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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해(遼海)와 사막(沙漠)지대
○ 독사방여기요 (讀 史 方 輿 紀 要) 52 권 섬서(陝西)편을 보면, 당시의 섬서(陝西) 구역은 오늘날의 구역(區域)과는 다르게 현 감 숙성(甘肅省)지방까지를 총칭(總稱)하는 행정(行政) 구역(區域) 명칭(名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곳엔 우리의 관심(關心)을 끄는 기록(記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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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서(陝西)편 개략(槪略) 설명 말미(末尾)에 이런 기록(記錄)을 남겨 놓고 있는데,
《北 屆 朔 漠 : 即沙漠也.自西域橫亙而東北,以達於遼海,為內外大限.今榆林,寧夏,甘肅三鎮之北,皆以沙漠為界.漢唐至今,所以固內攘外之要地也.》
《 북 굴 삭 막 (北屈朔漠) : 곧 사막(沙漠)이다. 서역(西域)에서 횡【橫 : 좌우 또는 동서】으로 동북(東北)으로, 요해(遼海)에 다다르는데, 안(內)과 밖(外)을 크게 경계한다. 유림(楡林), 영하(寧夏), 감 숙(甘肅)의 삼진(三鎭)의 북쪽이며, 모두 사막(沙漠)을 경계로 접한다. 한당(漢唐)으로부터 지금까지, 이곳은 안(중국)을 지키고, 밖의 적을 물리치는 중요한 땅이다.》
● 위 글에서 《 即沙漠也.自西域橫亙而東北,以達於遼海,為內外大限 : 곧 사막(沙漠)이다. 서역(西域)에서 횡【橫 : 좌우 또는 동서】으로 동북(東北)으로, 요해(遼海)에 다다르는데, 안(內 : 화(華))과 밖(外 : 이(夷))을 크게 경계한다. 》에서 “요해(遼海)”란 내륙(內陸)의 해(海)를 말하는 것으로 밖에 이해(理解)할 수 없는 지리적(地理的) 구도(構圖)이다.
통상적 역사해설【반도사관(半島史觀)과 현 중국(中國)의 역사해설 등】에서 ‘하 북 성(河北省)’ 남쪽의 바다, ‘요 녕 성(遼寧省)’의 ‘심양(瀋陽)’ 남쪽 곧 ‘요수(遼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그 바다를 “요해(遼海)”라고 한다. 위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기록(記錄)된 내용(內容)과는 상반(相反)되는 역사해설이 되는데,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어떤 역사서(歷史書)를 증거(證據)로, 또는 고증(考證)으로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問題)가 제기(提起)된다. 이것은 『성경강역 고(盛京疆域考)나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기록이 존재(存在)한다.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따른 『“요해(遼海)”는 결국 중원(中原) 서북(西北)변에 있었다.』 는 결론(結論)으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유림(楡林). 영하(寧夏). 감 숙(甘肅)의 삼진(三鎭)의 북쪽』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 여기서 위의 『“요해(遼海)”과 관계되는 것은 “성경강역 고(盛京疆域考)”의 “삼 만 위 (三 萬 衛)” 설명(說明)과 맞물린다.』 곧
《 原注洪武二十四年建韓王府永樂二十二年遷於陝西平涼西北有金山東有分水東嶺北有分水西嶺西有大清河東有小清河流合焉下流入於遼河又北有土河東北有艾河流合焉謂之遼海即遼河上源也 : 원(原) 주석(註釋)에, 명(明) 홍무(洪武) 24년에, 한 왕 부(韓 王 府)를 건치(建 置)하였는데, 영락(永樂) 22년 섬서(陝西) 평 량(平凉) 서북(西北)으로 옮겼다. 평 량(平凉) 서북(西北)에는 금산(金山)이 있는데, 금산(金山)의 동(東)쪽에서는 물길이 동(東)쪽으로 흐르고, 금산(金山)의 북(北)쪽에서는 물길이 서(西)쪽으로 갈라져 흐른다. 금산(金山)의 재(嶺) 서(西)쪽에 대 청하(大淸河)가 있고, 그 동(東)쪽에는 소 청하(小淸河)가 흐르는데, 이 두 물이 합쳐져 하류(下流)에서 요하(遼 河)로 들어간다. 또 북(北)쪽에 <토 하>가 있는데, 동북(東北)에서 애하(艾河)와 합류(合流)한다. 일컫기를 요해(遼海)이며, 곧 요하(遼河)의 상류 근원(根源)이다.》【성경강역 고(盛京疆域考)의 위 구절(句節)은 이미 오래 전(前)에 우리 카페에 소개(紹介)한 바 있다.】
● 얼마나 놀랍고 참신한 내용(內容)인가!
(1) 평 량(平凉) 서북(西北) 금산(金山) : 평 량(平凉)은 현 감 숙성(甘肅省)의 원주(原州)라고도 하며, 고원(固原)현 이다. 【왕조(王朝)에 따라 위치가 조금씩 다르나 대체적인 곳은 감 숙(甘肅) 고원(固原)현이다.】이곳의 서북(西北)이라면 내몽골 거연(居延)호를 지나 알타이산맥의 최고봉인 금산【 金山=알타이 산 = 금 사 산(金娑山) = 아이태산(阿爾泰山)으로 신강(新疆)과 러시아의 국경(國境)지방에 있다.】지방이다.
(2) 금산(金山) = 아이태산(阿 爾 泰 山) : 《 亦 作 阿 勒 壇. 又 作 阿 爾 但. 蒙 古 爲 金 爲 阿 爾 但. 故 又 稱 金 山. 天 山 北 出 之 脈. 中略, 與 賀 蘭 山 勢 遙 連 : 또 아 륵 단(阿 勒 壇)이며, 또 아이단(阿 爾 但)이다. 몽고(蒙古) 말로는 금(金)을 아이단(阿 爾 但)이라 하며, 고로 칭하기를 “금산(金山)”이다. 천산(天山)이 북쪽으로 뻗은 줄기이다. (중략). 하란(夏蘭)산의 산세는 멀리에 있다. 》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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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와 『성경강역 고(盛京疆域考)』의 기록은 또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도 고증(考證)할 수 있는 구절(句節)이 있다. 곧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 通典唐乾封二年薛仁貴破髙麗於金山進拔夫餘城(案夫餘城東接挹婁西接鮮卑在遼為通州金為威平府地).明統志金山在開原西北三百五十里遼河北岸又西北三十里曰東金山又二十里曰西金山三山緜亘三百餘里與烏梁海接境 : 통전(通典). 당(唐) 건 봉(乾奉) 2년, 설인귀가 고려(高麗 : 고구려)를 격파한 곳이며, 금산(金山)에서 진격하여 부여(夫餘)성을 쳐 빼앗은 곳이다. 【주석(註釋) : 안(案) : 부여(夫餘)성 동쪽에는 읍루(挹婁)와 접하고, 서쪽에는 선비(鮮卑)와 접하고, 요(遼)의 통주이며, 금(金)의 함평부이다. 】【 본인 주 : 고구려(高句驪)와 당(唐)의 강역 역시 기존의 역사 해설로 결코 해설될 수 없다. 부여(夫餘)의 위치를 후한서(後漢書)등의 대륙사서(大陸史書)에 기록된 위치(位置) 즉 원위치에 갖다 놓으면 “설인귀(薛仁貴)”가 금산(金山)에서 진격하여 ”부여(夫餘)성“을 칠 수 있다. 】 : 명 통지(明統志)에, 금산(金山)은 개원서북 350리 요하(遼河)의 북안에 있다. 또 서북 30 리에 동 금산이 있고, 또 20 리에 서 금산이 있는데, 이 세 산의 뻗친 줄기가 3백 여리에 달하는데 “오 량 해(烏梁海)”와 접경(接境)을 이루고 있다. 》
《 또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遼 金 所 置 眀 屬 烏 梁 海 其 稱 故 建 州 者 : 요(遼). (金)나라. 명(明)나라에 속하였던 “오 량 해”를 칭하기를 옛 건주에 있는 자들이라 하였다. 》 이 말은 곧 『“금산(金山) 곧 알타이 산” 주변과 접경(接境)하고 있었던 종족(種族)이 “오 량 해(烏梁海)”였으며, 또한 이들은 이전(以前)의 건주(建州)에 살고 있던 자들』이라는 설명이다.
과연 그럴까? 【반도사관(半島史觀)을 가진 분들은 이해(理解)를 하지 않으려 하니 말이다.】최근세기에 편찬(編纂)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찾아보자.
《烏 粱 海 ; 亦 作 兀 良 哈, 明 時 居 直 隷 長 城 外. 卽 蒙 古 東 部 地 方, 爲 朶 顔. 福 餘. 泰 寧 三 衛, 後 徙 外 蒙 古 西 北 部, 其 種 爲 突 闕 族, 語 言 風 俗, 則 以 喀 爾 喀 人, 自 稱 東 巴. 居 唐 努 山, 阿 爾 泰 山 之 間. 分 爲 三 部, 一 曰 唐 努 烏 梁 海, 二 曰 阿 爾 泰 烏 梁 海, 三 曰 阿 爾 泰 諾 爾 烏 粱 海. : 오 량 해(烏梁海) : 또 올 량 합(兀良哈)이다. 명(明)나라 때 직례(直隷)장성(長城)밖에 살았다. 곧 몽고 동부지방인데, 타안(朶顔). 복 여(福餘). 태 녕(泰寧) 삼위(三衛)이다. 후에 몽고(蒙古) 서북부로 옮겼는데, 이들 종족은 돌궐(突闕)족이며, 언어(言語) 풍속(風俗) 등은 곧 객 이 객(喀爾喀)사람들이다. 자칭 동파(東巴)라 하였다. 당 노산(唐努山). 아이태산(阿爾泰山)사이에서 살았는데, 삼부(三部)로 나누어져, 첫째는 ‘당노 오 량 해(唐努烏梁海)’, 둘째는 ‘아 이 태 오 량 해(阿爾泰烏梁海)’, 셋째는 ‘아 이 태 락 이 오 량 해(阿爾泰諾爾烏梁海)’이다. 》
㉠ 당노 산(唐 努 山) : 外 蒙 古 唐 努 烏 梁 海 南 境. 阿 爾 泰 山 之 大 支 幹 也. 唐 書 作 唐 麓 嶺. : 외몽고(外蒙古) 당노 오 량 해(唐努烏梁海) 남쪽지경이다. 아이태산의 큰 지간이다. 당서(唐書)에서 말하는 당 록 령(唐麓嶺)이다.
㉡ 당노오량해부(唐 努 烏 粱 海 部) : 外 蒙 古 西 北 境. : 외몽고(外蒙古) 서북(西北)지경이다.
㉢ 아이태산(阿 爾 泰 山 = 금산(金山) :《 亦 作 阿 勒 壇. 又 作 阿 爾 但. 蒙 古 爲 金 爲 阿 爾 但. 故 又 稱 金 山. 天 山 北 出 之 脈. 中略, 與 賀 蘭 山 勢 遙 連 : 또 아 륵 단(阿 勒 壇)이며, 또 아이단(阿 爾 但)이다. 몽고(蒙古) 말로는 금(金)을 아이단(阿 爾 但)이라 하며, 고로 칭하기를 “금산(金山)”이다. 천산(天山)이 북쪽으로 뻗은 줄기이다. (중략). 하란(夏蘭)산의 산세는 멀리에 있다. 》
● 결론(結論)을 내보자.
<오 량 해(烏梁海)>는 <올 량 합(兀良哈)>이며, 이들은 <건주(建州)>에 살던 자들을 말하는 것이며, 명(明)나라 때 직례【현재의 하 북 성(河北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성(長城) 밖에 살았으며, 이들은 몽고(蒙古)의 동부(東部)에 있었다.【몽고(蒙古)의 동부(東部)란 현재의 외몽고(外蒙古) 동부(東部)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眞實)된 몽고(蒙古) 강역(疆域) 곧 우랄산맥주위의 몽고(蒙古) 땅을 말하며, 그 동쪽지방이란 현 신강(新疆)의 북(北), 동북(東北)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즉 <타안(朶顔). 복 여(福餘). 태 녕(泰寧)>의 삼위(三衛)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언어(言語) 및 풍속(風俗)은 모두 돌궐(突闕)과 같았으며, 한 측으로는 객 이 객(喀爾喀)인이라 한다. 이들은 스스로 칭하기를 “동파”라 했고, 이들이 거주하고 있던 곳은 『당노(唐努)산과 아이태산(阿爾泰山)지간』이었다. 이들은 『당노 오 량 해(烏梁海), 아 이 태 오 량 해(阿爾泰烏梁海), 아이태락이오량해(阿爾泰諾爾烏梁海)』등 3부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을 자세하게 보면 :
《제 일부(第1部)인 당노 오 량 해(唐努烏梁海)는 외몽고(外蒙古) 서북(西北)지경이며, 제 이부(第 2部)인 아이태산(금산)오 량 해(烏梁海)는 신 강성(新疆省) 아산도(阿 山 道)에 속해 있고, 제 삼부(第3部)인 아이태락이오량해(阿爾泰諾爾烏梁海)는 지금의 러시아령에 속해 있다. 》고 기록, 설명하고 있다.
● 결론(結論)은 :
(1) <건주(建州)>는 <금(金)>의 발상지(發祥地)이며, 이곳 주위에 장백산(長白山)이 있었고, 이곳으로부터 발흥(發興)한 금(金)은 세력을 키워 북방(北方)지역을 호령하게 된다. 오량 해(烏梁海) 곧 올 량 합(兀良哈)는 아이태산(阿爾泰山)의 서(西)쪽과 서북(西北)지역으로부터 하란(夏蘭)山의 북방(北方)지역에 살고 있었던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여러 개의 물줄기가 합해지는 곳을 “요해(遼海)”라 했고, 이 “요해(遼海)”는 “요하(遼河)”의 상류(上流)지역이란 설명이다.
【 대 청하 + 소 청하 + 토 하 + 애하 = 요하(遼河)에 유입(流入)되며, 모든 물이 합쳐지는 곳을 “요해(遼海)”라 하였고, 이곳이 “요하(遼河)의 상류 근원(根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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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북방삼성’지방에 있다는 “요하(遼河)”는 전형적인 “짝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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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말하는 “요해(遼海)”는 당연히 『섬서(陝西). 감 숙(甘肅). 유림(楡林) 북변(北邊)의 삭막(朔漠=사막(沙漠)지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이들【 오 량 해(烏梁海) 곧 올 량 합(兀良哈)은 돌궐(突闕) 종족으로 오늘날의 몽고(蒙古)종족(種族)과는 다른 모습을 한 자들이다.】의 종족(種族)은 돌궐(突闕)종이며, 또한 삼위【三衛 : 타안(朶顔). 복 여(福餘). 태 녕(泰寧)】의 지리적 위치는 <현 신강(新疆)의 중부 이북(以北), 감 숙(甘肅)의 하서회랑(河西回廊) 이북(以北)의 외몽골, 러시아 접경(接境)지대>이다.
이들과 와랄(瓦剌)은 같은 종류(種類)로 보며, 청사고(淸史考) 신강(新疆)편을 보면 : 《迪 化 府 : 元末,猛可鐵木兒據之,為瓦剌國.至明正統中為乜先 : 원(元)말에는 “맹가 철목아”가 이곳에 웅거하였는데, 와랄(瓦 剌)국이다. 명(明) 정통 간에 야선(也 先)이 웅거하였다. 》고 기록해 놓고 있다.
2011년 12월 15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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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천산의 북쪽으로 뻗은 줄기가 아니태산(알타이산)이라 헸으니...
원래의 천산은 한탱그리산(황제하늘님산) 유역의 남북으로 뻗은 산맥이란 말도 돼는군요...?
천산은 근세에 이르는 몽골알타이(카자흐스탄알타이)를 말하는가 봅니다.
글을 대륙조선사연구회로 퍼 나르려 했더니...
박자우선생의 요청에 의해 박자우선생님과 제가 일체의 글쓰기 금지로 처벌돼어 있습니다...^. .^
박자우선생이 박자우선생을 처벌한다...?...저의 개인적 예감입니다.
대륙조선사가 왜 이리 진도가 않나갔는지의 단적인 예 같습니다.
적들이 이미 가두리양식장에 역사학도들을 다 가둬났단 생각은 저만의 기우인지 모르겠습니다.
<박자우>님께서 그러리라고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인터넷 공간에서 만난 분이나 과거의 공간에서의 행적을 보면, 결코 그럴 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저의 순진한 생각일지는 모르나, 믿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속성이란 겉과는 전혀 다르니, 참 안타까운일입니다.
확실한 것이 표면으로 부상할 때, 그때 코멘트할 까 생각합니다. 믿고싶지 않은 사실입니다.
"海"라는 자의에 대해 더 연구해 볼 필요성이 있네요 고사변등 여러 문헌을 보고 더 정밀하게 한다면 "海"의 개념이 확실해 질 듯하네요 좋은 글 감사요^^
저는 그 분들의 과거의 행적도 모르고 미래의 행적에도 관심은 없으나, 최소한 제가 활동했던 시기부터 지금까지만 놓고 보면, 쥐뿔도 아니면서 쥐인양 행세하는 꼴이랄까요. 그래서 그냥 거기 소식은 관심 끊은지 오래입니다.
어제 밤 늦게 <대륙조선사연구회>를 노크했더니, 일반인들은 아예 글을 읽을 수 없도록 잠가 버렸더군요. 회원이 아닌 사람은 아예 볼 수 없도록 말입니다.
그래 놓고는 우리 카페 글을 성토하는 것인지, 아니면 검증이라도 해 보고 싶은 것인지.........그들만의 목적(?)은 분명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 대륙조선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재대로 된 말을 삼가한 것인데, 만약 더 이상의 우리 카페에 관한 것들을 가지고 왈가불가한다면 조치를 취해야 되겠지요.
그들의 목적을 확실히 파악해야 겠지요. 재미있는 세상입니다.
저도 손님으로 보았더니 이제는 볼 수 없도록 잠가놓았습니다. 주인들을 내쫒고, 객들이 쑥대밭을 만들 작정같습니다... 제가 쓴글도 다 지웠어야 했는데,...
그 쪽 카페 움직이는거나 하는 짓을 보면 운영진쪽에 멀티아이디가 있는게 아닌가 혹시 의심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