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과 같이 닭재(계현, 대전시 동구 삼괴동에서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 사이의 고개) 방문 시 제가 반드시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천(狗川)에 관해서입니다.
구천(狗川)이라는 말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옥천에서 성왕이 죽은 구천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군서면 월전리 군전부락을 감싸고도는 협곡인 구진벼루(구전벼루)로 보는 견해(다수가 인정)
다른 하나는 군북면 이백리의 갯골(식장산 자랏)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구진벼루는 개구자에 건널진이고, 벼루는 벼랑이라는 뜻으로 구천을 건너는 곳에 있는 벼랑이라는 뜻(이는 관산성 전투 후반에 중요한 전투지역 임)으로 주변의 성들과 구진벼루 주변의 지명이 진터벌, 염장, 말무덤고개, 무중골, 군전등을 미루어 추정을 하는 것이고, 갯골 역시 개라는 지명과 주변의 산성과 이백리의 승지골의 전설등을 미루어 추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개와 연관된 지명에서 구천을 추정을 하나 구천이 서화천이라고 하는데는 거의 이설이 없고, 성왕이 죽은 곳이 어디인가에 대한 설명인데, 상기 추정은 서화천이 구천이라고는 연관을 구체적으로 설명을 못합니다.
반면에 닭재(계현)에서 옥천쪽으로 가다보면 논골이 나오는데 논골 주변으로 수캐골이 있습니다. 아래의 지도를 보시면.
2번 성이 계현산성이고, 5번 성이 성치산성입니다.
빨간 표시의 수캐골은 하나의 골을 이루어 성치산성 밑 명경소류지 경유 서화천으로 흐릅니다, 즉 옛날의 길은 대부분 물따라 난다는 말에 기초하면 닭재에서 가장 편한 길인 수캐골을 따라가면 서화천에 이르는데, 백제인들이 서화천을 수캐골의 개와 냇가의 천을 합하여 구천이라 하지않았을까 추정을 해봅니다. 그래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구천이 언급된 것 같습니다.
파란 표시의 논골은 사양리쪽과 수캐골 중간을 논골이라하는데, 사람들이 사양리쪽으로 들어와 영농을 하면서 생겨난 말로 추정이 되어 수캐골보다 논골이 늦게 생긴말로 추정을 합니다.
따라서 닭재에 오시면 계현산성과 성치산성 사이에 수캐골이 있는데, 이 수캐골은 그 옛날 백제인이 대전방면에서 옥천쪽으로 갈 때 경유한 골짜기로 추정되면 이 골짜기 지명에서 구천이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미에서 수캐골을 잊지않았으면 합니다.
이 닭재는 관산성 전투 시 백제 성왕이 대전의 사정동 산성, 소호동 산성, 공주말를 경유해 옥천으로 갈때 지나간곳으로 추정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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