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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자연과 조응하다
-박영자 수필집『해자네 앞마당』의 경우-
(프롤로그)
디지털 시대인 21세기엔 네트워크화 된 컴퓨터 환경 탓에 종이에 인쇄된 활자체는 사멸의 운명을 맞을 것이라 한다. 이와 달리 박영자의 수필집『해자네 앞마당』엔 그동안 문학작품에서 느꼈던 ‘미학적 거리(aesthetic distancc)'가 좁혀졌음을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다. 작가와 독자와의 거리가 좁혀지는 일은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에서 바람직한 일이라 여겨진다.
1)자연, 영원의 보금자리
박영자의 수필집『해자네 앞마당』이 단숨에 읽혀지는 것은 내용의 공감성 때문이다. 현대 산업사회는 분초를 다투어 세상을 변모시키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자연은 인간이 기댈 수 있는 영원의 보금자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이란 존재를 삼라만상의 한 요소로 인식할 때 이 명제는 더욱 선명해 진다. 그러하기에 모든 생명체는 자연의 소중함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 세대의 과제는 산업문명으로 인한 지구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후손을 위해 하나 뿐인 행성을 살려내는 길이다.”. ‘환경 다큐멘터리 영화 ’11번째 시간( The llth Hour)'을 제작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말이 아니어도 자연은 생명의 젖줄이다.
특히 박영자의 수필「봄비의 약속」은 자연 친화를 주창하되 풍부한 감수성과 ‘봄’에 대한 섬세한 표현이 겨우내 꽁꽁 언 가슴을 따스하게 녹여주는 훈풍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매우 인상 깊은 작품이다.
-남풍에 실려 새색시 걸음으로 살금살금 오는 봄비는 잠자는 새 생명을 흔 들어 깨운다. 손나발을 하고 가늘고 고운 목소리로 “어서들 일어나. 봄이 야! 내가 왔다고.” 들릴 듯 말 듯 속삭인다. 봄비는 북쪽으로 걸음을 옮기 며 언 강을 풀어주고 실개천의 물을 부풀려 물소리를 스스로 키우며 흘러 갈 것이다.- <「봄비의 약속」 중에서>
봄의 훈풍이 집안까지 불어와 두 볼을 간질일 듯 착각하게 하는 봄 풍경의 뛰어난 묘사다. 이는 베이컨의 “상상은 사실의 세계에 매이지 않고 사실들을 마음대로 변형시켜 사실보다 더 아름답게, 더 다양하게 만들어 즐기는 것이다.” 라는 주장보다 심도가 더 강한 수필적 표현이다.
흰 눈이 펑펑 내리는 밤에 이 글을 읽어보라. 삼라만상을 일깨우는 봄기운에 혹한도 범접할 수 없는 온기를 느끼리라. 벗어나기 어려운 우리네의 겨울 같은 팍팍한 삶, 그러나 분홍 옷으로 치장한 진달래가 봄을 안고 다가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그런대로 살맛나지 않던가.
-베란다에서 자라는 내 식구들도 봄비를 맞고 싶다고 창밖을 기웃거리며 수런거린다. 내가 주는 물을 먹고 자라고 꽃을 피우지만 봄비 한 그릇 마 시면 보약처럼 소생할 것 같다. 그네들의 얘기 소리가 내 귀를 간질인 다.- <앞 글 중에서>
예로부터 봄비는 단비, 혹은 떡비라고 하였다. 한 방울의 봄비에 한줌의 땅이 녹색의 분칠을 하고, 한 줄기의 봄비가 실가지의 눈을 트게 한다. 이런 봄비의 속성에 반하여 작가는 「봄비의 약속」 글에서 ‘봄비 한 그릇 마시면 보약처럼 소생할 것 같다.’ 라고 표현했나보다.
-봄비가 그치면 농부들은 이제 바빠질 것이며 고단함 속에 삶의 의욕도 솟 아 날 것이다. 반만년을 이어온 그 습관보다 더 위대한 것은 다시없다. 나 도 내 나름의 농사를 시작한다. 겨우내 잠자던 야채 재배 상자를 끌어내어 흙을 부순다. 골을 타고 엊그제 육거리 시장에서 사다 놓은 열무 씨와 적 상추씨를 뿌린다. 봄비처럼 가늘게 물을 주려고 물뿌리개가 바쁘게 물을 나른다. 손바닥만 한 내 밭이지만 거기서 싹이 트고 자라는 모습을 보며 뻔히 아는 신비한 일에 다시 감동하며 나는 배가 부를 것이다. 생명을 지 켜보며 삶의 의미를 깨닫고 희망도 심을 것이다. 얼었던 내 마음의 땅도 함께 갈아엎어 마음의 씨앗을 뿌린다.- <앞 글 중에서>
작가의 봄은 언제나 베란다에 심어놓은 화초가 전령사처럼 전해준다. 농부가 봄비를 기다리며 농사일을 준비하듯, 작가 박영자도 봄을 맞을 채비로 분주하다. 야채 재배 상자를 끌어내어 흙을 부수어 깔고, 골을 타 시장에서 사온 채소 씨앗을 뿌려야 한다. 이는 단순 작업의 농사일이 아닌 듯싶다. 하나의 생명을 키워낸다는 노동의 의미와 더불어 세월의 무게를 벗어나려는 여인의 몸부림이 내포돼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색깔로 치면 회색빛이다. 그래 노인들을 위한 복지 시설을 실버타운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박영자는 칠순이 넘은 노령의 문필가이다. 그러나 연령을 초월한 참신한 시각은 젊은 문인들이 본받아야할 관점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는 세상 보는 눈은 매우 따뜻하고 정이 담뿍 담겨있다.
‘얼었던 내 마음의 땅도 함께 갈아엎어 희망이란 씨앗을 뿌린다.’
육신은 늙어가나 마음은 그대로이기를 소망하는 작가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표현이다. 자연의 이치를 거역하지 않고, 순리에 따르겠다는 겸허함이 잘 드러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희망과 사랑이 담긴 박영자의 화분에는 오늘도 새싹이 돋고, 망울이 터지며 환희의 함성이 서린 예쁜 꽃들이 활짝 피어나리라.
-이 비가 그치면 첫사랑처럼 찬란한 봄 햇살 속에서 매화의 젖멍울 같은 봉오리가 축포를 터뜨릴 것이다. 여기저기 제비꽃들이 다복다복 피어날 것 이며, 들판은 곧 임산부처럼 부풀어 올라 해산의 기쁨을 만끽할 것이다. 보리밭이랑은 초록이 눈에 띄게 짙어지고, 봄나물들이 여기저기서 ‘나 살 아있었어요.’ 하며 눈을 맞출 것이니 봄빛 속으로 나물을 캐러 나갈 것이 다. 달래를 넣은 된장찌개가 구수하고, 신선한 봄나물 밥상 앞에서 식욕이 당기어 가족들의 웃음소리는 담을 넘을 것이다.- <앞 글 중에서>
겨우내 움츠렸던 들판이 새봄을 맞아 생동하는 것을 두고 ‘임산부 배처럼 부풀어 올라 해산의 기쁨을 맛볼 것’이라 했다. 적절한 비유이고, 절절한 표현이다. 산문이 해낼 수 없는 함축미도 갖추고 있는 탁월한 문장이다.
수필의 생명은 소재의 참신성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 하찮은 소재가 한 편의 훌륭한 글로 둔갑 할 수도 있다. 이는 능력 있는 작가를 만났을 때 가능하다. 「이팝꽃 필무렵」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지천으로 피어있는 이팝꽃이 박영자라는 작가의 능숙한 문장력과 예리한 주제의식에 힘입어 화려한 장미로 피어났다고 말이다.
-지금이야 쌀밥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배부른 소리를 하는 세상이 되었고, 배고픈 북한 동포들을 도와주기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팝나무를 볼 때마 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보릿고개를 넘기던 민초들의 설움을 이해하기 때 문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이 이팝꽃을 보고 하얀 쌀밥을 연상하며 위로를 받기나 했을까. 아니면 더 배가 고팠을까…- <「이팝꽃 필무렵」> 중에서.
밥풀떼기를 닮은 이팝꽃을 보고 시장기를 느끼며 자란 구세대의 머릿속에, 입맛을 투정하는 신세대의 모습이 그리 예쁘게만 보이지 않을 터이다. 보릿고개가 어디에 있는 고개냐며 질문하는 그들에게 어제의 이야기는 하나의 푸념으로 들릴 뿐이다.
-어느 날 신문을 뒤적이다가 한 장의 사진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지붕 위 넓은 공간에 동글동글한 빵 같기도 하고 과자 같기도 한 것들이 몇 백 개 줄을 지어 널려있고 저만치 피부가 까만 여인이 양동이 같은 통에 그것을 주워 담는 듯싶은 사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납득이 가질 않았습니다. 얼른 보기에는 무슨 소꿉장난 을 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사진의 여인은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었지요. 사진 밑 에 해설을 읽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습니다.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 스에서 찍은 것으로 지붕위에서 ‘진흙쿠키’를 햇볕에 말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팝꽃 필무렵」 중에서>
진흙으로 쿠키를 빚어 햇볕에 말리는 사진을 본 작가는 ‘밥’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밥’은 모성이다. 어머니의 사랑처럼 절대적인 우리의 생명 줄이다. 또한 어머니의 사랑 없이 우리의 심신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듯 ‘밥’을 구할 수 없는 일은 삶의 고통이다. 한편 ‘밥’은 사회적 신분을 의미하기도 한다. ‘먹고 살기 걱정 없다.’ 여기서 ‘먹고 살기’는 부와 사회적 신분의 높낮이를 가늠하게 하는 잣대가 아닐까 싶다. 그래 ‘밥’은 어쩌면 인간 능력의 척도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이런 ‘밥’이 없는 절망의 삶이 지구촌 어느 나라 수도에서 일어나고 있다니, 연 8조원이 넘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다는 우리의 신문기사를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자고로, 역사는 물과 더불어 풍성해진다는 등식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고장 청주의 무심천은 새록새록 시민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오늘도 말없이 자기의 길로만 흐르고 있는 무심천, 이 무심천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수필가 박영자와 더불어 무심천을 동행해 보자.
-청주에 젖줄인 무심천이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아니 애초에 무심천이 있었기에 청주가 생겨난 건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어머니 품속에 안긴 듯 푸근함에 위로를 받는다.
나처럼 휘적휘적 걷는 사람, 자전거 도로를 씽씽 달리는 사람, 손을 잡고 걷는 가족들, 둑에서 쑥을 뜯는 할머니의 얼굴도 모두 여유롭고 평화롭다. 처음 보는 이들인데도 눈인사로, 미소로 아는 체를 하며 지나간다. 모든 게 무심천 물길처럼 급하지 않고 여유롭다.-- <「무심천을 거닐며」중에서>
투자를 한만큼의 무심천은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예전과 달리 오염된 그것에서 풍기던 고약한 냄새도 이젠 없어져 청정수에 가까워졌다. 누구보다 수필가 박영자는 무심천을 좋아한다. 작가의 자연친화적 사상은 이렇듯 이 글에도 배어있다.
박영자의 자연친화적 사상은 「해자네 앞마당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학교만 파하면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순례를 하는 요즘 아이들은 노는 일에 매우 서투르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하여 사회성을 기르고 남과 어울려 사는 법을 터득하기 마련이다. 또한 놀이를 통하여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학교 시험에서 만점을 맞는 것을 최고의 능사로 알아서인지 지나친 경쟁의식 탓에 남을 누르고 올라서는 법을 익히기에 혈안이 돼 있다. 이런 아이들의 지나친 경쟁의식에서 빚어진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해자네 앞마당」에 상세히 표현돼 있다.
-지금 이 아이들의 노는 모습은 모두가 혼자다. 편을 갈라서 승부를 내는 놀이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개인주의의 모습이 놀이터에서도 실감나게 느껴진다. 이 아이들은 집에서도 혼자서 인터넷으로 정보의 바다를 헤엄쳐 다닐 것이다.--< 「해자네 앞마당 」중에서>
인터넷, 컴퓨터 게임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훗날 성장하여 어린 날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무엇을 간직 할 수 있을까? 박영자의 「해자네 앞마당」에 표현된 내용처럼 인터넷에 심취했던 자신의 지난날 모습이 어린 날의 추억으로써 전부라면 동심과 거리가 멀어 너무 삭막하다. 과연 먼 훗날 어린이다운 놀이 문화를 떠올릴 수 있을까? 작가가 표현한「해자네 앞마당」은 단순 어린 날의 추억이 서린 놀이터 의미의 장소만은 아니리라. 요즘 어린이들 가슴에서 동심을 앗아가는 것들에 대한 경계와 눈부신 문명의 그림자로써 아이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는 것들에 대한 우려 깊은 표명이 잘 드러난 작품이어 매우 시사적이기도 하다.
-우리 어릴 때보다 아이들 숫자는 몇 배 늘어났는데 놀이문화는 퇴보하여온 것이 아닌가싶다. 학교가 파하면 이 학원 저 학원을 순례해야 하는 아이들이 언제 모여서 땀 흘려 놀 새가 있는가. 그 시절 우리는 놀이시설도 아무 것도 없는 빈 마당에서 어울려 놀면서 다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면서 암암리에 사람끼리 어울려 살아야 하는 이치를 배웠다. 양보하는 법도, 남을 배려하는 법도 스스로 익혔다. 그 놀이터에 어른들은 아무도 없었다. < 앞 글 중에서>
해자네 앞마당은 자연이었다. 신선한 바람을 접하며 아이들이 맨발로 흙을 밟고 뛰놀 수 있었던 해자네 앞마당은 자연 그 자체였다. 이젠 해자네 앞마당은 회색빛 촌에 갇혀 사는 아이들에겐 먼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놀이 장소일 뿐이다. 아이들 곁에서 ‘마당’을 앗아간 것은 현대의 건축 설계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뛰어놀 마당이 없잖은가. 시멘트로 뒤덮인 아파트에서 어찌 아이들이 흙 내음을 맡을 수 있으며 맘껏 친구들과 온몸을 부딪치며 뛰어놀 공간이 어디 있던가. 무엇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1등 주의’가 어린이들 가슴에서 마당을 상실하게 했다.
2)원초적 본능, 해학의 묘미
삼복더위 하절기 때면 곧잘 백화점에서 더위를 피할 때가 있다. 백화점에는 죽부인이라는 좀 괴이한 이름의 물건이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고안해 낸 피서기구이다. 이름을 부인이라 붙였으니 껴안고 잠자라는 뜻이다. 우스갯소리로 죽부인에 투기하여 규수가 내쫓김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수필「죽부인과 죽노」에는 유머와 위트가 넘쳐있어 죽부인 이상의 청량제가 된다.
-인터넷을 뒤져 죽부인을 주문했다. 죽세공품은 담양 것이 으뜸이라기에 그 쪽 것을 택했다. 며칠 후 배달된 죽부인을 본 남편이 "이게 뭐야?" 하 며 놀라는 기색이다.
"뭐긴 뭐요. 당신 둘째 마누라지…."
남편은 싫지 않다는 듯 호탕하게 껄껄껄 웃는다. 그러더니 얼른 집어 들고 포장된 맑은 비닐을 벗기려고 매듭을 푼다. 나는 때 안 묻게 그냥 쓰지 뭘 벗기느냐며 말리자니,
"마누라 속살도 못 만져보고 옷 입힌 채 안고 자면 무슨 재미야?"
익살스런 그의 말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남편의 속마음을 본 것 같아 눈을 흘긴다. 하긴 비닐을 벗겨 놓아야 대나무살 사이로 공기가 통할 터이니 맞 는 말이다.
그런데 비닐 한 겹을 벗기고 났더니 속에 또 한 겹을 싸 놓았다.
"그 놈의 몸뚱이 뭐 대단하다고 이렇게 단속을 했누?"
남편은 정말 둘째마누라 속옷을 벗기는 재미라도 보는 듯 희희낙락이다.-
<죽부인 중에서>
죽부인을 남편의 애첩으로 의인화 한 내용이 독자의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한다. 해학적인 수필이 때로는 에너지를 제공하기도 한다. 남편이 죽부인의 속옷을 벗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누라 속살도 못 만져보고 옷 입힌 채 안고 자면 무슨 재미야?"「죽부인」수필에 표현된 이 내용으로부터 독자가 얻을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 절로 입가에 맴도는 웃음이 선사하는 즐거움이 그것이다.
-벗겨 놓고 보니 푸른빛이 도는 청대로 만든 것이 크기도 알맞고 기물답 다. 쭉 빠진 미인이니 마음에 든다. 남편은 한 번 쓰다듬어 보더니 거실 돗자리 위에서 여자라도 품듯 한쪽 다리를 척 걸쳐 얹은 채 꼭 끌어안고 옆으로 눕더니
"아! 시원한데 이 여자 차곰차곰한 게 촉감도 좋다! 당신 고마워."
하며 나를 약 올리듯 빙글거린다.
‘내가 공연한 짓을 한 게 아닌가?’
내가 끌어안고 자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꼭 남편을 위해서만 샀노라고 한 것도 아닌데 당연히 자기 것이라는 듯 하는 짓이 심통이 난다.
"너무 좋아하진 마셔. 볼썽사나우니까."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고나니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찜찜했지만 남편도 움찔하는 눈치다.”- <앞 글 중에서>
여인의 질투는 무죄이다. 남편은 죽부인을 마치 애첩인양 품에 끼고 아내 앞에서 천연덕스럽다. "너무 좋아하진 마셔. 볼썽사나우니까." 농담 속에 진담이 있다고 했다. 이것이 여인의 솔직한 속내인지 모른다.
대나무만이 갖는 찬 기운, 성근 구멍을 통하여 전달되는 자연풍, 우리 조상의 멋과 지혜가 한껏 돋보이는 명품이다.
-높은 담장 안에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화창한 봄날, 과부로 보이는 양반집 마님과 몸종이 내원의 그루터기에 앉아, 마당 한 쪽에서 짝짓기에 열중하는 개들을 곁눈질로 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다. ‘이부탐춘(二婦耽春)’이라는 이 그림은 오래 눈길을 두기조차 민망하다.
은근하기로는 사시장춘(四時長春)을 따라갈 그림이 없다. 멀리 계곡과 폭포가 보이는 한낮, 한적한 후원 별당의 장지문은 굳게 닫혀있고, 툇마루에는 남녀의 신발 두 켤레가 놓여있다. 봄이 무르익어 꽃은 만발한데 술 쟁반을 받쳐 든 계집종이 엉거주춤 방 앞에 서 있다.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구성이지만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숨은 뜻에 저절로 미소가 번진다.- <「풍속도」 중에서>
우리의 한옥 구조에 툇마루는 방과 방이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툇마루 아래 놓인 남녀 신발 두 켤레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방문을 열고 확인하지 않아도 그 방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짐작하게 한다. 언어가 갖는 상징성이다.
때는 바야흐로 백화가 만발하는 춘절이다. 방안의 분위기를 눈치 챈 계집종이 술 쟁반을 받쳐 들고 엉거주춤 문밖에 서 있으렸다. 이를 두고 손쉬운 표현으로 해학적 미학이라고 하지 않는가. 마치 원본 춘향전에 나오는 두 주인공 성 춘향과 이 도령의 사랑 짓을 보는듯한 장면이다.
3) 소소한 행복 만들기
백화점, 옷 상설 매장마다 유행을 앞서는 기성복이 진열돼 있어 언제든 자신의 체형에 맞는 옷을 사 입을 수 있는 시대이다. 기성복에 밀려 양장점, 양복점이 동네에서 사라진지 이미 오래이다. 지난날 가정에 재봉틀 한 대 있으면 부자 부럽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아낙들의 바느질 솜씨에 의지해 식구들 의복을 마련했으니 현대에 비춰볼 때 격세지감마저 느낀다. 그땐 식솔들의 옷을 손수 만드는 일을 당연시 했으나 요즘처럼 바쁜 현대인들은 꿈도 못 꿀 일들임이 분명 하다. 박영자는 재봉틀로 바느질을 하는 어머니의 젊은 날 모습을 떠올리며 가족들을 향한 어머니의 진한 사랑을 새삼 반추하고 있다.
-어머니는 14살 때 한복을 처음 짓고 동네 어른들께 칭찬을 받을 정도로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셨단다. 솜씨 있는 사람이 일복이 많다고 늘 그것을 돌리셨다. 그것으로 바느질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각박하지는 않았다. 그저 가족들을 위해 그것을 최대한 부리면서 행복에 젖곤 했다. 옷감을 끊어다 아버지의 노타이셔츠를 만들거나 자식들 옷을 만들어 입히는 일이 어머니의 취미고 행복이었다. 꽃무늬가 귀여운 천을 끊어다 내 원피스를 만들어 입히고 흡족해하거나 멋진 천으로 당신의 치마나 블라우스를 만들어 입고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 「봉순이」 중에서>
손수 옷감을 골라 와서 가족의 옷을 지으며, 행복을 만끽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도 한없는 행복에 젖었다는 작가의 소박한 마음이 비단결보다 더 곱게만 느껴진다. 이렇듯 여인의 행복은 엄청나게 크고 대단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숨겨져 있는 지도 모른다.
4)나가면서-- 작품의 원천, 사계의 아름다움
사계의 혜택을 받고 사는 국민을 복된 국민이라고 했다. 봄이 있어 꽃 향에 취해볼 수 있고, 여름이 있어 녹음에 싸여볼 수 있고. 가을이 있어 단풍에 젖어볼 수 있고, 겨울이 있어 백설의 낭만을 안아볼 수 있으니, 이 보다 더 복된 국민이 또 어디에 있다던가.
이것이 자연을 사랑하는 박영자의 수필에 깃든 아름다운 정신세계이자 뛰어난 작품을 창작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김혜식 약력: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청주문인협회 회원
현, 독서신문, 충청타임즈 고정 필진
제11회 청주문학상, 아시아 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청주예총 예술 공로상 수상.
저서: 수필집 『내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독서에세이『예술의 옷을 입다』, 칼럼 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연락처: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창직로 50 푸르지오 캐슬 아파트 408동 402호
010-3117-9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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