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도 사람도 참으로 무상합니다. 곱든 아이가 문득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됩니다. 봄인가 했더니 어느새 여름을 지나 가을이, 그리고 겨울을 향해 나아갑니다. 변해가는 세상사를 석가모니는 ‘제행무상’이란 단 한 마디로 설파하셨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이러한 무상 속에 깃든 영원한 진리를 말하기도 합니다. '텅 비었으되 묘하게 존재한다'는 뜻의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바로 그것입니다.
불경 가운데‘大般涅槃經’에 보면 <구도자 - 설산동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말라야 깊은 설산에서 진리를 구하는 설산동자라는 행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상에 가득 찬 재보는 물론 천상계의 영화조차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고 오직 미혹을 여의고 생사윤회를 뛰어넘는 진리만을 추구하였습니다. 설산동자의 구도정신에 감동한 제석천 환인 하느님은 그를 시험하고자 나찰 귀신의 모습으로 그의 곁에 현신하여 이같이 노래합니다.
“모든 것은 변해가나니[諸行無常] 이것이 나고 죽는 현상이다.[是生滅法]” 설산동자는 이 노래를 듣고 목마른 이가 물을 얻고 갇힌 이가 풀려난 것처럼 크게 기뻐하며 이같이 외칩니다. “내가 오랫동안 찾고 있던 그 진리를 오늘에야 들었다.” 그리면서 행자는 노래가 들리던 곳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그곳엔 사람은 없고 무시무시한 나찰 귀신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설산동자는 괴이하게 여기면서도 나찰 귀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진실한 도를 구하는 행자입니다. 조금 전의 노래는 그대가 부른 것이 맞습니까? 그 노래 속에 내가 찾고 있는 붓다의 진리가 있으니, 그 다음 구절을 불러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찰 귀신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것은 내가 부른 노래가 맞지만 나는 지금 몹시 배가 고파 나머지 노래를 부를 수가 없습니다.” 이에 설산동자는 나찰 귀신에게 약속합니다. “나를 위해 나머지 노래를 들려준다면 내가 맛난 음식을 제공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찰 귀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람의 더운 피와 살을 먹습니다. 그대가 그것을 제공한다면 노래의 나머지를 들려주겠습니다.” 이 말에 설산동자는 결연히 맹세합니다. “노래의 나머지를 들려준다면 내가 그 노래를 바위에 새겨놓고 즉시 이 몸을 던져 그대의 음식으로 내놓겠습니다.” 그랬더니 나찰 귀신은 낭랑한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나고 죽는 것을 초월하면[生滅滅已] 고요함이 즐거움이 되리라.[寂滅爲樂]”
설산동자는 이 놀라운 노랫말을 후세 사람들을 위해 바위에 새겨놓은 뒤, 맹세한 대로 나찰 귀신의 밥이 되고자 나무 위로 올라가 그의 발아래로 몸을 던집니다. 그 순간, 나찰 귀신은 곧 제석천 환인 하느님 모습으로 돌아와, 설산동자의 몸을 안전하게 받아 땅 위에 모셔놓고는 엎드려 경배 드리면서 그의 구도열정을 찬송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설산동자의 구도의 법문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고 죽는 무상한 것은 모두 생멸의 존재이지만 그 무상한 것의 근원이 되는 것은 나고 죽는 생멸의 현상을 초월한 적멸의 진리란 사실이요, 또 하나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몸마저도 내놓을 수 있는 불석신명(不惜身命)의 구도적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진리가 무슨 소용이냐, 등 따시고 배부르면 그만이지 않느냐고 합니다. 배고픔과 추위에 허덕이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기에 언뜻 생각하기에 이 말은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밥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밥보다 더 귀한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드높은 존재이기에, 이 말은 결코 참다운 진라라고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밥만을 위해 산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나는 밥만을 위해 산다고 강변한다면 이는 자신을 짐승과 같은 반열에 내려놓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인생은 탄생에서 죽음으로 나아가는 여행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 준비가 필요하듯이 인생이란 여행길에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학생이 평소에 공부를 잘 해 두면 시험장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 평소에 알뜰히 저축해 두면 종국에는 부자가 되는 것처럼 인생이란 여행길의 성공을 위해서도 <밥을 먹는 육체적 삶>과 <법을 먹는 정신적 삶>이 균형을 이루는 영육쌍전(靈肉雙全)의 온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인생을 위한 준비가 무엇이겠습니까? 육적인 삶을 위해 직업적 충실을 기해야 하고, 영적인 삶을 위해 법회에 출석하여 불공드리고 염불하고 법문 듣고 공덕의 탑을 쌓는 종교적 충실에 부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공적인 인생의 준비요, 노력이라 할 것입니다.
옛말에, 자기가 쌓은 공덕의 탑은 누구도 훔쳐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본인이 누리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결과가 안 나타난다 해도 언젠가 그 공덕의 결실은 반드시 본인이 누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흔히 잘 산다고 하면 부자로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사실 잘 산다는 것은 바르게, 진실되게, 거룩하게, 공덕을 지으며 산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산다는 것은 영육이 쌍전하는 성불의 삶을 살 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잘 살기 위해, 성불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니 날마다 순간마다 내 마음에 좋은 생각을 품기에 힘쓰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 하였습니다.
같은 그릇이라도 그 그릇에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과일을 담으면 과일그릇이 되고 말듯이, 같은 통이라도 연핑를 담으면 연필통이 되고 휴지를 담으면 휴지통 되고 말듯이, 같은 마음이라도 자비를 품으면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지혜를 품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화합을 품으면 화합하는 사람이 되지만 살인을 품으면 살인자가 되고 도둑질을 품으면 도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마음에 더러운 번뇌를 품지 말고 부처님을 품고서 끝내 성불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불이 무엇입니까? 성불은 문제 많은 내 인격을 지혜롭고 자비롭게 바꾸는 것입니다. 성불은 갈등과 불화로 허덕이는 우리 가정을 밝고 따뜻하게 바꾸는 것입니다. 성불은 범좌와 파괴와 전쟁이 난무하는 이 세상을 불국정토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불은 우리 모두가 나아가야 할 참으로 잘 사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다함께 참으로 잘 사는 성불의 길로 나아가지 않으렵니까? |
첫댓글 인쇄된 신문에서 내 글을 다시 보니, 몇 군 데 오자가 있기에 필자의 입장에서 이를 수정하여 우리 카페에 다시 올리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