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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겨울은 유난히도 바람이 매섭다. 세기말이라는 것이 무엇 그리 대단한지 모르겠다. 조각조각 내다보면 일초에서 또 다른 일초로 넘어가는 것뿐인데도 말이다.
윤민, 항상 밝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아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심각한 표정이다. 남자아이치고 속눈썹이 길었는 그였기에 그의 심각한 표정은 슬픔에 가깝게 만들어져서 로뎅이라도 일년을 넘게 고민 해야지만 표현할 수 있는, 코발트(cobalt)빛이 가진 차갑고도 애수에 젖은 듯한 빛이 그의 얼굴 여기여기 묻어난다.
고아원에서 5살 때 입양된 지 보름만에 양부모가 교통사고로 죽고, 그 꼬리표 때문인지 민이를 입양할 부모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민이를 딱하게 여긴 고아원장은 고아원에 계속 남아 있도록 민을 도와 줬다. 하지만 그것도 고등학교를 졸업함에 따라 더 이상 있을 수도 없게 됐고, 원장의 허락이 있더라도 고아원의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기말, 세기말 외치면서도 어느 누구하나 선 뜻 큰돈을 기부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다 못해 작은 액수에 돈이라도, 어쩌면 세기말은 지금이 아니라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서는 각박한 현실 일 것이다.
하지만 민이에게는 세기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사람들의 표정과 흡사한 것은 대학을 합격했기 때문이다. 고아원에서 나가야하는 형편에 대학이라니 그것은 꿈의 영역일 뿐이다. 이제껏 자신이 고아라는 것을 누구에게도 원망치 않고, 운명 그 자체를 받아들이며 사고한번 안쳤던 민이는 누구를 원망하기보다 자신이 싫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또래의 친구들이 대학에 합격했다고 좋아하는 부러워 할 마음도 시기할 마음도 없지만, 민이도 같은 일이었는데 왜 자기만 기뻐하지 못하는 가에 대한 자멸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아프고 시리고 죽을 것만 같았다. 세상에 신은 있는가에 대한 회의마져 느끼는 민이었다.
그 해 겨울 유난히도 서글픈 바람이 민에게 불고 있었던 것이다.
"민아!"
민을 부른 것은 그의 절친한 친구 태식이다. 태식은 민이와 다른 운명의 아이였다. 중학교부터 친구였던 그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태식은 양부모가 건실하고도 부유했기에 민이와 달랐고, 어린 그들은 그런 이유에서 많은 다툼을 하고 난 후 이제는 누구보다도 우정을 과시하는 친구였던 그들은 이제 형제나 다름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충실하다.
"응?"
민의 눈에 초점이 없다.
난생 처음 마신 술이라서 인지 소주 반병에 민이의 눈의 초점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내가 도와줄까?"
"후"
민의 힘없는 웃음은 태식에 대한 애정이었다. 태식이 등록금만 주면 나머지는 민이 벌어서 다닐 수 있지만 민이에게 그런 문제는 차후였다. 민에게 지금 가장 심각하고도 급한 건 다른 아이들과 달리 이렇다할 사춘기의 열병도 앓지 않고 보낸 민이가 아프기 때문이다. 민이의 영혼이 시름시름 열병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민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태식이지만 이렇다할 방법이라곤 민이가 스스로 그것을 극복하는 길밖에 없었고 세시간여의 긴 침묵 끝에 해준다는 말이었기에, 둘 모두 하기도 어색하고 듣기도 어색한 말이었다.
또 다시 긴 침묵이 흘렀지만 태식이 만들어 준 미소가 민의 영혼에 그대로였다. 당장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이고 무엇으로도 해결되기 힘든 문제지만 말없이, 왜 그러냐는 말이 없이 곁에 있어주는 태식의 마음이 고맙게 여겨져서인지 민은 미소를 그대로 둔 체 다시 침묵을 지키고 만다.
"야! 임마. 궁상 그만 떨자."
민의 눈치만 살피던 태식이 갑작그레 소리치며 태식의 머리를 한 대 갈긴다. 민은 그런 태식의 행동에 사뭇 놀란 표정이다. 가정형편이나 무엇으로 봐도 태식의 성격이 활발한 것 같지만 그것은 민이를 만난 후 였다. 민이가 오히려 활발했고 누가 보아도 고아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밝은 아이였다. 그런 성격은 지금가지도 유지가 되고 그렇기에 태식의 갑작스런 행동에 민이가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체 두 배로 커진 눈으로 태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의 모습에 태식도 어색한 듯 얼굴이 한껏 달아 오르고 말았다.
"뭐냐?"
민이가 입을 열었다. 무려 4시간 만이다.
"뭐...뭐긴, 궁상 떨지 말자고."
"뭐?"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태식의 어색한 모습을 놀릴 심산으로 민은 인상을 찌푸려본다. 고마운 마음, 민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태식의 맘이 고마운 것이다.
"아니...그냥 우리 고딩 딱지도 뗐는데....."
"뗐는데 뭐?"
"아 그러니까......나이트."
"나이트 가보고 싶냐?"
태식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요즘 그만한 나이면 나이트 같은 곳은 다 한번쯤 가봤지만 태식과 민은 그렇지 못하다. 민은 그렇다 치더라도 태식은 숫기가 없고 부끄러워서 아직 나이트를 가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민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나이트 같은 건 여전히 어떤 이유에서이든지 호기심도 발동시키지 곳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나이트란 곳은 더없이 딴 생각하기에 좋은 곳임이 분명했고 망설일 여지가 없는 두 사람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일어서서 옷을 챙겨 입었다.
"가자!"
태식의 집에서 번화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오늘 따라 거리는 사람들이 더 많이 돌아다니는 느낌이다. 거리가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마음씨 좋은 아줌마가 만들어 놓은 김밥 모양이었다. 민이가 태식에게 거리가 김밥이라고 했다. 밥알 가득 혹은 색색의 자동차가 가득, 사람들 중 한 명이 못 견디고 터져 나갈 듯한 거리의 풍경이었다.
"하하하. 그것도 그럴 것 같네."
태식이 크게 웃어 보인다. 민이도 자기가 한 농이지만 크게 웃어 보인다. 답답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려서인지 그들은 시덥지 않은 농담 한마디에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 진짜 나이트가?"
크게 웃다가 태식은 자기가 꺼내 놓은 말이지만, 지레 겁먹은 눈빛으로 민이게 묻는다.
"그래"
민이 역시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태식의 겁먹음 탓인지 단호히 대답을 하면 한 꺽 웃음 참는 모습이다.
"웅?"
"아, 가자구"
"응......"
태식의 콩닥이는 심장이 얼굴까지 후끈거리게 만들었다. 큰 한숨을 지어 보이는 태식이었다. 태식이나 민이나 나이트는 설레기보단 두렵기 마련이었다. 그냥 춤을 추고 술을 마시는 곳뿐인데도 태식과 민에게는 두려움으로 느껴지고 만다. 아직까지 사회에서 어떤 유희란 그저 어른들의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을까. 그들에게 나이트란 곳은 어른들의 영역이라 생각 되었을 것이고, 그런 생각이 적잖게 수줍음으로 혹은 설레임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선다.
파라다이스 나이트. 나비넥타이에 비까번쩍 검정구두와 기름 좔좔 번질거리는 올빽머리. 입구에서 또래의 한 남자가 허리를 굽힌다.
"어서옵쇼"
"네......"
태식이 어색해하며 웨이터 보다 더 허리를 굽힌다. 웨이터의 눈빛이 '초짜'구나 하는 말이 간질간질하다. 그런 웨이터의 눈빛을 민이가 읽은 듯, 민은 태식의 머리를 한 대 갈기고서는 한마디를 내 뱉는다.
"가자, 하하! 이놈이 나이트는 처음이라...."
민이가 내뱉은 말에 태식은 나즈막이 궁시렁거린다.
"지도 처음이면서......"
시끄럽기 그지없다. 세상 모든 사람이 비틀거리며 음악을 타고 있었다. 그러나 둘에게는 음악이 아니라 소음에 가깝고 세상 모든 사람이 비틀거리며 기차를 타고 있는 것이었다. 캔맥주 하나를 금방 마셔 취한 사람들이.
"야!"
태식이 민이를 부르나 음악소리가 어찌나 큰지 그 소리가 민에게까지 가기는 힘들다.
"야! 윤민"
더 큰 소리로 민을 불러보지만 마찬가지였다. 태식은 급기야 민의 어깨쭉지를 잡아 댕기고 이제야 민이가 태식을 쳐다본다.
"어...어?"
민이는 난생 처음 와 본 나이트에 어안이 벙벙하기 그지없다.
"야 저리가자"
태식이 구석에 작은 테이블 하나를 가르키며 말을 했다.
"그래"
오히려 태식 쪽이 담대해 보였다. 입구의 웨이터에게 챙피함을 준 복수정도 였다. 곧이어 웨어터가 맥주 세 병과 마른안주 따위를 가져오고 민에게 묻는다.
"부킹 하시겠습니까?"
"네?....아 네."
민은 웨이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소음도 소음이지만 부킹이란 말을 알고는 있으나 아는 언어가 실제에서 사용되어지면 낯 설은, 그저 언어의 낯설음 탓이었다.
"네, 그럼 잠시만."
웨이터가 작은 메모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이더니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뭐래?"
웨이터의 말을 태식도 못 알아 들은 눈치다.
"몰라"
둘은 또다시 큰 소리로 웃고 만다. 지난 몇 시간의 깊은 슬픔을 떠나 낯설음에서 얻은 웃음이었기에 더욱 크게 웃어 보인다. 깊은 슬픔이 익숙하다면 낯선 행복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서였을 것이다.
민과 태식은 어느 덧 소음이 익숙해진 듯, 둘 다 어깨를 들썩인다. 하지만 그 모양이 여간 어색했는지 서로의 눈 빛이 마주칠 새도 없이 웃음이 비쭉 나오고, 다시 어깨를 들썩이고 그렇게 몇 번의 반복을 중단시킨 것은 아까의 웨이터였다.
"저 손님 저쪽으로 가시겠어요?"
웨이터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민이 또래의 두 명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다지 밝지 않은 곳이기에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이쁘장 하니 고운 빛나는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아까 웨이터의 한 말을 알아차린 민이었으나 태식은 여전히 모르는 눈치다. 그리고 민이가 이리저리 피하는 기색이자 웨이터는 민의 손을 낚아채서는 고운 빛나는 여자 아이 테이블로 끌고간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민의 볼이 붉어진다.
"저 그럼 좋은 시간 되십쇼."
여자 아이들의 테이블 중 빈 의자에 민을 앉힌 웨이터는 깍두기 인사와 함께 안내멘트를 하고 사라졌다. 민은 얼어붙은 동상이 되어 눈동자만 갈 길을 잃었다.
"너 몇 살이니?"
"네.......네?"
두 여자 아이 중 발랄한 미소가 생긋 귀여운 아이가 민에게 대뜸 말을 건넨다. 시작부터 반말인 것도 그러했지만 여전히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기에 나이트안은 너무 시끄러웠다.
"쿠쿠"
민으로서는 원인 모를 여자아이의 웃음이 여간 어색하지 않다.
"몇...살이냐구!"
"여...아니 스 수물살."
나이를 속일 생각은 없었으나 여자아이의 웃음에 자신도 모르게 나이를 속이고 만 것이다.
"진짜?"
하지만 여자아이는 믿지 않는 눈치다. 부킹란 것 혹은 나이트에 익숙한 아이처럼 이 곳에 오는 모든 사람의 나이를 파악하는 듯한 물음을 던졌다.
"어....어"
"에이 너 올해 졸업이지. 나이트도 처음이고...."
민은 속으로 나이트 자주 다니는 게 자랑인가하는 생각함께 스물 살이나 열아홉이나 하는 생각으로 부끄러운 마음을 잠시 접어 두고 있었다. 그 마음 마져 들킬새라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는 중 민에게 질문한 아이 옆의 여자아이를 보았다.
"롤리타 렘피카(Lolita lempicka)!"
민이도 모르게 검지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외쳤고, 속눈썹이 유난히 긴 아이가 민이를 두 눈을 동그랗게 한 체로 쳐다보았다. 민 역시 눈이 동그랗게 되어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저...그냥....뭐....그 향수 쓰시냐구요?"
"어떻게...?"
목소리가 고왔다. 단 세 마디의 짧고도 낮은 음성이었지만, 나이트 안의 음악이 민에게 소음에 가까웠다면 그것으로부터 민의 귀를 보호해주는 소형카셋트로부터 이어진 이어폰으로 전해오는 감미로운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작은 목소리지만 그 억양 발음 하나에 피아노 건반이 눌러지며 다음 건반이 눌러 지는 그 교차의 순간의 감동은 앵콜을 외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냥 그거 쓰실 거 같았아요."
쇼팽은 감성이다. 마음이 편해진다. 어느 누구나 그 음의 마법에 걸려들어 평안을 찾으라. 민이 어투가 많이 차분해 진다. 둘은 한 동안 민이의 말을 끝으로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뭐야..."
그 침묵을 깬 건 발랄 그 자체의 아이였다. 민이와 쇼팽의 연주자가 주고받는 시선은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사기 충분한 그윽함과 더불어 쥬이상스한 그 무엇이 교차되고 있었기에 그럴 것이다.
그렇게 태식과 민, 그 두 여자 아이는 한 테이블이 되었고 같은 나이란 것을 안 후 로 금새 친해졌다. 자연스레 짝은 나뉘어지고 태식과 발랄 그 자체, 이름이 민지라고 한다. 민지와 태식은 어느 새 테이블을 벗어나 사람들 틈 사이에서 근원지 없는 춤을 추면서 히히덕 거리고 있었다.
"저..."
"네?...아니...어."
"나가자. 여기 너무 시끄러워서."
민은 자신도 모르게 소녀, 이름이 아리라고 했다. 아라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나갔다 나이트 안의 공기가 더웠는지 겨울 날 밖의 바람이 그 따스함을 시샘한다. 아라가 추위가 여간 매서운게 아니었는지 부르르 떨고 민은 자기가 입고있던 반코트를 벗어 아라의 어깨를 걸쳐준다.
"괜찮어"
민이가 벗어 준 반토트를 다시 민에게 건네는 아라다.
"나두 괜찮아. 그래도 한 겹보다는 두 겹이 낫잖아.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갈까?"
"아무데나 가자. 커피숍 어때?"
아라도 민처럼 나이트의 소음이 그다지 내키지 않았던 탓에 조용한 곳을 찾았다.
"그래."
둘은 나이트의 소음이 여간 싫은 게 아니었나 보다. 사실 아라도 민지의 반 강요에 따라 왔지만 나이트란 곳이 별로 내키지 않았고, 그건 민도 마찬가지였다. 태식과 민지, 그들과 함게 나올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어쩌면 둘만이 같이 있고 싶었음이다.
"여기 괜찮다. A forget-me-not "
소녀는 이층에서 새어 나오는 보랏빛 카페를 가르킨다. 창문에 작은 발코니와 하얀색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오는 보랏빛 불빛이 소살리토의 한 예술인 집을 연상시키는 듯 하였다. 만약 21세기로 접어 들 때 빈센트 반 고흐가 있었고, 그 카페를 본다면, 밤의 카페 테라스(Cafe Terrace on the Place du Forum, Arles, at Night)가 좀 더 현대식으로 그려 륵을 것이다.
'물망초'
민식은 고3을 막 지났지만 책을 유난히 좋아했기에 거의 모든 것에 능통하다고 볼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놀 형편도 아니었고, 민이가 할 것이란 책 읽고 고아원 잡일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아주 단순한 카페 이름이었지만 그에 연계되는 이야기들이 민의 머리 속을 스쳐 가고 있었다. 속으로 다시 한번 카페 이름을 다시한번 되뇌겨 보는 민이었다.
민과 아라는 따스한 난로 옆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아라가 민의 반코트를 건네주었고 민은 잠시간이지만 아라의 렘피카향이 자신의 옷에 묻어있음에 그녀와 하나가 된 느낌으로 여겨졌다. 민은 어쩌면 렘피카 향은 천사의 가루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 가루를 가진 사람이닌 아라는 민에게 천사 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를 잊지 마세요."
민은 반코트에 시선을 둔 체로 중얼거렸다. 대상이 없는 혼자말 임에도 아라는 그 말을 가져오고 민에게 묻는다.
"뭐?"
"응..? 아...물망초 꽃말, 나를 잊지 마세요. 그리고 진실한 사랑."
"아...후후, 너 사랑해봤어?"
별 뜻 없는 아라의 농담이지만 민의 표정이 어두워 졌다. 사랑하기는 커녕 부모의 사랑도 모르는 민이었다. 그래서 유달리 향수를 좋아하는 민이었다. 비싸서 많이 사지는 못했지만 내 부모님의 향기는 어떨까 하는 마음이 세상 모든 향수의 이름을 민의 머릿속에 새겨 놓은 것이다. 향수에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그 향기를 상상해보면 그려지는 부모님의 얼굴이었고 실제로 그 향기를 맡는다면 이렇겠다 하는 생각이 민이 받을 수없는 부모님의 사랑을 대신 하였다. 그 중에서도 민이 좋아하는 향기 렘피카다. 민의 이런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라가 이전 질문을 취소한 체 다른 질문을 한다.
"렘피카 어떻게 알았어?"
"그냥."
"이거 여자꺼인데."
"우디 계열이지?"
"오호!"
"후후..."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모네(Claude Monet)가 그린 잔담(ZAANDAM) 속, 전원의 풍경 속에 한 채 만 외떨어진 통나무집의 굴뚝 연기를 연상시키는 커피 두 잔이 쟁반에 담겨져 둘에게로 다가왔다. 커피는 검ds 빛깔이었기에 하얀 마음으로 펜으로 그리면 무엇이든지 그릴 수 있는 둥근 도화지였고 한 모금 씩 입에 댈 적에 민과 아라의 시선이 마주치는 것은 필시 서로의 인물화를 그렸을 것이다. 로댕이 끌로데를 느끼며 웅크린 여자(crouching woman)를 조각하듯 민이의 시선은 아라의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을 모양으로, 그의 눈이라는 프레임바 속에는 아라만이 가득 담겨 있다.
"대학은?"
다시 민의 표정이 굳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이전과는 달리 아주 잠시 잠깐이었다. 아라는 어느새 민에게 치유의 향기를 가진 쟈스민이 되어 버린지 오래고, 창 밖으로 내리던 싸리 눈이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서 말한다.
사랑은 분만으로 충분하다고, 그 걸로 싸리 눈은 함박눈이 되어버린다고 온 세상에 외치고 있었다.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가면서 어떤 수식어도 그 속에 잠들어 새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리대학, 사랑과 그리고 신입생."
"뭐?"
민의 황당한 대답에 아리가 볼은 빨간 풍선이 되어 터질 듯 이 화끈거렸다.
"아리대학, 사랑과...그리고 지원자."
민은 볼은 더 이상 붉어지지 않았다. 사춘기도 여자친구 없이 지내고 남학교를 다녔지만 아리에게 만큼은 볼 빨간 아이가 되지 않았다. 민이는 그런 부끄러움을 느낄 겨를이 사실상 없었다. 터질 듯한 가슴에 뱉어져 나온 이쁜 꽃말이지만 이쁜지, 안이쁜지는 아라의 눈에 달린 것이다. 옆에 놓인 난로보다 더 후끈거리는 침묵이 아라와 민의 테이블 가득 놓여있었다. 그리고...
"우리 사귀자"
"우리 사귀자"
거의 동시에 외쳤지만 누구도 먼저 대답하려 들지 않았고 후끈거리는 침묵만이 분홍빛 구름으로 솜사탕 하트를 그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이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솜사탕하나가 아라의 눈과 민의 눈에 달콤하게 그려져 있었다.
'하하하'
둘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좋기에 웃음이 나온는 것이었다. 싫다면 웃음이 나올 수가 없 기 때문이다. 하지만 웃음에도 종류가 있다. 비웃음, 코웃음 등등 그리고 굳이 둘의 웃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둘이 똑같은 웃음이다.
그 웃음을 끝으로 서로가 말없이 서로만을 쳐다보고, 그들을 창밖으로 함박눈이 쌓이면서 지켜본다. 그 눈이 하나 둘이 아니라 부끄러움에 결국 민이가 그 뜨거운 침묵을 깬다.
"손줘봐."
"웅?"
"손 줘보라구"
아라가 어리둥절하며 민에게 오른손을 내민다.
"아니, 왼손."
"손금 봐 줄려구? 쿠쿠. 별거 다 아네."
아라가 다시 왼손을 민에게 내민다.
민은 아라의 왼손을 이리저리 보기도 하고 세세히 살피다가 손을 놓아버린다.
"어때?"
"뭐가?"
"손금 본 거 아니야?"
"아니"
"그럼 왜 손을"
"보고싶어서"
"쳇."
할말은 잔뜩이나 많이 쌓인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민이나 아라나 말이 없어도 수많은 이야기가 비워지는 커피 잔 속으로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다. 민이가 한 모금 마실 때면 민의 잔에는 커피는 비워지고 너를 만난건 행운이야라는 말이 쌓이고, 아라가 한 모금 마실 때 묵시적인 동의가 담긴 미소 없는 미소를. 그들은 한 모금 한 모금 커피 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검은 도화지에 하얀 마음을 그리고 있었다.
"혹시 그거 알어?"
민이가 아라에게 묻는다.
"뭐?"
"이 음악..."
카페 안에서 스티브 바라캇의 레인보우 브릿지가 흐르고 있었다.
"모르겠는데..."
아라는 다시 한번 귀를 기울였지만 무슨 곡인지 모르는 듯 했다.
"무지개 다리를 걷는 느낌이란 어떤 걸까? 이 노래 제목이 무지개 다리거든. 무지개 그건 비 오면 뜨는 천국행 오리엔탈 특급열차의 다리가 아닐까? 노아도 방주를 만들고 비가 온후 무지개를 보고서 그런 생각을 했을 거야. 저 다리만 건너가면 하느님의 곁으로 갈 수있다고."
"후후"
아라는 민의 말이 어리석거나 헛소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John Vance Cheney란 시인도 그러지 않았는가?
울어본 적이 없는 눈을 가진 영혼엔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고, 민의 영혼이 아라에게 느껴진 듯 했다.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는 눈, 민의 눈이 7가지색의 무지개빛을 가지고 있었다.
뻐꾸기가 노래한다. 열 한번 하면 열한 시.
"어머"
아라가 갑자기 분주하게 이것저것을 챙기며 분주하다.
"왜?"
"시간, 시간 말이야 큰일났다."
"아.. 그러네 벌 써 열 한시."
서로 헤어져야하는 시간에 커피 잔에 담아둔 이야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어느 말을 시작 해야하는지 모르는 민의 마음이었다.
"가야돼."
"그...그래. 저"
"우리 내일 보자. 여기서 오후3시."
아라가 민에게 먼저 약속을 청한다. 민이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체 황급히 민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간다.
"우리 내일 오후3시. 오늘 즐거웠어."
"어......"
다급한 아라의 모습에 민이는 어찌 할 바를 모른다.
아라의 작은 발자국이 하나둘 씩, 한 뼘 높이로 쌓인 눈 위에 모데라토의 바르기로 연주한다. 그 연주에 어떤 마음에서인지 민이가 알레그로로 자신의 발자국을 연주하기 시작하고, 어느새 콘체르토 그로소가 되어버린 둘의 발자국은 카덴차에 이르서서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헤피엔딩을 노래한다.
그리고 정적.
끝없이 내리던 눈마져 그 정적을 깨지 않으려 조심스레 내리는 눈치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에 오른 이 환상협주곡의 제목 첫 키스.
관객도 없고 남녀 주인공뿐이다. 스스로의 연기에 혹은 그 감흥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가 그들의 사랑이다.
유치할지도 혹은 웃음 밖에 안 나올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데는 1분의 시간 혹은 0.001초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만날 사람은 언제든지 만나게 되고 만나지 못할 사람은 언제든지 못 만나게 될 것이니 지금부터 이 짧은 이야기, 그저 어쩌면 당신과 나의 이야기,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운명을 믿는가?
로망스류로 세상에 작별을 고하고자한 랭보의 헛소리를 아는가?
그 헛소리가 과연 몰까라고 출발, 국어사전에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 내리고 있다.
"이성(異性)의 상대에게 성적(性的)으로 이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의 상태. 드물게, 좋아하는 상대를 가리키기도 함"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운명으로 수식되는 사랑이 아니다.
자 그럼 이런 사랑 있을까의 네개의 에피소드 그 첫 번째, 물망초.
그 드물게 좋아하는 상대를 가리키는 사랑이야기를 시작하겠다.
혹시 그대 롤리타 렘피카란 향수를 아는가?
내 연인이 그 향수를 쓴다. 초고를 끝낸 후 보여주니 우디 계열보단 오리엔탈 쪽에 가깝다 고 핀잔을 준다. 우디면 어떻고 오레엔탈이면 어떤가?
드물게 좋아하는 향수이니...후후!
자 그럼 첫 번재 에피소드 물망초. 그 드문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1. 슬픔에는 바람 같게 하시고 미움에는 나그네가 되게 하소서.
민이가 아라를 본 것은 1999년 크리스마스 이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롤리타 렘피카의 여인, 사람들이 즐겨 쓰는 향수는 아니지만 어쩌다가 낯선 이에게서 익숙해진 그 향기가 날 때는 작은 미소가 민의 눈가에 자리매김하였다. 벌써 7년이다.
사람은 변하지만 향기는 지속된다. 그 향기는 민이에게는 시간이 파열되고 분열되어 1999년 그 날에 머믈러 불 특정한 시간대에 불 특정하게 일어난곤 한다. 민에게 롤리타 렘피카는 아라 그 자체였고 변하지 않은 순수의 영역에 머믈러 있는 것이었다.
"저 새끼...저거 또 왔네."
감색 모자를 눌러 쓴 여기저기 상처를 얼굴에 담은 청년이 서초 경찰서 강력반으로 당당히 들어온다. 조직폭력배인지 경찰인지 구분할 수 없는 한 중년의 형사가 금새 알아차리는 것을 보아 한두번 오는 것이 아니었기에 청년은 당당할 수밖에 없다. 신참 형사보다 덜 떨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최 형사님, 은퇴안하슈?"
"저거 말버릇하곤. 모냐?"
"아씨...뭘 물어보슈. 뻔하지"
"야 이 새끼야. 정신 좀 차려라. 니 나이 27이야. 날고 뜨는 것도 이제 접을 때라구. 고아새끼들은 하여튼"
최 형사가 혀 찰 틈 없이, 청년은 최형사에게 주먹을 날린다.
"다시 한번 말해봐."
청년의 눈빛은 온갖 슬픔이 담긴 듯한 중세 마법사의 슬픈 수정과 닮았다.
"야, 윤민! 최형사님이 너무 하셨습니다. 범죄자라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는 겁니다."
최 형사가 입술 사이로 흐른 엷은 핏기를 닦아내며 일어선다. 민이와 젊은 반장이 아니꼬운 마음의 눈길을 흘리나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지 자리로 돌아가 담배를 한 대 물며서 밖으로 나간다. 젊은 반장은 그 청년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이 형사에게로 다가간다.
"이형사님, 윤 민 제가 맡겠습니다."
"그러시죠."
"이봐! 윤민 따라와."
민과 태식은 최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조실이 둘만이 공간이 되자 태식이 민의 손목에 수갑을 풀어주며 한숨을 크게 내쉬자 민이 태식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미안하다."
"머가?"
"그냥."
"밥은 먹었냐?"
"어..."
"잠깐만 기다려. 밥시키고 올 테니. 그나저나 대리입건이냐? 합의 되고?"
"그렇지, 머."
태식은 씁쓸히 혀를 두 어번 차더니 민에게 담배를 한 대 건네주고 밖으로 나간다. 민과 태식이 만나 것은 불과 두 어달 사이다. 오래 전 태식과 민은 연락이 끊겼고, 그 후론 이 곳서 서로를 처음 만난 것이다. 얼마 있지 않아 다시 태식이 들어온다 한 손에 노트북이 들려있는 것으로 보아 조서를 꾸미기 위함이었다.
태식은 말없이, 다른 형사들과 달리 민과 마주하지 않고 옆으로 앉아 노트북을 켠다. 그리고 조서를 꾸미기 위해 문서 작성프로그램을 열고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한다.
'슬픔에는 바람같게 하시고'
태식은 채 끝나지 않은 문장을 쓰고는 민에게 노트북을 옮긴다. 잠시잠깐 미소를 머금던 민이 자판에 손을 올려놓는다.
'미움에는 나그네가 되게 하소서'
민은 일년의 징역을 받았다. 다행이 피해자와 합의가 됐지만 그간의 전과가 문제가 되었다.
민의 출소 날 어김없이 태식이 마중 나왔고, 한 그릇의 해장국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대신했다. 그 길고도 짧은 이야기가 한 그릇의 해장국으로 사글어 들고 난 후 태식이 민에게 담배 한 대를 꺼내며 걱정을 던진다.
"계속 거기 몸담을 거야?"
민이 길게 담배 한 모금을 빨더니 그 길이만큼 긴 한숨을 지어 보이다 웃는다.
"그럼 깡패가 모하냐. 깡패짓 해야지. 너한테는 미안하다 내 꼴 안 보려면 빨리 승진해서 펜대나 굴려라."
"휴...오늘은 우리 집 가자.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 그리고 푹 쉬고."
"됐어. 임마! 유부남이 어디서 깡패를 지 집에서 재우냐?"
"너!"
"됐어. 어쨋든 고맙다. 여전히 친구로 생각해줘서."
"생각하긴 우린 친구야. 그리고 오늘은 우리 집 가자. 오늘 니 생일이잖아?
"내 생일? 후후...만들어진 생일"
"가자. 가자구! 어디 우정의 범인이 형사 말을....떽!"
태식이 민이를 잡아 끌 듯이 차에 태운다. 민이도 포기를 했는지 차안에 음악시디를 뒤적인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 틀어본다.
Steve Barakatt의 I Need Another Day. 민이 의자를 뒤로 젖히고 지긋이 눈을 감는다. 음악이 감미로움에거 슬픈 음으로 바뀔 때 주는 카타르시스로 민의 왼손이 자기 목 언저리로 가고, 목걸이의 걸린 작은 은빛 반지 하나를 감싸 쥔다. 반지 슬픈 빛으로 울고 있었다. 왼손은 심장과 연결되었기에 민의 심장의 슬픔이 반지로 전달되면서 반지는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더 깊게 민의 손에 감긴다.
"민아! 윤민! 다 왔다"
태식이 민을 흔들어 깨운다.
"어...그래 잠깐 잠이 들었나봐, 피아노 같은 건 졸려서 말이지. 하하. 야! 근데 제수씨한테 뭐라 그럴거냐. 너 이미지 손상가는 거 아니야?"
"됐어. 너도 아는 사람이야."
"어?"
민은 태식의 부인이 누군지를 몰랐다. 알았다하더라 자신이 전과자인 탓으로 민의 집을 가거나 하지 않는 게 나을거란 생각에서 애써 불어보지도 않았고 태식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 치더라도 말 할 겨를도 없었다.
"가자."
엘리베이터에서 민은 휘파람을 불었다. 태식도 따라서 불러 보았다.
차에서 들은 노래를 벌써 익힌 민의 익숙한 휘파림이 태식의 귀에 다가설 때 태식도 절로 휘파람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야"
태식이 벨을 누른다. 안에서 태식의 부인인지,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여전히 휘파람소리를 내다 갑자기 민의 표정이 굳어지고 만다.
"램피카(Lempicka)."
역시 휘파람을 불던 민이 뜬금 없이 혼잣말을 한다.
"뭐?"
"롤리타 램피카!"
"머라는 거야? 하하!"
"어?"
"하하. 너도 가는귀가 먹었구나."
"아니...향..."
'철컥'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2. 그러나 사랑에는 눈멀게 하소서.
"고아라?"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 였고 너무나 익숙한 향기였다. 잊혀짐이란 불가능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 날의 모습이 향기가 아직도 거의 모든 곳에서 그녀임을 민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네"
"자자. 가는귀도 먹었지만 가는코도 막힌 윤민! 램피카를 잊었단 말인가. 하하 "
태식이 멍한 민이의 등을 밀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민은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민은 속으로 수 없이 되뇌었다.
'만나면 안돼, 만나면 안돼.....'
"자, 내 친구 민의 28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케랺에 촛불을 붙여 태식이 식탁으로 가져온다. 그러나 민은 그 어느 것도 귀에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야 임마! 뭐하냐? 소원 빌고 촛불 꺼."
"어...어?"
"촛불 끄라구!"
태식의 재촉에 더해 아라도 한 마디를 한다.
"그래요 민씨. 생일 축하해요!"
태식의 얼굴에 장난끼가 가득하다 촛불을 끄자 마자 민의 얼굴에 케랺을 엎을 생각이다.
그것은 아라의 표정에도 익을 수 있다. 민의 표정만이 그 이야기를 모르는 듯 했다
"소원빌고 어서 끄세요. 민이씨."
여전히 미소가 아름다운 아라였다.
민이 눈을 감는다.
'오늘 이 후로 그녀를 다시는 다시는 볼 수 없게 해주소서.'
촛불이 꺼지고 예상대로 태식은 민의 얼굴에 케랺을 엎는다.
"하하하하...하...하...어....윤민. 야 우냐? 미안하다."
하얀 크림위에 민의 눈물, 한 방울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야. 고마워서. 야 화장실어디냐?"
"저기...짜식 고맙기는 우린 친구잖아."
민이 화장실로 가고 크림 위에 눈물 한 방울은 아라를 처음 만난 날의 싸리눈이 함박눈으로 변하듯 강이 되어 급류로 흐르고 있었다. 한 참을 세면대를 붙잡고 고개를 들지 못하는 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마냥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깊은 한 숨을 내리 쉬고 차가운겨울 보다 차갑운 영혼을 갈구하며 찬물로 얼굴을 씻어내렸다.
"여기요. 수건"
아라였다.
"롤리타 램피카(Lolita lempicka). 그렇죠?"
"기억하네요.이 향기가 좋아서요. 태식씨도 좋아하구. 여전히 뜬금없이 물어 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네요."
"네, 감미로우면서도 이지적이죠."
"그건 그렇고 어떻게 지냈...."
민은 아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다시 들어간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이 그러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격정이 불쑥불쑥 이르다 고요해지는 음악처럼 아라의 목소리는 쇼팽의 선율의 그 미학과 같이 느껴지는 민이었다. 하지만 오래 전 그때의 앵콜은 외칠 수 없는 슬픔 그 자체였다.
"아직 크림이 묻었네요...잠시"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버린 민이다.
민이의 얼굴에 하얀 크림보다 더 진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도무지 멈추지 않아 그것은 크림같이 두꺼운 눈물이 되어 버렸다.
"야, 아라가 음식 솜씨가 없어서..."
태식이 민의 미역국에 숟가락을 집어 넣으며 말했다.
"고맙다. 잘 먹을게. 아라씨도..."
"네. 진짜 맛없을 건데."
아라가 애교 섞인 말투로 민에게 답했다.
"그럼 진짜 맛없게 먹어드리죠. 하하"
"여전하네요. 그 말솜씨."
"하하"
밥을 먹는 내내 그들은 어떤 말을 해야할지도 해야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처럼 음식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세 사람이 밥을 먹는 자리에서 나는 소리라곤 규칙적이지 않은 식기와 집기 사이의 파열음뿐이었다. 그 침묵을 깨는 건 손님인 민이 몫이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둘이 언제 결혼했어? 청첩이라도 보내지. 주소는 음...대한신문 지면으로...."
"6년됐다. 우연치 않게 아라랑 만나게 됐는데 너 이야기하다 가까워졌지."
"어...6년이면...아이는?"
"있어. 딸이야. 유치원 갔고."
"아빠 닮았냐? 그럼 시집가기는 글렀는걸. 하하"
"뭐라고?"
"하하하하"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커피와 함께 지난 회포를 풀기로 했다. 민이가 끝끝내 일찍 간다는 걸 태식이 술대신 커피로 대신 한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태식에게 긴급 출동이 걸렸다.
"어, 이거 어쩌지?"
태식이 민에게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가자. 나도 가 봐야하고. 제수씨 오늘 고마웠습니다."
"짜식 형수라니까 계속 제수씨라네."
"가자 긴급 같더구만."
"그래...."
태식이 차 키를 들고 나가려다가 뭔가 생각 난 듯 멈칫하고 민에게 말한다.
"넌 아라랑 이야기, 좀 더하다 가"
"어?"
"짜식. 아라의 첫 키스를 훔치다니. 그래도 너라 다행이다 임마. 나간다. 아라야! 저 자식한테 맘 빼기면 안돼. 하하"
"어...태..."
'찰칵'
민이 태식을 따라 나갈 겨 를없이 현관 문을 닫아버리고 나가는 태식이었다.
집안은 막연한 정적이 흘렀다.
"저...아무래도 가봐야겠어요."
아무래도 어색한 기분의 민이 자리를 일어서려 하자 아라가 붙잡는다.
"그날 많이 기다렸어요.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미안해요. 난 그저 장난이었어요."
민이 고개를 떨군다.
"후후. 그럴 필요 없어요. 다 지난 일이니. 그저 그때 생각하면 화가 나서요.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네..."
또 다시 막연한 정적이 찾아 들어오고 있었다.
"램피카 향기로 온 집안에서 꽃피네요."
"후후"
"왜 웃죠?"
"꽃피네요가 머예요."
"제가...그렇게 말했던가요?"
"넵!"
이제는 정적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느낌이다.
"손 줘보세요."
정적의 끝에서 아라가 민에게 말을 했다.
"네?"
"손 좀 줘 보시라구요."
민은 아라의 뜬금 없는 말에 무작정 손을 내밀었다.
"아뇨. 오른손말고 왼손."
"네? 왜요? 손금 볼 줄 아나요?"
"아뇨, 그냥 보고싶어서요."
"아...하하하...기억하군요?"
"후후"
정적은 주기적 악성 열병과도 같다.
"저 정말 가봐야겠습니다."
열병이 악성질환으로 바뀌기 전에 민이는 곧바로 일어섰고 더 이상 아라도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현관 즘에 다가설 때 벨이 울렸다.
"아라가 왔나보네."
"아라요? 아라는..."
"딸애요. 한자로는 틀려요. 후후"
"네..."
아이치고는 속눈썹이 길었다.
엄마를 빼다 박은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이는 민이를 보더니 대뜸 인사를 한다.
"이름이 뭐니?"
"아라요"
"아 그랬지. 잠깐."
민은 아이에게 용돈이라도 줄려는 셈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슬그머니 손을 뺀다. 출소한 날이라 차비밖에 없는 민이였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기 목걸이를 뺀다.
엷은 금색 실 줄에 은빛 반지가 메어있었다.
"아라야. 삼촌이, 아라 선물을 깜빡했다. 이건 아주 오래된 이야기인데. 어떤 연인이 봄의 저녁 무렵에 강가의 근처에서 사랑을 나누며 걷고 있었어. 그때 여자가 강가에 피어 있는 파랗고 작은 꽃이 갖고 싶다고 했지. 그래서 남자는 절벽을 내려가서 꽃을 꺾은 순간 발이 미끄러져서 급류에 휘말여서 영원히 그녀를 볼 없게 됐지. 그때 남자는 최후의 힘을 짜내서 파랗고 작은 꽃을 하천가에 던져 「forget me not」이라고 외치며 흘러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거든. 아라는 지금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를거야. 하지만 아라도 엄마처럼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알거야. 이 반지는 그 꽃의 살고 있는 남자의 영혼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 다운 아가씨를 보게 되면 전해주라고 내게 부탁 한 건데. 우와! 아라를 봤네. 자. 이건 니꺼야. 아빠 같은 남자를 보게 된다면 그 사람한테 줘. 약속?"
민은 작은 아라의 작은 손에 목걸이를 쥐어 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체, 엄마 아라에게 잘 있으란 인사도 하지 않은 체 밖으로 나가고. 발자국을 알레그로 템포에 마추었다. 아라를 본 첫 날 아라의 발자국은 모데라토였으니. 알레그로면 충분할 듯 싶었다.
3 .소년은 메피스토에게 영혼을 팔아 소녀를 구하고, 소녀는 그녀의 두 눈을 받쳐 소년의 영혼을 되찾다.
여기서 에피소드 그 첫 번째 이야기 물망초. 그 이야기 끝난다.
하지만 이야기가 혹은 그 무엇이라도 잊혀짐이란게 불가능하다면 시간은 파열되고 분열되기에 그러기에 끝이란 무의미하다. 사랑도 그러하다.
그 파열되고 분열 된 시간, 그 사랑이 영원할 수 있는 비밀의 기억들.
쉿! 나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모르겠으니. 집중 집중...후후!
-민과 아라가 만나던 날, 민이 아라의 손을 보자고 한 것은 반지를 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랑고백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라의 손가락에 딱 맞는 은색 은반지를 하나 사서 아라가 말한 오후 세시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아라는 민이 그저 장난을 치는 거라 생각하고 그 날 오지를 않았다.
이럼 페미니스트들한테 욕먹겠지?
-왔다. 늦게 온 것이다. 장난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온 것이다. 하지만 민은 그 곳에 없었다. 과연 민이 아라를 얼마 기다리지 않고 간 것일까?
이러면 남자는 도둑놈이란 사실이 밝혀지니 안 된다.
반지가 왜 딸에게 갔는지 만 상상해본다면, 아니 사실이 그렇다. 진실도 그렇다.
사람은 죽어도 이야기가 남 듯.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내 기억 속에서 파열되고 분열되어 쓰여진다.
-민은 아라와의 약속에 들 뜬 마음이었다. 간 밤에는 잠을 설쳐가며 램피카의 향기를 느꼈다. 우디계열의 향수가 다 그렇듯 조금 진했기에 오래도록 그 향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민에게는 진한 향수라지만 그 보다 진한 향기로 오래동안 자신에게 그 향기가 머믈러 주기를 바라면서 내일을 기약했다.
다음날 아침 민은 태식에게 찾아갔다. 태식은 부시시한 모습으로 나왔다. 태식이 하품을 하며 먼저 어제 일을 묻는다.
"어제 어떻게 된거야?"
민은 미소로 어제의 이야기를 대신하고 만다. 그런 민의 이야기를 알아듣는지 태식이 다시 말을 잇는다.
"아라랑 잘됐어?"
"어, 오늘 다시 보기로 했다. 너는? 어제 보니까 그 엉성한 춤하며. 크크크"
"아, 어제 취했나? 음..."
태식의 볼이 빨개지는 것도 어제의 태식의 춤은 과히 코메디 수준이었기에 그러하다.
"아라..."
"응. 머?"
"너 아라랑 나가고 민지한테 아라 얘기 들었는데..."
"응?"
"아니다 됐어."
"모야? 말을 꺼내다 말고..."
"아라 다시 만날거야?"
"응. 오늘 오후3시에 약속했어. 여기..."
민은 태식에게 은빛 반지를 꺼내 보인다. 하지만 태식은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기에 민이 어색한 표정을 짓고 얼마간이 낯설은 침묵의 시간을 끝으로 혹은 낮은 어투로 태식이 입을 연다.
"민아, 아라 만나지 마라."
"왜?"
"아니 그냥, 너 문제도 있고 지금 여자 만날 그런 거, 아니잖아."
"고아는 사랑도 하면 안되냐?"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럼, 부모 없고 돈 없는 놈은 사랑도 하면 안 된다는 거지 뭐. 그런 소리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마. 어제 너랑 아라랑 찾다가 민지한테 아라이야기를 들었어. 아라. 술 집 다닌데. 민지도 아라 거기서 알았고, 아라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 사채업자한테 빚을 지게 됐나봐. 대신 아라가 술집에서 일을 거고. 만약 그 사채 업자들이 민이 너, 아라 만나는거 알면 가만히 안 둘거라면서..."
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건 오래가지 않았다.
"뭐 어때, 첫 느낌이 좋은 아이였어. 첫 키스도 했는 걸. 그런건 문제가 안 될거야. 사채업자도 사람인데..."
"그래도..."
"그렇긴 뭘 그래. 몇시냐?"
"2시"
"가야겠다. 이따 저녁에 보자."
"괜찮겠어?"
"안 괜찮으면?...후후...이따보자."
1999년 12월 25일. 거리는 김밥이었다. 그것도 맘씨 좋은 아줌마가 만든 김밥.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도 해맑은 웃음이었고 당연하듯 낄낄 거리는 연인들 그렇게 웃는 사람들로 거리는 가득 차 있었다. 혹은 거리 밖으로 터져 나 갈 것 같았다.
카페 물망초안에 민도 미소짓고 있었다. 은빛 반지가 그 미소에 반짝이며 민을 기억하고 있었다.
1시간 2시간...뻐꾸기가 6번 노래하면 6시.
민이의 맑은 웃음이 씁쓸한 미소로 바뀌기 시작한다. 은빛 반지가 그 미소에 반짝이며 민을 다시금 기억하고 있었다.
뻐꾸기가 11번 노래할 때 카페 물망초에는 민이의 미소도 그 미소를 기억하는 은빛 반지도 없었고 불꺼진 물망초 카페에는 어둠만 자리매김했다.
민이의 발자국이 안단테를 연주하며 쓸쓸히 태식의 집으로 향 할 때, 카페 물망초에는 이리저리 헤메이는 하나의 발자국이 알레그로가 캐논협주곡처럼 연주되고 있었다. 아라였다. 그러나 그것은 미완성이었고 그저 가가기 따로 연주되는 불협화음이었을 뿐이다.
지난밤에도 일을 해야했던 아라는 술기운에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오후 6시쯤 일어난 아라가 분주히 물망초로 나가려 할 때, 민지가 붙잡았다.
"안 올 거야, 가지마. 어제 내가 태식이란 애한테 니 얘기 했어. 태식이도 사정이 안 좋 더라. 고아원에 살고 대학은 붙었는데 등록금도 없고, 그런 둘이 만나서 뭐하겠냐. 서로 아프기만하지. 안 가는게 좋아. 그리고 이유야 어찌 됐건 넌 계약기간까지 여기서 일해야하고 남자 만나고 그러면 오빠들이 가만히도 있겠다."
아라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래도 민이 기다리고 있을거란 마음이 아라의 심장을 파열하는 것 만 같았다. 그리고 일을 나가서 손님들과 술을 마시다. 문득 가야만 한다고 물망초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온 것이다. 카페 물망초의 창에는 어제의 보랏빛이 나오지 않았고, 그래도 밖의 어디선가 민이 기다릴거란 마음에 이리저리 민을 찾았다. 알레그로 보다 조금더 빠르게 연주되고 있었다.
"들어가자"
축 쳐진 어깨와 힘없이 미소짓고 있는 민이에게 태식은 물어볼 것도 없다는 듯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괜찮아?"
"응"
"야. 아버지가 민이 너 등록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 대신 공부 열심히 하라고. 여기"
태식은 민에게 하얀 봉투 하나를 건넨다.
"됐어."
"됐기는 대학가면 더 괜찮은 여자 만날거야"
"......"
태식은 민이의 손에 억지로 흰 봉투를 쥐어준다. 그리고는 책상을 뒤적거리더니 볼펜하나를 꺼내들고 흰 봉투에 몇 글자를 적는다. 그리고 민이 그 글자를 나지막히 따라해 본다.
"슬픔에는 바람 같게 하시고, 미움에는 나그네가 되게 하소서. 이게 모야?"
민이 태식의 얼굴을 쳐다본다.
"실연 당한 동생에게 하는 형님의 조언!"
"풋"
민은 태식이 봉투에 적어준 글자를 다시 한번 쳐다보고 속으로 되뇌겨 보았다.
'슬픔에는 바람 같게 하시고, 미움에는 나그네가 되게 하소서...그러나...그러나...사랑에는 눈 멀게 하소서.'
민은 봉투를 쳐다보다 갑자기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태식을 쳐다보면 말을 꺼낸다.
"너 친구지?"
뜬금 없이 던져진 민의 말의 태식은 어리둥절하다.
"당연한걸..."
"혹시 너, 아라 어디서 일하는지 아냐?"
"어...민지가 알려주기는 했는데, 그건 왜?"
"좀 알려줘. 그리고 이거 아버지한테 꼭 갚아 드린다구."
"너 설마..."
"얼마일지는 몰라도 시도는 해봐야지. 내가 벌어서 갚아준다구."
"허튼 짓 하지마. 한 두 푼도 아닐거고..."
"내가 대신 일하면 되잖아."
"그럴만한 가치가 있냐?"
"사랑이란 거 받아 본 적도 해 본적도 없어. 이게 사랑인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램피카의 향기가 아직도 남아 있어. 아라가 뿌린 향수이름이 롤리타 램피카라는 향수거든. 하지만 내게는 랄프로렌 로맨스 향기로 다가왔어. 랄프로렌 로맨스, 그 향수는 사랑의 무한한 본질을 일깨우는 향수, 진실한 사랑을 찬양하는 향수야. 지금의 내 느낌, 아라를 단 한번 본 것으로 사랑이라 말 할 수는 없겠지만 향기로는 설명할 수 있어. 이해해주기를 바래."
민은 말이 끝나자 마자 태식의 손에 든 명함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명함에 적힌 민지를 찾았고 아라를 담보로 데리고 있는 오빠라 불리우는 사채업자 밑의 조직폭력배를 만나기로 했다.
"비밀로 해주세요."
민지는 민의 이런 행동이 이해가 안되었다. 하지만 민의 눈빛은 이해를 요구하기보다 그래야만 한다는 진실이 눈빛에서 새어나오고 있었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 후 민은 민지가 알려 준데로 낡은 3층 건물, 한 사무실로 올라갔다.
"모꼬?"
낡은 건물이었지만 사무실은 깔끔했고 몇 명의 남자들이 담배를 피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이 든듯한 육중한 남자가 민에게 묻는다.
"아라 대신 제가 일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민은 태식의 아버지가 마련해준 등록금을 내밀었다. 얼굴에 여러 개의 상처가 이리저리 흩어진 남자가 봉투를 열어보더니 큰소리로 웃어대다 일순간에 무표정해 진다.
"삼백, 이걸로 된다 싶나? 아라년 빚이 얼만지 아노? 일억이다 일억. 보아하니 학생 같은데 술집 년 반반한 거에 속지말고 가서 공부나 하그라."
민이 갑자기 무릎을 끓었다.
"목숨이라도 내 놓겠습니다. 아라 빚을 제가 대신 갚겠습니다. 저는 고아라 그리고 학생도 아닙니다."
험상궂은 나자의 얼굴이 비웃음로 바뀌고 만다. 그런데 옆서 과도롤 사과를 깍고 있던 멀대같은 남자가 그 남자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인다. 육중하고 얼굴에 이리저리 상처가 많은 남자는 무언가를 생각하다 민에게 다가온다.
"그래? 목숨이라도 내놓겠다고. 시키는 대로 할꼬마?"
"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래 좋다. 낼 찾아 오그라. 아라가 너랑 어떤 사인지는 몰라도 이건 계약이다카이. 일억 땅파봐라 1000키로도 넘게 파도 안나오는 돈이다. 그 빚을 까줄꼬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알아두그래이. 이건 계약이다. 계약! 이건 가지고 가그래이. 그리고 낼 모레쯤 온나."
"네?"
"가지고 가서 술이나 먹던지 뭘 하던 가지고 가라. 쉬운 일은 아닐꺼고만."
쉬운 일이던 어려운 일이던 민은 개의치 않았다. 아라의 빚을 대신 갚을 수 있는 거만으로 만족했다. 밖은 흰눈이 흰눈이 말없이 민이 이야기를 고스란이 그 색으로 말하고 있었다.
"사건번호 35가-29398, 윤민, 무기징혁."
판사의 선고가 내려졌다. 윤민은 재판 내내 미소를 짓고 있었고 항소조차 포기했다. 그리고 영등포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 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태식이 면회를 왔다.
"견딜만해?"
"응, 아라는? 내 일 비밀 꼭 지켜야 한다."
"그곳에서 나왔고... 미친 놈."
"미치지 않고서야 사랑할 수 있겠냐? 후후"
"사람 죽여놓고 뭐가 좋다고 웃냐?"
"악마랑 계약을 한 거 뿐이야. 그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내 영혼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사랑의 원죄의 영역이라면 원죄가 생기는 것은 영혼과 영혼의 서약이야. 그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내 영혼을 팔아버리는 것 밖에 없어."
태식이 크게 한숨을 지어 본다.
"태식아! 부탁이 있다."
"해봐."
"시간이 지나고 삼년이든 사년이든 혹시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아라를 보게 된다면,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없잖아. 그럼 내 물건 중 은반지가 하나있어. 그거 찾아서, 혹시 그렇게 우연치 않게 보게 된다면 그리고 아라 옆에 아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대신 니가 그 자리에 가줄래? 괜찮은 아이야. 알 수 있어. 너도 느낄 수 있을 거야. 단 일분만 같이 있어 보면 아니 일분도 필요 없어. 알 수 있을 거야. 느낄 수 있을 거야....만약 그때 사랑을 고백 할 때가 되면 이 반지로 대신해 줘. 사이즈는 정확 할 거야. 후후, 악마도 있으니까 분명 신도 있을거야"
태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 여기 오지마. 뭐랄까. 이건 느낌인데 내 사랑이 내 느낌이 진실이고, 그 사랑의 대가로 내 영혼이 악마에게 팔린 거라면, 그 정도의 바램은 이뤄 줄 거야. 너도 나를 잊고 살았으면 좋겠다. 친구로서 부탁이다."
태식은 더 이상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지만 눈이 응수를 했고 눈물이 대답을 했다.
그 후, 민은 모범수로 가석방되고, 민의 소망대로 태식은 우연치 않게 아라를 만났다. 하지만 우연함이 아니었다. 태식은 민의 반지를 전해주고 싶었다. 민이 느꼈다는 롤리타 렘피카 향이 랄프로렌 로맨스로 바뀌는 사람. 궁금함도 있었기에 아라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도 모른체 아라는 술집서 나왔고, 아라의 아버지 역시 재기를 해서 아라는 밝은 모습의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태식은 그런 아라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태식은 민의 은반지로 아라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
"반장님 왜 이리 늦으셨어요?"
이형사가 태식에게 불평을 던진다.
"죄송합니다. 이형사님. 오늘 친구가 아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어서요."
"네?"
"그런 게 있습니다. 물망초라고...친구 덕분에 아내를 만나게 되서요."
"뭔말인지..."
이형사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아침나절 비가 온 탓인지
코발트 빛 건물 사이로 무지개가 걸쳐있었다.
무지개다리는 비가 온 후 뜨고, 울어 본 적 없는 영혼에는 무지개가 뜨지 않는 법이다.
이별 노래는 슬프기만 하다.
하지만 그 노래가사 내용 모두가 진실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왜 그럴까 한번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나를 잊지 마세요!
진실한 사랑이라면 그저 헤어질 때 이렇게 말하라.
그녀가 혹은 그가 잊지 않는다면 잊혀짐이란 불가능의 영역속에 신이 내린 작은 선물이라면.
그렇다면 적어도 당신 자신만은 알 거니까, 이 사랑의 비밀을.
이런 사랑 있을까?
혹시 모를 일이다. 그저 이런 이야기가 들렸다.
내가 처음 여자친구를 만났을 때, 그 향수 이름이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안 가르켜준다.
궁금한걸 못 참는 성격인걸 아는 여자친구는 그 재미에 푹 빠지다.
나의 강건한 집요함에 결국 그녀의 향수 이름을 말해 주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향수 이름이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그 향기가 있다고 쥐스킨의 소설에도 나오 듯.
나는 다르게 묻는 법을 배운 것이다.
"이런 사랑 있을까요?"라고...
-한 사람만을 위한 단편, 에피소드 그 첫 번째 물망초 끝-
당신이 한 남자나 여자를 만날 때, 어떤 종류의 향기든 다른게 다가온다면, 스스로도 사랑이 단정하지 말고 다르게 묻는 법을 배우는게 물망초에 담긴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