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위에서 산이 자란다
진화자
물위에서 산이 자란다
낙엽이 젖은 채
제 갈길 가지 못하고
왼종일 물위를 서성거린다
푸른호수는
오랜만에 찾아온 떨림에 어쩔줄 몰라서
가볍게 흔들리고 있다
빛나는 살얼음에 바람은 심장을 베이고
마음이 무거운 사람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
온갖 낯선 근심들이
물위를 걸어간다
짙은 커피향은 호수를 가로질러
변방에 조용히 자리 잡고 번호를 기다린다
속이 빈 커다란 빵은 허기진 추억들을 입에 물고
주인을 잃은 검은색 가방이
출렁출렁 물소리 따라 고개를 흔들때
비틀비틀
겨울, 도담삼봉의 풍경화가 완성된다
우우 우우
겨울바람이 제목도 없이 서럽게 울면서
물속으로 몸을 숨긴다
바람의 중재로
물속에서 걸어 나온
법어 한 귀절이
마을을 훤히 밝힌다
고구마의 발
진화자
고구마에 발이 있던 적이 있다
이제는 화석으로 굳은 역사가
돌팔매질 한번으로
부끄러운 역사를 토해내고
향긋한 공기와
바람의 온전함과
알맞은 온도의 물로
고구마의 발을 그려낸다
풀어헤친 발이
옛날옛적에 출가한
머리카락의 조상이라고 우기는 무리들
잔발이 무성해지면
초록치마는 너울바람따라
먼길 떠나고
고구마 나무였다가
고구마 뿌리였다가
그럼에도 발이 먼저였다
아니다
머리카락이 담을 넘은 것이다
토론회는 밤을 세워 이어가고
고구마의 발은 한없이 뻗어 나간다
둥글게 살아가기
진화자
몇번째 이사날이었던가?
대못을 있는 힘껏 때려 박던날
흔들거리던 찬장은
제자리를 잡는듯 하더니
뾰족뾰족 튀어 나와
성질을 돋군다
아흔아홉간 집을 지어도
못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껴맞추고
서로를. 의지하고
따듯한 온기 퍼지는 손을 맞잡고
구불거리는 길을 천천히 펴가며
둥글게 둥글게
살아가는 집도 있는데
비가오면 너의 우산이 되어
둥그스름하게 가슴을 포개고
눈이내리면 바람 소리 조차
들지 못하게 밀봉하여
모나지 않게
소리없이 살아 갈일이다
둥금이 오카리나의
단정한 음절되어
내어깨를 가지런히 껴안는다
오래된 함벽루에서
진화자
갑자기 무슨 용기가
발동을 했는지
검은 중절모자는 오른쪽으로
회색빛 벙거지모자는 왼쪽으로
덜거덕거리는 길위에 느닷없이 세우고
우리는 함벽루를 향해
냅다 달렸다
어린시절
그렇게 찾아보고 싶던
장군님의 검을 또한번 찾아보고
50여년을 부끄러움으로
물들게 했던 누각은
바람닿는 자리마다
아프다고 삐걱거리고
하루에도몇번씩 올라 갔다가
얼굴빨개진 부끄러움으로
돌아서던 강물은
그옛날의 나처럼
두근거리며
설레며
미안한듯이 조심스레
흘러가고 있다
한겹 한겹 쌓이는
간격좁은 물주름만
내그림자를 밟고 서있다
광천젓갈시장
진화자
천일염에 푹 절여진 노란잠바가
흐느적거리며 길을 나선다
그옆을 부축하던 여인네의 한숨소리는
장바구니의 입구를 꾹꾹 눌러 담은채
다음에는 절대 따라 오지 말라고
생소금을 뿌려댄다
낙지. 오징어. 꼴뚜기. 갈치. 청어알. 명란
보기좋게 곰삭은 광천은
부드럽게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질서있게 누워있다
삽교천을 지나고
예당호의 거대한 잔주름을 끌어 당기며
평생 부풀어 오르기만 한 속병을 새우 몇 알로 숨죽이며
빨간점퍼, 노란바지, 핑크빛 모자가
철없이 출렁거리며
광천을 목이 터져라 노래한다
카페 게시글
수호천사의서재
물위에서 산이 자란다
진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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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4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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