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저의 책에서 인혁당 사건을 다룬 내용들을 발췌하여 공개하고자 합니다. 아래 글은 무장봉기에 의해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주의 혁명을 이룩하려고 했던 인혁당의 역사적 뿌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가. 통일혁명당의 무장투쟁준비
1965년 11월 김종태와 이문규와 김진락 등 세 명은 본격적으로 지하당을 창당하기 위한 논의를 거쳐 통일혁명당의 창당을 결의하였으며
'조국해방전선'과 '민족해방전선'의 두 계통으로 조직을 확장하기로 하고 이문규와 김질락이 각각 두 전선의 책임을 맡았다. 김질락과 이문규는
1967년 5월 함께 월북, 약 한 달간 체류하며 노동당에 입당하고 공작금 및 난수표를 교부받았다. 서울로 돌아온 이문규는 '학사주점'을
설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60년대 학사회를 조직해 나갔으며, '조국해방전선'을 결성하고 조직확대를 꾀하였다.
통혁당의 12개조의 강령 중 첫째 강령과 둘째 강령 제목만 열거하면 이러하다: 1. 미제국주의 식민지 통치의 철폐와 자주적 민주정권의 수립.
2. 파쇼독재체제의 소탕과 사회정치 생활에서 민주주의의 실현.
조희연은 '무장투쟁'을 위한 통혁당의 목적의식적인 노력들의 구체적인 예로서 다음 여덟 가지를 든다.
특수전술교관요원 후보로서의 이진영과 오병현의 월북: 대부분의 경우 월북은 단기간(4~5일내지 1주일)에 이루어졌으나 이 경우 6개월 예정이었다고
함. ② 유사시를 위한 무기획득 및 무기 비축방법, 비축지의 궁구 ③게바라의 querilla warfare의 번역 및 윤독 ④ 군부 내
조직부식을 위한 초보적인 지도 ⑤ 말도에서의 봉사활동 및 선박구입에의 적극적인 참여 ⑥ 유격전을 예상한 생할상의 규율 강조(조기 기상 등) 및
신체단련(구보 등), 전투력 품성에의 강조 ⑦ PS(from Paper to Steel) 작전으로 표상되는 무장투쟁의 현실적 가능성에 대한 공감
⑧ 개개인의 생활근거지(소재지, 직장 등)를 무장투쟁과 연관시켜 사고하는 관념 등이다 (조희연 1990, 120).
그런데, 위의 6번에서 전투력 품성이란 남로당 '당원 준칙 11訓'과 모택동의 '자유주의 배격 11훈'을 숙지하는 것을 일컫는다.
조희연은 남민전은 ‘무장이 수반된 민중봉기’를 전제하고 있었으며, ‘도시게릴라’ 방식의 대중봉기를 전망하였던 것으로 간주한다 (조희연
1991, 288). 조희연에 따르면 무장 유격전 방식과 전국적 대중봉기 방식은 인혁당과 통혁당과 남민전의 공통점이었으되 단지 이 두 방식의
배합 비율이 각각 조금씩 달랐다. 인혁당에 있어서는 전국적 대중봉기 방식을 중심으로 하여 사고하면서 무장유격전의 장기적 가능성을 인정하되,
통혁당에 있어서는 전국적 대중봉기 방식의 유효성을 인정하되 그러한 봉기의 발전된 형태로서의 '무장유격전'을 보다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경우는 '도시게릴라' 형태의 무장투쟁 방식을 구체적으로 사고하고 실행에 옮겼다 (무기 취득 및
'혜성대'의 가동 등) (조희연 1990, 133).
조희연에 따르면 통혁당 내부의 무장투쟁관은 국제적으로는1964넌 이후 북한의 적극적인 대남 노선과, 국제적으로는 중국혁명, 쿠바혁명의 경험에
의해 추동되었다. 그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관찰한다:
먼저 국내적인 측면에서 보면,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64년 이후 '대남사업총국'의 책임자로 허봉학이 부임하면서 '전투적' 대남노선 및 대남
지하당건설노선이 보다 강도있게 추진되는데, 이러한 대남노선의 영향이 통혁당의 무투관 형성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점이다. 실제 64년
이후 60년대말까지 북한은 남한에서의 유격근거지의 구축, '결정적' 시기에서의 남한 무투역량과 북한 군사역량의 결합을 목표로 대남노선을
적극화하여왔다. 다음으로 49년 중국에서의 혀명의 성공, 59년 쿠바에서의 혁명 성공은?비록 양자의 무장투쟁의 역사적 경과와 형태는 달랐음에도
불구하고?제3세계 혁명운동의 현실적 투쟁형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의 운동 역시 그러한 영향을 일정하게 받고 있었다 (조희연 1990,
135).
광주사태 때 등장한 도시 게릴라 방법도 1980년 5월 19일에 갑자기 우발적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1960년대의 통혁당 시절부터
운동권은 그 방법을 터득하고 실행하려는 시도를 하였었다. 즉, 무장투쟁의 방법과 형태로서 '도시게릴라' 방법이 잠재적으로나마 상정되고 있었던바,
조희연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당시 남한사회의 경우, 중국의 '井岡山', 베트남의 '정글', 쿠바의 '농촌 배후지'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숲', '인간정글'
속에서의 가동력 있는 무투방식(도시게릴라 혹은 농촌에서의 소규모 유격적)이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비정규적 군대'에
해당하는 것인 바, 이러한 무력을 확대강하하고 그것을 결정적인 국면에서 '정규군대'로서의 북한의 군사역량과 결합시켜냄으로써 혁명적 투쟁의
성공가능성이 주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조희연 1990, 135-136).
통혁당이 그런 노력을 하던 당시 광주에서 광랑을 장악하였으며, 윤한봉 등 청소년 시절 광랑에서 의식화되었던 광주운동권이 훗날 무장투쟁 준비를
하였다. 이처럼 윤한봉 등 광주운동권이 1980년 봄에 돌발적으로 무장투쟁 준비를 하였던 것이 아니라, 1960년대 중후반으로 거슬러올라가는
통혁당의 무장투쟁 준비의 산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