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트 어웨이(Cast Away)
나는 계속 숨을 쉰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
항공택배업체의 간부인 척 놀랜드(톰 행크스)는 정신없이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이렇게 직원들에게 말합니다. "시간은 우리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시간을 무시하거나 깔보고 낭비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절대로 범해선 안됩니다" 늘 시간에 얽매여 있는 척은 모든 일을 시간에 의해 움직입니다. 심지어 데이트 조차도 시간이 없어 차 안에서 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이같은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척이 근무하고 있는 항공택배업체 페덱스(FedEx=Federal Express)의 모토는 "World on Time"인데, 그냥 직역하면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는 세상" 즉 그같은 세상을 위하여 회사가 존재한다는 의미도 되고,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는 세상이 바로 페덱스라는 의미도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말 그대로 "시간 위에 있는 세상"! 즉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는 우리 자아를 잃어버리고 주어진 세상의 질서와 시간에 의해 지배되어가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던 척에게 갑자기 사고가 일어납니다. 회사 일 때문에 비행기로 이동하던 중 척은 갑작스러운 비행기 사고로 외딴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 영화의 원래 의도는 섬에 버려졌다는 의미로 제목을 캐스트 어웨이로 썼겠지만 사실 또 다른 의미가 숨어있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버려지는 또 다른 무엇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연히 자아가 버려집니다. 자신을 상실합니다. 존재의 이유를 상실합니다. 단지 단초적인 삶의 즐거움이 삶의 목적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즉 많은 시간을 일하는데 투자했다는 말입니다. 그 댓가로 그는 많은 물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부자가 잃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은 부자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황폐되어가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버려진 영혼을 거두어 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지금 살아있지만 실상은 죽은 껍데기에 불과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
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마틴 하이데거가 우리를 피투적 존재 즉 세상으로 던져진 존재라는 표현을 썼는데, 본질적으로 우린 버려진 존재, 즉 죄를 범함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자신에게, 세상에게 집중할 때 우리의 공허함은 극대화에 이르게 됩니다. 매일 우리 자신이 버려진 존재라는 사실이 거인처럼 다가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시간에 매여 열심히 일하게 되고 결국 일중독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1500일동안 살면서 척은 주변에 널려있는 사람냄새나는 것들이라고는 FedEx 상자외에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빠르게 살라고 하는 세상의 흔적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빠르게 살 수 없었습니다. 거기는 시간이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정리된 시간! 격리된 시간! 빨리 살아야 되는 세상에서 빨리 살 수 없는 세상으로의 격리. 이처럼 버려지고 난 다음에 그가 깨닫게 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도대체 그가 잃었던 것은 무엇이었고 무엇을 찾게 된 것이었을까요?
척은 버려진 세상에서 도무지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살을 기도합니다. 밧줄을 만들고 거기에 통나무를 매달고 높은 절벽에 있는 나무에 묶어서 던져서 완벽한 자살을 위한 실험을 하였는데, 나무가 부러지는 바람에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때 척에게 이전에 알지 못했던 평안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탈출에 성공한 후 친구와의 대화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통제할 수 있는 단 한가지는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내가 죽는가였지... 그리고 죽기위해 꼭대기 나무에 매달아서 자살을 위한 실험을 했는데 통나무 무게 때문에 나무가 부러져서 자살에 실패했어. 그때 편안한 깨달음이 밀려왔어. 그때 난 알았지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말이야. 난 살아 있어야만 했어! 희망을 가질 이유가 없어도 말이야. 그래서 버틴거야. 살아남기 위하여..."
죽음이 살게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척은 살아남을 것을 다짐한 것일까요? 무엇이 그로하여금 살게 한 것일까요? 그것은 죽음에 대한 체험이었고 그 버려진 자신에 대한 체험이 생명을 느끼게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눈 부자도 살 수 있는 방법은 아마 죽음을 보았을 때였을 것인데, 성경은 그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지 않습니다. 만일 부자가 그 유명한 스크루지 이야기처럼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볼 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었다면 분명히 자신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세상적 만족에서부터 반드시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눅12:19)
그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 시간의 문제일 뿐 우리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죽음을 향한 존재이기에 곧 죽음에로 우리 자신을 캐스트 어웨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절대적인 존재에 의존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버려진다는 것은 결코 불행이거나 저주가 아닙니다. 여하튼 자신의 버려짐, 곧 캐스트 어웨이의 체험은 존재의 이유를 찾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척은 자신의 살아있다는 것이 귀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절망의 시기는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