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 위대한 화가
에곤 실레
[ EGON SCHIELE ]
요약 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의 표현주의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간의 육체를 묘사하고, 성적인 욕망을 주제로 다루어 20세기 초 빈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죽음과 소녀>는 실레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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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출생지-사망지예술양식작품
1890년 6월 12일 ~ 1918년 10월 31일 |
오스트리아 툴른 - 오스트리아 빈 |
표현주의 화가, 초상화, 자화상, 풍경화, 고통에 사로잡힌 인물들, 십대 소녀들의 노골적인 데생, 밀실공포증적인 도시 풍경화 |
미술작품 감상하기 |
구스타프 클림트의 친구이자 피후견인이었던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표현주의적인 선들을 더욱 발전시켜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간의 육체를 묘사하고,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주제로 다룸으로써, 20세기 초 빈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빈 공간을 배경으로 툭툭 튀어나온 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마르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한 실레의 자화상은 고뇌하는 미술가 신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것은 그의 작품의 어느 일면일 뿐이다. 실레의 도시 풍경화들은 역동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파로 넘쳐나는 도시 모습의 이면에는 어떤 긴장감이 감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실레가 그린 장인의 초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그린 초상화들은 감정이입의 표현이 훌륭하며, 가장 뛰어난 초상화 작품들에 속한다.
실레는 열여섯 살에 빈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지만, 그곳의 교육이 케케묵고 인습적이라고 생각되어 곧 그만두었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창립했다. 그 후 그는 여인들과 소녀들의 누드화를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하고 생생하게 묘사한 드로잉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드로잉들은 실레가 크루마우로 이주한 후인 1911년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모델이자 동거녀었던 발레리 '발리' 노이칠과의 자유분방한 생활과 미성년자들을 모델로 그린 그림들 때문에 크루마우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노이렝바흐에서는 더욱 이해받지 못했다. 1912년 실레는 그곳에서 어린 모델들을 데려다가 부도덕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죄목으로 잠시 동안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죽음과 소녀>는 실레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군복무를 마치고 빈으로 돌아온 실레가 1917년에 그린 <포옹>
1915년 실레는 발리와의 동거 생활을 청산하고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했다. 1918년이 되자 실레는 지난 몇 년간에 비해 훨씬 더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다. 아내인 에디트는 임신한 상태였다. 실레는 빈 분리파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해에 사망한 클림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아버지가 된다는 기대감으로 <가족>(1918)을 완성했다. 새롭게 발견한 희망을 보여주는 듯한 이 작품에서 실레와 아내, 아이는 모두 나체로 묘사되어 있으며 특히 인물들의 행복한 표정이 눈에 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실레의 아내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했고, 아내와 뱃속의 아기를 잃고 슬퍼하던 실레도 스페인 독감으로 3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
실레에 관한 사소한 것들
· 실레의 왜곡된 인물 습작은 접사다리 위에서 작업한 것에 기인한다.
· 실레의 작품들은 빈의 레오폴트 미술관에 많이 있다.
· 실레가 감옥에서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일기는 사실 그의 친구이자 평론가인 아르투르 뢰슬러가 쓴 것이다.
· <발리의 초상>(1912)과 <죽은 도시 Ⅲ>(1911)는 21개월이나 뉴욕에 억류되었다. 전시를 위해 대여 중이었던 두 작품은 나치가 오스트리아에서 약탈한 것으로, 원 소장자가 이를 돌려받기 위해 재판에 회부한 상태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곤 실레 [EGON SCHIELE]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스티븐 파딩, 위키미디어 커먼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