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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부터 5편(完)까지 구성되어있는 단편이며 중간에 번외편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 - 로젠의 다리 :: 01
[ 부제 :: 거꾸로 흐르는 시간 ]
「2008年 1月」
'RRRRR-'
'RRRRRRRRR-'
잠결에 내 귓 속에 귀를 찢는 듯한 듣기 싫은 소음이 파고들었다.
나는 그 기계음을 무시하고 다시 눈을 감았지만, 쉬지않고 울려대는 탓에 결국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었다.
"아씨 누구야. 이 새벽에"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십원짜리 욕을 겨우 집어넣고 집 전화가 있는 책상위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강아지 초코녀석을 손으로 들어올려 안고는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여보세요."
짜증 가득한 내 목소리. 그리고 잠시 뒤, 나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져버렸다.
내 가슴팍에서 바둥거리던 초코녀석을 던지듯 떨어트려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그대로 주저 앉아버리자 책상위에 있던 전화기가 우당탕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바닥을 짚고 있던 손 등위로 후두둑 먼저 차가운 액체가 흘러내렸고 나는 무의식중에 그 액체를 털어냈다.
"민로마씨! 얼른 청화병원으로……."
수화기에서 나온 다급한 듯한 어느 여자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이 들어 벌떡 일어났다.
어, 어디로 가야하는거지.
정신을 차리지못하고 제자리에서 잠시 방황하다가 책상위에 놓여있는 휴대폰을 들고 무작정 뛰쳐나갔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내 몸 곳곳을 찔러대는 차가운 바람들에 의해 나는 몸을 잠시 움추렸다.
하지만 '춥다'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채 정신없이 길가로 뛰어들었다.
1월의 하늘은 아직 캄캄하고 별은 죽은듯 빛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는 탓에 주변이 모두 어두웠다.
칼바람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듯, 나는 그 바람을 맞고 조금은 휘청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택…택시!!"
허공에는 비명에 가까운 내 고함소리가 울렸지만, 그 무엇 하나 되돌아 오는 반응은 없었다.
헤드라이트를 켠 채 빠르게 달리는 차 한 두대가 지나가고 저기 멀리서 또다른 빛이 다가왔다.
택시…였다.
나는 도로로 뛰어내려와 미친듯 손을 흔들었고, 택시는 내 바로 앞에서 급정거했다.
"아니, 이 아가씨가 미쳤나!"
평소같으면 택시기사를 향해 십원짜리 욕을 해댔을 나였지만,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신없이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에 타자마자 특유의 택시냄새가 확 풍기고, 마침 따뜻한 히터를 틀어놓은 듯 공기가 매캐하게 느껴졌다.
내가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나를 한번 훑어본 택시기사는 어이없다는 듯 운전대를 잡았다.
"청…청화병원. 청화병원으로가요! 지금 빨리!!"
나의 큰 목소리에 후덕한 체형의 택시기사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급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택시가 빠르게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나는 계속 내 앞을 흐리는 눈물들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택시기사는 앞을 주시하다가 나를 힐끔쳐다본다.
"저, 아가씨. 병원에 무슨 일 있는거야?"
"……."
"지금 정신없어서 모르겠지만, 뭐 다른 사람 연락 할 땐 없는지 잘 생각해봐."
아저씨의 말을 무시하다가 '다른 사람'이라는 말에 나는 손바닥에 땀나도록 꽉 쥐고있던 휴대폰을 열었다.
다른 사람이라는 말에 나는 왜 하필이면 그가 생각난걸까. 왜 하필이면 그의 번호를 눌렀던 걸까.
한참의 신호음 끝에 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의 그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비호야!"
"……."
"비호야. 비호야."
비호의 이름을 내 입에서 내뱉자마자 다시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비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 어떡해…… 나 어떡하면 좋아."
나의 울음섞인 목소리를 들은건지, 한참동안의 공백 뒤에 비호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있니?"
"울엄마랑… 아빠랑… 어떡해……."
비호의 무슨 일 있냐는 그 말이 고마워져서, 아니 더 서러워져서 더이상 나는 말을 잇지못하고 계속해서 펑펑울어버렸다.
택시가 어느 곳에 정차하고, 택시기사가 나를 쳐다보았다.
"아가씨 청화병원 다 왔는데……."
"엉엉엉……."
"아가씨 청화병원이라니까!"
나는 휴대폰을 붙잡고 정신없이 울다가 아저씨의 말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병원앞에 도착해있었다.
나는 스프링에 몸이 튀듯 택시에서 빠져나와 병원 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휴대폰은 그대로 택시에 떨어트린 것 같다.
정신없이 하얀 병원 내부를 둘러보다가 차트를 들고 빠르게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았다.
"교통……사고. 방금 교통사고로 들어온 사람들 어,어디있어요?"
내 말에 그 간호사는 두 눈이 커지며 내 차림을 한 번 보더니 나를 붙잡고 어딘가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응급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곳으로 나를 데려간 간호사는 카운터로 보이는 곳에서 무작정 종이에 싸인을 하라고 닥달했다.
나는 정신없이 종이를 들여다 보다가 볼펜을 들고 어느 빈 칸에 싸인을 했고,
그 종이에는 검은 활자로 「수술 동의서」라고 쓰여있었다.
그리고 간호사는 그대로 나를 내버려두고 어딘가로 달려갔고, 나는 흔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추스르고 그 간호사 뒤를 따랐다.
간호사가 간 곳엔 두 세명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둘러 싸고 있는 곳이었다.
"선생님! 보호자가 싸인했어요!! 얼른 수술실로……."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그들은 침대를 끌고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들을 따라가려다 그 곳에 남은 한 간호사를 붙잡았다.
"우리……엄마, 아빠는요? 네?"
그 간호사는 나를 보곤 아, 하고 짧게 신음을 내더니 곧 표정변화를 지우곤 무표정하게 답했다.
"이지혜씨는 방금 수술실로 옮겼고, 민기태씨는…… 사망하셨습니다."
나는 그 마지막 말에 그대로 정신을 잃은 것 같다.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 - 로젠의 다리 :: 02
[ 부제 :: 거꾸로 흐르는 시간 ]
나는 쥐죽은 듯 조용한 어느 공간에 누워있는 채로 눈을 떴다. 아무 생각없이 하얀색 천장을 쳐다보고 있다가
병원 냄새가 훅, 하고 내 코를 덮치자 여기가 병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나는 누워있던 하얀색 시트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팔에는 투명한 링거가 연결되어 있었고 그것을 뽑으려다가 말고 내 옆에 누군가가 얼굴을 파묻고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 뒷통수는 친구 민예가 분명했다. 나는 민예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민예야! 안민예!!"
내가 흔드는 것과 동시에 민예는 벌떡 고개를 쳐들었고, 아직 잠에 덜 깨 정신이 없는 듯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나를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마야!! 괜찮아?"
민예는 내 손을 덥썩 붙잡았고, 나는 민예의 말에 내 옷차림이 병원복차림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내가 왜 여기있는거지……?
"너, 기절했었어."
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내 마음을 읽곤 답해 준 민예를 쳐다봤다. 민예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이 기집애야. 너 튼튼하다며, 끄떡도 없다며 왜 이러고 있어. 이 바보야."
나는 민예의 눈물을 처음 본다. 민예는 항상 강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늘 우는 건 나였고, 달래는 건 민예였다.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민예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그리고 민예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한 이 병실에서 나는 혼잣말하듯 물었다.
"엄마… 아빠는…?"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런 내 목소리를 들은 민예가 조금 당황한 듯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시계를 쳐다보는 듯 하더니, 내 손을 꽉 잡았다.
"민로마. 너 혼자 아냐. 나두 있구……."
"그런 말 말고, 엄마 말야. 아빠말야."
민예의 말을 중간에 짤라먹은 나는 조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민예를 향해 쏘아붙이듯 말했다.
민예는 그런 내 모습에 다시 한번 울음을 삼키고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가보자. 엄마랑… 아빠한테……."
나는 민예의 말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두 발이 닿는 순간 확하고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벽을 짚고 겨우 섰다.
여기서 아픈 것 처럼 보이면 민예는 가지 않을 게 뻔하니까.
내가 벽을 짚고 서서 바닥에 놓인 슬리퍼를 신는 동안 민예는 옆으로 돌아가서 링거를 끌고 나왔다.
"안괜찮지 너?"
"괜찮아."
"얼굴이 질려있는데, 뭐가 괜찮아 이 바보야!"
민예가 다시 울먹거리며 소리를 질러버렸다. 하지만 나는 민예가 옮겨 온 링거가 걸려있는 쇠 기둥을 움켜잡았다.
"소리지르지마. 그럼 나 더 아플 것 같단말야."
내 말에 민예는 두 눈을 막 비벼서 눈물의 흔적을 지우더니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섰다.
그리고 내 팔을 잡고 부축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바닥에 조금 흔들리는 걸 느꼈지만 그렇지 않은 척 크게 한 보폭을 떼어냈다.
민예는 얼른 내 앞으로 와 병실 문을 열어 주었고, 병원 특유의 크레졸 냄새가 더 심하게 났다.
나는 잠시 숨이 막혀 작은 기침을 토해냈고, 밝다 못해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형광등 불 빛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잠시 여기 있어. 간호사 언니한테 뭐 좀 물어보고 올게."
민예는 나를 잠시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다가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나를 병원 벽에 기대게 해놓고는
간호사들이 앉아있는 카운터로 달려갔다. 그리고 1분도 안되어 다시 달려오더니 다시 내 옆에 섰다.
"이제…… 가자."
조금 뜸들이는 듯 하던 민예가 다시 나를 부축했고, 나는 다시 민예를 따라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이제 더이상 땅은 울렁거리지 않았고 형광등 불 빛에도 눈을 똑바로 뜨고 앞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조금 나아 진 것을 보이자 민예는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왜?"
"너, 다시 쓰러질까봐."
"안그럴거야. 나 튼튼하니까."
"……."
내 말에 민예는 어이가없다는 듯 내 병원복 차림을 훑어보곤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그런 민예의 손을 잡고 민예가 이끄는 곳으로 조금 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엘레베이터를 타더니 지하층을 눌렀다.
그리고 지하 층의 버튼 옆에 조그맣게 붙어있는「장례식장」이라는 글자. 나는 그 글자를 보고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민예는 그렇게 떨리는 내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엘레베이터의 숫자는 하나씩 빠르게 떨어지고 곧 지하층에 도달했다.
긴 복도를 민예의 느린 걸음을 따라「제2실」이라는 곳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친척들의 얼굴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친척들은 모두 나를 보자마자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손을 잡아주셨다.
"로마야. 가서 어머니, 아버지께 인사드리렴."
평소 나와 친하게 지내던 막내 이모의 말에 나는 친척들의 손을 놓고 건조한 얼굴로 천천히 작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 곳엔 엄마, 아빠의 따뜻한 미소를 담고 있는 영정사진이 놓여있었다.
"엄마……아빠아……."
나는 엄마와 아빠의 사진을 향해 걸어나가다가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 버렸고, 내 두 눈에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주체 할 수 없을 만큼의.
아인슈타인 - 로젠의 다리 :: 03
[ 부제 :: 거꾸로 흐르는 시간 ]
친척들의 도움으로 삼일장을 무사히 끝내었다. 엄마와 아빠는 평소의 바람대로 납골당으로 모셔졌다.
그렇게 정신없던, 복잡한 장례 절차를 마치고 나는 우선 학교에 휴학을 내기로 했다.
나 혼자 힘만으로 대학을 제대로 다니기엔 빠듯한 건 사실이니까.
오랜만에 나온 학교는 내가 몇일 간 세상을 보지 않은 동안 내린 하얀 눈으로 덮여있었다.
차가운 눈 냄새가 난다.
"너 휴학 꼭 안내도 되잖아. 넌 장학금도 받고있구 부모님 앞으로 나온 돈도 있구."
휴학에 대한 서류 절차의 설명을 듣고 휴학서를 제출하고 나오는 길, 오늘 강의가 있었던 모양인지 민예가 나를 찾아왔다.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푹푹 내쉰다.
"민예야. 돈 문제가 아니야."
"그럼 대체 이유가 뭔데."
"그냥…… 좀 쉬고싶어서 그래."
"안돼. 쉬지마. 나 너 불안해서 못견디겠어."
민예는 계속 내 옆에서 어린아이처럼 칭얼댔다. 나는 그런 민예에게 웃어보였다.
"야이 바보야. 내가 혼자 죽기라도 할까봐?"
내 말에 민예의 얼굴이 딱 굳어지는 게, 내가 답을 맞춘 모양이다. 바보같은 민예.
날씨가 너무 추워서 민예의 코 끝이 빨개져 있다.
"정말 걱정마. 그렇게 걱정되면 매일 우리 집에 오던지!"
"쳇.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못 갈 것 같아? 갈거야 정말!"
민예의 투덜거림에 웃음이 나온다. 옛날엔 하루하루 만날 때 마다 싸우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거의 앙숙이었는데.
정말 필요할 때의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내가 이렇게 힘들 때 날 찾아온 건 민예가 유일했다.
민예는 많이 추운지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 보니 난 두꺼운 코트를 입었지만 민예는 스타일링한답시고 얇은 스웨터가 전부이다.
그래서 나는 민예와 어디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아리 선배들께 인사도 드릴 겸 동아리 건물로 들어갔다.
"그런데, 나 병원에 있을 때 어떻게 온 거야?"
내 물음에 민예는 어? 하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뭔가 뜸 들이는게 수상쩍다.
"어떻게 온거냐구. 난 너한테 연락 안했는데? 그리구 폰도 택시에 떨어트……."
아. 이제야 기억이 났다.
나, 그 정신없는 와중에 비호에게 전화했었지 참.
순간 그 때가 생각이 나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왜 하필이면 비호에게 전화했을까. 왜 하필이면 그 때 생각 난 사람이 비호 뿐이였을까.
민예는 굳어져버린 내 얼굴을 보며 계속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런 민예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이고는
동아리실 문 앞에 섰다. 동아리실 문의 손잡이를 잡은 내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 왜 떨고 있는거지? 행여나 안에 비호가 있을까봐? 하하.
이런 바보같은 생각을 하다가 동아리실 문을 열었다. 그 곳엔 아주 불행히도, 아주 당연하게 비호가 있었다.
내가 비호를 보고 흠칫하자 민예가 동아리실에 들어가려는 나를 붙잡는다.
"나가자."
하지만 민예가 한 그 말은 나를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나보다. 그 말에 비호가 뒤를 돌아봤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한동안 그렇게 눈이 마주친 상태로 있다가 비호가 내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는 것으로 나는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동아리실에는 선배들이 없었다. 어색하게도 비호와 그 애의 여자친구, 민예 그리고 나, 이렇게 넷 뿐이었다.
비호의 여자친구, 저 애는 우리 과의 한 학년 후배이다. 조금 예쁘장한 외모로 내 주변의 남자애들이 모두 침을 흘렸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어느덧 저 애는 비호 옆에 서 있었다.
......
언제였더라, 저 애가 비호와 사귄지 얼마 안되었을 때 다.
당돌하게도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민로마선배?'
'누구시죠?'
'저예요. 신율아.'
'그게 누구지?'
나는 사실 알고 있었다. 신율아라는 애를. 그 앤 비호의 새 여자친구였다.
비호와 내가 헤어지고 단 하루만에 사귄…… 비호의 여자친구.
'아, 비호오빠 여자친군데. 저 기억안나세요?'
내가 그 앨 먼저 아는 척을 했든, 여자친구라는 말을 직접 듣든 간에 어쨌거나 내 자존심이 상하는 말임은 분명했다.
애써 내 감정을 숨기고 나는 천역덕스럽게 어, 그래? 라고 대답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우리 만날래요?'
'아니. 그냥 전화로 얘기해.'
'아, 그럼 그러죠 뭐.'
저 여자애를 만약 만나게되면 나 어떻게 표정관리 해야할 지, 막막해져버려서 거절했다.
속으로 나를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나는 더 자존심이 상해 기분이 나빠져버렸다.
'비호오빠가 선배랑 헤어진 이유…… 혹시 알고 계세요?'
얄미우리만큼 예쁜목소리. 나와는 비교도 안되는 예쁜 목소리로 아주 다정스럽게도 말하던 아이.
나는 듣고싶지 않았다. 차라리 비호에게서 듣지, 너한테선 듣고싶지 않아.
'어. 알아.'
나는 모르면서 아는 척했다. 그러자 그 아이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더 자존심이 상해버렸다.
'아, 그렇군요. 난 또 모르실까봐.'
완전 비꼬는 말투였다. 이 기집애 그냥 만나서 얘기할걸. 한 대 패버리고싶다.
'그럼 말하기 더 편하겠네요.
어쨌거나 로마선배가 우리 비호오빠 아기 가졌던 건 사실이니까, 저도 모르는 척 넘어갈 순 없어서요.
비호오빠 마음이 약해서 그런데요. 뭐 물론 로마선배가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행여나 아이핑계로 다시 만나자거나 동정심같은거 얻을만한 행동,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오직 신율아라는 기집애에 대한 화만 가득하던 내 마음속에서 뭔가 물밀듯 솟아올랐다.
이비호……. 알고있었던거야? 너, 그래서…… 나한테 헤어지자고 한거였니?
나는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아주 펑펑. 홍수라도 났나보다.
그 애의 말을 더 듣지 않고 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한테 화가나서 그랬던 거구나.
역시 그래서 …… 그렇게 갑자기 헤어지자고 한거였구나.
나한테 말이라도 하지. 그랬더라면 나 그땐 자존심 버리고 변명이라도 했을텐데.
그리고 사귈거면 좀 더 착한 여자애 사귀던지. 이 병신아.
넌 어째 사귀는 여자마다 그렇게 한결같이 못됐어? 나도 그렇고, 이 신율아라는 기집애도 그렇고.
이 병신.
.... 병신.
......
"얘기 좀 할래?"
민예와 내가 동아리실에 있는 소파에 앉자마자 비호가 일어나며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계속 굳은 채로 그렇게 앉아 있다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무표정하게 바꾸고는 비호를 따라 일어났다.
"그래. 얘기 하자."
내가 비호를 따라 일어나자 비호 옆에 앉아있던 비호의 여자친구가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고, 내 옆에 있던 민예가
그 여자아이를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비호가 앞장 서 동아리실을 나가고 나도 비호를 따라 나갔다.
"부모님 장례…… 잘 치뤘니?"
"응."
"장례식장엔 못 가서 미안해. 나 그 때 서울에 없었거든."
"응."
"아팠다며……? 몸은 괜찮은거야?"
"…… 응."
"왜 응 밖에 안해?"
내 손바닥에 있는 휴대폰만 빤히 쳐다보고 있던 나의 숙여진 고개에 비호의 차가운 손길이 느껴졌다.
비호는 내 양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 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 보게 했다.
"너, 아직 나한테 마음있니?"
비호의 담갈색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나는 비호의 그 한마디에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나한테 화가 났으면서 화났다고 말하지 않고 헤어지자고 말하던 너.
나와 헤어진지 24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새로운 여자친구를 내게 소개 시켜줬던 너.
나에 대한 건 그 어떤 것도 갖고 싶지 않다며 나에 관한 물건을 모두 내게 돌려 줬던 너.
나를 걱정해주는 척, 웃어주는 너.
난 너의 이 모든 것이 싫어. 정말…… 싫어.
"있다면?"
당연히 마음 없노라고 답할 줄 알았나 보다. 나의 대답에 비호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자존심이 세다. 그래서 비호가 헤어지자고 할 때에도 울지 않았다. 결코 매달리지 않았다.
먼저 사랑한단 말도 한 적 없다. 심지어 비호와 나, 이렇게 단 둘이 풀어야 할 일에 대해서도 나 혼자 결정 했었다.
그 애 앞에서 나는 늘 그랬다. 비호의 아기를 가졌을 때에도.
"할 말이 없네."
비호는 내 뺨을 감싸던 큰 손을 툭, 하고 떨어트렸다. 내 뺨에는 아직도 비호의 차가운 느낌이 남아있다.
비호는 나를 그대로 두고 동아리실로 들어가버렸고, 나는 눈에 차오르는 눈물에 앞을 잘 볼 수 없었다.
그 애에게 내 눈물의 흔적을 보이기 싫어 소매자락으로 마구 문질러버렸다. 눈두덩이가 따갑다.
그리고 다시 동아리실로 들어가려는데 문이 갑자기 열리고 비호와 그 애의 여자친구가 나왔다.
내가 그 둘을 보고 뒤로 조금 물러서자 비호는 나를 향해 씨익, 하고 웃어보였다.
역시…… 넌 잔인하구나, 이비호.
비호는 바로 내 앞에서 신율아의 얼굴을 붙잡고 키스해버렸다.
나는 그걸 다 보기도 전에 뒤돌아서서 계단으로 달려 내려가 버렸다.
"미친새끼야!!!"
계단으로 내려가는 동안 민예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민예야. 걔 좀 패줘. 죽지 않을 만큼만 패줘. 너 그거 되게 잘하잖아. 응?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나는 또다시 바닥이 울렁거리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주저 앉아버렸다.
세상은 내게 너무 잔인하다. 이 수많은 고통을 한꺼번에 내가 쏟아부었다.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잘못된건지, 내가 단 1초의 여유조차 주지 않은 채 이 엄청난 고통을 내게 짊어지게했다.
이 모든 걸 되돌리고 싶어.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럴 수 만 있다면.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인슈타인 - 로젠의 다리 :: 번외
[ 이비호 "우리가 헤어진 이유" ]
2007년 11월, 늦가을.
낙엽이 흩날리는 아름다움을 만끽하기도 전에 바닥에 떨어져 사람들에게 무참히 짓밟히던 낙엽만이 보이던 때.
바로 그 시기쯤 나는 강의가 끝나고 로마와 있을 즐거운 데이트를 생각하며 학교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저기…… 비호선배."
"어?"
나를 불러 세운 건 다름아닌 08학번으로 입학한 신입 여자 애 중 하나였다. 이름이 율아였던가……?
"율아 맞지? 신율아."
내가 겨우 기억해 낸 이름으로 멋쩍게 웃으며 아는 체를 하자, 그 여자 애가 환하게 웃었다.
내 친구 녀석 중 한명이 이 여자애를 꼬시려다가 실패했다는 걸 들었다.
초반부터 예쁘장한 얼굴에 과 선배들도 노리던 애 같은데.
나야 물론 내 곁엔 이 여자애보다 훨씬 예쁜 로마가 있으니까,
이 여자애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였을까 겨우 기억해냈다.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래? 그런데 나 지금 로마 만나러 가야하는데 어쩌지……?"
"아, 저 정말 조금만이면 되요."
슈렉에 나오는 고양이 이름이 뭐더라? 여튼 걔 같은 눈을 하고선 나를 바라보는 이 여자애.
문득 여자애들에게 있어서 미모라는 건 이럴때 이용해 먹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케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여자애와 조금은 어색하게 걸어 주변의 한 카페로 향했다.
가는 길에 로마에게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문자는 보내뒀다.
로마는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므로, 이렇게 연락을 주지 않고 늦었다간 큰 코 다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민로마가 화내는 얼굴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걔 딴에는 무서워 보일 거라고 생각하나본데 그건 오산이다.
귀여워죽겠다. 물론 나만.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죽겠단다.
어쨌든 나는 잔잔한 클래식이 흐르는, 나와는 어째 좀 어울리지 않는 카페에 신율아라는 여자애와 마주보고 앉아있다.
"그래, 할 말이 뭐야?"
내 물음에 잠시 커피잔을 잡고 망설이는 듯 하던 그 여자애가 나를 수줍게 쳐다보았다.
이 분위기는 아무래도…….
"저, 선배 좋아해요."
이럴 줄 알았어. 아, 바보같은 이비호. 그냥 진작에 눈치채고 빠져나왔어야하는건데.
다른사람에게 거절같은거 잘 못하는 성격인지라 나는 조금 당황한 채로 계속 우물쭈물 답을 못하고 있었다.
"선배랑 사귀고 싶어요."
"너도 알잖아. 내 옆에 이미 누군가가 있다는거."
"민로마선배요?"
"그래, 잘 아네."
이제야 뭔가 말이 통한다는 생각에 나는 살짝 웃어보였다. 이 여자애가 상처받았을까봐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나는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시계를 쳐다보게되었다.
로마가 기다릴텐데…….
"민로마선배같이 더러운 여자, 좋아하시나봐요?"
순간 그 애의 목소리가 내 귀에 정확하게 꽂혀들었고, 내 가슴속에서 '화'라는 이름의 감정이 불 지피듯 피어올랐다.
나는 그 애를 향해 생글거리고 있던 내 웃음이 사그러드는게 느껴졌다.
나는 어느덧 정색을 하고 있었고, 그 애는 내 표정을 보고 조금은 당황한 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냐?"
"민로……."
"너같은거 입에서 우리 로마 이름 그렇게 나오는거, 나 무지 싫다?"
내 말에 그 여자애는 다시한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여자애의 두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내리려는 듯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런 모습에 나는 또 잠시 짜증이 났다. 뭐하자는 플레이야 이거?
"울지마. 뭐 잘했다고 울어?"
"흡……."
"비록 민로마가 좀 안씻기는 해도, 그렇게 더럽진 않거든? 나 견딜만하거든?"
"그런 뜻 아니란 거 잘 아시잖아요. 왜 외면하려고 해요? 들어보지도 않고, 왜 화부터내요? 여자친구라서요?"
아무 말도 못할 것 처럼 눈물만 짜내며 앉아있던 그 여자애가 마치 독이라도 품은 듯 쏘아대는데,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내가, 외면하려고 했단다. 로마가 내 여자친구라서 들어보지도 않고 자기한테 화를 냈단다.
그치만 나는 로마가 그런 일을 할만한 애가 못된다는 걸 잘 안다. 그것도 아주 잘.
그래서 듣지도 않고 화를 냈다. 너무나도 당연하니까. 당연히 로마는 아니니까.
"그냥 나 좋아하는 거면 조용히 좋아만해. 우리로마 이름 더럽히지말고.
아니, 나 좋아하지마라. 너 우리로마한테 죽는다?"
내 말에 그 여자애는 또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여자애 뒤의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로마에게 문자를 보낸 지 벌써 30분이 지났다.
별로 한 얘기도없는데 벌써 시간이…….
나는 더이상 들을 것도 없을 것 같아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여자애가 자신의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탁소리나게 테이블위로 올렸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채 그 여자애를 향해 물었다.
"이건 뭐냐?"
"진단서요."
"무슨 진단서?"
"선배의 여자친구 민로마가 얼마나 더러운지 알려주는…… 진단서요."
나는 그 애의 그렇게 독한 목소리와 독한 표정에 질려버렸다.
뭐 이런 여자애가 다있어? 여자애가 얼굴이 예쁘면 독하다더니.
쟤도 우리 로마만큼이나 독하다. 아니 로마는 독하지만 쟤는 표독하다 아주.
나는 더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 여자애가 일어나 내 팔을 붙잡았다.
내가 조금 짜증이 나서 멈춰서자 내 눈앞으로 그 여자애가 진단서를 내밀었다.
"외면하려하지마요. 여기, 다 나와있어요."
그리고 나는 똑똑히 그 진단서 내용을 보고 말았다.
민로마. 라고 쓰인 세 글자와 낙태라는 이름의 진단서.
내 시선은 잠시 그 '낙태'라는 두 글자에 머물렀다. 그리고 '민로마'라는 세글자에 한번.
번갈아 가며 그 활자를 확인 하는 동안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거 진짜예요. 이 산부인과 간호사언니가 제 친언니거든요."
그 여자애는 꽤나 자랑스러운 듯 그렇게 말을 했다.
나는 그 종이를 다시 읽고, 또 읽었다.
2007년 09월 01일. 이 때…… 로마가 잠시 학교를 나오지 않았었다. 일주일 가량.
그래서 나는 무지 화를 냈지만, 그렇지만 로마는 일주일동안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정말이야? 민로마……. 이거 정말인거야?
"어떤 남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 여자애의 입술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는 그 얼굴이 참으로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쁘지 않아. 정말 못생겼어.
"선배 일단 앉아요."
그 애는 내가 당연히 앉을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자신이 아까 앉아있던 자리로 그 애가 가는 동안,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민로마……. 그거 내 아이 맞지? 그치? 왜 지웠니, 도대체 왜. 왜. 왜.
아니, 어째서 나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너한테 나 그것밖에 안되는 존재였니?
넌 어떻게 그렇게 지독하게도 네 멋대로냐.
나는 민로마가 있는 그 곳을 향해 걷다가, 걷고 또 걷다가 화가났다. 화나 머리끝까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길에서 멈춰 서 버렸다. 내가 가서 왜 그랬냐고 물어도, 그 앤 변명같은 거 하지 않을테니까.
그게 날 미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민로마의 집 앞으로 갔다.
낮에 민로마에게 가지않은 탓에 내 휴대폰은 민로마의 부재중 전화로 한 가득이었다.
나는 그 애의 집 앞에서 그 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꽤 오랫동안 흘렀다.
"왜."
퉁명스런 그 애의 목소리. 낮에 내가 가지 않은 것에 대해 화가 난 모양이다. 그래서 전화도 늦게 받은거겠지.
그 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울컥하는 내 마음을 다시 추스렸다.
"나와. 너네 집 앞이야."
"싫어."
"고집피우지마. 민로마. 할 말있으니까 나와."
나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내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로마와 만나면서 단 한번도 이렇게 내 멋대로였던 적 없었다.
멋대로였던 건 늘 로마였으니까. 로마는 그래서 아마 놀랐을 것이다. 로마가 나오지 않아도 계속 기다릴 생각이었다.
통화가 끝나고 한 5분 쯤 지났을까, 그 애의 집 문이 열리면서 커다란 가디건을 입은 그 애가 나왔다.
조금은 뾰로퉁하면서 내 눈치를 살피는 듯 한 그 애의 시선.
나는 그대로 나무처럼 우뚝 서서 그 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 술마셨니? 냄새나……."
로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다는 것은 로마가 미안하다는 뜻이다.
그 애는 영문도 모른채 미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헤어지자."
"……."
내 한마디에 로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래서 곧 그애는 생긋, 웃어보였다.
"그래. 그러자."
라는 대답과 함께.
아인슈타인 - 로젠의 다리 :: 04
[ 부제 :: 거꾸로 흐르는 시간 ]
"로마야! 민로마!! 얼른 안일어나?"
누군가가 자꾸만 나를 흔들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의 어떠한 것이 나를 누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허억……!"
나는 결국 눈을 뜨게 되었고,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하늘의 구름이 잔뜩 그려져 있는 천장.
나는 한참동안 그렇게 누워 가픈 숨을 내쉬고 있었다. 숨이 막혀서, 그래서 죽는 줄만 알았다.
"어이구 얘 왜이래? 잠이라곤 없던 올빼미같던 애가."
내 위에, 지금 내 얼굴 바로 위에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 누구도 아닌 엄마가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엄마…… 엄마다. 엄마…….
"엄마……."
내가 두 눈에 눈물을 펑펑 쏟아내자 엄마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어머, 얘가 정말 왜이래? 민로마! 어디아파?"
"엄마아……."
나는 몸을 일으켜 엄마를 꼭 안아버렸다. 그리고 엄마의 목덜미를 붙잡고 놓지않았다.
엄마는 그런 내 모습에 당황한 듯 몇 번이고 어머 얘가 왜이래, 라고 했다.
"로마아빠! 얼른 와 봐. 로마가 좀 이상해."
엄마의 말에 내 방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고, 나는 잠시 온 몸에 돋는 소름을 느끼며 뒤를 돌아봤다.
아빠였다. 엄마와 마찬가지로 놀란 얼굴의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이번에는 내가 아빠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아빠의 목덜미를 놓지않고 그렇게 꼭 안고있었다.
나의 돌발스러운 행동에 아빠도 당황했는지 버엉한 표정을 지으셨다.
"지혜야. 로마 왜이래?"
"나도 모르겠다니까? 잠 없던 애가 12시간 넘게 잠을 자질 않나, 깨자마자 펑펑울면서 안지를 않나."
엄마와 아빠의 체온을 느끼자 나는 이제껏 내가 겪었던 미친듯 슬펐던, 절망스러웠던 그 일들이 모두 꿈이었음을
깨닫고는 너무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그런 악몽 꾸고싶지 않아.
나는 그렇게 계속해서 아빠와 엄마의 품을 번갈아 부볐던 것 같다.
몇 분 뒤, 나는 거실에 앉아 있다.
아빠는 늘 그랬듯 티비를 보고 있었고 엄마는 내게 늦은 점심을 준다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빠 곁에 앉아 아빠와 함께 티비를 보고 있는데, 익숙한 스토리가 전개된다.
"아빠 이거 재방송이야?"
"아닌데?"
"응? 재방송 맞네. 그것도 좀 오래된거. 나중에 저 대조영 아저씨가 이기잖아."
"뭐래는거야 딸."
아빠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아빠를
안심시켜 놓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뭔가, 이상한데?
'RRRRRRRR-'
컴퓨터나 할까, 하던 내 발목을 붙잡은 건 한 통의 전화였다. 책상 위에 있던 휴대폰을 들어 액정을 봤다.
액정에는「비호」라는 글자가 떠올랐고, 나는 나도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비호…… 전화다. 헤어진 이후로 비호가 먼저 내게 전화를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무슨일인걸까?
'RRRRRRRR-'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민로마! 왜 학교안나온거야!"
"어?"
"왜 학교 안나왔냐고."
왜 학교안나왔냐고, 무작정 화를 내는 비호. 하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정확하게, 한토시도 틀림없이 똑같은 말을 하는 비호.
내가 비호에게 아무 말도 없이 학교를 일주일 넘게 빠졌던 5개월 전,
화난 비호의 통화와 정확하게…… 똑같은 내용.
나는 너무 놀라서 계속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캘린더를 쳐다보았다.
2008년 1월이…… 아니었다. 캘린더의 숫자는 2007년 08월이라는 활자가 박혀 있었고 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지금이…… 2007년이니?"
내 말에 수화기 속의 비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지금 나랑 장난쳐?"
"몇 년이지?"
"허 참……."
비호의 황당하다는 듯한 한숨소리가 이어지고 잠시 뒤 비호는 2007년이다 왜, 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2007년……?
"자,잠시만……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휴대폰 속에서 비호의 어,어, 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무작정 휴대폰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한동안 방 한 가온데 서서 혼자 멍하게 입을 벌리고 서 있었던 것 같다.
이게…… 어떻게 된거지?
나는 눈을 크게 한 번 깜빡이고는 조심스럽게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
밝은 빛이 나왔고, 커다란 액정에는 정확하게 2007년 08월 31일 04:20 p.m. 이라는 숫자가 박혀있었다.
말도… 안돼.
거짓말…….
나는 휴대폰을 침대위에 던지고는 다시 방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아빠는 여전히 1년 전 대조영을 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한 번 크게 깜빡이곤 아빠 옆으로 천천히 걸어가 앉았다.
"저기……. 아빠."
"왜?"
"올해가…… 몇 년도야?"
"얘가 뭐래는거야?"
아빠는 여전히 티비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나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심장이 조여드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시 천천히 아빠에게 물었다.
"2007년이지? 지금……."
내 말에 아빠는 티비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한 번 쳐다봤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계속 쳐다본다.
"로마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어? 아무것도 아냐! 배가 고파서 그런가보다!"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아빠의 시선을 피해 나는 엄마가 있는 부엌으로 걸어갔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거지?
내가 정말 꿈이라도 꾼건가? 미래에 간 꿈.
내가 정신이 잠시 나간거 같다. 아주 잠시.
나는 애써 복잡해져오는 내 머리속을 비우기 위해 가스 불 앞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엄마 곁에 섰다.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욱……!"
내 속에서 올라오는 역한 어떤 것에 의해 나는 헛구역질을 했고, 현기증으로 머리가 띵해졌다.
"욱…!!"
다시 한번 올라오는 구역질에 나는 냅따 화장실로 달렸다.
"로마야!! 민로마!! 너 왜이래!!"
엄마의 놀란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고,
내가 화장실로 들어가는 동안 엄마의 고함소리에 아빠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쪽으로 달려오려는 엄마와 아빠를 막기위해 얼른 문을 닫고 잠궈버렸다.
"우욱……."
계속 해서 속이 메스꺼웠고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쾅쾅쾅-!!'
"로마야 어디 아픈거야?"
"민로마 문열어!!"
엄마의 울음 섞인 목소리 한 번, 다급한 듯한 아빠의 목소리 한 번.
나는 또다시 현기증을 느꼈다.
"으응, 괜찮아. 잠시 잠시만 있다가 나갈게!"
계속 문을 두드리자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속이 또다시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우선 엄마 아빠를 안심시키고는 욕조에 걸터앉아 물로 입을 헹궈냈다.
깨끗한 물이 입안에 들어오자 헛구역질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 정말. 엄마 아빠 말대로 오늘 내가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하다.
왜 이런거지? 한번도 이랬던 적 없는데…….
나 스스로도 의아하게 여기다가 문득 거울을 봤다.
욕실에는 아주 큰 거울이 걸려 있었는데, 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그야말로 앳된 모습.
2007년이면 내 나이 스무살. 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쳐다보다가 문득 내 배로 시선이 머물렀다.
약간…… 솟아 나온 배. 살 찐건가?
내 배를 보고 약간 의아해 하다가 나는, 나는 그 때 기억이…… 났다. 기억이 나버렸다.
2007년 08월…… 내가, 비호의 아기를 가지고 있던 해.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충격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나보다.
순간 나는 비틀거리며 화장실 바닥에 주저 앉았고, 아랫배에 잠시 통증이 왔다.
"으윽……."
찌릿한 고통에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고통이 가실 때 까지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리고 고통이 가실 쯤, 겨우 욕조를 딛고 일어났다.
나, 임신……했었지. 비호의 아기.
이제 기억이 났다. 그리고 아까 비호와의 통화내용도 기억이 났다.
2007년 초가을. 나는 비호의 아기를 지우기 위해 휴학을 냈었다. 비호에겐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모든 것을 숨긴채.
나는 이제 겨우 스무살. 비호를 사랑하지만, 두렵다. 내 뱃속에서 이제 막 잉태되고 있는 아기. 비호와 나의 아기.
나는 이 아기의 존재를 알고 난 뒤, 바로 병원에 전화를 걸었었다.
그리고 2007년 09월 1일이 이 세상에 아기가 사라질 날.
가슴 깊숙한 곳에 묻혀있던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자 갑자기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현재인지 미래인지 모를 2008년 1월의 추운 겨울을 보고 왔다.
그 곳에서의 나는 불행했고, 고통당하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내가 사랑하는 비호를 잃었다.
그것은 정말 내 미래라면, 다시는 그리되고싶지 않은…… 미래.
'이 모든 걸 되돌리고 싶어.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럴 수 만 있다면.'
문득 꿈의 마지막 장면이 파노라마지나가듯 흘러지나갔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나는 후회했었다. 어쩌면 지금, 그 꿈에서 내가 바라는 대로 시간을 돌아왔다.
그래, 시간은 돌아 온거야.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흘러서 그 끔찍한 고통이 일어나기 전, 바로 그 때로 돌아왔다.
아인슈타인 - 로젠의 다리 :: 05
[ 부제 :: 거꾸로 흐르는 시간 ]
"정말 병원 안가봐도 되겠어?"
내 침대 옆에 걸터앉아 내 이마를 짚어보는 엄마. 그런 엄마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하다.
나는 엄마를 안심시키려고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엄마는 계속 걱정이되는지 내 옆에서 떠나질 않고 있다.
"엄마. 내가 말했잖아. 난 엄마닮아서 다리도 튼실하고 팔근육도 장난아냐."
내 말에 엄마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예전같아선 엉덩이를 한대 맞았을텐데, 지금은 내가 아프답시고 누워있으니
엄만 날 차마 때리지 못하겠는지 내 침대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나는 거기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앞으론 이 말 안해야지. 했다간 정말 맞아 죽을수도…….
"알았어! 그럼 푹 자."
엄마는 토라진 듯 입을 삐쭉 내밀었다.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엄마를 내보내려면 이 방법밖엔 없는 걸.
엄마가 방 문을 닫고 나가자 나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살짝 열린 창문사이로 옅은 바람이 스며들어온다.
그 바람에도 한기를 느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내가 아니라 내 뱃속에 아기가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침대 구석에 던져진채로 있던 휴대폰을 주워들었다. 그 사이 부재중 전화가 3통이나 와 있었다.
2통은 비호, 1통은 민예.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민예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나는 2007년 09월 01일 병원에서 민예와 함께있었으니까.
"여보세요?"
한참의 신호음 끝에 민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 지 몰라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예는 그런 나를 참을성있게 기다려주었다.
"내일……이지?"
내가 겨우 꺼낸 이 말에 민예는 응, 이라고 작게 대답했다.
"너, 정말 비호에게 아무말도 안할거야? 비호 알면…… 되게 화낼거야."
민예의 조심스러운 물음. 더이상 예전처럼 화끈하게 눈치안보고 막 말하는 민예가 아니었다.
민예 말이 맞다. 비호가 알면 화낼거다. 아니 화내다 못해 미친 것 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
내가 비호 모르게 나 혼자 둘의 일을 해결할 때마다 비호는 그랬으니까. 미친듯이 화를 냈으니까.
"그래…….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내가 비호랑 결혼할 것도 아니고. 나 이제 고작 스무살이야."
"……."
"나에겐 지금까지 살아온 스무살보다 더 많은 날들이 남아있어."
"비호, 사랑한다며."
"사랑하면 꼭 아길 낳아야하니? 난 비호를 사랑했지, 내 미래를 포기할 만큼…… 아기를 사랑하진 않아."
나의 단호한 이 말에 나는 살짝 내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기가…… 울고 있는 것 만 같아서.
내 말에 민예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한참 뒤에 민예는 '알았어, 내일 보자.'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민예와의 통화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어쩌면 이 말은 2007년 08월 31일, 민예와의 통화에서 내가 했던 그 말 그대로인 것 같다.
아, 아니지. 지금이 2007년 08월 31일이잖아. 나는 시간을 돌아 온 거니까.
나는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두어번 저었다. 시간을 돌아 온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정말 꿈이었는데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 내가 시간을 돌아왔다고 나는 이미 믿고 있다. 거의 확실하게.
기분은 이상했지만 나는 나 자신을 다독이며 침대에 누웠다.
벌써 바깥은 어두워졌고, 내일이…… 그 날이다.
다음 날 아침.
"그러니까 오늘이 2007년 09월 01일."
나는 달력을 보고 중얼거렸다. 여느 아침보다는 늦게 일어난 탓일까, 햇빛이 길게 집안에 드리워져있었다.
9월 1일이라는 네모난 달력 칸 옆에 07:00 p.m. 이라는 작은 메모가 쓰여져 있었다. 아마 내 기억상으론 병원 예약 시간일것이다.
나는 나도모르게 내 배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여기…… 비호의 아기가 있다.
내 미래, 2008년의 1월이 또다시 생각났다.
그 땐 비호와 헤어졌었다. 비호가 화가나서. 나한테서 화가나서. 내가 비호의 아기를 지웠기 때문에…….
그런데 비호는 나에게 화내지 않았다. 헤어지자는 말로 화를 대신했다.
어쩌면, 내가 이 아기를 지우지 않으면, 그러면 비호와 헤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먼 훗날의 고통이 지금의 고통에 비해 수백배라서. 차라리 아기를 지우지 말까.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비호를 한번 만나보고싶다는 마음이 든다. 그래서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비호야. 우리 좀 만날까?"
........
비호가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나는 일방적으로, 아주 멋대로 약속을 잡았고
비호는 어제 내가 전화를 끊은 이 후로 기분이 조금 나빠져 있는 상태였다. 목소리가 퉁명스러웠으니까.
비호는 언제나 이치에 맞고 감성적이기 보단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편이었다. 나는 정반대였고.
그런데 비호가 나와 헤어진-미래인지 꿈인지 모르겠지만-이유를 생각해보면 조금 웃음이 나온다.
비호답지 않았으니까. 매우 감정적으로 내린 결정이었으니까.
카페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이 시간이 사람이 많을 시간은 아닌데, 나는 조금 의아하게 여겼지만 한 자리에 앉았다.
보통 나는 카페에 가면 현관을 등 뒤에 두고 앉는 것을 즐겨한다.
카페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가 하는 복잡한 광경들을 지켜보고 싶지 않아서이다.
오늘도 역시 그렇게 앉아 비호에 대한 생각을 이것 저것 하고 있는데, 내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비호가 온 모양이다. 비호는 항상 인사를 하지 않곤했다. 그냥 내가 알아차리게끔 내 뒤에 멀뚱이 서서 기다린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비호와 눈이 마주치자 비호가 내 시선을 피하며 내 앞으로 와서 앉는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화 났어?"
"응"
"어제 전화 끊은 것 때문에?"
"응"
내 물음에 비호는 계속해서 무심하게 답했다. 나는 그런 비호의 모습이 싫었고, 내 자존심이 상해왔다.
몹쓸 자존심. 언제나 나는 이 자존심이라는 녀석때문에 비호와 싸우곤 했지. 씁쓸한 웃음이 입가에 맺힌다.
내가 말을 이어나가지 않자 그제서야 비호가 나를 쳐다본다. 나는 입을 계속 다물고 있었다.
"알았어. 화 풀게."
비호는 꼿꼿하던 몸을 뒤로 느긋하게 기대었다. 나는 그 모습에 슬쩍 웃어버렸다.
내게 더 화를 내고싶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남는 게 없을 것이라는 계산을 마친모양이다.
비호는 잠시 그렇게 앉아있다가 일어나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나도 옆으로 조금 옮겨갔다.
"어디 아파?"
"왜?"
"얼굴이 좀 창백하다? 너 답지 않아. 넌 튼튼한데."
비호의 장난스런 웃음이 지나간다. 그리고 다정한 손길. 내 머리카락을 갖고 노는 것을 좋아하던 비호였다.
"비호야."
"엉"
"넌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이해해줄 수 있니?"
"무슨 일?"
"그냥. 사람일은 모르는 거잖아. 무슨 일이 생길지."
"……."
내 말에 비호는 고개를 약간 갸웃한 채 나를 쳐다본다. 나는 비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한참을 비호의 맑은 담갈색 눈동자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드디어 비호가 입을 열었다.
"너한테 무슨 일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뭐 다 이해하진 못할거야. 하지만 노력은 할거야. 너니까."
비호의 말에 나는 살짝 가슴언저리가 아파왔다.
내가 비호의 아기를 지운거,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하다가 안된거겠지? 너 그래서 나와 헤어지자고 한거겠지.
"나 폼잡으니까 이상하지?"
비호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런 비호를 쳐다보다가 나도 그만 웃어버렸다.
헤어지는 것 보다 그래서 아팠던 그 꿈에서의 나날들보다 지금 너와 이렇게 함께 웃고, 손잡고, 얘기하는게
얼마나 소중한건지 너무 크게 느껴버렸어. 나, 이제 어쩌면 좋아?
"비호야. 시간을…… 되돌린다는 거 가능한거 같아?"
내 물음에 비호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짓는다. 뭐, 아직도 그런거 믿어? 라는 표정이라고나 할까.
"너 오늘 좀 이상해. 어디 아파? 어제도 그래서 그렇게 전화 끊은 거야?"
내 추측이 틀렸나보다. 아직도 그런거 믿냐는 그런 얼굴이 아니었다. 나를 엄청 걱정하는 듯한 얼굴.
나는 비호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게 어색해져버렸다. 그래서 다시 활짝 웃었다.
"그냥 해 본 말이야. 너 지식이 어느정도 되나 싶어서."
내 말에 비호가 그러면 그렇지, 하고 작게 말하고는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를 한모금 마시더니
자세를 고쳐앉고는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나 이래뵈도 이과생이었거든?"
"그래서?"
"지구과학 공부했다고."
"우주? 그게 왜."
내가 계속 말귀를 못알아 듣고 있는 모양이다. 비호의 얼굴에 잠시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이 지나간다.
우씨. 난 문과였다구! 당연히 과학공부를 너처럼 제대로 했을리가 없잖아.
"그래, 네 말대로 우주에 막 홀같은게 있거든? 블랙 홀 알지?"
"응. 그거 막 빨려들어가는거?"
"에이…… 아, 어쨌든. 그게 중요한게 아냐. 그런 홀 중에서 웜홀이라는게 있어."
점점 재미없는 우주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비호. 나는 조금 뾰로퉁해졌다.
어째 내가 하던 이야기와 많이 벗어난 것 같은데.
"듣고 있어?"
"어? 어."
내가 건성으로 듣고있다는 걸 비호가 눈치 챘는지, 확인을 한다.
그래서 나는 어쩔수없이 다시 비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웜홀을 학계에서는 '아인슈타인-로젠의다리'라고도 해. 그 곳을 통과하면 시간을 거꾸로 흘러서 갈 수 있대."
"……어?"
"너 시간을 되돌릴수 있냐고 물었잖아."
아……. 그래서 비호가 그 얘기를 꺼낸거구나. 아인슈타인-로젠의다리.
그렇다면 어쩌면 나는 미래에서 그 아인슈타인-로젠의다리를 통과하여 이곳으로 돌아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절망했던 나에게, 고통에 버거워 했던 나에게 조금의 기회를 주려고. 다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나 자신이 그 아인슈타인-로젠의다리를 통과했나보다.
나는 잠시 말이 없는 비호를 똑바로 쳐다봤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비호도 나를 쳐다봤다.
"비호야."
"응?"
"여기에 네 아기가 있어."
나는 내 배를 가리켰다. 비호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한 것 처럼 한참을 벙, 하게 앉아서
한번은 내 배를 쳐다보고 또 한번은 내 얼굴을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나는 비호를 천천히 기다렸다. 비호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나는 비호를 기다렸다.
잠시동안 그렇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침묵이 흐르고 비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사실 조금 놀라서 비호를 쳐다보았다.
비호는 자리에 서서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나를 향해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역시…… 그렇지? 많이 놀란거지? 우린 아직 어리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아기 지우려고 한거지만.
이 아기는 나만의 아기가 아니니까. 너와 내 아기니까 너도 알아야지.
나중에 오후에 민예와 가기로 한 병원이 생각났다.
생각은 이렇게 긍정적으로 하긴 했지만, 비호에게 섭섭한 건 사실이다.
"여러분!!!"
그 때, 큰 비호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두 눈에 고인 눈물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비호를 제대로 보기위해 눈을 비볐다.
손등이 금방 젖어들었다.
"저 아기의 아빠가 됐습니다!!! 저, 정말 마누라랑 잘 살테니까 지켜봐주세요!!"
비호의 목소리가 카페를 울리고, 카페 안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호를 향해 박수를 쳤다.
그리고 이곳 저곳에서 격려의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잘 사세요!"
"예쁜 아기 낳으세요."
"축하해요~"
그렇게 나를 일으키는 손길들에 의해 정신없이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문득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뒤로 돌아섰다. 그 곳엔 늘 그랬듯 비호가 서 있었다.
"고마워. 고마워. 우리아기도, 민로마 너도."
비호의 나긋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린다.
되돌리고픈 시간이 있으세요?
지나간 사랑에 후회하시나요?
지우고싶은 감정이 있나요?
여러분도 시간을 되돌려보세요.
아인슈타인-로젠의다리 <끝>
* * *
안녕하셔요, 휘련입니다.(웃음)
단편이라기엔 너무 긴 단편이네요.
재밌게 읽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작은 댓글 하나가 휘련이에게 큰 힘이된답니다!
* * *
첫댓글 정말 재밌게 잘 봤어요! 보는 내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될까 하고 깊게 생각도 해보고 했네요, 맨처음에 제목보고 뭐지? 라고 생각하고 봤는데, 아인슈타인-로젠의다리의 뜻이 뭔지도 알게되었고, 왠지 뿌듯한 것 같아요. 과거로 돌아가서 내가 잘못했던 걸 다시 되짚어보는거, 저도 꼭 해보고 싶네요. 사람한테는 저마다 다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잖아요^^ 아무튼 정말 잘 봤습니다!
혜윰님.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웃음). 뭔갈 깊게 느끼기엔 많이 부족한 글이였을텐데, 혜윰님의 넓은 이해력으로 제 소설이 재미있게 읽혔나봅니다^^ 혜윰님 말씀대로 사람들은 누구나 지우고픈 과거가 있죠. 저도 그런 과거를 지우고 싶어하는 바람으로 써 본 소설입니다. 부족한 소설을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웃음)
잘봣습니다 뭔가가 보면서 가슴이 찡해지네요...!
지성아돌아와님(웃음) 소중한댓글 감사합니다! 지성아돌아와님께 감동을 드릴만큼 좋은 글이 아니었는데, 과찬이세요 ㅜ.ㅠ 하지만 지성아돌아와님께서 써주신 소중한 댓글로 다음 소설을 더 열심히 쓸게요(웃음)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저두 요즘에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하는데,, 그래서 인지 더 동감가구 재밌게 읽었던것 같아요^^
심방님, 소중한댓글 감사합니다(웃음). 심방님도 그러세요? 저도 요즘 그래서 쓰게 된 소설인데, 공감을 하셨다니 동변상련의 기쁨이 느껴집니다. 재밌게 읽어주셨다니 저로써는 무한 영광이랍니다! 댓글 써주신거 정말 감사합니다! 노력하는 휘련되겠습니다.
와아-뭔가가슴이찡해요>_<잘봤습니다!!!
그린비♪님,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웃음). 가슴이 찡할만큼 잘 보셨다는 말, 정말 저에겐 과찬이세요 ㅜ.ㅠ 무한영광입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더 노력하는 휘련되겠습니다(웃음)
재밌어요ㅎㅎ 시간을 되돌리는 상상 많이 해봤는데ㅎㅎ 시간여행이라는 거 되게 매력적이지 않나요? 잘 읽고 가요~
비오는날† 님,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웃음) 시간을 되돌린다는거, 이제 상상뿐 아니라 먼훗날엔 실제로 할 수 있게 되겠지요? 이론적으론 가능하다니까요 헤헤 저도시간여행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웃음)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된다면 비오는날† 님, 저랑 함께 로젠의다리를 건너용 헤헤!
음.. 쫌 많이 길이서.. 살짝 눈 아프긴 했는데.. 그래도 재밌네요. ^^ 잘 보고 갑니다. 정말.. 남자 멋있네요.^^ 로젠의 다리가 뭔지도 잘 몰랐는데.. 제게 시간을 되돌릴 기회가 온다면.. 옮기게 될 지.. 아니면.. 거부할 지.. 잘 모르겠어요. ^^ 여튼 잘 읽고 갑니다. 정말..글 잘쓰시네요.^^
카즈키♡님, 소중한댓글 감사합니다(웃음) 단편치곤 꽤 길지요? 그래서 사실 작게 쪼갤까 고민도 했지만 저만의 단편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무리하게 올리게 됐습니다 ㅜ.ㅠ 헤헤 그래도 재밌게 읽어주셨다니, 무한 감사드립니다!! 저는 시간을 돌릴수잇다면 한번쯤 돌려보고싶어요. 후회할만큼 막살았다고나 할까요^^; 아직 많이 부족한 글입니다 ㅜ.ㅠ 과찬이세요! 더 잘하란 뜻으로 알고 노력하는 휘련되겠습니다(웃음)
멋져요..............역시최고에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정말 지울수 있을 까요? 나도 지우고 싶은것들이라면 대빵 많지만 좋앗으면 멋진일이고 나빳다면 경험이래요ㅎㅎㅎㅎ 아직 남은 인생 더 멋지고 더 좋게 살고싶어요 휘련님도 하고 싶은거 맘껏 양껏 다하세요 ㅎㅎㅎㅎㅎ 휘련님 소설보면 뭔가 교훈을 얻고 든든하게 가는 것만 같아요!!!! 히히히히히 멋져요 작가님 >_<!!!!!!!!!!!
ㅋrnl오퍼lㅇr님,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웃음) 정말 기대도 안했었는데, 이렇게 제 소설에 여러번 댓글을 남겨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ㅜ.ㅠ 저도 ㅋrnl오퍼lㅇr님과 같이 아직 더 많이 남은 인생을 알차게 잘 살다 가고 싶어요! 우리 함께 열심히살아요(ㅋㅋㅋㅋ) 어휴, 정말 과한 칭찬이세요 ㅜ.ㅠ ..... 많이 부족하지만 ㅋrnl오퍼lㅇr 님의 소중한 응원을 배불리 먹고 갑니다. 정말, 무한 감사합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