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연말 영화관에 내걸린 세 편의 한국영화가 연말연시를 뜨겁게 달궜다. 12월 14일 개봉하여 445만 관객을 불러들인 <강철비>, 12월 20일 관객과 만나 1440만을 동원한 <신과 함께>, 12월 27일 막을 올려 722만 관객을 울린 <1987>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들 세 편의 영화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우리가 음미(吟味)해볼 만한 문제를 제기해보고자 한다.
30년 전인 1987년 6월 항쟁을 돌이키면서 2017년 지금과 여기를 사유하도록 인도하는 영화 <1987>을 첫머리에 두고, 북한과 북핵(北核)을 진지하게 검토해보라고 제안하는 <강철비>를 두 번째 논의의 마당에, 그리고 한국인이 사유하는 사후세계(死後世界)를 희비극으로 다루는 <신과 함께>를 마지막 자리에 두고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가까운 과거를 다루는 <1987>, 현재 진행형을 추구하는 <강철비>, 그리고 언제든 닥쳐올 미래를 그려낸 <신과 함께>를 시간적 순차성으로 접근하는 글이다. 각각의 영화가 다루는 주제 역시 인권과 민주주의, 남북분단과 국제관계, 이승의 삶과 저승의 판결이라는 구도가 선명하다. 서로 다른 시공간과 인간관계 그리고 사건에서 관객은 삶의 본원적인 모티프와 인과율 내지 존재의의까지 다각도로 성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1987>, 그 뜨겁던 6월의 함성과 피맺힌 절규들
영화 <1987>은 한국의 민주주의 제단(祭壇)에 바쳐진 두 명의 대학생을 호출한다. 부산의 박종철과 광주의 이한열이다. 두 사람을 축으로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진행된다.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관들은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을 하숙집에서 영장 없이 불법으로 강제 연행한다. 그들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중인 박종운의 거처를 알아낼 목적으로 박종철을 가혹하게 고문한다.
고문경관들은 구타는 물론이려니와 물고문과 전기고문까지 동원하여 청년 박종철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만행(蠻行)을 서슴지 않는다. 고문경관들의 뒤에는 대공전문가 박처원 치안감이 있는 것으로 <1987>은 그려낸다. 대공전담부서의 수장(首長)이자 그들의 든든한 배경이자, 빨갱이 섬멸작전의 선봉장 박처원. 그에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운운하는 자는 한 치도 용서할 수 없는 존재로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할 박멸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박처원을 독려하고 학살자 (虐殺者) 각하의 각별한 관심을 전달하는 자는 각하의 복심 (腹心) 장세동 안기부장이다. 그들이 이른바 ‘밀실안가 (密室安家)’ 혹은 ‘요정 (料亭)’에서 대면하는 장면은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부터 연면부절하게 이어져온 전통(?)이기도 하다. 우리는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발생한 박정희 살해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토록 믿어왔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하릴없이 스러져간 18년 독재자의 허망한 최후라니?!
<1987>을 보다가 흥미로웠던 대목 가운데 하나는 장세동을 연기한 배우 문성근과 영화 말미에서 민주화 제단에 바쳐진 열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내는 문익환 목사의 관계다. 주지하는 것처럼 문익환 목사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투사이자 온유한 인품의 목회자다. 그의 아들이자 또 다른 민주주의 활동가가 문성근이다. 영화배우 문성근이 아무렇지도 않게 각하를 들먹이고 박처원을 위무(慰撫)하는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박처원은 장세동에게 김대중과 김영삼 그리고 수배중인 김정남을 묶어 대규모 시국사건을 조작해낼 것이라고 언명한다. 학살자의 권력이 다해가는 1987년 초의 정국을 권부(權府)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려는 포석(布石)이다. 만약 그들 모두를 하나의 올가미에 얽어맬 수 있다면 향후 정치일정은 어린애 팔 비틀기처럼 손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야당과 재야를 잇는 거물 정치인 두 사람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조작하려는 야욕의 박처원.
왜 그토록 박처원은 대공수사와 간첩 만들기에 골몰했을까. 왜 그는 그렇게 처절할 정도로 재야인사나 운동권을 저주하고 압살(壓殺)했을까. 왜 그는 고문기술자로 악명 높은 이근안 같은 자를 대공수사팀에 합류시켰을까. 그에게는 최소한도의 인간적인 정리(情理)도 드러나지 않는데, 왜 그런 냉혈한(冷血漢)이자 악마의 화신이 된 것일까. 왜 그는 각종 불법 탈법 무법 초법 위법적인 행태를 감행해서라도 야권인사들을 박멸하고자 했을까?!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지옥이 뭔지 아네? 가족이 다 죽어 나가는데 아무것도 못하는 기야. 마룻바닥 아래서 식구들이 모두 죽는 걸 두 눈 뜨고 지켜보는 거, 그게 바로 지옥이야.”
1929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출생한 박처원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 박처원은 지주집안의 아들로 어린 시절 온가족의 몰살을 목도(目睹)하고 월남하여 1947년 18세의 나이로 경찰에 투신한다. 그 이후 그는 대공수사 부서에서 근무했으며, 대간첩수사의 상징적인 인물이 된다. 박처원을 발탁한 인물은 친일악질 경찰 노덕술이었고, 노덕술은 이승만의 심복 장택상이 끌어다 쓴 인물이다. 박처원은 노덕술에게 배운 악랄한 수사기법을 고스란히 써먹었다고 전한다.
2008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한 박처원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1996년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자행한 고문에 대해 한 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으며, 당뇨증상을 이유로 집행유예를 받았다고 한다. 박처원은 문자 그대로 대공수사의 최전선에서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운 악귀 자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가족참살’ 트라우마가 잠시도 지워지지 않은 듯하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이것은 만고(萬古)의 진리다. 언젠가는 사건의 실체와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요즘 한창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다스는 누구 것?’ 유희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시대와 역사를 속이고, 5천만 시민을 능멸하면서 사익(私益)을 취해온 구린내 나는 싸구려 모리배(謀利輩)이자 장사치의 진면목이 청천백일 하에 그 추악한 전모를 드러내기 직전 아닌가?! 더욱이 진실을 밝혀내려는 정의로운 자들은 고금동서 어디에도 존재한다.
<1987>에 등장하는 최 검사 (최환), 교도관 한병용 (한재동), 민주인사 김정남과 이부영,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 박종철의 죽음을 최초로 확인한 오연상 외과의사, 부검을 집도한 황적준 박사,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 등이 그런 인물이다. 이렇게 정의로운 사람들의 눈과 손과 입을 거쳐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전모(全貌)가 세상에 알려진다. 대중은 분노하기 시작하고, 학살군부가 시도한 ‘4.13호헌조치’에 빨간불이 들어온다.
“잘 가그라, 종철아...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1987년 한국사회를 이렇게 간결하게 요약해서 전달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대공(對共)으로 포장된 국가폭력으로, 잔인무도한 악랄한 고문으로 생때같은 자식을 잃어야했던 종철 아버지 심경(心境)은 학살군부의 무쇠발톱 아래 살아야했던 이 땅의 모든 민초들의 절규이기도 했다. 장엄한 1987년 6월 항쟁의 불꽃은 이렇게 산화(散華)해간 젊은 영혼과 육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뜨겁게 점화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광주의 이한열.
<1987>은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화면을 채웠다가 사라진다. 그러다가 마지막엔 거리를 가득 메운 허다한 민초들의 행진과 구호로 끝난다. 장준환 감독은 박종철이나 이한열의 영웅적인 투쟁이나 특정한 정치적인 서사(敍事)가 아니라, 당대를 살았던 이 나라 민초들의 웅혼한 함성으로 영화의 주제를 전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민주주의는 동시대의 시공간을 살아가는 다수 민초들의 깨어있는 시민의식과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으로 완수되기 때문이리라.
그러하되 영화 <1987>이 700만 넘는 관객을 동원한 것은 달달한 사랑의 서사가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들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연세대 신입생 연희가 가슴에 담아두는 운동권 선배 한열을 향한 사랑의 마음.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버린 서사시의 한복판에 작은 물줄기를 이루어 객석을 어루만지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 하지만 영화는 연희를 사랑의 전령(傳令)으로도 열렬한 투사로도 만들지 않는다. 그저 담담한 기록자이자 조력자로 연희를 남겨둔다.
연희를 움직인 것은 한열이 소속돼 있던 만화영화 동아리가 상영한 ‘광주항쟁’ 비디오였다. 학살자의 명령에 따라 계엄군이 잔혹하게 민주시민과 학생들을 학살하고 구타하는 장면에 연희는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간다. 당대의 얼마나 많은 청춘이 그 장면을 보고 운동권에 몸을 던졌는지, 새삼 재언(再言)이 필요치 않다. 나와 친구 혹은 애인과 가족의 범주에 머물러 있던 허다한 장삼이사들을 거리의 투사이자 민주주의의 전위(前衛)로 내몰았던 광주항쟁!
시위에 참가하지도 않은 연희가 사복경찰에게 잡히기 직전의 절체절명 순간에 한열이 연희의 손목을 잡는다. 단시 (短詩) <절망>에서 김수영 시인이 투덜댄 것처럼 “구원(救援)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인연을 맺는다. 하지만 연희는 아버지의 뜻하지 않은 죽음과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이라는 이중적인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그토록 믿었던 사람들 때문에 아버지가 세상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연희. 그녀는 말한다.
“그런다고 세상이 변해?! 삼촌이 바라는 그런 세상은 절대 오지 않아.”
김정남과 이부영의 비밀교신에 관여하는 교도관 한병용의 조카딸 연희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리 열심히 피나게 뛰어도 세상은 요지부동이란 게다. 엄청난 숫자의 달걀로 바위를 내려쳐도 바위에는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는다는 논리다. <1987>은 연희의 이런 확고부동한 사고방식에 어떻게 균열이 생겨나고 강화되는지 보여준다. 정해진 논리에 따라 객석을 이끌고 가지 아니하고, 연희의 어린 사유와 인식의 변화과정을 드러내는데 주력(注力)하는 것이다.
한열은 1987년 6월 9일, 다음 날로 예정된 ‘6.10 대회 출정(出征)을 위한 범 연세인 총궐기대회’에 참여하여 연대정문 앞으로 진출하려는 학생들과 함께 교문진출을 막으려는 전경들과 대치(對峙)한다. 6월 항쟁의 첫 번째 포문이 열리기 직전이다. 그런데 일부 전투경찰이 고각(高角)으로 발사해야 하는 최루탄을 학생들을 향해 수평으로 발사한다. 정문 부근에서 쓰러져 있던 학생을 구하려 다가가던 한열은 전경이 쏜 직격 (直擊)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고 쓰러진다.
사경을 헤매던 한열은 뇌손상이 회복되지 않은 채 합병증인 폐렴이 발생하여 7월 5일 21세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한열의 장례식은 7월 9일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서울 시청에 100만, 광주에 50만 등 전국적으로 160만 추모인파가 그의 죽음을 기린다. 이한열은 광주광역시의 망월동 국립묘지 5.18묘역에 묻힌다. 그의 장례 열흘 전에 학살군부정권은 이른바 ‘6.29선언’으로 체육관 선거를 포기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전격적으로 수용하기에 이른다.
<1987>에는 그 유명한 명동성당 투쟁도, 교수들의 시국선언도, 스님들의 장삼투쟁도 나오지 않는다. 자연발생적으로 거리에 나타났던 넥타이 부대와 운전기사들의 경음기 투쟁동참도 스치듯 등장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모여 결코 변할 것 같지 않던 저주 받을 세상, 교도관 한병용이 그토록 소망하던 사람 사는 세상의 도래(到來)를 제시한다.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는 그렇게 값진 희생을 전제로 얻어진 것이다.
항쟁의 승리도 잠깐 김영삼과 김대중의 정치적 야욕은 군부독재의 연장에 숨통을 터준다. 이른바 양김분열로 인해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다시 뒷걸음질 친다. 훗날 김영삼은 노태우에게 무릎 꿇고 김종필과 함께 3당 야합에 도장을 찍는다. 대통령이라는 평생의 꿈을 위해 호남을 고립시키는 야비한 술수(術數)를 부린 것이다. 김대중은 살아생전 양김분열의 책임을 통감한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나라도 그때 양보해야 했다”는 반성은 너무 늦은 후회였다.
항쟁의 주역으로 참가했던 수많은 청년학도들이 386의 이름으로 정치권에 진출하여 새바람을 일으켰지만, 상당수가 민정당의 후신(後身)인 한나라당과 새한국당, 새누리당(현재의 자유한국당 전신(前身))에 투신함으로써 민주주의 역사를 후진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1987년 당시 세상을 버린 박종철의 죽음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그를 욕보인 박종운이나, 이한열의 안타까운 죽음을 외면한 386 정치인들은 훗날 가혹한 역사의 법정에 서게 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