오성(吳城)을 구하고 월군을 박살내야 했다.
'이놈, 구천아. 어디 두고 보자!'회맹이 끝나자마자 오왕 부차(夫差)는 부리나케 황지 땅을 떠났다.
제수(濟水), 기수(沂水), 회수(淮水), 장강(長江)으로 이어지는 수로로 접어들어 밤낮 없이
배를 몰았다. 미처 배를 타지 못한 병사들은 강안(江岸)을 따라 열심히 달렸다.
이때쯤 해서는 오나라 군사들도 월군(越軍)의 침공 사실을 알았다.
마음은 조급했고 사기도 떨어졌다. 더욱이 그들은 2천 리가 넘는 먼 길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칠 대로 지쳤다.그런 상태에서 오군은 오성 교외에 당도했다.
부차(夫差)는 그때까지도 월군을 깔보고 있었음인가.다짜고짜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월군(越軍)은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다.
수영에 능한 2천 수군이 물밑으로 헤엄쳐나가 오(吳)나라 전함의 바닥에 구멍을 내었다.
가뜩이나 사기가 떨어져 있던 오군(吳軍)은 가라앉는 배를 보고 완전히 싸울 의욕을 잃었다.
오성(吳城) 교외에서 한 차례 큰 싸움을 벌였으나 결과는 오군의 대패였다.
비로소 사세가 여의치 않음을 알게 된 부차(夫差)는 화평을 맺어서라도 이 위기를 넘겨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급히 백비(伯嚭)를 불러 호령했다.
"그대는 늘 월(越)나라가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해왔소. 그런데 이것이 무엇이오?
구천(句踐)이란 놈 때문에 우리 오(吳)나라가 멸망 직전에까지 이르지 않았소?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이 다 그대 책임임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백비(伯嚭)는 입이 열 개 있어도 말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저 고개만 숙인 채 처분만 기다렸다. 부차(夫差)의 호령은 계속되었다.
"그대는 지금 당장 구천에게로 가 화평을 청하시오! 만일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과인은 그대에게 촉루검을 내리겠소."촉루검을 내리겠다는 말은 곧 자결을 하라는 뜻이었다.
백비(伯嚭)는 질겁했다.황급히 황금과 보물을 싸가지고 월군(越軍) 영채로 달려갔다.
10여 년 전 문종(文種)이 그러했듯 이번에는 백비가 구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애걸했다.
"대왕께서 군사만 거두어주신다면 지난날 월(越)나라가 오나라에 복종했던 것과 같이 앞으론
우리 오(吳)나라가 월나라에 대해 복종하겠습니다."
구천(句踐)은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린 백비를 내려다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얼마나 기다려온 이 날이던가.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통을 과연 어느 누가 알아줄까.
그는 화평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대로 백비를 참수하고 부차의 진영으로 밀고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구천(句踐)이 두 눈을 부릅뜨며 백비에게 호통을 치려 할 때였다.
곁에 서 있던 범려(范蠡)가 재빨리 구천에게 속삭였다.
"아직은 우리 전력으로 부차(夫差)를 완전히 제압할 수 없습니다. 오나라 정병이 돌아온 이상
승패는 반반입니다. 모험을 하느니보다 차라리 화평을 맺어 백비에게 생색을 내게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 당분간은 오(吳)나라가 힘을 쓰지 못할 터이니, 그 동안 왕께서는 좀더 군세를 확장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간(諫)했다면 아마도 구천(句踐)은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그러나 범려라면 구천과 함께 오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하며 온갖 고난과 멸시를 감내해낸
사람이 아닌가.누구보다도 오(吳)나라에 대해 원한이 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장의 보복을 만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범려(范蠡)의 판단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구천(句踐)은 범려를 자신보다 더 신뢰하고 있었다.-믿자, 범려를 믿자.
구천은 타오르는 복수의 불길을 억누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오나라의 화평을 받아들이겠소."마침내 오왕 부차(夫差)와 월왕 구천(句踐) 사이에는 강화가
맺어졌다.이제 또 한 시대를 마감할 때가 왔다.
오, 월 화평조약이 맺어진 이듬해는 BC 481년(오왕 부차 15년, 월왕 구천 16년)이다.
그 해 노(魯)나라에는 춘추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하나의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이 해는 노애공(魯哀公) 14년이기도 하다.
어느 봄날, 노애공(魯哀公)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대야(大野)라는 곳으로 사냥을 나갔다.
대야는 거야(鉅野)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지금의 산동성 거야현 동쪽 땅이다.
그 날 숙손씨의 가신 중 수레를 관리하는 서상(鉏商)이라는 사람이 이상한 짐승 한 마리를 잡았다.
그 짐승은 몸통이 노루 같았고, 꼬리는 쇠꼬리 같았고, 머리에는 뿔이 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짐승인지 몰라 불길하게 여기고 목을 찔러 죽였다.
사냥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짐승의 시체를 공자(孔子)에게 가져다 보이며 물었다.
"이것이 무슨 짐승입니까?"공자가 자세히 들여다본 후 대답했다."이것은 기린(麒麟)이다."
사람들이 돌아간 후 공자(孔子)는 하늘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했다."아, 이제 나의 진리는 끝났도다!"
공자는 제자들을 시켜 죽은 기린을 땅에 묻어주었다.
오늘날도 거야 땅 옛 성터에서 동쪽으로 10리쯤 가면 둘레가 40여 보쯤되는 무덤처럼 생긴
토대(土臺)가 있다. 사람들은 이 흙무더기를 '획린퇴(獲麟堆)'라고 부르고 있다.
바로 공자가 기린을 묻은 곳이다.공자(孔子)는 기린을 묻고 나서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지어 불렀다.
밝은 임금 태어나니
기린과 봉황이 와서 노니는구나.
그러나 오늘날은 그런
태평시절이 아니거늘
너는 무엇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나왔느냐.
기린이여, 기린이여!
내 마음 몹시 우울하구나.
이때부터 공자(孔子)는 서재에 틀어박혀 노(魯)나라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노은공(魯隱公) 원년(BC 722년)을 시작으로 242년간의 일을 기록했다.
이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춘추(春秋)>다.
<춘추(春秋)>는 역사책이긴 하지만, 공자(孔子)는 단순히 역사 이야기만을 전달하기 위해
저술에 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정신을 이 책에 불어넣었다.
- 후일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이 글을 보면 몸을 떨리라!이런 마음으로 붓을 들었다.
옳은 것은 옳다고 쓰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썼다.
일체의 타협도 하지 않았고, 추호(秋毫)의 거짓도 기록하지 않았다.
오늘날 바르고 곧은 글이라는 뜻으로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는 말이 쓰여지고 있는데,
이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670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670
■ 2부 장강의 영웅들 (326)
제10권 오월춘추
제 41장 춘추(春秋), 덧없는 사라짐이여 (2)
공자(孔子)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혼을 불살랐다. 하지만 그도 끝없이 무너져가는 어지러운
사회상을 보고 절망했음인가.불현듯 붓을 놓았다.<춘추(春秋)>의 맨끝 기사는 이러하다.
서수(西狩) 획린(獲麟) - 서쪽으로 나가 사냥하여 기린을 잡다라는 뜻이다.
현존하는 <춘추(春秋)>는 그 뒷부분이 더 있으나 그것은 공자의 제자들이 이어서 쓴 것이다.
공자가 쓴 <춘추>의 마지막 구절은 '획린(獲麟)'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기린(麒麟)은 당시로서는 매우 구경하기 힘든 짐승이었다.
그래서 진수(珍獸)라고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의미심장한 상징이 담겨 있다.
공자(孔子)는 자신을 기린에 비유했음에 틀림없다. 자신이 이루려고 하는 사상과 정신은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진귀한 보배가 아니겠는가.그런데 사람들은 그 기린(麒麟)마저 잡아죽였다.
자신의 사상과 정신은 죽었다.아아, 통탄할 일이 아닌가.그는 회생할 수 없는 절망을 보았다.
'더 이상 희망은 없다.' 공자(孔子)는 기린 잡은 기사를 마지막으로 붓을 던졌다.
이로써 '획린(獲麟)'이란 말은 '붓을 놓다' 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고, 나아가 '절필(絶筆)'이라는
뜻을 내포하게 되었다.또한 <춘추>를 일러 '인경(麟經)'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공자와 기린의 인연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미 공자(孔子)가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 징재(徵在)는 기린에 대한 꿈을 꾸었다.
앞서도 기술했듯, 꿈속에서 기린은 옥척(玉斥) 하나를 토해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수정(水精)의 아들은 쇠약한 주(周)나라를 계승하여 소왕(素王)이 되리라.
소왕이란 무늬 없는 옷을 입은 왕, 즉 지위 없는 왕을 뜻한다.
공자(孔子)가 성인(聖人)이 될 것임을 예언하는 꿈이라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주평왕(周平王) 이후 동주(東周)시대를 '춘추시대' 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 <춘추(春秋)> 라는
책에서 비롯되었다.물론 <춘추>의 첫 시작인 노은공(魯隱公) 원년과 동주시대를 연 주평왕(周平王)
원년(BC 770년)과는 48년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춘추시대'는 이 기간을 다 포함하고 있다.
이리하여 '춘추(春秋)'는 세월 혹은 역사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춘추시대의 끝 또한 엄밀히 얘기하면 '획린(獲麟)' 을 한 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평왕 원년부터
'획린'의 해까지는 290년째가 된다.그러나 기린(麒麟)을 잡은 해를 춘추시대의 끝으로 삼는 것은
어딘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대체로 사람들은 춘추시대의 끝을 이 해로부터 만 8년 후에 일어나는
BC 473년의 '오나라 멸망'으로 잡고 있다.또 어떤이는 그보다 더 내려가 진(晉)나라가 위(魏), 한(韓),
조(趙) 삼국으로 분열되어 독립국으로 인정받았을 때인 BC 403년으로 삼기도 한다.
<춘추>를 쓰기 시작한 지 2년 뒤, 공자(孔子)는 마침내 그 생을 마쳤다. 이때 그의 나이 73세.
공자는 자신이 활동했던 당대에는 그다지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공자(孔子)의 사상이 널리 꽃피우게 된 것은 한대(漢代)에 들어와서이며, 이후 그의 행동과 말과
서적과 정신은 2천 년이 훨씬 넘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의 생활과 마음속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한 사신은 공자의 생애와 업적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공자, 성인으로 탄생하시어
궐리(闕里) 땅에서 덕을 기르셨도다.
칠십 평생 학문을 연구하시고
사방에 이치를 밝히셨도다.
행동과 삼가함을 두루 통찰하셨으니
협곡(夾谷)에서 이를 실천하셨도다.
봉황이 날지 못하매 탄식하셨고
기린이 죽으매 슬피 우셨다.
구강(九江)이 우러러 거울로 삼고
만고에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도다.
제자들은 공자(孔子)를 곡부 땅에 장사 지냈다. 무덤의 크기를 1경(頃)으로 하였다.
경은 밭을 세는 단위로 지금으로 환산하면 약 2만 평이다.
공자의 위대함을 날짐승들도 알았음인가.
공자(孔子) 무덤 근처의 나무에는 새들도 일절 둥지를 틀지 않았다.
한대(漢代)이후 역대 황제들은 공자를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봉했다.
어머니 징재의 태몽대로 '지위 없는 왕' 에 오른 것이다.
청(淸)나라 때에는 '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 라고 불리었다.
오늘날은 공자를 일러 '대성(大聖)' 이라고 부르고 있다.
노(魯)나라 사람이 기린을 잡은 그 해, 제(齊)나라에서는 또 한 번의 반역이 일었다.
재상 진상(陳常)이 제간공(齊簡公) 및 유력 귀족들을 죽인 것이었다.
진상은 제간공의 동생인 공자 오(鷔)를 군위에 올려세웠다.
그가 제평공(齊平公)이다. 그러나 제평공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제나라 정권은 모두 진상(陳常)과 그 일족에게로 돌아갔다.
심지어는 조그만 마을의 수장까지도 진상에 의해 임명될 정도였다.
이때 진상(陳常)은 기괴한 방법으로 진씨 종족을 번식시켰다.
즉 자신의 집 뒤에 커다란 별채를 만들어놓고 키가 7척 이상 되는 여인들을 1백여 명을 뽑아
기거케 하였다.그리고 진씨(陳氏)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방에 들락거리게 하여
여인들과 관계를 맺게 했다. 이리하여 수년 후에는 이 여인들에게서 태어난 아들만도 7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거구로 성장하여 모두 제(齊)나라 대부 벼슬에 올라 주요 요직을 차지했다.
진상의 아들 대에 이르러 진씨는 성(姓)을 전씨(田氏)로 바꾸는데, 진상의 증손자 전화(田和)는 태공망의
후예인 강씨 임금을 폐하고 스스로 제나라 임금에 오른다.
이때부터 제(齊)나라 임금의 성(姓)은 전씨(田氏)가 된다.
당시의 정서로 볼 때 이 역성 쿠데타는 매우 보기 드문 일로서, 그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기반이 이미 진상(陳常) 대에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같은 해, 위출공(衛出公)도 그 아버지인 괴귀(蒯瞶)에 의해 축출당하고 제나라로 망명했다.
이로써 괴귀는 마침내 위나라 군위에 올랐다. 그가 위장공(衛莊公)이다. 아들의 뒤를 이어
아버지가 임금에 오른 묘한 계보(系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위장공(衛莊公)은 재위 3년 만에 백성들의 반란에 의해 북융(北戎)으로 달아났고,
이후 1년간의 혼란 끝에 제나라에서 위출공이 다시 돌아와 복위했다.
공자(孔子)가 죽은 다음해인 BC 478년.이번에는 초(楚)나라가 진(陳)나라를 쳐 아예 멸망시켜버렸다.
이로써 진(陳)나라는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때 초나라 임금은 초소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초혜왕(楚惠王)으로서 재위 11년째였다.
671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