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부터 있는데 마지막 부분에 4권이후 이야기가 있어요,,
한번 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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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어떤 분께서 팔라딘이란 말에 이견을 보내오셨는데, 사전을 찾아
보니 팔라딘이란 단어는 '높은 수준으로 무예를 닦는 사람'으로 나와 있더군요.
아마 제 생각으로는 팔라딘이란 말을 계속 써도 무방할 것 같은데, 여러분들의
생각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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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르보네 마을에 잘 오셨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마을은 현재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그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팔라딘의
실력을 지닌 당신 같은 분이 꼭 필요합니다. 부디 저희마을을 위기에서 구해
주십시오"
"................."
모닥불 주위에 모여있는 병사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듯한 사내가 뭐라고 자신에게
떠들자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한성은 그저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풀
플레이트 매일을 착용하고 있는 30대 초반의 그 사내는 푸른 눈에 간곡한 빛을
담고는, 계속해서 한성에게 말을 건넸다.
"젠장 뭐라고 말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그러나 한성은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사내의 눈빛에
담긴 염원이 지극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 병사들은 얼굴에 희열의 빛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성을 둘러싸고는 어디론가 인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태도에 한성은
당황했으나, 그들의 행동에 적의가 드러나지 않은 것을 본 한성은 그들의 인도에
따라가기 시작했다.
배도 무척 고팠고, 옷도 구해야 하기에, 일단 그들이 안내하는 곳으로 가 볼
생각을 한 한성은 그들을 따라 말이 매여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한성에게 정중하게 말 한 필을 내어주었고, 한성은 사뿐히 그 말에
올라탔다.
"중원의 말보다는 월등히 덩치가 크군, 힘도 무척 세어 보이고......."
중얼거리는 한성의 말에 그들은 문득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그들은
앞장서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덩치가 중원의 말보다 큰 만큼, 그 말들의
속도는 빨랐으나, 이내 한성은 그들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이미 한성은 기마술에
대단한 조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말을 내어준 요세프는 그 기사가 숙련된 기술로 말을 몰자, 눈에 이채를
띠었다. 말이라는 동물은 주인이 바뀌면, 쉽게 새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이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말은 쉽사리 저 낯선 기사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순순히 따르는 것이 상당히 이상했던 것이다.
'저 숙련된 기마술을 봐서, 분명히 저 인물은 실력이 뛰어난 기사임이 틀림이
없어'
자신의 예측을 확신한 요세프는 말을 몰아 그를 뮬렌 백작의 저택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 시각 뮬렌 백작은 자신의 마을에 대 전사로 지원한 기사를 만나고는 무척
감격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그는 예전에 로세니아의 근위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실력이 뛰어난 팔라딘 이었던 것이다. 뮬렌 백작은 이미 로세니아의 수도인
로젠에서 이미 그를 만났기에 그의 실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뮬렌 백작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뮬렌 백작님"
"오 루크경이 이렇게 달려와 주다니 정말 어떻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할지"
뮬렌 백작의 앞에 서 있는 삼십대 초반의 우람한 기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비록 근위기사단을 탈퇴했다고는 하나 저는 자랑스러운 로세니아의 기사라는
것을 한 시도 잊어 버린 적이 없습니다."
"정말 고맙소, 공의 실력이라면,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바, 이제 한 시름, 덜 수
있겠구려"
루크 라고 불리는 기사는 천천히 자신의 옆에 있는 콧수염을 기른 장대한
체구의 사내를 뮬렌 백작에게 소개했다. 그러자 그 사내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예를 취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지크레아 왕국의 기사인 벨레로크이라고 하옵니다"
"그는 지크레아왕국의 중앙기사단 소속이었지요. 아마 대 전사로 출전하기에
충분한 실력이 있을 것입니다. 저와 그는 우연히 만나, 지금까지 동행하고
있지요"
"오오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고맙소이다. "
뮬렌 백작은 두 눈에 감사의 뜻을 가득 담고 그들을 응시했다. 일전에 캇셀도르프
제국의 압력으로 로세니아 왕궁의 궁정 마법사였던 필리모네스를 추방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에 반발해서 근위기사단을 탈퇴하고 대륙을 떠돌던 기사 루크
반 필리어드가 자신의 대 전사로 나선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힘이 났던 것이다.
사실 로세니아의 국왕인 펠리오네 3세는 무척이나 심약하고 겁이 많은 인물
이었다. 그랬었기에 아르펜 대륙에서 유일한 8 써클의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궁정마법사인 필리오네스를 두려워 한 나머지, 그를 추방하지 않으면 로세니아
를 침공하겠다는 캇셀도르프의 협박에 견디지 못해, 펠리오네 3세는 필리오네스
를 그만 추방하고 만 것이다. 겁이 많은 펠리오네 3세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런 조치를 취했지만, 그것 때문에 캇셀도르프의 침공을 빨리 받게
된다는 사실은 몰랐던 것이다.
물론 수많은 뜻 있는 기사들이 그에 반발하고 나섰다. 그리고 명예를 중시하는
많은 기사들이 그들이 소속된 기사단을 탈퇴하고, 그들의 고향으로 내려갔다.
루크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근위기사단의 뛰어난 기사였지만, 캇셀도르프 제국의 협박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한 로세니아의 국왕에게 실망하고는 결연히 기사단을 탈퇴하고는
떠나간 필리오네스를 찾아 대륙을 떠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득 루크의 옆에
서 있던 미모의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푸른 로브를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법사로 보이는 그녀는 캇셀도르프 제국의 대 전사들에 대처할 방법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마도 캇셀도르프 제국에서는 비밀 기사단 소속의 상급 팔라딘을 보내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대륙의 통일이라는 미명아래, 수많은 비밀 기사단들을
키우고 있는 형편이니까요"
뮬렌 백작은 천천히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루크의
소개를 들어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로 로세니아
왕국의 궁정마법사였던 필리오네스의 수제자인 일레인이었다. 그녀는 지금
5써클의 마스터인 숙련된 마법사로 자신의 스승을 찾기 위해, 루크와 동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천천히 캇셀도르프 제국 측에서 보내올 대 전사를 상대할 방법을 상의
하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의 영지를 지켜낼 희망의 빛을 찾은 뮬렌 백작은
골똘히 그들과 전략을 숙의하기 시작했다.
한성은 벽안의 사내의 안내를 받으며, 작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원의 것과는 형태가 무척 다른, 이곳의 성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한성은 성문이 열리자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성문이
내려지며 해자(성 주위에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파 놓은 연못) 위에 놓은
다리로 변하자, 한성은 천천히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에 들어가자, 한성은
자신을 안내하는 사내에게 말을 걸어, 음식과 옷을 구할 수 없는지 물어
보았으나, 도통 그 사내는 자신의 손짓과 발짓을 알아듣지 못했다. 한성은 이미
카르보네스의 레어를 나서며, 충분한 보석을 챙겼기에, 금전적으로 부족한 것은
없었지만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기에, 한성은 일단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마을을 지나며 한성은 마을주민들이 힐끔거리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자신을 안내하는 사내들도 상당히 중 갑주를 걸치고
있었지만, 자신이 걸치고 있는 염갑 보다는 훨씬 가벼워 보였다. 그런 육중한
갑주를 그들보다 체격이 호리호리한 자신이 걸치고 다니는 것이 꽤나 신기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 한성은 천천히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리 저리
숨어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마을의 주민들은 대체로 금발에 벽안을
가진 전형적인 서양인의 모습이었다. 남자들은 보통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여자들은 대단히 날씬하고 아름다웠다. 천천히 이국적인 모습의 마을건물들을
바라보던 한성은 자신을 안내하는 사내들이 무척 규모가 큰 저택에 멈춰 서자
그 저택을 바라보았다.
중세의 귀족들이 거주하는 이 저택은 한성이 이미 사진 등을 통해 이와 유사한
형태의 저택들을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자신을 안내한 사내가 저택의
문을 두드리자, 그 사내와 같은 갑주를 입은 병사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kanisipke ean nimjuyoung"
"kakunnu nunjaje derunk"
고개를 내민 장대한 체구의 사내는 의아한 듯이 한성을 쳐다보다가, 처음에
한성을 안내한 사내의 대답을 듣더니 반색을 하면서 한성을 맞아 들였다.
"danisupsutyo jal danisupgapvan"
"젠장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야지 대답을 하지"
투덜거리던 한성은 그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긴 회랑을 거쳐, 한성은 그 장대한 체구의 사내를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안내하는 사내는 정말 커다란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딱 벌어진 어깨에
꽤 힘을 쓰게 생긴 사내는 철판을 이어서 만든 두꺼운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간혹 하녀로 보이는 여인들이 옆으로 비켜서며, 호기심 어린 시선을 한성에게
보냈으나, 앞장선 사내는 아랑곳없이 한성을 데리고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층에 있는 백작의 집무실로 안내된 한성은 천천히 안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안내한 사내가 꽤 신분이 높은 듯한,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는 중년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느끼며, 한성은 안의 탁자에 앉아 있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탁자의 중앙에 앉아 있는 젊은 사내들을 바라본 한성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들은
두 눈에 정광이 어려있는 것이 상당히 고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실력을 가늠해 본 한성은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상당한 미모를 가지고 있는 금발의 아가씨가 한 명, 그리고 아직 실력이 낮은
젊은 무사가 한 명이 있었다. 한성은 천천히 두 명의 무사의 실력을 가늠해
보기 시작했다.
'거의 절정의 수준에 도달한 실력들이군. 내공은 꽤나 쌓은 듯한 흔적이 보이는데,
그것을 효율적으로 제어하지는 못하는군'
한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 무척이나 충만한 이곳에서는 조금의 수련
만으로 몇 배나 높은 성과를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 한성은 쌓아놓은 내공에 비해
잘 운용하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미 심검의
경지에 이른 한성은 잠시 살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수련정도를 알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가장 신분이 높은 듯한 인물이 자신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끼며 한성은 손짓 발짓을 섞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배가 무척 고픕니다. 그리고 옷이 필요합니다."
이방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손짓과 발짓을 동원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뮬렌 백작과 루크, 그리고 벨레로크는 이채를 띠며 살피기 시작했다. 사내는
간간히 자신들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을 걸었는데, 도저히 자신
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이상하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야"
"그래요 적어도 이 아스펜 대륙에 존재하는 언어는 아닌 모양 이예요"
"그런데 저 이방인이 어떻게 우리 대륙에 올 수 있었을까?"
그들은 고민에 빠졌다. 그때 뮬렌 백작의 음성이 들려왔다.
"외곽의 경계를 서는 요세프가 그를 데리고 왔다고 하오. 아마 헤르시온으로
보이는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봐서, 저 사내가 팔라딘 급의 기사라고
생각하고는 데리고 온 모양이오"
뮬렌 백작의 말을 들은 루크와 벨레로크는 사내가 착용하고 있는 갑주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정말 그렇군요. 형태가 우리들의 것과 많이 다른 것을 보니, 무척 옛날에 제조된
것 같네요. 거의 순수한 강철로만 만들어진 것 같은데, 저 무거운 것을 어떻게
착용하고 있지요? 범인이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할텐데"
루크와 벨레로크는 각자 자신의 헤르시온을 소유하고 있기에, 이국의 사내가
착용하고 있는 것이 무척 구형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것과 같은 대 마법갑옷인
헤르시온이라는 것을 알아 차릴 수 있었다.
그때 마법사인 일레인이 입에다 손을 가져다 대며, 그들에게 조용히 할 것을
요청했다.
"잠깐 기다려 봐요, 혹시 통역마법이 통하는지 알아 볼께요"
일레인은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금발의 미녀가 느닷없이 주문을 외자 한성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흑포의 중년인이 외우는 주문에 의해 뜨거운 맛을 충분히 봤던 것이다. 그러나
한성은 아내 그녀의 눈에 살기가 감지되지 않는 것을 보자, 긴장을 풀고 그녀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bupma oui yuktong"
그녀의 손에서 밝은 빛이 일어난 뒤, 뜻밖에 한성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듣게 되었다.
"당신은 누구지요. 그리고 왜 여기에 있지요"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나게 되자, 한성은 잠시 멍해졌다. 그러나 이내 한성은 그
동안 못했던 대화를 모두 하려는 듯 그녀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정말 반갑소, 여기서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나다니. 대관절 여기는 어디요.
그리고 나를 왜 이곳으로 데리고 왔소"
그녀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제발 천천히 말을 해 주시겠어요?. 그리고 나는 지금 마법을 써서 당신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이 마법의 효력은 오래 지속되지 않으니, 내게 물어볼 것이
있으면 빨리 물어 봐 주시겠어요?"
마법이란 말에 한성은 다시 멍해졌으나, 이내 빨리 대답하라는 그녀의 질책을
받고 자신에게 현재 절실한 것을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무척 배가 고프니, 음식을 좀 주겠소, 그리고 내가 입을 옷도 한 벌
필요하오"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천천히 한성의 정체를 물어 보았다.
"당신은 어디에서 온 누구죠?"
당연히 차원이동을 해서 이 곳과는 공간과 시간이 전혀 다른 중원에서 왔다고
하면, 당연히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기에, 한성은 적당히 말을 꾸며대기
시작했다.
"나는 먼 곳에서 왔소. 그만 본국의 배가 난파되었기에 파도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찾아 온 곳이 이곳이오. 그런데 아까 나를 안내한 사람들이
다짜고짜 나를 이리로 데리고 왔소."
한성의 설명을 들은 여인은 천천히 다른 사람에게 한성의 정체를 들은 대로 설명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작의 얼굴에 다시 실망의 표정이 어렸다. 그들에게
한성의 정체를 말한 여인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한성에게 물어 보았다.
"그 갑옷은 여기에서 얻은 것인가요?"
"아니오, 이것은 내가 살던 곳에서 가지고 온 것이요"
"그렇다면 당신은 팔라딘 인가요"
팔라딘의 뜻을 모르는 한성은 그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했고, 그녀는 단순한
통역마법으로는 짧은 시간 내에 팔라딘이란 단어가 뜻하는 바를 설명할 수 없음을
알고 쓴웃음을 지었다. 통역마법은 한 번에 오래 쓰지는 못했기에, 그녀는 일단
한성이 현재 원하는 것을 백작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자 백작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시녀를 한 명, 불러 한성에게 먹을 것과 옷을 주라고 당부했고, 한성은 그녀의
안내를 따라 방을 나섰다. 그 이국의 사내가 사라지는 것을 본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팔라딘 급의 기사라고 해서, 기대를 가졌는데, 헛된 기대가 되고 말았군."
"조급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일단 저희들이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까요"
이국의 무사에게 관심을 끊은 그들은 다시금 대책마련에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시녀에게서 낡은 옷을 한 벌 건네 받은 한성은 민첩하게 손을 뻗어 시녀의 혼혈을
짚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시녀를 사뿐히 받아, 옆에 내려놓은 한성은 천천히
염갑을 풀었다. 염갑이 다시금 배갑의 형태로 돌아갔고, 벌거벗은 한성의 알몸이
드러났다. 한성은 천천히 시녀가 건네준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 옷은 조금
컸지만,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기에, 대충 그 옷을 걸쳐 입은 한성은 염갑을
갈무리하고는, 다시 시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sork dho dlfjwl?"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린 시녀는 기지개를 켜더니, 고개를 돌려 한성의
모습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그녀는 한성의 이국적인 모습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젠장"
한성은 두 손을 펴서 , 그녀를 진정시켰고, 이내 눈 앞의 생소하게 생긴 이국인이
바로 아까 자신이 안내했던 헤르시온을 걸치고 있던 그 기사란 것을 깨달은 시녀는
두려운 눈빛으로 그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내가 무슨 괴물로 보이는 모양이군, 젠장 그래도 중원에서는 제법 미남자로
통했는데"
투덜거리던 한성은 음식이 나오자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원래 식욕이 좋기로
정평이 있는 한성이라, 그가 음식을 걸신들린 듯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시녀는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음식은 생각보다는 맛이 있었다. 어느새 한성은 두 상의
음식을 모두 먹어치우고는, 트림을 하면서 배를 두드렸다.
"이제 좀 살 것 같군, 그 용의 고기는 정말 맛이 없었는데, 의외로 이곳의 요리는
먹을 만 하군"
배가 부르니 스르르 졸음이 오는 것을 느낀 한성은 그대로 의자에 기대어 졸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아랑곳없이 잠을 자는 이국의 사내를 바라본 시녀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병사를 한 명, 불러서, 한성을 감시하게 한 다음
종종걸음으로 식당을 떠나기 시작했다. 한성은 그것도 모르고 태평하게 식당에서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시녀의 보고를 들은 뮬렌 백작은 천천히 좌중의 인물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이미 캇셀도르프 제국의 대 전사들을 상대할 방법을 구상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에는 지금 식당에서 잠을 자고 있는 이국의 사내가 꼭
필요했다.
"그 사내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소"
뮬렌 백작은 천천히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이번 아르키스 영지에서는 세 명의 대 전사들을 출전시킬 것이오. 그렇지만
현재 우리에게는 두 명의 대 전사로 나설 기사만 있소. 물론 대 전사로 출전하는
기사들은 당연히 팔라딘 급이라는 전제하에 우리는 그 이국의 사내를 출전시킬
수밖에 없소"
뮬렌 백작의 설명은 계속 되었다.
"정확한 실력은 모르지만, 헤르시온이라고 추정되는 구형의 대 마법갑옷을 착용
하고 있는 이상 그 이국 사내는 분명히 마나를 운용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소. 그렇다면 그를 이쪽의 대 전사로 출전시켜 아르키스 영지에서 내보내는
대 전사 중 가장 강한 인물과 싸우게 한다면, 그의 승패와 상관없이, 이 곳의
루크경과 벨레로크 경의 승패에 따라 본 영지의 운명이 좌우될 것이오"
중앙의 요직에 있었던 경험을 살려, 뮬렌 후작은 대단히 효과적인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이국의 사내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요"
불연 듯 그 이국의 사내에게 측은한 감정을 느낀 일레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소, 그 사내의 실력을 모르는 이상, 삼전 이승(三戰二勝)제의
이번 대 전사 결투에서 승리하려면, 그 방법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소"
뮬렌 백작의 설명에 좌중의 인물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측은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마법사 일레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백작의 의견에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작은 천천히 결론을 내렸다. 이미 모든 인물들이 백작의 제안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책회의는 거의 끝난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곧이어
회의가 종료된 후, 백작의 집무실에 모인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처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잠에서 깬 한성은 자신을 지키고 있는 건장한 체구의 병사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일어나자 대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자신을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그들의 태도가 왠지 마음에 거슬렸지만, 옷과 음식을 얻은
죄로 한성은 천천히 그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어제 가 보았던 커다란 집무실에
들어선 한성은 어제의 그 인물들이 다시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가장 신분이
높아 보이는 인물이 손짓을 하자, 어제의 그 여자 마법사가 앞으로 나서더니
다시금 통역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잘 쉬셨나요? 이국의 기사분"
"예 덕분에......"
한성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천천히 한성이 해야 할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충 말하자면, 이 마을과 옆의 이웃마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겨서 각 마을
에서는 세 명의 대 전사를 내보내서 그들의 승패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자신이 이 마을의 대 전사로 나가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한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할 수 없군, 옷 얻고 밥 먹은 죄로, 이들을 도와줄 수밖에...."
분명히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좋지 않은 내용인데도, 뜻밖에 그 이국의
사내가 옅은 웃음을 띄고 있자, 좌중의 인물들은 의아해 했다. 그러나 뮬렌 백작의
반응은 좀 달랐다.
'싸움을 전혀 겁내지 않는 것을 보니, 저 사내는 자신의 나라에서 기사나 그에
준 하는 신분이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이어 통역마법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동안, 한성에게는 그들의 질문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질문은 여 마법사 일레인이 중간에서 통역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헤르시온은 어디서 얻은 것 이예요?"
"헤르시온?"
한성이 반문하자 일레인은 이마를 딱 치더니 헤르시온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그녀는 이곳의 개략적인 사정과, 그리고 팔라딘에 대한 설명을
통역마법의 효력이 사라지기 전에 한성에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미
어제 통역마법의 스펠을 메모라이즈 해 놓았기 때문에, 어제보다는 그 효력이
오래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극도로 내공이 발달한 중원과는 달리, 이곳은 마법이
훨씬 많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예전의 이곳에서는 기사들보다는
마법사들이 더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사실 기사들은 오로지 백병전용
무기로써 접근해서 싸워야지 만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마법사들은
달랐다. 비록 그들의 체력이 기사들보다 떨어지지는 했지만, 거리를 두고
상대를 요격할 수 있는 각종 마법공격들은 항상 기사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오래 전에 한 마법사에 의해 발명된 헤르시온이라는 대 마법갑옷으로
인해 그 위치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 마법사는 기사들을 위해 각종 공격마법을
막아주는 대 마법갑옷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그 갑옷의 표면에는 효율적인
대 마법주문들이 각인 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사들은 더 이상 마법사들의 공격
마법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것에는 제약이 있었다. 갑옷의
표면에 각인된 대 마법주문을 활성화시키려면, 그것을 착용하는 기사는 적어도
어느 정도 마나를 움직일 수 있는 팔라딘 급의 기사 여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기사는 마법사에 비해 체력이나 전투력이 월등히
뛰어났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마법수련에 정진해야 하는 마법사에 비해
기사들은 비교적 그 수련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아이러니컬하게도 마법사에
의해 만들어진 헤르시온으로 인해 마법사와 기사들의 위치는 역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거쳐 헤르시온은 휴대의 편리성을 높이기 위해
계속 개선되어 왔고, 결국에는 헤르시온은 한성이 가진 염갑 처럼 평상시에는
신체의 한쪽에 위치해 있다가, 기를 불어넣으면 다시 본래의 중갑주의 모양으로
돌아가도록 설계되었던 것이다.
"당신의 그 헤르시온은 무척 오래된 것 같아요. 요즘은 그런 형태의 헤르시온은
거의 사용하지 않죠"
그녀는 천천히 탁자에 앉아있는 두 명의 기사를 가리켰다. 그들은 몸통만을
가리고 있는 대단히 얇아 보이는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저들이 입은 것이 요즘 쓰이는 헤르시온이죠. 당신의 것과 같이 전체가 강철
재질이 아니라 저것들은 와이번 본을 입힌 최신형의 헤르시온이죠"
"그런데 와이번 본이 뭐요?"
한성의 반문에 세레나는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당신은 모르는 것이 많군요. 일단 그것은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을 테니,
일단 당신이 지금 우리들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봐도 좋아요"
"그럼 팔라딘이란 것이 무엇이오"
그녀에게서 팔라딘에 대한 설명을 들은 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팔라딘이란 오랜 수련을 통해, 마나를 제어하여, 검에 응축시킬 수 있는 고급
기사를 일컬어 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들은 한성은 그녀가 말하는 뜻을 알 수
있었다.
'어기충검술을 쓸 수 있는 고수를 뜻하는군'
그때 다시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통역마법이 이제 거의 효력이 떨어졌어요. 그런데 당신의 이름은 뭐죠?"
"내 이름은 한성이오"
"한스?"
"아니오 한, 성,"
한성은 일부러 한자 한자 끊어서 자신의 이름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똑바로 발음할 수 없었다.
"오우 한센?"
"당신 마음대로 부르쇼"
한성은 투덜거렸다. 그때 통역마법의 효과가 떨어지고, 다시금 한성과 그녀와의
대화가 단절되었다. 이어 그녀와 그녀의 일행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한성은
그들의 헤르시온이라고 부르는 갑주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떤 재질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헤르시온은 무척 가볍고 견고해 보였다.
그 부피도 간신히 몸통만을 가리고 있어서, 등에 메고 있는 자신의 염갑보다
훨씬 휴대하기가 편해 보였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검들은
무척 무거워 보였다. 대충 그들의 무공을 가늠해 본 한성은 그들 중 루크라고
소개받은 기사가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손마디와 눈빛을 본 한성은 대뜸 그가 이곳의 최고수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리저리 근육이 붙은 우람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의
무사들은 대체로 근육이 잘 단련되어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내공을 잘 제어하면 굳이 근육이 내는 힘보다 월등히
강한 위력을 보일 수 있을 텐데......."
물론 혼잣말로 하는 한성의 고려의 언어를 좌중의 인물들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대신 벨레로크라고 소개받은 기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오더니
한성의 검이 보고싶다는 표정을 하였다.
"짜식 무인에게 검을 보여달라고 하다니? 중원이라면 넌 바로 칼을 맞을 텐데,
하지만 할 수 없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랬다고, 이곳에서는 검을 보여
달라는 것이 큰 실례가 되지 않은가 보지?"
한성은 자신의 검을 반쯤 뽑아들더니, 그것을 벨레로크라고 불리는 기사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그 기사가 자신의 청강장검을 자세히 살피는 것을 바라보았다.
"꽤나 얇은 검이군, 날도 상당히 예리하고, 그런데 이것으로 격전을 벌인다면,
몇 번 쓰지 않아서 검날이 나가버리겠는데......."
검을 살펴본 벨레로크가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자 루크가 다가와
그 검을 받아 들었다. 천천히 이국 무사의 검을 살펴본 루크는 조금 다른 의견을
내었다.
"그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닌 것 같아.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팔라딘 이라면
능히 마나를 검에 집어넣어서, 검의 강도를 높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실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데?"
"글세 두고보면 알겠지"
그들은 천천히 그 이국의 사내가 왔으리라 짐작되는 나라를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 나라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어 그들은 한성이 가진
염갑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형태를 보아 적어도 오백 년은 족히 된 것 같아. 요즘은 철로는 거의 헤르시온
을 만들지 않은지가 오래 되었거든, 이렇게 무거운 갑옷을 입고 움직이려면,
정말 힘이 들텐데.......그런데 이런 오래된 헤르시온이 아직도 작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무척 의외인데?"
루크의 의구심을 일레인이 풀어 주었다.
"그 때는 지금보다 마법사들의 수준이 훨씬 높았잖아요? 지금은 헤르시온
때문에 굳이 마법을 익히려는 수련생들이 많이 줄어들었으니까, 아무래도
차이가 나겠죠?"
그들은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루크가 물어 보았다.
"참 그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던가?"
"한센이라고 하던데요?"
"한센?"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멍하니 앉아 있는 이국의 무사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결투를 벌일 시간이 왔다.
뮬렌 후작은 백여 명의 병사를 동원해서, 대 전사로 출전한 기사들을 데리고,
분쟁의 시발점이 된 베히모스 숲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성도 그들에게
이끌려 갔다. 한성은 느긋하게 말 위에 앉아 주위의 경관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의 태평스런 모습을 본 일레인은 문득 호기심이 간다는 표정을 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그와 대화를 더 나누고 싶은데, 그녀의 통역마법은 그다지 오래 지속
시킬 수 없었기에, 이내 그녀는 그 생각을 지웠다.
'참으로 궁금한 인물이야. 그다지 잘 생긴 것 같지는 않은데, 여자인 나보다도
피부가 더 고운 것이 정말 부러운 걸?'
그러나 일레인은 이내 그 이방인에게 관심을 지웠다. 사실 그녀는 루크를
깊이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살며시 루크의 강인한 얼굴에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루크와 눈이 마주치자 기겁을 해서 고개를 돌렸다.
이미 루크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레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공포의 마룡 카르보네스의 영역을 돌아서 가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동속도는
지루할 정도로 느렸다. 그러나 그들은 일체의 기척도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 피와 살육을 즐기는 블랙 드래곤이 언제 나타나서 그들을 위험에 빠뜨릴지
몰랐다. 만약 카르보네스에게 들킨다면, 이곳의 인물들은 하나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아니 도망칠 수 있다고 해도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그랬다면
카르보네스는 한 명의 생존자라도 끝까지 처치하기 위해 마을로 들이닥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뮬렌 백작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르보네 마을의
모든 병사들은 마을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서슴없이 내어놓을
마음가짐을 하고 있었다. 사실 세르보네 마을은 넓고 풍요로운 대지를 가지고
있어서, 언제든지 로세니아의 중요한 도시로 변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블랙 드래곤의 패악스러운 만행에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마룡에 의해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농민들이 자신들의
기름진 농토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기에, 현재 세르보네 영지는 무척
상황이 어려운 상태였다. 단지 로세니아 왕실에서 많지는 않지만 금전적인
지원과 함께 꾸준히 이곳으로 정착민들을 보내오고 있었기에, 그나마 이
마을의 인구수는 크게 줄지 않는 상태였다.
일행들이 대결장소로 정해진 베헤모스 숲의 공터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아르키스
영지의 병사들은 도착해 있었다. 서로가 미리 약조한 일백 명의 병사들 만을
대동하고, 아르키스 영지의 영주인 군터 자작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색 로브를 입은 세 명의 사내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들은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꺼린 때문인지, 온통 헐렁한 로브로 전신을 가리고 있었다.
뮬렌 백작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가서 인사말을 건넸다.
"많이 기다리셨군요, 노고가 많으십니다"
"뭘요, 개념치 마십시오"
거드름을 피우며 군터 자작이 그에게 답례의 인사말을 했다. 그의 거만한 태도를
지켜보던 뮬렌 백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백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자신
보다, 아르키스 영지의 영주인 군터 자작은 분명히 작위 상에 있어서는 자신
보다 한 단계 낮은 귀족이었다. 그렇지만 강대한 캇셀도르프 제국의 자작은,
약소국인 로세니아의 백작보다도 더 끝발이 높았다. 그것을 알고 있는 뮬렌
백작은 그의 거만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들이 귀 영지에서 내세운 대 전사들인가요?"
"그렇소이다. 본 영지의 주장이 합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온,
캇셀도르프의 의기 넘치는 기사들이지요"
아르키스 영지의 소개에 따라, 대 전사로 짐작되는 세 명의 인물들은 천천히
펑퍼짐한 로브를 벗기 시작했다. 그러자 휘황찬란한 차림을 한 당당한 체구의
기사들이 그 모습을 내밀었다. 문득 그들 중 중앙에 서 있는 인물을 본 뮬렌 백작은
안색이 창백해 졌다.
"이...이런, 말도 안 되는...... 이보시오 군터 자작, 분명히 귀 영지와 본 영지가
자체적으로 해결하라고 합의해 놓고, 어찌 캇셀도르프 제국의 정규 기사단장이
나올 수 있단 말이오"
분노로 온 몸을 부르르 떠는 뮬렌 백작은 군터 자작의 뒤에 버티고 있는 한 명의
기사를 보면서 울분에 찬 음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의 기사는 뮬렌 백작도 잘 알고 있는 캇셀도르프
제국의 정규 기사단장이었던 것이다.
페르넨 드 세바스타인
그는 대 제국 캇셀도르프의 열 개 기사단 중 하나의 단장을 맡고 있는 최상급의
팔라딘 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서열이 낮은 기사단을 맡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당당한 기사단장의 신분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이 외진 아르키스 영지의
대 전사로 출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 전사로 나서는 데, 그의 신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 대결은 오로지 아르키스 영지와
세르보네 영지만의 문제였으며, 그렇다면 캇셀도르프의 정규기사단장이 이번
결투에 나서는 것은 명백한 계약 위반이었다.
그러나 느물거리는 군터 자작의 설명이 뒤를 이었다.
"아 물론 그는 과거에 정규기사단의 단장이었소. 그렇지만, 본 영지의 억울한
사정을 보다 못해, 그는 기사단장 직을 사직하고 결연하게 우리를 돕겠다고
나섰소. 알아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는 분명히 캇셀도르프의 기사명단에서도
제외된 자유기사의 신분이오. 그것은 귀 영지의 사정도 그렇지 않소? 본인은
분명히 들었소. 귀 영지의 대 전사로 출전할 루크 경도 과거 로세니아의 근위
기사단의 일원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군터 자작의 설명을 들은 뮬렌 백작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의
말대로라면, 캇셀도르프 제국의 기사단장인 페르넨이, 대 전사 결투에 나서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미 상대는 이쪽의 대 전사
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대비책을 세우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이쪽의
대 전사인 루크에 비해서, 상대의 대 전사 페르넨은 실력으로나, 명성으로나
분명히 한 수 위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번 결투는 득보다는 실이 많겠는걸....'
뮬렌 백작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번 대 전사들의 결투에는 두
영지의 소유권이 달려 있었다. 쉽게 말해서 이 대결에서 승리한 영지 측에서는
패배한 영지의 영토를 몰수할 수 있는 것이다. 새삼 세르보네 영지를 집어삼키려는
캇셀도르프 제국의 계략을 눈치챈 뮬렌 백작은 뼈저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루크와 벨레로크도 상대의 대전사인 페르넨 기사단장을 알아보았다.
그만큼 그는 각국의 정보망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비겁한 놈들 속이 빤히 보이는 수작을 하는군"
급한 성격의 벨레로크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자 루크가 조용히 그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일단 예정대로 할 수밖에 없어. 페르넨을 저 이국의 무사와 상대하게 하고,
우리는 나머지 대 전사들을 전력을 다해 처리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삼판
이승제의 이번 대결에서 우리가 두 번만 이긴다면 승리할 수 있을 거야."
말을 마친 루크는 고개를 돌려 말 위에 앉아 있는 이국의 무사를 쳐다보았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지. 이번 대결은 승부를 가르는 결투이니까,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페르넨은 저 이국의 무사를 죽이지는 않을 거야"
겸연쩍은 얼굴로 루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침내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한성을 제외하고는 세르보네 영지의 모든
인물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대결에 임하고 있었다. 뻔히 보이는 캇셀도르프
제국의 음모에 순순히 넘어갈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비교적 약한 세르보네 영지측 대 전사들에게, 우선적으로 상대를 선택할 권한이
주어졌기에, 그들은 미리 짠 각본에 따라 대결 상대를 결정했다. 당연히 한성에게
아르키스 영지가 출전시킨 대 전사들 중, 최고의 고수인 페르넨이 배정되었다.
이 곳의 기사들 중 명실상부한 최강자인 페르넨은 천천히 자신의 상대로 지명된
낯선 이국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얼굴의 형태로 봐서 이국인이 분명해 보였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실 그들은 로세니아의 어떤 대책에도 충분하게
대응할 계책을 세우고 온 상태였다. 상황을 봐서 저 이국의 무사는 세르보네
측에서, 단순히 자신을 상대할 소모품으로 끌어들인 용병이라고 생각한 페르넨
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과거 로세니아 근위기사단의 일원이었던 루크를 쏘아
보았다.
'너희들의 약은 수에, 우리들이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미 우리
에게는 너희들이 꾸밀 수 있는 모든 계략에 대한 방비가 되어 있다. 세르보네
영지는 바로 오늘 부로 대 캇셀도르프 제국의 영지로 편입될 것이다'
문득 기분이 좋아진 페르넨은 옅은 웃음을 띠며,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날카로운
눈매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느긋하게 경기를 관전하는 그 기사는 정체가 이
아르펜 대륙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그 기사의 정체와 그의
가공할 실력을 이미 알고 있었다.
'로세니아의 머저리들은 이 기사의 진정한 정체를 알지 못한다. 이번 대결은
명백한 우리의 압승으로 끝날 것이다'
생각을 마친 페르넨은 천천히 걸어나오는 세르보네 측의 대 전사 루크
필리어스를 바라보았다. 첫 번째 대결은 세르보네 측의 대 전사인 루크가
이긴다고 해도 결과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아르키스 측에서는
상대의 계략을 간파하고, 상대의 계책을 역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비록 지금
나가는 기사도 꽤 이름이 나 있기는 했지만, 그들 중에서는 가장 약했다.
그것을 모르는 루크는 바로 그 기사를 자신의 상대로 지명했던 것이다.
페르넨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막 대결이 벌어지려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자, 각 영지에서 내세운 대 전사들은
각자의 말을 타고는 렌서를 겨누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자의 헤르시온
으로 몸을 감싸고는, 커다란 방패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들이 탄 말
들도 묵직한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그랬기에 말들은 그 무게 때문에 빠른 속도를
내지는 못했지만, 흙먼지를 자욱하게 움직이며 그들은 급격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던 루크는 격돌할 만한 거리에 이르자, 얼굴 가리개를 내려
쓴 뒤, 손에 든 랜서로 상대의 방패를 겨누었다. 랜서란 기사들이 기마전에 쓰는
손잡이가 둥그런 긴 창으로써, 창의 날은 그리 날카롭지 않았다. 그러나 질주하는
말의 탄력과, 갑주의 무게에 힘입어 그 창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자 상대인 아르키스 영지의 대 전사도 최대한 몸을 말에 밀착시키고는
랜서로 루크의 방패를 겨냥하고 달려오고 있었다. 두 기사간의 거리는 급격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 두 기사가 격돌할 즈음 루크는 랜서를 올려 상대의 투구를 겨냥했다.
상대의 투구는 찌르기가 어렵지만, 방패에 비해 커다란 충격을 상대에게 줄 수
있는 목표물이었다. 사실 평범한 실력의 기사들은 흔들리는 말 위에서, 방패보다
훨씬 작은 상대의 투구를 겨냥해서 찌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루크는
로세니아의 근위 기사단의 일원이었기에, 충분히 그럴 실력이 있었다.
콰쾅!
아르키스 영지에서 내세운 대 전사는 정확히 자신의 렌서를 상대의 방패에다
찔렀지만, 이내 자신의 얼굴로 날아오는 렌서의 둥그런 끝 부분을 보고 기겁했다.
머리를 피할 여유도 없이 상대의 랜서는 자신이 쓰고 있는 투구를 강하게
가격했다.
쾅!
굉음과 함께, 아르키스 영지의 대 전사는 투구에 가해진 엄청난 충격에 의해,
허공에 붕 뜨더니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나가떨어진
그 기사는 몸에 걸친 헤르시온의 무게까지 더해서 커다란 충격을 받고는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세르보네 영지의 병사들이 일제히 환호성
을 터뜨렸다. 병사들의 응원을 받으며 루크가 다시금 말을 돌려 다가온 뒤,
말에서 내리는 사이에 아르키스 영지의 대 전사는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로 다가온 루크는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롱소드를 뽑더니,
천천히 상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아르키스
영지의 대 전사도 자신의 롱소드를 뽑으며 상대가 공격해 오기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특이한 마상전이군, 마상전에 이어, 이번에는 검술 대결로 승부를 가리려는
건가?"
한성은 그 대결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그 여자마법사가 통역마법을 쓰지 않은
이상, 이곳에서는 자신의 언어를 알아들을 인물은 없었기에, 한성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던 것이다.
이곳에서 쓰는 검술의 특징을 알아보려는 한성은 그 대결에 정신을 집중해서
관전하기 시작했고, 두 명의 대 전사는 이어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채챙!
펑!
두 사람은 한 손에는 방패를 들어 몸을 가리고, 다른 손에 든 롱 소드를 휘둘러
상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력의 우열은 명확히 드러나고 있었다. 비록
약소국인 로세니아의 기사였지만, 루크는 당당한 근위기사단의 일원이었었다.
그랬기에 루크는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상대를 몰아 붙이고 있었다. 아르키스의
대 전사가, 위에서 내려찍는 루크의 검을 가로막자, 루크는 그대로 방패를
이용해서, 상대의 몸을 밀어 버렸다. 그러자 상대는 방패에 큰 충격을 받고
나동그러지고 말았다. 그는 버둥거리며 일어나려고 했으나, 어느새 루크가
다가와서 그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음 졌다!"
그는 의외로 순순히 패배를 시인했고, 검을 거둔 루크는 천천히 세르보네 영지의
병사들이 몰려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어 병사들의 환호성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그들은 첫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뮬렌 백작은 첫 승리의 기쁨에
들뜨지 않고 도리어 상대측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피기 시작했다.
패배한 대 전사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자신의 진영으로 물러나고 있었으나,
군터 자작은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편에서 가장 강한
팔라딘인 페르넨이 도리어 짙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자, 뮬렌 백작은 더욱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두 번째 대결만 이기면, 우리측이 승리하니까,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 친히 하사하신 이 영지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동쪽의 지크레아 왕국과 통하는 통로인 이 세르보네 영지를
캇셀도르프 제국의 손에 넘겨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뮬렌 백작은
고개를 돌려, 두 번째 출전자인 벨레로크를 쳐다보았다. 백작의 시선을 느낀
벨레로크는 만면에 웃음을 짓고는 자신이 있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 동안 세르보네의 병사들이 그의 말에 갑주를 씌우며 두 번째 대결의
출전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문득 막연한 불안감이 감돌았으나 뮬렌 백작은 상황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래 벨레로크 경도 지크레아 왕국의 중앙기사단 소속이었던 팔라딘 급 기사
인데, 설마 패할 리가 없겠지?'
뮬렌은 억지로 자신을 안심시키며, 세 번째 출전자인 이국의 무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기다리기가 지루했는지, 연신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물론 이번 대결만
이기면, 저 이국의 사내는 출전할 필요가 없었기에, 백작은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이어 뮬렌 백작은 막 두 번째 대결이 펼쳐지려는 대결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아르키스 영지 측의, 두 번째 대 전사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
리고 있었다. 뮬렌 백작이 그의 모습을 보고 있는 동안 이쪽의 대 전사인
벨레로크도 준비를 마치고 진영을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았는지,
상대의 대 전사도 마주 달려 나왔다. 이어 두 사람은 양군의 진영 사이로 질주해
나가기 시작했다.
벨레로크 폰 엘렉시아.
그는 지크레아 왕국의 명망 높은 귀족의 아들이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무예를
좋아해서, 기마술과 검술을 계속 갈고 닦았으며, 결국 이십 오 세의 젊은 나이에,
아레스의 신전에서 팔라딘의 자격을 인정받은 훌륭한 기사였다. 그리고 그는
당당히 지크레아의 중앙기사단에 합류하여 높은 직위를 인정받은 전도가 창창한
젊은 귀족이었다. 게다가 그는 왕실에서 만난 지크레아 왕국의 아르비오나 공주와
사랑에 빠져, 그녀와 가정을 이루겠다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공주의 달콤한 꿈은, 캇셀도르프 제국에 의해 산산히 부서졌다.
상호불가침 조약을 빌미로, 캇셀도르프 제국은 지크레아 왕국에, 아르비오나
공주를 볼모로 보낼 것을 요청해왔고, 지크레아 왕국은 그 청을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아르비오나 공주는 볼모의 몸으로, 캇셀도르프 제국의 수도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벨레로크는 분통을 터뜨렸으나, 그의 힘으로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마침내 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캇셀도르프 제국으로 떠나자, 벨레로크도
지크레아의 중앙기사단을 사직하고, 종자 한 명만을 데리고는 아르펜 대륙의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방랑기사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루크의 일행과 합류하여, 그들과 동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벨레로크는 캇셀도르프 제국에 대해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루크를 따라 이번 대 전사 결투에 자원했으며, 마침내 캇셀도르프
측의 대 전사와 결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벨레로크는 말을 몰아가는 도중, 천천히 자신의 투구에 달린 얼굴가리개를
내려썼다. 그러자 이글거리는 살기를 내뿜는 자신의 두 눈이 가려졌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진정시키며, 벨레로크는 방패를 들어 몸을 가리며, 천천히 랜서를 상대의
방패에 겨누었다. 곧이어 두 필의 말에 탄 기사들은 빠른 속도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아르키스 영지의 두 번째 대 전사도 같은 동작을 취하며, 빠른 속도로
접근해 왔다. 이어 두 사람은 달려오는 말의 탄력에 힘입어, 상대의 방패를 강하게
찌르기 시작했다.
콰쾅!
벨레로크는 정확히 상대의 방패를 정통으로 찔렀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방패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충격을 느껴야만 했다.
"이 이런!"
강철로 된 방패의 한 쪽이 찢겨져 나가며, 중심을 잃어버린 벨레로크는 기우뚱
하더니 이내 말에서 떨어졌다. 땅바닥에 그대로 쳐박힌 벨레로크는 헤르시온의
무게와 더해진 충격을 이겨내며, 혼신의 힘을 다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어느새 말을 돌려서 다가오는 상대의 모습이 보였다. 관례대로 상대는 말을
세우더니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장검을 뽑아들고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어! 저자는 평범한 팔라딘이 아냐"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벨레로크는 허겁지겁 자신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아까 자신이 받았던 타격을 생각한다면, 상대는 최소한 상급을 상회하는 고급의
팔라딘이었던 것이다. 자신은 지금 중급의 팔라딘, 그러나 상대는 최상급의
수준인 고급 팔라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패배를 시인할 수 없다.
자신이 진다면, 이번 대 전사 결투는 결국 세르보네 측이 패배하는 것과 진배가
없다. 아직도 이국의 무사가 남았지만, 설마 그가 페르넨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기에, 그는 천천히 장검을 꼬나 쥐고는 상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상대는 높이 치켜든 검을 휘둘러
자신을 내려쳐 왔고, 벨레로크는 방패를 들어 결사적으로 막아갔다.
비무를 지켜보고 있던 세르보네 측, 인물들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의 대결은 이쪽의 대 전사가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의 매서운 공격에 이쪽의 대 전사는 그저 막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특히
루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하고 있었다. 높은 실력에 걸맞게 그는 이미
상대의 실력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코 내 아래가 아냐! 결코 벨레로크는 저 자의 적수가 될 수가 없어"
침음성을 흘려내는 루크는 자신도 모르게 손아귀를 꼭 쥐었다. 그의 손에서는
식은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물론 뮬렌 백작도 멍하니 정신이 완전히 나가 있었다.
그들은 이번의 대결에 모든 성패를 걸었기에, 긴장하며 대결이 벌어지는 곳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챙!
마침내 자신의 롱 소드가 부러지자 벨레로크는 이를 악물고 뒤로 물러났다.
지금까지 상대의 검을 막아오던 자신의 롱 소드가 계속 날이 나가다가 결국에는
두 조각으로 부러졌던 것이다. 그것으로 봐서, 상대의 마나가 자신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벨레로크는 방패를 치켜세우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미 자신의 방패는 너덜너덜해 진 상태였지만, 그것으로 앞을 가린 벨레로크는
전속력으로, 상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무기가 부러진 상태에서 벨레로크가
택할 방법은 상대보다 월등한 덩치를 이용할 방법 밖에 없었지만, 이미 상대는
벨레로크의 생각을 훤하게 읽고 있었다.
아르키스의 두 번째 대 전사도 방패를 세워 벨레로크의 방패에 맞부딪쳐 갔다.
이어 방패와 방패가 맞부딪치는 굉음과 함께, 벨레로크의 거구는 허공에 붕
뜨더니, 이어 상대의 어깨 위로 넘어가서는 바닥에 허무하게 쳐 박혔다. 자신의
어깨 가리개가 부서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벨레로크는 일어나려고 버둥댔지만,
어느새 다가온 상대는 자신의 목에 장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졌다!"
넘어진 벨레로크는 이를 갈며 패배를 시인했다. 그러나 가공할 만한 실력을 보이는
상대는 빙글빙글 웃으며 벨레로크를 놀렸다.
"이봐, 그것가지고 되겠어, 무릎을 꿇고 나서 내 발을 핥으며 살려달라고
빌어야지?"
순간 벨레로크는 발작을 할 뻔했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그는
천천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실력도 월등히 떨어지는 상태에서, 무기도 없이
덤벼봐야 덧없는 개죽음만 당할 것임을 아는 벨레로크는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진영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성질만 급한 멧돼지인줄 알았는데, 제법 신중하군"
이죽거리는 상대를 뒤로 하고, 벨레로크가 세르보네의 진영으로 터덜터덜 힘없이
발길을 옮기자, 이번에는 아르키스 영지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군터 남작이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페르넨도 미소를 진하게 짓기 시작했다. 아르키스 영지에서 두 번째 대 전사로
나선 인물은 전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비밀기사단을 맡고 있는 기사
단장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선택한 패가 맞아떨어지자, 페르넨은 천천히
일어나서 상대의 세 번째 대 전사를 어떻게 요리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내일은 세르보네 영지를 인수받을 수 있게, 사람을 보내야겠군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군터 남작은 천천히 세르보네의 영지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세르보네 영지는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였다. 믿었던 벨레로크가 패배하자, 뮬렌
백작은 기가 찬 표정이었다. 루크는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일레인은
정신없이 통역마법을 캐스팅하기 바빴다. 이윽고 벨레로크가 터덜터덜 걸어
들어오자, 그의 부러진 검과 방패를 받으러 병사들이 달려나갔다. 병사들에게
망가진 병기를 건넨 벨레록은 고개를 푹 숙이며 뮬렌 백작에게 힘 없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그런 말 말게......단지 상대가 너무 강했을 뿐이야"
뮬렌 백작이 천천히 그를 위로했으나, 그의 말에는 힘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마지막 대 전사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일레인이 통역 마법의 캐스팅을 마쳤는지,
그 이국의 무사와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대결의 규칙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 뮬렌 백작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는 저 이국인에게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솔직히 미덥지는 않았기에 백작은 이미 패배를
기정 사실화하고 있었다.
"대 전사 결투는 마상 전투술과 검술을 겨뤄서 승부를 정하는 것이에요."
통역마법을 이용해 일레인은 한성에게 대 전사 결투의 규칙을 가르쳐 주기
바빴다. 사실 그들은 승리를 확신했었기에, 굳이 한성에게 규칙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벨레로크는 패했고, 이제는 한성이 유일하게
남은 대 전사였기에, 일레인은 다급하게 그에게 대 전사 결투의 규칙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마상 전투술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상대를 공격해서 말에서 떨어뜨리는 것이에요.
그리고 말에 탄 상태에서 바닥에 있는 상대를 공격할 수는 없어요, 만약 상대가
말에서 떨어지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검으로 승부를 지어야만 해요, 만약 마상
전투술에서 승리하면 반을 이기고 들어가죠, 거기에다 검술 대결에서도 승리
한다면, 완전하게 승리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마상 전투술에서는 승리하고,
검술 대결에서 패배한다면, 무승부가 되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구요,
그렇다면, 이미 승리한 기사들이 다시 승부를 가려, 이 대결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에요, 아시겠어요?"
'뭐가 이리 복잡해?'
한성은 그녀의 설명에 머리가 아파왔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에게 말문을 열였다.
"그런데 저 육중한 방패는 꼭 써야만 하오?"
상대의 엉뚱한 질문에 일레인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방패가 있는 것이 방어하기가 편할 텐데요?"
"그렇다면 됐소"
한성은 천천히 몸을 돌리며 염갑에 기를 불어넣었다. 계속되는 격전으로 이리저리
찌그러지고 패인 염갑이 다시금 한성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표면에 각인되어
있던 대 마법주문이 많이 지워진 것을 발견한 일래인은 불연듯 그의 실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기대를 하지도 않았지만, 정말 구형의 헤르시온이군, 필시 그는 저것을 어디서
주웠을 거야'
그녀의 걱정스런 시선을 받으며, 한성은 천천히 말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세 편을 올리게 되는군요. 워낙 많은 분들께서 원하셔서 ^^;
그리고 박영호님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기사 월리엄을 보지
못했어요. 소드엠페러 쓰기 시작하면서, 영화와는 거의 담쌓았어요. 한 번
봐야겠네요. 이번의 기사대결씬은 바로 명작인 아이반호우(흑기사)에서
따온 것입니다. 루크가 상대방 대전사의 투구를 공격하는 장면도 바로
아이반호우가 성당기사 봐길베르를 상대할 때 썼던 것이지요. 그럼 한성이
어떤 방법으로 마상술을 사용할 것인지 지켜봐 주시구요.
참 다음(daum) 카페에 소드엠페러 팬클럽이 생겼더군요. 한 번 들어가 봤지만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아요. 그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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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세르보네 영지의 병사들이 자신이 탈 말의 갑주를 씌우고 있었다. 한성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가며 투덜거렸다.
"괜히 말에 이렇게 무거운 것을 씌우다니........쓸데없이 속도만 떨어지잖아?"
그의 말을 들은 일레인은 다시금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그리고 결국 그 이국의
무사가 방패까지 바닥에 버리자 이제는 아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정말 고집이 쎈 사람이군"
한성은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천천히 말을 몰아 달려나갔다. 방패도 없이
달랑 랜서만 한 자루 든 한성은 말을 몰아 양군의 중앙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르키스 영지의 마지막 대 전사인 페르넨이 마주 달려 나왔다.
"꼬락서니를 보니 세르보네의 머저리들이 돈으로 고용한 용병인가 보군, 저런
구닥다리 헤르시온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그래도 팔라딘의 자격시험은
간신히 통과한 인물 같군"
페르넨은 곧 상대에 대한 호기심을 지우고, 먼저 달려나갔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제국의 수도로 귀환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 임무를 성공시키면 그에게는 새로운 비밀 기사단이 배속될 예정
이었다. 대륙의 통일을 위해 캇셀도르프 제국 측에서 비밀리에 키우는
기사단들은 대단히 높은 봉급을 받고 있었기에, 그는 이번에 받은 보상금으로
고급 저택을 장만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상대는 이리저리 찌그러진 낡은 헤르시온을 착용하고 있었다. 표면에 각인된
대 마법주문이 거의 지워진 모습을 보자 페르넨은 이제 완전히 상대를 무시하고
있었다.
"멍청한 놈! 방패 사용법도 모르는가?"
아르펜 대륙에서는 방패도 하나의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 페르넨은
나직히 중얼거렸다. 그의 방패는 거의 이십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무게와, 표면에
와이번의 비늘을 입혀 놓았기 때문에,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방패로
한 번 후려치면, 어지간한 상대는 중심을 잃고 나가떨어지기 때문에, 페르넨은
주로 방패공격을 많이 애용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급격하게 좁혀지자, 페르넨은 얼굴가리개를 내리고는 랜서를
들어 상대의 몸통을 겨냥하였다. 몸통은 방패에 비해 찌르기가 조금 어려웠지만,
페르넨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의외로 승부가 쉽게 끝나겠다고 생각한
페르넨은 이어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한성은 굳이 얼굴가리개를 내릴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착용하고 있는 염갑은
얼굴가리개와 투구가 일체형이었던 것이다. 얼굴가리개 사이에 난 눈구멍으로
상대의 모습를 바라보며 한성은 천천히 자신이 든 랜서를 빙빙 휘두르기 시작했다.
3미터가 넘는 랜서를 휘두르며, 달려가는 한성을 보고 양군의 병사들은 일제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저 무사는 랜서의 사용법도 모르는 인물인가?
의심하는 뮬렌 백작의 시선을 받으며, 두 명의 대 전사는 서서히 격돌을 벌일
만한 거리에 이르고 있었다.
랜서를 빙빙 휘두르던 한성은, 상대가 자신의 몸통을 겨냥해서 긴 창을 찌르자,
손에 든 랜서를 허공에 던져 올렸다. 그리고는 말의 허리를 감싼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한성은 말의 옆구리에 붙은 형색이 되었고,
그의 빠른 동작에, 페르넨의 랜서는 헛되이 허공을 찔러 버렸다. 페르넨이 어느
정도 중심을 잃고 몸이 앞으로 쏠린 것을 발견하고는, 한성은 말의 반대편으로
돌아 오르며, 아까 던져 올린 자신의 렌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휘둘러 상대의 뒤통수를 강하게 가격했 버렸다.
"따악"
뒤통수에 강한 충격을 받은 페르넨은 이제 완전히 중심을 잃고, 말에서 거꾸로
떨어졌다. 세르보네 측에서 내세운 세 번째 대 전사의 무식하기 그지없는
공격에 양군의 병사들은 입을 딱 벌렸다. 특히 페르넨은 골이 흔들리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생전 처음 당해보는 무식한 공격에 이를 악문 페르넨은 몸을
일으키며, 장검을 뽑아 들었다. 상대의 어처구니없는 공격에 그만 마상 전투술
에서는 패하고 말았지만, 검술 대결에서 상대의 목숨을 끊어 놓겠다는 각오를
하며, 페르넨은 천천히 상대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말에서 뛰어내려 바닥을 딛고 있었다. 상대가 검을 뽑아들고는 천천히 자신
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보며, 페르넨은 상대의 장검에 시선을 두었다. 상대의
얇은 소드가 자신이 사용하는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에 견디지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한 페르넨은 자신이 들고 있는 장검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방패로 몸을
가리며 바스타드 소드를 거세게 휘둘렀다.
푸캉!
의외로 상대는 자신의 장검에 실린 강대한 힘을 정면으로 받아 내었다. 그리고는
그는 빠른 속도로 몸을 날리며 연신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어느새 방패의 곳곳이 깊숙히 패이기 시작했고, 도저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믿지 못하고 있는 페르넨은 방패와 장검을 이용해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정신이 없었다.
양 영지의 인물들은 입을 딱 벌린 채, 두 명의 대 전사들의 격전을 정신없이
관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로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무척이나 낡은
헤르시온을 걸친 호리호리한 체격의 세르보네측 대 전사가, 명색이 대
캇셀도르프 제국의 기사단장인 페르넨을 정신 없이 몰아붙이는 형국이었다.
서서히 세르보네 영지 측 인물들의 얼굴에는 희열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거의 기대도 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세 번째 대 전사가 압도적인 실력으로,
저 이름만으로도 공포스러운 페르넨 기사단장을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승리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대결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보면 몰라? 싸우는 중이잖아"
<지금 장난하는 거냐? 저런 힘만 앞세운 멍청이는 네 실력이면 단 칼에 두 조각
내버릴 수 있잖아.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끄는 이유가 뭔데?>
"어휴, 너도 혁천소와 똑같이 아이큐가 두 자리구나?"
<대관절 그게 무슨 소리냐?>
"너는 손자병법도 안 읽어 봤냐?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지 않을 상황에서는
자신의 실력을 삼 푼쯤 숨기는 것도 몰라?"
<어휴, 그래 너 잘났다 잘났어!>
문득 상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며 공격을 느슨하게 하자,
페르넨은 겨우 정신을 차릴 여유를 가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체중을 실은
공격은 더 이상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미 페르넨은 그 공격으로 인해 톡톡하게
쓴맛을 보았던 것이다. 맹세코 페르넨은 저 세르보네 측의 세 번째 대 전사가
사용하는 기술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자신의 체중이
실린 공격을, 검을 비스듬이 세워, 다른 방향으로 흘려 버렸다. 그리고는 중심을
잃은 자신을 공격하지 않고, 여유를 부렸기 때문에, 지금 페르넨은 겨우겨우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장기인 방패공격은 저 기사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상대의 몸놀림이 워낙 빨랐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문득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딴청을 피우자, 페르넨은 기회라는 듯이, 몸을 방패로
가리며, 상대에게 돌진해 들었다. 거구의 페르넨이 방패로 앞을 가리고 왜소한
체격을 한 세르보네 측 대 전사에게 달려들자, 세르보네 영지의 병사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정신을 딴 데다 팔고 있는 그들의 대 전사에게 주의를 주려는
소리였으나, 그 소리는 이내 멎었다. 그리고는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결이 벌어지는 장소를 정신없이 주시하기 시작했다.
한성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상대의 방패를 몸을 숙여 피하며, 왼쪽 발로 상대의
발을 강하게 가격했다. 그러자 맹렬히 달려들던 페르넨의 거구가 허공에 붕
뜨더니, 이내 바닥에 꼬구라 졌다.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서던 패르넨은, 그러나
자신의 투구로 날아드는 상대의 건틀릿에 싸인 주먹을 물끄러미 지켜봐야만
했다.
퍼억!
한성의 주먹에 깃든 경력은 이내 페르넨의 투구를 뚫고, 그의 안면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발경(發經), 흔히 말해, 겉은 상하지 않게 하고, 안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태권도의 고유의 기술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굳이 상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한성은 어느 정도 경력을 조절하여 가격했다. 그러나
페르넨을 전투불능의 상태로 만드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페르넨은 곧 의식을 잃고, 그 자리로 서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육중한 거구가 굉음을 일으키며 바닥에 쳐 박히는 소리를 들으며, 한성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세르보네측의 병사들이 일제히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머리에 쓰고 있던 투구를 허공으로 던져 올리며, 승리의
기쁨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던 것 같았던 이번 결투에서
그들은 승리했던 것이다. 승리의 희열에 빠져 있는 세르보네 영지의 인물들과는
반대로 아르키스 측은 침통한 기색이 감돌았다. 몇 명의 병사들이 분분히 달려
나오며, 죽은 듯 쓰러져 있는 페르넨의 거구를 들어올려 자신들의 진영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군터 자작은 아예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고, 두 번째의
대 전사로 나섰던 비밀 기사단의 단장은, 의식을 잃은 채 운반되어 오는
페르넨의 거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젠장 본국 기사단의 단장 급들이 두 명이나 동원되었는데, 이까짓 시골영지의
대 전사 결투에서 패배하다니?"
상대의 가공할 검술 실력을 직접 겪은 페르넨과는 달리 그 비밀 기사단의 단장은
상대의 실력을 정확히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르보네 영지의 병사들은 진영으로 들어온 한성을 둥그렇게 둘러싸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뮬렌 백작과 루크가 다가와서는 무언가 말을 건넸으나, 한성이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따뜻한 시선으로 한성의
선전에 고마움을 전했다. 일레인이 감격에 찬 표정으로 다가와서 한성의 볼에
입을 맞추자, 그만 한성은 얼굴이 벌개져 버렸다.
그 이방인 무사의 어색한 표정을 보자, 그를 둘러싼 세르보네의 인물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비웃음이 아니었다. 한성은 바로
그들의 영지를 캇셀도르프 제국의 마수에서 구해낸 은인이었던 것이다.
다시금 병사들이 한성을 둘러싸고 환호성을 지르는 사이, 뮬렌 백작과 루크는
천천히 아르키스 영지의 인물들이 멍하니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제 대 전사 결투에서 승리했으니, 그들에게는 아르키스 영지의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었던 것이다. 넓은 농토를 가지고 있는 아르키스 영지를 손에
넣는다면, 세르보네 영지는 충분히 자체적으로 자립할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어차피 영지의 농노들은, 주인이 바뀌는데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고, 더욱이
인망이 있는 뮬렌 백작이 그들의 영지를 다스리게 된다면, 군터 자작의 학정에
시달리는 그들로써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노릇이었다.
아르키스 영지의 인물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세르보네의 영주인 뮬렌 백작이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미 이 대결을 통해 그들은 서로
자신들의 영지를 걸었기 때문에 자신의 영지를 잃게 된 처지의 군터 자작은
망연히 비밀 기사단의 단장만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기사단장은 슬그머니
외면을 하며 뒤로 빠지기 시작하자 군터 자작은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젠장, 나는 오로지 시키는 데로 했을 뿐인데.....'
그러나 군터 자작은 그런 말을 밖으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당연히 일개
시골영지의 영주인 자신보다는, 저 기사단장의 신분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군터 자작은 뮬렌 백작에게 아르키스 영지의 소유권을 넘겨 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당한 표정의 뮬렌 백작과, 풀이 죽어있는 군터 자작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며
루크는 빙그레 웃었다. 이미 이번 대 전사 결투에는, 기사의 명예를 걸고, 결투에
참가한 대 전사들이 직접 증언를 하기 때문에, 저들은 결코 딴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루크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이국의 무사가 전개한 검술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높은 경지에 이른 팔라딘이었기에, 그 이국의 무사가 펼친 검술의
위력을 어느 정도 실감하고 있었다.
"대단한 검술이었어, 특히 페르넨의 힘이 실린 검을 흘려보내는 기술이
일품이었어"
그러자 다시 얼굴이 펴진 벨레로크가 명랑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까? 어떻게 치열한 격투를 벌이는 중에, 상대의 검에 실린
힘의 적용점을 찾아내어, 다른 곳으로 분산시킬 수 있다는 거지?"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오랜 시간 수련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굳이 지금처럼 근육을 키우지 않아도, 상대에게 밀리지 않을
텐데....."
그러지 벨레로크가 호기심을 띠웠다.
"그 기술을 내게 좀 가르쳐 달라고 그럴까?"
"아서라, 내가 볼 때는 그것은 며칠 배워서 써먹을 만한 기술이 아닌 것 같아"
벨레로크도 루크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빙그레 웃었다.
한성은 천천히 염갑을 풀고 있었다. 이리 저리 패이고 구겨진 그의 거무튀튀한
염갑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한성은 천천히 그 자리에 걸터앉았다.
세르보네의 병사들이 연이어 빵과 포도주를 건네주었기에, 한성은 사양하지 않고
포도주를 받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자 여 마법사인 일레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어느새 통역마법을 캐스팅 했는지,
그녀는 한성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이제 보니 대단한 실력의 기사이셨군요?"
"별 말씀을.... 과찬이십니다"
그녀는 한성의 진정한 실력은 채 짐작하지도 못한 채, 한성에게 그의 염갑을
보여달라고 했다. 한성은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고, 그녀에게 염갑을 벗어서
건넸다.
한성이 쓰던 염갑을 건네 받은 일레인은 천천히 염갑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한성에게 말을 걸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 대륙에서 건너간 헤르시온이예요. 어떻게 얻으셨는지는
모르지만, 그 동안 한 번도 보수는 하지 않으셨군요"
"보수...라니요?"
의아한 표정의 한성을 보며 일레인은 빙그레 웃었다.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마법사라면, 능히 손상된 헤르시온을 보수할 능력이
있어요, 사실 저는 헤르시온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은 되지 못하지만, 손상된
헤르시온을 보수할 만한 능력은 있답니다."
"이것을 수리할 수도 있어요?"
한성은 그녀의 말에 멍해졌다. 사실 한성은 중원 땅에서도, 이리저리 패인
염갑을 보수하기 위해, 대장간에 들렸지만, 중원의 대장장이들은 하나같이
난색을 표했다. 게다가 대장간의 풀무로 염갑을 녹일 수도 없었기에, 한성은
결국 수리를 포기해야 했던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별 문제는 없어요. 그냥 헤르시온에 특정 주문과 함께, 마나를 주입하면
되니까요."
"마나라니요?"
마나라는 뜻을 모르는 한성은 그녀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일레인은
웃으며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마나에 의해 구동되는 헤르시온을 사용하시는 분이, 마나를 모르신다니
우습군요. 팔라딘들이 헤르시온을 착용할 때, 주입하는 것이 마나예요"
'아항 마나라는 말은 내공을 뜻하는 것이구나'
그제서야 마나의 뜻을 알아차린 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실 마나라는
것은 내공보다는 기(氣)의 의미에 가까웠다. 내공이란 일정한 수준에 이른
고수가, 대 자연의 기를 빨아들여 자신이 익힌 내공심법으로 정제하여 농축한
것을 뜻하기에, 원칙적으로 내공도 응축된 마나의 일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헤르시온이라고 불리는 염갑이 내공을 주입해도 똑같은 원리로,
작동을 하는 것이었다.
새삼 한성은 사황교의 지보였던 염갑이 이 세계에서 온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말로는 족히 몇 백년은 된 구형의 헤르시온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오백 년 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벽안의 노인이 가지고 왔다는, 사황의
말과 같지 않은가?.
문득 한성은 다시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오백 년 전에 이곳의 마법사가 중원으로 왔다면, 한성도 그곳으로 갈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성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중원으로 가서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들을 찾으려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는 결코 단목영령과 수련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혁천소가 같이 머물면서 그녀들을 보호하고 있기에,
별 일은 없겠지만, 한성은 어느새 그녀들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한성의 얼굴이 침통하게 변하자, 일레인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눈앞의 이국인이 자신이 있던 나라의 그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어차피 통역마법도 그 효력이 다했기 때문에, 그녀는 천천히 그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었다.
어느새 아르키스 영지의 소유권을 넘겨받는 협상이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는지,
뮬렌 백작은 밝은 표정을 하고는, 병사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그들의 대장인 세바스찬이 병사들을 독촉해, 출발준비를 서둘렀고, 그들은 다시
세르보네의 영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중에 루크는, 뮬렌 백작과
말을 나란히 하고는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협상은 잘 되었습니까?"
"잘 되었네, 저들은 이미 우리 영지를 집어삼키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더군,
그들이 준비한 계약서에 도리어 아르키스 영지의 이름을 적어 넣고는, 군터 자작의
사인을 받았지, 저들은 대 전사 결투에서 패배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허허허"
"하하하"
루크와 뮬렌 백작은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고,
상대적으로 풍족한 아르키스 영지를 얻은 것이 못내 후련했던 것이다.
"일단 국왕전하께 이 사실을 전하겠네, 그런데 우리의 영웅은 어디에 있나?"
고개를 돌린 뮬렌 백작은 어느새 말 위에서 끄덕끄덕 졸고있는 한성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단하군 어떻게 흔들리는 말위에 탄 채로 잠을 잘 수가 있지?"
그러자 루크가 그 질문에 대답을 했다.
"초원국가인 세자르 왕국에서는 기수들이 말에 탄 채로, 식사를 하고, 잠을 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저 기사도 그런 기술을 익힌 모양입니다"
여러 곳을 방랑하면서, 많은 것을 보았던 루크가 백작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그가 느낀 감정을 루크에게 털어
놓았다.
"솔직히 벨레로크가 패배했을 때, 나는 세르보네 영지를 잃은 줄 알았어, 그런데
저 이국의 기사가 괴력을 발휘해서, 캇셀도르프의 기사단장인 페르넨을 제압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대단한 검술실력을 가진 기사 더군요"
루크도 뮬렌 백작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그들은 개선의 기쁨을 느끼며,
세르보네 마을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 전사 결투에서 이겼다는 승전보를 받은 로세니아의 왕실에서는 아르키스
영지를 뮬렌 백작에게 맡기겠다는 통보를 해 왔고, 비교적 풍요로운 아르키스
영지에서 나는 세금으로 세르보네 영지는 이제 자체적으로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는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웬 일인지, 하루가 멀다하고 살육을
일삼던 마룡 카르보네스가 요즘은 무척 잠잠해 졌기에, 다시 세르보네 마을을
찾아오는 정착민들은 늘어만 갔다. 그 때부터, 세르보네 마을은 번창하기
시작했다. 잠잠한 카르보네스의 동태에 뮬렌 백작은 의아해 했으나, 결국
세르보네 영지의 주민들은 카르보네스가 휴면기에 들어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는 단정을 내리고는 무척 기뻐했다. 물론 한성은 세르보네 마을의 중요한
귀빈이 되었다. 영지의 주민들은, 낯선 이국인인 한성에게 무척이나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학정을 하기로
악명이 높은 군터 자작을 섬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이 세르보네 영지는
척박하고 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영주인 뮬렌 백작의 선정에 의해 제법
살기가 좋은 마을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군터 자작 같은 탐관오리에게
이 영지가 넘어가지 않은 것은 주민들에게는 무척이나 다행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검을 들고, 같은 편에 서서 싸운 덕분에, 한성은 루크의 일행과도
무척 가까워 졌다. 그 동안 한성은 일레인의 통역마법을 통해 많은 대화를
나누고는, 서로의 사정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루크와 벨레로크는 한성에게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설명했고, 그 것은 일레인의 통역마법을 통해, 한성에게
전달되었다. 비록 자신이 살던 시대와는, 시간과 공간이 다른 곳에 있는 타인의
사정이었지만, 한성은 그들의 처지를 깊게 이해하고, 공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먼 곳에도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횡포는 여전히 존재하는군'
한성은 그들의 입장에 대해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그들과 자신은
감히 저항할 수조차 없는 강대한 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했다. 한성에게는
마젤란이, 루크 일행에게는 캇셀도르프 제국이란 강력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한성에게, 이번에는 일레인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물어 보았다. 굳이 자세한 사정을 밝힐 필요가 없었기에, 한성은 그럴 듯하게
꾸며내어서 둘러대기 시작했다.
"나도 역시 강대한 적에 의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소, 비록 그들의 손을
피해, 그 땅을 떠나온 처지이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복수를 하기 위해, 다시 그곳
으로 돌아갈 계획이오."
"그렇군요"
일레인도 한성의 처지에 동정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록
인종도 다르고, 언어도 달랐지만, 그들이 처한 입장은 비슷했던 것이다.
세르보네 영지에 머물러 있는 한 달 여의 기간 동안, 그들은 많은 대화를 나누며,
상당히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일레인의 통역마법에 의지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었기에,
한성은 시간을 내어 그녀에게서 이곳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아르펜 대륙에서 통용되는 언어는, 한성이 알고 있는 언어와는, 그 체계가
너무나 상이하였기에, 아무리 오성이 뛰어난 한성이라도 이곳의 언어를 익히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지만, 한성은 이곳 아르펜 대륙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익히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고, 결국 아주 약간의 의사소통은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사실 루크는 현재 로세니아에서 추방된 대 마법사인 프라티우스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비록 그 이유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는 것을 꺼렸지만 그는
다시 프라티우스를 찾아 길을 떠날 작정이었다. 물론 일레인도 루크와 마찬가지로
목적이 같았기에 당연히 동행할 계획이었고, 고국을 떠나온 벨레로크는 달리
할 일이 없었기에,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따라다닐 계획이었다. 사실
그들은 상당히 막강한 파티를 이루고 있었다. 팔라딘 급의 기사가 두 명, 5 써클
마법의 마스터인 여 마법사가 한 명, 그리고 수련기사가 한 명인 이 최강의
파티는, 이 아르펜 대륙을 떠돌아다니는 모험가의 파티 중,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막강한 능력을 지닌 그들은, 웬만한 몬스터들의 출몰 따위에는 별로
위협을 느끼지도 않았고, 또 그들의 목적은 던전 발굴 따위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위험에 뛰어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루크는 지금 위험천만하기가 그지
없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이렇게 대륙을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녀봐야, 대 마법사 프라티우스의
자취를 찾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일레인의 질문에 루크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물론 한성도 그 대화에
끼어 들어 있었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한성은 그냥 멀뚱멀뚱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모두가 조용한 가운데 루크가 자신의 의견을 모두에게 밝혔다.
"나는 캇셀도르프 수도인 카르마고로 갈 생각이야"
"뭐야?"
동시에 방안에서 경악성이 이리저리 튀어나왔다. 그들은 루크의 말에 질겁을
했던 것이다.
"대관절 그 악의 제국에는 왜 간단 말인가? 이번의 대 전사 결투에서, 제국의
흉계를 우리가 원천적으로 막았으니, 그 쪽에서는 현재 우리들에게 이를 갈고
있을 텐데"
그러자 루크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카르마고에 있는 헤르메스의 신전에 가서 신탁을 받아 볼 생각이야. 게다가
우리는 자유기사의 신분이니, 제국 측에서도 드러내놓고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거야."
루크의 계획을 알게되자, 그들은 암묵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였다.
"지혜의 신인 헤르메스의 신탁을 받는다는 생각은 물론 좋다고 보지만, 너무
위험하지는 않을까. 아무래도 캇셀도르프 제국의 수도에 간다는 것은 좀
꺼림칙한 걸?"
"하지만 이 방법 밖에는 없다고 봐. 지금처럼 대륙의 곳곳을 기약 없이 떠돌아
다니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야!"
루크의 말에 일행들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일레인은 조용히
통역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는 루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
하였기 때문에, 조용히 한성의 의도를 물어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한참동안 통역마법을 캐스팅한 일레인이 한성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봐요 한센"
그러자 한성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젠장 어째서 내 이름이 한센이여?. 부모님이 지어주신 소중한 이름을 바꿔도
유분수지?'
하지만 이곳의 인물들은 도무지 '한성'이라는 말을 발음하지 못했으므로,
한성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한성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무슨 말이오?"
"참 내 생각 좀 봐?"
자신의 실책을 알고 이마를 탁 친 일레인은 그동안 그들이 나누고 있었는 대화를
한성에게 설명해 주었다. 모든 것을 들은 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한성은
뭔가가 생각이 났는지, 호기심 어린 어조로 일레인에게 뭔가를 물어 보았다.
"혹시 그 카르마고란 곳에, 외국인에게 언어를 가르쳐 주는 교육기관이 있소?"
뚱딴지같은 한성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일레인은 곧, 한성의 의도를 알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굳이 언어만이 아니라도, 외국인을 위한 아카데미가 있기는 해요"
그러자 한성의 두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곳에서 이곳의 언어와, 관습
등을 배운다면, 이 아르펜 대륙에서 지내기가 용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곳에 대해 자세한 것을 알 수 있겠소? 그 곳에 입학하는 방법이라든지?"
결국 일레인은 캇셀도르프 제국에 있는 카르마고 아카데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캇셀도르프 제국에는 카르마고 아카데미라는, 그들의 수도의 이름을 딴
아카데미가 있어요, 그 곳은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행정관의 과정을 교육하는
세 개의 학부가 있지요, 그렇지만 외국인이 입학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행정관
아카데미 한 곳 뿐이에요. 기사나 마법사 학부는 오로지 캇셀도르프 제국의
지체높은 귀족의 자제들만이 입학할 수 있지요"
일레인의 설명을 들은 한성은 곧, 그 아카데미에 대한 대략적인 사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생각을 굳힌 한성은 자신의 결정을 일행에다 밝혔다.
"그럼 캇셀도르프의 수도인 카르마고까지 당신들과 동행하기로 하겠소"
한성의 결정에 그들은 대단히 기뻐했다. 그 동안 지내면서 그들은 한성과 정이
많이 들기도 했지만, 대단한 검술실력을 지니고 있는 한성이 동행한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안도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그들의 여정은 위험요소가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자신들의 행로를 결정한 일행은 곧 뮬렌 백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백작은 무척
이나 섭섭해 했지만, 그들이 처한 사정을 알기에, 이내 그는 세바스찬을 불러
그들의 여정에 불편함이 없도록, 각종 물품을 넉넉히 챙겨주게 하였다.
"나와 본 세르보네 영지는 그대들의 노고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훗날 꼭 다시
찾아주기 바라오"
루크가 뮬렌 백작에게, 기사의 의식에 따라 예를 취한 뒤, 그들은 세르보네 마을
을 떠나기 시작했다. 다섯 필의 말에 나눠 탄, 그들은 환영하러 나온 세르보네의
주민들 사이를 비집고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머나먼 여정이었지만, 뮬렌 백작이
준비해준 물품이 풍족하였기에, 그들은 발걸음도 가볍게 카르마고를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세르보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캇셀도르프의 수도에는 일말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전황을 보고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밀기사단의 단장은 긴장감으로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아르키스 영지 측에서 내세운 두 번째, 대 전사
였던 인물이었다. 그란델이란 이름을 가진, 그 기사단장은 천천히, 캇셀도르프
제국을 지탱하는 세 기둥 중 하나인 조르그문트 공작 가문의 성으로 걸어 들어
갔다. 캇셀도르프 제국에는 세 개의 공작 가가 있었다. 그들은 지금의 캇셀도르프
제국을 있게 했던, 명실상부한 제국의 실질적인 실세였다. 게다가 제국이 보유
하고 있는 다섯 명의 소드 마스터 중, 세 명의 인물이 그 공작 가문의 주인이었다.
소드 마스터!
인간의 경지를 넘어 선 검의 절대자를 칭하는 말이었다. 거의 검의 극한까지
수련한 인물로써, 백 명의 팔라딘에 맞서 싸워서도 밀리지 않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인에게 붙여지는 영광스런 칭호의 기사들로써, 이 드넓은 대륙에 총
일곱 명의 소드 마스터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엄청난 국력을 과시하듯,
이 캇셀도르프 제국에는 그 중 다섯 명의 소드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들은
소드 마스터의 명성에 걸맞게, 대부분이 공작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엄청난 인물의 성에 들어가는 그란델은 이 성의 주인인, 소드 마스터의 명성이
주는 위압감에 완전히 눌려 있었다. 비록 그가 아레스의 신전에서 상급의 팔라딘
으로 인정받기는 했으나,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결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르그문트 공작이 나오는 동안, 공작의 집무실에 앉아 기다리던
그란델은 천천히 자신이 지금까지 계속해온 수련과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손에 검을 잡은 이래, 열심히 수련을 계속한다면, 팔라딘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팔라딘과, 소드 마스터와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단순히 수련만 계속해서는 결코 마스터의
칭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란델은 지금까지 그런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존재가 다섯 명이나 있는 이
캇셀도르프 제국의 기사단장인 사실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은 현재 작전에 실패한 패장의 신분
으로, 질책을 받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이다.
그란델은 천천히 머리를 들어, 공작의 집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가 도착한 지,
한 시간이 지났지만, 조르그문트 백작은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조바심을 내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는데 열중했다. 그런 그의 정성이 통했
는지, 이어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란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인물을 응시했다.
허연 백발을 휘날리며, 날카로운 눈매를 한 노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던 그란델은 문득, 노인의 눈매에서 날카로운 기세를 느끼
고는 비로소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는 황급히 무릎을 굽히며 예를 취했다.
"제 2전단 소속의 비밀 기사단 단장인 그란델 폰 레지온이 조르그문트 공작전하
를 뵈옵니다"
그란델은 식은땀을 흘리며, 공작에게, 자신이 맡은 이번 임무의 경과에 대해 보고
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삼 아직까지 의식불명인 페르넨 기사단장을 원망하고
있었다. 원래는 상급자인 페르넨이 보고를 맡아야 하지만, 그 가공할 검술실력을
보인 이국의 무사에게 당한 일격 때문에, 아직까지 페르넨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보고를 받은 조르그문트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란델을 쳐다본 공작은 그에게 물러날 것을 명했다.
"그만 되었다. 이만 물러가도록 해라"
"알겠사옵니다. 공작 전하"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그란델은 천천히 공작의 앞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사단장의 신분이었지만, 공작의 앞에서는 도무지 오금을 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란델이 물러나자, 조르그문트 공작은 의외로운 시선을 띠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이번 계략이 실패할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었다. 그는 조용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의외로군, 뜻밖의 이국인 무사 때문에, 지크레아 왕국으로의 침공로를 확보
하려는 이번 계획이 무산되다니? 할 수 없군, 그렇다면 로세니아 왕국을 먼저
도모하는 수밖에"
그는 천천히 부관을 불러 외출할 채비를 갖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관이 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밖으로 뛰어 나가자, 그는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어 조르그문트 공작가의 정문이 내려지며, 일단의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공작 가문의 문장을 각자의 헤르시온에 새겨 넣은 기사들은 곧, 마차 한 대를
호위하여 캇셀도르프 제국의 황제가 살고 있는 황궁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기사들은 일사분란하게 두 패로 나뉘더니, 한 패는 마차를 호위하고, 한 패는
길을 열기 위해서, 앞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관도를 질주하는 일단의 기사단들
때문에, 길을 가는 행인들은 분분히 길을 비켜섰으며, 휘황찬란한 문장이 새겨져
있는 마차를 보자,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마차에 타고 있는 조르그문트
공작은, 시민들의 경의 어린 시선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으며, 황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황궁에 도착한 공작은 곧바로 황제를 알현하고 난 뒤, 황궁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캇셀도르프 제국의 공작들은 저마다, 황궁에 자신의 집무실을
소유하고 있었다. 호화로운 통로를 지나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온 조르그문트
공작은 천천히 자신이 전갈을 보낸 인물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조금 기다리자
뒷 편에 나 있는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조르그문트
공작은 그들을 보더니 반색을 하며 맞아들였다. 그들은 오랜 시간을 같이 했던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바로 이 캇셀도르프 제국의 실세들이었던 것이다. 이미
밖에서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경비가 필요없는
실력들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어 조르그문트 공작의 집무실에서는 로세니아
왕국을 집어삼키기 위한 은밀한 음모가 꾸며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오랜 두 명의 친구들을 만난 조르그문트 공작은 천천히 그들의 젊었던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사실 그들은 예전에는 평범하기가 그지없는 캇셀도르프
왕국의 수련 기사들이었다. 그 때는 자그마한 크기의 캇셀도르프 왕국의 기사들
이었던 그들은, 여행 중 만난 모험가들을 따라 던전을 발굴하러 다니다가,
마침내 자신들의 인생에 대 변혁을 가져 올 사건을 만났던 것이다. 공작은
천천히 자신이 이십대일 때 겪었던 그 사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물론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나머지 두 명의 공작도 그 때의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혈기왕성한 20대 일 때의 그들은 모험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고향 친구
사이인 그들은 우연히 던젼을 발굴하려는 모험가의 그룹에 끼게 되었고, 마침내
그들은 모험가들을 따라, 특이한 마나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들어갔다.
우연히 이곳을 지나치던 그들은, 마침 일행 중의 하나인 마법사가 발견한 기척
으로 인해 그 곳의 존재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마법사들이란 마나의 기척에 예민
하기 때문에, 실낱같은 마나의 기척을 용케도 감지하고는 그 곳을 발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마법사의 인도에 따라 경험이 많은 모험가들이 선두에 서서 먼저
던젼으로 들어가고, 실력이 떨어지는 자신들은, 뒤를 경계하며 후미에 붙어
던젼으로 짐작되는 통로를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변이 벌어졌다. 던젼으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짐작되는 곳을 지나자,
그 곳에는 반구형의 커다란 구조물이 자리잡고 있었고, 낮은 소리로 웅웅거리는
그 것은 일행들이 들어가자 마자 느닷없이 보랏빛의 빛 무리를 쏘아대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먼저 들어간 마법사와 모험가들이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 버리고, 자신
들은 겁에 질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들은 그 구조물이 마왕의 신전으로
생각하고 이젠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왕의 신전은 더 이상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이 그 마왕의 신전에서 들려왔던 것이다.
"너희들이 나를 따른다면, 강대한 힘을 주겠노라, 나를 따르겠는가?"
그들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는 별 달리 선택할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조르그문트를 비롯한 두 명의 수련기사는, 마왕의 신전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신전의 안으로 들어갔다. 신전으로 들어간 그들은 무언가 빛이
번쩍하는 것을 느끼며 그들은 이내 정신을 잃었고, 깨어보니 그들의 몸에는
막대한 양의 마나가 충만해 있었다.
마왕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했다. 자신의 신전을 좀더 마나가 충만한
곳으로 옮겨 달라는 것이었다. 그 대신 마왕은 그 대가로 육 개월에 한 번씩
그들의 몸에 마나를 주입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랬기에 그들은 마왕과의
약속을 마음속에 깊이 품은 뒤, 그 던젼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마왕에게서
얻은 막대한 마나를 바탕으로 그들은 점차적으로 팔라딘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
던 것이다.
팔라딘의 경지에 오른 그들은 곧 캇셀도르프 왕국에서 중요한 요직을 맡게
되었다. 휘하에 충분한 부하를 거느린 그들은 이내 인부들을 고용하여, 그 마왕의
신전을, 마왕이 원하는 장소로 이동시켜 주었다. 특이하게도 마왕의 신전이 있던
자리에는 대 자연의 마나는 모두 소멸되어 버리고, 척박한 죽음의 땅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에 개의치 않았다. 자신들이 받게 될 대가에
비하면, 그 따위 사실쯤은 생각할 가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마왕의 신전
을 옮긴 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인부들은 모두 죽여 버렸다.
그 마왕의 신전은 거의 삼 년에 한 번씩, 그들에게 자신을, 마나가 충만한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고, 그들에게는 충분히 그것을 가능하게 할
권력이 있었다. 마왕의 신전을 이동시켜 준 그들은, 그 대가로 평생동안 수련해도
얻지 못할 마나를 얻었던 것이다.
그 때 부터 그들의 불타는 야망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육 개월에 한 번씩 마왕
에게서 주입 받는 마나 덕분에 그들은 오랜 수련을 통해, 그 이름만으로도
공포스러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마왕과의 계약을 통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그들은 곧 명실상부한 캇셀도르프 왕국의 실세가
되었고, 그들은 그 때 부터 무력을 이용해, 주위의 왕국들을 침공해서 그들의
영토를 빼앗기 시작했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그들을 상대할 만한 기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연전연승을 거듭하면서 그들은 캇셀도르프 왕국을 지금의
위용을 자랑하는 대 제국으로 키웠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명백한 캇셀도르프
제국의 숨은 실력자가 되었다. 심지어 캇셀도르프 제국의 황제도 그들을 두려워할
만한 막강한 권력을 거머쥐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아르펜 대륙의 모든 국가
들을 멸망시키고는, 그 위에 새롭게 거대한 제국을 탄생시킬 야욕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제국을 삼 등분해서 그들이 직접 황제의 보위에 오를
엄청난 음모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멍청한 캇셀도르프 제국의 황제는,
이런 공작들의 계략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제국의 황제는 세
공작이 각지에서 뽑아서 추린 미녀들에게 파묻혀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부귀영화에만 빠져 있었다. 물론 제국의 중신들도 모두 그들의 입김이 닿아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추호도 그들의 계획이 무산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과거의 상념을 마친 조르그문트 공작은 다른 두 명의 공작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바로 같은 목표를 가진 동업자이자, 오랜 친구 사이였던 것이다.
"의외로 이번 세르보네 영지를 병탄하려는 나의 계획이 실패했네"
그 말을 들은 자이렌 공작은 의외롭다는 표정을 했다. 그가 아는 조르그문트
공작은 엄청나게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라, 지금까지 그의 계획이 실패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안색은 이내 평온한 상태로 돌아갔다. 그가 말을 꺼내는 이상,
이미 다른 대비책을 세웠을 것이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이렌 공작의
예상대로, 조르그문트 공작은 천천히 자신의 또 다른 계획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아예 로세니아 왕국을 병합해 버릴 생각이네,
풍요로운 라인하르트 평원을 본국의 수중에 넣는다면, 우리의 야망을 달성하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네"
"하지만 이미 로세니아를 비롯한 여섯 개의 왕국들이 한데 뭉쳐, 동맹을 맺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만약 우리가 로세니아를 침공한다면, 그들의 동맹국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텐데?"
그 말을 듣고 있던 자이렌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이 아르펜 대륙에
존재하고 있던 일곱 개의 왕국들이 그들에 의해 멸망을 당했고, 그러자 그것에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왕국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는, 강대한 캇셀도르프 제국을
견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로세니아를 침공하자는 조르그문트 공작의 의견에서
느끼는 그의 불안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아무리 캇셀도르프 제국이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나머지
여섯 왕국의 연합군과 격돌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였다. 그러나 조르그문트
공작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건 다 네게 생각이 있네, 자네들은 단지, 휘하의 고급기사 몇십 명만 빌려주면,
나머지는 다 내가 알아서 할걸세"
"고급기사라면 어떤 경지에 이른 인물을 말하는가?"
"최소한 상급의 팔라딘은 되어야겠지? 당연히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
이어야 하네, 물론 자네의 아들은 안되지. 그는 이 아르펜 대륙에서 오로지 일곱
명만이 존재하는 소드 마스터중의 하나가 아닌가"
그 말을 듣자, 자이렌 공작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사실 그들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고 나서, 각각 한 명씩의 아들을 직접 가르쳤다. 그러나
오직 조르그문트 공작과 자이렌 공작만이 그들의 아들들을 소드 마스터의 경지
에까지 이끌었던 것이다.
나머지 한 명의 공작인 헬베크 공작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비록 그들의 힘을
얻은 마왕의 신전에, 자신의 아들들을 데리고 가기는 했으나, 오직 자신의
아들만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아들은 타고난
자질뿐만 아니라, 검을 익히는 검사로써의 참을성이 훨씬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헬베크 공작은 그런 사소한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인물이 아니었다.
헬베크 공작은 궁리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조르그문트 공작의 의견에 찬성했다.
"나는 동의하겠네, 조르그문트 공작 나으리가 계획했다면 의심할 필요도 없지"
그러자 자이렌 공작도 그 계획에 동의했고, 이내 그들은 세부사항의 협의에
들어갔다.
사소한 일이 아닌, 하나의 왕국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일이라서, 그들의 회의는
지루할 정도로 길었다. 마침내 완전한 의견의 일치를 본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명의 공작을 배웅하는, 조르그문트 공작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일어나고있었다.
루크 일행은 천천히 시틀레안 산맥을 넘어가는 유일한 통로를 향해 말을 몰고
있었다. 루크와 벨레로크는 일행의 선두에 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일레인은
흔들리는 말 위에서, 마법의 캐스팅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이번에
자신의 파티에 끼여든 이국의 무사에게 호기심이 많았던 것이다. 한성은 느긋하게
말 위에 앉아, 주위의 경관을 감상하고 있었다. 문득 그는 벨레로크의 부하라는
스무 살 정도의 청년에게 눈길을 돌렸다.
토머스라고 불리는 그 수련 기사는,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한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성이 그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도 미소로써 한성에게
화답했다. 한성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이곳의 인물들이 사용하는 무기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이 곳의 인물들은, 길이가 거의 1.2미터
가 넘는 두꺼운 장검을 사용하였다. 당연히 이곳의 기사들이 걸치고 있는 두터운
갑주를 공격하려면, 그 정도의 중 병기를 사용해야만, 상대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팔라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토머스까지도 기름을 먹인
가죽갑옷에다가, 강철 재질의 플레이트 메일을 덧입고 있었다.
이곳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덩치가 우람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고 생각한 한성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들 정도로 덩치를 키우지 않으면, 무거운 중 갑주를
착용하고 나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한성의 체격도
작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적으로 중원 인에 비해서였지, 이곳의
기사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왜소한 체구였다.
게다가 앞에 걸어가는 루크와 벨레로크는 장검 이외에도,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무기들을 여러 자루씩 말의 옆구리에 매달고 있었다. 도끼가 달린 긴 창과, 철퇴,
거대한 방패도 두 개씩 말의 등에 달아매고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한성의 무장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중원에서 가지고 온 가느다란 장검 한 자루에, 허리에 찬
단궁이 모두였다. 문득 한성은 토마스라고 불리는 수련기사가 자신의 허리에 찬
단궁을 보고싶어 하는 눈치를 느꼈다. 그것을 느낀 한성은 천천히 단궁을 풀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단궁을 건네 받고는 신기한 눈빛으로 이리저리 살피던 모습을 보고 있던
한성은, 문득 일레인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듣고는, 그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이미 통역마법의 캐스팅을 끝마친 모양이었다.
"무척 작은 활이네요. 사냥용인가요?"
그 말을 들은 한성은 눈이 동그래졌다.
"뭐이 어드레?"
"예? 뭐라고 하셨죠?"
"아니오, 이것은 전쟁용이오, 크기는 작아도 대단한 위력이 있죠"
그러자 일레인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했다. 그녀는 고려에서 생산되는 단궁의
강력한 탄력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작은 활을 전쟁에서 쓸 수 있다는 말인가요?"
"충분히 가능하죠"
그 말을 들은 일레인은 뒤에서 걸어오는 토머스에게 눈짓을 했다. 그 눈짓을
받은 토머스는 한성에게 단궁을 다시 건네주더니,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의 옆구리
에서 커다란 석궁을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그 위력을 과시라도 하듯이, 시위를
당기며 화살을 하나 먹였다. 이어 일레인을 한 번 본 뒤, 토머스는 그 석궁을 들어
전면에 보이는 나무를 겨냥해서 화살을 한 대 날렸다. 그러자 앞서서 가던 루크와
벨레로크도 두 눈에 호기심을 띠고 토머스를 바라보았다.
피융!
시위를 벗어난 화살은 정확히 나무의 줄기에 명중했다. 그 화살은 나무줄기에 반
이나 박혀 들어가 있었다. 화살을 쏜 토머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한성을 바라
보았다. 석궁의 위력이 어떠냐? 하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한 토머스를 본 한성은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짜식! 귀엽게 노는군'
한성은 느긋하게 등의 전통에서 화살을 한 대 뽑아 들었다. 이미 한성은 명검
산장에서, 여진족 궁사들이 놀랄 정도로 궁술을 익혔던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막강한 내공마저 뒷받침 된 지금, 그는 저 나무정도는 완전히 두 조각으로
쪼개어 버릴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을 삼 푼쯤
숨기라는 병법의 요체에 따라 한성은 조심스럽게 내공을 가늠한 뒤, 대충 나무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대충 겨냥해서 화살을 날리는 한성의 태도에 그들은 의아해 했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목표물을 겨냥하는 것은 상당한 정신집중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무를 보더니 입을 딱 벌렸다. 한성이 쏜 화살은, 정확히 토머스가 쏜
화살의 옆에 명중했으며, 한성의 내력에 힘입어, 그 화살은 꽁지의 깃털까지도
완전히 나무 속으로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보자, 일행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비록 자신이 패했지만 토머스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 주었다.
일레인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한성이 가진 고려단궁의 위력을 칭찬했다.
"과연 대단하군요. 그토록 작은 단궁이,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요, 그것은 컴퍼짓 보우 인가요?"
"컴퍼짓 보우?"
그러자 일레인은 한성이 알아듣기 쉽게 그 용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통역마법을 쓰고 있지만, 한성은 어려운 단어를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복합재료를 사용한 활 말이죠, 아무 곳에서나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 컴퍼짓
보우는 덩치에 비해서 위력이 무척 세다고 들었거든요"
"그런 것 같소"
한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고려 단궁은 여러 가지 재료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물소의 뿔에다가 탄력이 좋은 버드나무를 덧붙인 뒤, 민어의 부레로
만든 아교를 사용해서 붙이고, 심지어는 창호지까지 붙여서 보완시킨, 동양 최고의
명품이었던 것이다.
일레인은 눈을 빛내며 한성을 바라보더니, 이내 그의 나이를 물어 보았다.
그러자 한성은 난감해졌다. 그는 지금까지 무공수련에 몰두하느라, 자신이 지금
나이가 얼마나 먹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대충 마흔은 넘은 것
같은데, 그것을 사실대로 밝힌다면 저들은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 물론
동양인의 얼굴은 이곳의 인물들에 비해 무척 앳되어 보였다. 거기에다 한성은
환골탈태를 통해 무척 맑고 깨끗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성은
그들에게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이곳의 나이로는 내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오, 하지만 내가 있던
세계의 나이로는 약 10갑자 정도 되지요"
"갑자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으나,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일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로써는 갑자라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대충 얼굴은 봐서 서른은 넘지 않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에게 편하게
대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성이 얼굴을 굳히고 전방을 주시하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왜 그래요?"
한성은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전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놀란 그녀도
한성이 바라보는 쪽을 쳐다봤으나, 이상한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극대화된 한성의 감각에 이상한 생명체가 감지되었다. 상당히 강한 기를 품고
있는 그것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물론 내공이 천인지경에 이른
한성만이 그 생명체를 멀리서 감지했던 것이다. 한성의 태도에 놀란 일행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사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문득 루크의 경계음을 들은
그들은 일제히 각자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전방의 숲에서 두 마리의 녹색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크르르르
기성을 내며 나타난 괴물들은 족히 2.5미터는 되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징그럽게
생긴 녹색의 피부는 번들거렸으며, 손에는 커다란 돌도끼를 가지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괴이하게 생긴 생물의 모습을 본 한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루크와 벨레로크는 별 감흥도 없다는 듯이 각자의 헤르시온을 착용했다.
그들의 몸통을 가리고 있던 헤르시온이 삽시간에 그들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고,
이내 그들은 청백색의 중 갑주를 걸친, 뒤 그 괴물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한성의 귀에 일레인의 말이 들려왔다.
"트롤이군요"
"트롤?"
트롤들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한성에게 일레인은 그 괴물의 정체를 일깨워
주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제법 강한 몬스터의 일종이죠, 몸의 재생력이 비 이상적으로
뛰어나서 일반적으로 상대하기가 무척 버겁죠, 하지만 걱정 말아요. 그것은 일반
모험가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고, 우리 파티에는 팔라딘이 두 명이나 있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그 말을 들은 한성은 고개를 돌려 트롤이라고 불리는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거구임에도 트롤들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다.
거기에다 힘이 대단한 지, 휘두르는 돌도끼에서는 엄청난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들은 상대를 잘못 택했다. 루크와 벨레로크는 여유있게 트롤
들의 공격을 피하며, 손에 든 장검으로 트롤들의 몸에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문득 그것을 보고 있던 한성은 두 눈에 이채를 발했다.
벨레로크가 휘두른 검에 옆구리를 길게 찢긴 트롤의 상처가 급격히 아무는 것을
본 때문이었다. 트롤들이 휘두르는 돌도끼가 벨레로크의 헤르시온을 몇 번 강타
했으나, 와이번의 본으로 만들어진 헤르시온은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것을
본 트롤들은 괴성을 지르며 차츰차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트롤들이 물러
서자 팔라딘들도 싸움을 멈추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트롤들은 이내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트롤들이 완전히 숲속으로 사라지자, 천천히 루크와 벨레로크는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런데 왜 저 괴물들을 완전히 죽이지 않는 거요?"
한성의 질문에 일레인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사실 트롤은 상대하기가 퍽 힘든 몬스터예요, 저들이 팔라딘의 경지에 오른
고급기사들이라서 트롤을 손쉽게 막을 수 있었지, 보통의 모험가 파티였다면,
아마 무척 고전을 했을 것이예요. 그리고 저 트롤들은 머리를 완전히 부숴야만
죽어요, 그렇기에 저들도 트롤이 물러서자, 굳이 공격을 하지 않은 거구요,
트롤을 죽이는 일은 아무리 저들이라고 해도 쉽지가 않아요"
일레인의 설명을 들은 한성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전설상의 용도 살고 있는데, 저런 신기한 생물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뭐 이상할 것은 없지'
생각을 마친 한성은 일레인에게 자신이 죽인 용의 정체를 물어 보았다.
"혹시 크기가 엄청나게 크고, 마치 날개가 달린 도마뱀처럼 생긴 생물에 대해서
알고 있소?"
"왜 그러죠?"
"내가 이곳으로 와서 그 생물을 한 마리 죽인 적이 있는데, 그 당시에 그놈을
죽이느라고 상당히 애를 쓴 적이 있어서요"
그러자 일레인은 심각한 표정을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한성이 죽인 용이 드래곤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만큼 드래곤이란 생물은 이세계에서는 최강의
생명체였던 것이다.
"당신의 설명으로 봐서는 그것은 와이번이라고 하는 몬스터예요. 사실 와이번은
우리들 정도의 실력으로도 제법애를 먹는 상대인데, 그 것을 혼자서 처치했다니,
정말 대단한 실력을 갖췄군요"
"그럼 그 와이번이란 생명체가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나요"
그 말을 들은 일레인은 피식 웃었다. 그녀는 한성이 와이번과 싸우면서 엄청나게
고전했다기에, 그만 그가 헛것을 본 것으로 단정을 지었다.
"와이번은 사람으로 폴리모프할 수는 없어요. 드래곤이라면 모르지만"
"드래곤은 또 어떤 생명체요?"
그러자 일레인은 한성에게 드래곤이라는 최강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드래곤은 적어도 팔천 년은 사는 생명체이죠, 게다가 모든 마법의 창시자이기도
하구요, 사실 저 같은 마법사들은 옛날에는 드래곤에게서 마법을 배웠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오래 전에는 드래곤은 사람들과 꽤 친하게 지냈다고 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거의 왕래가 없는 실정이예요. 게다가 이 시틀레안 산맥의
카르보네스같은 블랙 드래곤은, 그 성격이 매우 흉폭해서 인간을 보는 족족
죽여 버리죠. 그래서 우리가 떠나온 세르보네 영지가 번창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한성은 입을 다물었다. 대충 짐작해 보건데, 자신이 죽인 그 용은
아마도 드래곤이 틀림이 없어 보였다.
"그럼 그 드래곤을 죽이는 것은 어렵소"
그러자 일레인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한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일레인은 한성에게 드래곤의 무서움에 대해 강의하기
시작했다.
"아마 드래곤을 상대할 만한 생명체는 이 대륙에는 없을 것이에요, 물론 드래곤
슬레이어의 칭호를 얻은 인물들은 역사책을 뒤져보면 지금까지 몇 명이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 천 살도 안된, 어린 드래곤을 죽인 것뿐이에요, 천 살이 지나
성룡의 단계에 이른 드래곤은 죽이기가 도저히 불가능하죠, 게다가 이 산맥의
주인인 블랙 드래곤 카르보네스 정도의 드래곤은 거의 웜급에 이른 다 자란
드래곤이죠, 같은 드래곤이 아니면 카르보네스 정도 되는 드래곤을 위협할 생물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럼 많은 기사들을 동원해서 때려잡는 것은 어떻소"
그러자 일레인은 측은하다는 듯이 한성을 바라보았다.
"과거에는 그랬죠, 하지만 드래곤 사냥에 나선 기사들은 하나같이 영영 돌아오지
못했죠, 아무리 팔라딘의 경지에 오른 기사들이 수백 명씩 덤빈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드래곤에는 상대가 되지 못해요, 게다가 블랙 드래곤들은 맹독의
브레스를 뿜는다고 들었어요. 아마 토벌대들은 드래곤의 모습도 보기 전에 그
브레스에 중독되서 뼈만 남을걸요, 그랬기에 세르보네 영지의 뮬렌 백작도
카르보네스의 패악을 그냥 두고만 보고 있는 것이에요.
그 말을 들은 한성은 하마터면 그 악룡을 자신이 죽였노라고 고백할 뻔했다.
그러나 그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은 한성은 대화의 핵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럼 그것 말고도 강한 몬스터란 괴물이 또 있소?"
다행히 일레인은 한성의 속내를 짐작하지 못하고, 그가 묻는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강한 몬스터라면 당연히 오거(Ogre)죠, 4.5 미터에 이르는 키에, 무지막지한
파워를 지닌 그 괴물을 본다면 당연히 도망가야만 해요, 그만큼 오거는 강하죠,
하지만 걱정 말아요, 우리일행에도 오거가 있으니까요, 아마 저 오거에 버금가는
인간은 아마 오거를 상대할 수 있을 거예요."
일레인이 웃으며 가르킨 인물을 바라본 한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루크와 나란히
말을 타고 있는 벨레로크는 일레인이 자신을 놀리는 줄도 모르고, 루크와 나누는
대화에 열중해 있었다. 어느덧 통역마법의 효력이 떨어 졌는지,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느낀 한성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것을 눈치챈
일레인은 입을 다물고는, 담소를 나누고 있는 루크와 벨레로크의 사이로 끼어
들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 곳의 언어를 익혀야 겠군"
천천히 한성은 이곳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이 한성의
눈을 찔렀다. 한성은 말이 걸음을 내딛는 대로 몸을 맡기며, 그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루크 일행은 어느덧 험준한 시틀레안 산맥의 남쪽을 넘어 캇셀도르프 제국의
국경과 인접한 로데인 마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저번에 일어났던 트롤 두
마리의 습격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몬스터들의 습격은 없었다. 물론 오크 따위의
하급 몬스터들의 공격은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파티는 그야말로 무적!
그 자체였던 것이다. 상급의 팔라딘 두 명과, 그에 필적하는 가공할 검술을 지닌
이국인 검사, 게다가 5써클의 마스터인 여 마법사까지 가세한 이 파티는 최고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멀리 보이는 로데인 마을을 응시하며, 그들은
말에게 박차를 가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벨레로크는 로데인 마을에
도착하게 된 것이 무척이나 반가왔다. 그는 일행 중에서도 소문난 술꾼이었던
것이다.
그는 힐끗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이국의 검사를 쳐다보았다. 사실 그는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많이 상한 상태였다. 비록 그의 검술실력 덕분에,
자신들이 패배하는 것은 모면했지만, 그는 술로써 저 이국의 검사를 골탕먹일
음흉한 계략을 짜고 있었다.
블랙 드래곤 카르보네스 때문에, 세르보네 마을에는 별다른 술이 없었다.
많은 주민들이 굶주리는 상황에서 술을 만들 곡식이 없었기에, 뮬렌 백작의
엄명에 의해 술 종류의 밀조가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하루라도
술이 없으면, 살수가 없는 벨레로크는 마치 세르보네 영지가 지옥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벨레로크라고 불리는, 덩치가 산만한 기사가 자신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음흉한 미소를 띠자, 한성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일레인말고는
말이 통하는 상대가 없었기에, 그는 이내 그에게서 관심을 돌렸다.
벨레로크의 음흉한 계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들은 로데인 마을의 어귀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 로데인 마을은 시틀레안 산맥의 유일한 통로에 위치하고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로세니아 왕국과 캇셀도르프 제국의 국경은 바로 시틀레안
산맥을 경계 점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로데인 마을은 바로 그 국경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많은 상인들이 이곳을 거쳐 캇셀도르프 제국으로 넘어갔기에, 로데인 마을은 외진
산중에 위치해 있음에도, 무척 규모가 컸다. 그리고 몬스터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엄청나게 높은 성벽이 마을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일행은 천천히 성의 입구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중무장을 한 병사들이,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있었다.
루크의 일행이 다가가자 그들은 통행증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였다.
"통행증을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루크는 뮬렌 백작이 만들어 준 통행증을 병사들에게 내밀었다.
"세르보네 영지에서 오신 분들이군요, 우리 로데인마을에 잘 오셨습니다"
그것을 살펴본 병사들은 공손히 예를 건네며, 입성을 허용하였다. 물론 한성
에게도, 뮬렌 백작이 만들어 준 통행증이 있었다. 낯선 이국인의 모습을 한 한성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병사들은 의아한 기색을 보였으나, 한성이 가지고 있는
통행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그냥 통과시켰다. 일행의 신분을 확인한 병사
들은 성안으로 수신호를 했고, 이어 육중한 성문이, 소리를 내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성문이 완전히 내려오자, 일행은 천천히 성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을로 들어온 일행들은 일단 식당과 겸하고 있는 여관을 찾았다. 오래지 않아,
그런대로 깨끗한 여관을 찾은 그들은, 입구에 말을 매어놓고는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나이가 지긋한 노부부가 운영하는 여관이었고, 젊은 사환이 곧 그들의 말을
마굿간으로 끌고 갔다. 벨레로크는 험악한 얼굴로 젊은 사환에게 으름짱을 놓았다.
"이봐! 먼길을 갈 말들이니, 좋은 먹이를 주도록 해, 쓸데없이 귀리 따위나 주지
말고"
"귀리 정도면 좋은 말먹인데, 뭘 더 바래요. 귀리 말고는 다른 말먹이가 없으니,
그냥 굶겨요?"
이미 사환은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 본 듯,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러자 루크가
얼른 앞으로 나와 사환을 달랬다.
"귀리라도 좋으니, 충분히 먹이게, 그리고 물도 넉넉하게 주도록 하고"
사환이 마굿간으로 말을 끌고 가는 것을 본 루크는, 벨레로크의 팔을 잡고 식탁
으로 다가갔다. 나머지 일행들도 웃으면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제발 사고 좀 치지마. 이곳의 인물들은 대체로 거칠단 말이야"
탁자에 앉자마자 루크는 눈을 부라리며 벨레로크를 채근했다. 머쓱해진
벨레로크는 외면하면서, 다가온 주인에게 음식을 시켰다. 문득 생각이 난 듯
벨레로크는 주인에게 물었다.
"참 이 곳에 살류트라고 불리는 술이 있소?"
"당연히 있지요, 이곳은 바로 캇셀도르프 제국과 인접한 곳이라서, 항상 그 술을
보유하고 있답니다."
늙은 주인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살류트란 캇셀도르프 특유의 독한 증류주
로써, 풍요로운 캇셀도르프 지방의 명주였다. 일전에 캇셀도르프 제국에서 맛
보았던 그 독하고 그윽한 맛을 잊지 못한 벨레로크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바로
그 술을 주문하였다.
그러나 그 술은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일행의 재무를 맡은 일레인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벨레로크는 단 한 병만 주문하였다. 다른 일행들은 시원한
맥주를 주문하였고, 한성도 묵묵히 그것을 따랐다. 먼저 요리가 나오자 일행들은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일레인은 멍하니 두 명의 일행이 먹는 광경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것은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먹는 것도 잊어버린 듯, 벨레로크와 한성이
삽시간에 요리접시를 비워 버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저 오거가 먹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한센도 절대로 그에 못지 않은걸"
"먹성 좋은 오거가 한 마리 더 있었군"
주위의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두 사람은 오로지 먹는 데만 열중해 있었다.
원래 한성은 중원에서도 대식가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내공이 화경에 다다른 그가,
소화불량 따위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기에, 그는 벌써 세 접시의 음식을 비우고,
네 접시 채의 요리를 주문하고 있었다. 벨레로크가 네 접시의 음식을 비우고,
배를 두드릴 때, 마침내 한성은 다섯 접시 채의 음식을 주문하고 있었다.
몸집도 그다지 크지 않은 낯선 이국인이, 이토록 엄청난 식욕을 과시하자,
음식을 가져오는 주인을 위시해서, 식당 안에 있는 모든 손님들이 멍하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결국 다섯 접시의 음식을 다 비우고는, 한성이 배를 두드리자, 그들은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으로 외면하기 시작했다.
'저놈은 인간의 탈을 쓴 오거가 분명해'
각자의 의아한 시선을 무시해 버린 한성은 천천히 자신의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었다. 그러자 보고 있던 인물들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한성은
느긋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캬아아"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씁쓸한 맥주의 맛을 느끼자 한성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이거 얼마 만에 먹어보는 맥주야?"
물론 한성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서, 맥주를 무척 즐겼었다. 그러다가 중원에서
독한 죽엽청이나 화주같은 고량주만 먹다가, 이곳에서 맥주를 마시게 되니 무척
감회가 새로웠다.
이곳의 맥주는 현대의 맥주와 맛이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목젖을 시큰하게 하고
넘어가는 그 씁쓸한 맛은 그대로였다. 문득 한성은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는
주위의 시선을 느끼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일행을 비롯해서, 식당 안에
있는 모든 인물들이 멍하게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왜들 저러지?"
그러나 의사소통을 할 방법이 없는 한성으로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벨레로크가 예의 그 음흉한 미소를 띠우며, 자신에게 술잔을 권하자,
한성은 묘한 기대감에 그 술잔을 받아 들었다. 이어 그가 술병을 기울여 자신의
잔에 따르자, 붉은 액체가 조르르 술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벨레로크는 마시는
시늉을 하며 한성이 그 술잔을 들 것을 권유했고, 그러자 다른 일행들도, 그의
계략을 깨닫게 되었다.
일레인은 그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루크가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흔들자,
벨레로크를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는 그 자리에 도로 앉았다. 토머스도 빙글빙글
웃으며 한성이 술잔을 비우기를 기다렸다.
'이것들 봐라'
그들의 태도를 본 한성은 이내 벨레로크의 흉계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누군가? 한 술 하는 인물이 아니던가? 그 거친 몽고족들을 모두 넉아웃시킨
한성이 거기에 넘어갈 리가 만무했다. 내공을 끌어올려 만반의 준비를 갖춘 한성은
단숨에 그 술잔을 비워버렸다.
그때, 맥주를 가지고 오던 주인이 화들짝 놀랐다. 살류트같은 독한 술은, 천천히
음미하며 홀짝홀짝 마시는 것인데, 저 이방인처럼 단번에 들이키는 인물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술집 내의 상황을 이해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무척 오랜만에 재미있는 광경을 상상한 주인은 아예
의자를 끌어다가 앉고, 무모한 이국인의 만용이 가져올 결과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과연 화끈한 감촉이 목안을 훑고 지나갔으나, 한성은 억지로 참고, 다시 술잔을
벨레로크에게 권했다. 독한 술기운이 느껴졌으나, 그 정도도 이기지 못할 한성이
아니었다.
별 표정 없이 한성이 술잔을 건네자, 벨레로크는 이채를 띠며, 술잔을 다시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한성이 따라주는 살류트를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술을 마신 벨레로크는 오만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안색을 굳히고는, 다시
술잔을 한성에게 권했다.
권커니 잦커니 하며, 삽시간에 살류트 한 병을 비워버린 벨레로크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일행의 재무를 책임지고 있는 일레인에게 간절한 눈빛을 건넸다.
"안돼!"
일레인은 단호히 거절했다. 당연히 일행의 여비가 그리 넉넉하지 않았고 또한
살류트의 값이 무척 만만치 않았기에, 단순한 이런 쓸데없는 술 시합을 위해
날려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벨레로크는
한성이 내민 보석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족히 5캐럿은 되어 보이는 루비가
자신의 눈앞에서 빛나고 있었고, 그것을 건넨 한성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구세주를 만난 벨레로크는 다급하게 주인을 불러, 보석의
가치만큼 살류트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물론 그 보석의 가치는 이 술집의 술을
모두 마셔 버려도 가능할 만큼, 값이 나갔기 때문에, 주인은 창고에 있는 모든
살류트를 가지고 와서 탁자 위에 쌓아놓기 시작했다.
"오늘 이곳의 모든 술값은 내가 낸다!"
그말을 듣자 술집 안의 취객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술값 걱정을 덜어 버린
그들은 자신의 술병을 들고 다가와서는, 이 덩치가 큰 오거 전사와 이국인과의
술 대결을 참관하기 시작했다. 한성의 보석으로 호기를 부린 벨레로크는, 행복
하다는 표정으로 술병의 마개를 땄다. 물론 한성은 자신이 죽인 카르보네스의
보고에서 슬쩍한 보석을 건넸던 것이다. 지금 한성의 품에는 많은 보석이 갈무리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이 정도의 보석이라면 넘쳐날 정도로 있었다. 한성이
느닷없이 귀한 보석을 건네자, 그들은 의혹을 품었지만, 일행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술 대결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한 병, 두 병, 살류트가 든 병들이 비워지기 시작하고, 두 사람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살류트 같은 독한 술을 마치 맹물 마시듯 비워 버리는 두
사람을, 경의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인물들은 제각기 돈을 걸기 시작했다.
"당연히 저 거구의 기사가 이길걸?"
"아니야, 저 이국인도 만만치 않은걸?"
술집 안의 취객들은 압도적으로 벨레로크가 이긴다는 쪽에, 돈을 걸고 있었다.
간혹 가뭄에 콩 나듯 한성이 이기는 쪽에 돈을 거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덧 벨레로크는 취해서 그 거구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타고난 주량은
대단해서, 그는 끝까지 손을 들지 않았다. 그 것을 보고 있던 한성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비록 내공의 힘으로 한성은 이미 술기운을 많이 배출한 상태
였지만, 정상적인 대결이라면 자신은 벨레로크의 상대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질 수 없다고 생각한 한성은 마음을 굳히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두 병의 살류트 중 한 병을 거머쥐었다. 그리고는 병의 주둥이에 입을 대고는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바라보고 있던 인물들은 그 광경에 경악했고,
한성이 병을 다 비우자, 이내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독한 살류트 한 병을 단번에
마셔버린 한성은 꽤나 취기가 돌았지만, 천천히 내공을 이용해서 몸 속의 술기운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의 땀구멍을 통해 주정이 기체의 상태로 배출되었으나,
주위의 인물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덧 눈이 풀린 벨레로크가 질 수 없다는 듯이 마지막으로 남은 살류트 한 병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들이키는 살류트는 그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보다는, 그의 입가로 더 많이 흘러내렸다. 결국 벨레로크는 마지막 술병을 채
비우지 못한 채, 서서히 모로 쓰러졌다.
쨍그랑!
채 비우지 못한 살류트가 든 술병이 바닥에 떨어지며, 박살이 났고, 벨레로크의
거구는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것을 바라보던 한성은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탁자의 주위를 한 바퀴 돈 뒤, 밖으로 발길을 옮겼다.
전혀 비틀거리지 않고 걸어나가는 한성의 모습을 본 술집 내의 인물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놀란 표정의 일레인이 벨레로크에게 다가가서
그를 흔들었으나, 그는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결국 루크와 취객들의
도움을 빌어, 일레인은 벨레로크의 를 침실로 옮기기 시작했고, 다섯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달려들어서야, 결국 그를 침실의 침대에 눕힐 수 있었다. 잠시
바람을 쐰 한성은 다시 천천히 들어왔고, 믿을 수 없다는 시선 속에서 한성은
자신의 침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여관의 주인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내 평생 저렇게 술이 센 사람은 처음 보는군"
주위의 취객들도 그 말에 공감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루크 일행들도 한성의 엄청난 식욕과 주량에 감탄하며,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다음날 일행은 거기에서 하루를 더 묵어야만 했다. 물론 다음날
아침에 한성은 무척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나, 다시 한번 일행들을 놀라게 했지만
벨레로크는 그때까지 인사불성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날 출발하는 것을 포기한
그들은 시틀레안 산맥의 북쪽 능선을 넘어가는 길을 수소문하기 위해, 여관을
나섰다. 그들이 묵고 있는 방에는, 자고 있는 벨레로크와 한성만이 남아 있었다.
문득 한성은 죽은 듯, 쓰러져 있는 벨레로크를 한 번 바라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사실 내공을 이용해서 주정을 배출하지 않았다면, 저 거구의 인물은 감히 자신
으로써도 상대가 되지 않는 주당이었다. 그것을 생각한 한성은 천천히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물론 한성에게는 일행을 따라서 이국의 마을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그동안 계속 운기조식을 하지 못했기에 그것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성이 여관에서 운기조식에 몰두해 있는 사이 루크와 일레인은 로데인 마을의
경비대 사무실로 찾아가고 있었다. 일레인은 오랜만에 겪는, 둘 만의 데이트가
무척 기뻤는지, 계속 루크에게 말을 걸었다. 루크도 그녀가 싫지는 않은 표정
으로 대답을 했고, 담소를 나누던 그들은 이내 로데인 마을의 자치를 책임지는
경비대의 건물을 찾아 헤메기 시작했다.
로데인 마을은 산 속에 있는 외진 마을치고는 상당히 규모가 컸다. 한참을
찾아서야, 겨우 경비대 사무실을 찾은 루크는 천천히 그 쪽으로 다가갔다. 문득
건물의 앞에, 몇 명의 사람들이 벽에 붙어 있는 방문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루크는 호기심이 일어 그 사람들 사이로 끼어 들었다. 비록 벨레로크 같은 거구는
아니었지만 루크도 상당히 건장하고 우람한 체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그는 벽보에 적힌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벽보를 읽고 있는 루크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일레인은 호기심에 살며시 물어
보았다.
"뭐라고 적혀있어요?"
그러자 루크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에게 나직이 말했다.
"큰일인데? 캇셀도르프 제국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당분간 출입을 통제한다는군"
"뭔가 이유가 있을 게 아니에요"
"그건 지금부터 알아 봐야지"
루크는 천천히 경비대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기에는 묵직한 가죽 갑옷을
입은 병사가 흉갑 만을 걸친 채, 한 명의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소한
문제였는지, 먼저 온 여인은 곧 상담을 마치고는, 총총히 건물을 빠져나갔다.
콧수염을 근사하게 기른 그 병사는 천천히 일행에게 몸을 돌리며 정중하게 물어
보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러자 루크는 앞으로 나서서, 캇셀도르프 제국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왜 통행
금지가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병사의 대답을 들은 루크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기 시작했다.
"지금 그곳에는 오거가 출몰합니다. 그래서 그 놈을 퇴치하기 전까지는 당분간
출입을 금하라는 영주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믿을 수 없군, 오거 정도의 대형 몬스터는 이런 곳에는 살지 않을 텐데"
그러나 병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루크를 설득했다.
"사실입니다. 이미 오거에게 잡혀먹은 마을 사람들의 시신을 몇 구, 수습했지요.
만약 꼭 넘어가야 겠다면, 여행자시니까 말리지는 않겠지만, 만약 오거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본 영지에서 책임은 지지 않습니다"
"그럼 먼저 넘어간 여행자들이 있습니까?"
그 병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금 생각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세자르 왕국에서 온 노예상인들이 아까 넘어갔지요, 그들은 급한 사정이 있어
꼭 가야만 한다고 그러더군요. 하지만 판단은 자유입니다. 가급적이면 토벌대가
도착하는 한 달 후에나 출발하시는 것을 권유하고 싶군요"
그러자 루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는 굳이 이 마을에서 한 달을 허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병사는 다시 시체를 치워야겠다는 듯한 안쓰러운 표정
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보던 일레인은 화가 불끈 나서, 자신들의 파티
에는 팔라딘 급의 기사가 세 명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루크의 만류로
그만 두었다. 천천히 발길을 돌려 경비대 건물을 나선 루크와 일레인은 천천히
숙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문득 일레인이 말문을 열었다.
"믿을 수 없네요. 이런 외진 곳에 오거가 존재하고 있다니?"
"나도 그래, 오거란 몬스터는 여간해서는 보기가 힘든 존재인데....?"
사실 이 아르펜 대륙에서 오거란 존재는 모든 육상 몬스터 중 가장 강한 존재였다.
물론 오거보다 몸집이나 키가 큰 미노타우로스라는 덩치 큰 몬스터도 있었지만,
힘과 스피드에서 미노타우로스는 도저히 오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4.5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키와, 엄청난 체격에도 불구하고 오거는 웬만한 인간기사를 훨씬
능가하는 빠른 몸놀림을 가지고 있는 가공할 몬스터였다. 보통 혼자서 다니는
단독행동을 좋아하고, 인간의 고기를 좋아해서, 보이는 대로 잡아먹는 땅에서
돌아다니는 몬스터 중 가장 강력한 괴물이었던 것이다.
사실 루크 정도의 팔라딘급 기사들만이 오거를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었다.
오거는 맨손 격투술이나, 무기를 다루는 기술이 무척이나 뛰어났다. 지능은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본능에 의한 전투기술은 일반적으로 팔라딘 급 기사랑 막상
막하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일반 사람들에게는 오거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랬기에
오거가 출몰한다는 사실에, 이 로데인 영지에서 시민들의 통행금지를 선포한
조처가 그들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러나 루크는 오늘밤이라도 시틀레안 산맥의 북쪽 능선을 넘을 생각이었다.
물론 자신과 벨레로크가 합세한다면, 오거 한 마리쯤이야 처치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들에 필적한 실력을 가진 한센이라는 이국의 무사도
있었기에, 그들은 오거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어느새 벨레로크는 깨어 있었다. 무척이나 초췌한 몰골로 세수를 하고 나온
벨레로크를 본 그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호호호호"
"하하 야 세상에 네가 술 대결에서 지다니, 도저히 못 믿겠는걸? 다시 한 번
도전해 보는 것이 어때?"
그러자 벨레로크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그리고는 한성이 운기조식에 몰두해
있는 방을 한 번 쳐다본 벨레로크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세상에 저런 놈은 생전 처음이야. 아까 나올 때 보니까, 멀쩡한 얼굴로 바닥에
앉아 이상한 자세를 하고 있더군, 저놈은 절대로 인간이 아니야.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저 놈과는 술 대결을 하지 않겠어"
말을 마친 벨레로크는 속이 거북한지, 근처의 헛간 뒤로 돌아갔다. 이어 뭔가를
게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왜액!"
그것을 들은 루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벨레로크가 임자를 만났군, 그런데 그 한센 이라는 인물, 조금 이상하지
않아?"
"무슨 말씀이세요?"
루크는 천천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일레인에게 털어 놓았다.
"나는 아무래도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에이 설마요"
일레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축했으나, 루크는 정색을 하며 자신의
짐작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그 인물의 검은머리는 이곳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특이한 색이야,
거기다가 페르넨을 가볍게 요리한 그 검술실력! 자신은 감추려고 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났지만, 나는 그것을 알아 볼 수 있었어"
루크는 그 뛰어난 눈썰미로 이미 한성이 실력을 숨기고 싸운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인간이라면 저 독한 살류트를 열 병 이상 비우고, 멀쩡하지 못해,
게다가 체격에 비해 무척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을 보니, 나는 저 인물이 아무래도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울수가 없어"
그러자 일레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루크의 추리는
무척이나 조리가 있었고 이치에 맞았기 때문에 그녀는 이내 그의 말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바로 마룡 카르보네스가 폴리모프 한 거라고 생각해"
"그 살육만 일삼는 블랙 드래곤이 왜 인간으로 폴리모프 한다는 거죠?"
"그 것은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드래곤은 원체 오래 사는 존재이니,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어. 게다가 예전에 근위 기사단에 있을 때, 누군에겐가 들은
적이 있는데, 드래곤이란 존재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일이 있다더군. 그게 바로 드래곤의 유희라는 것이지"
루크의 설명은 계속 되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의문이 바로 설명이 되지, 그의 머리색은 검은 색이니,
바로 블랙 드레곤 카르보네스와 같고, 그 엄청난 식욕과 주량, 게다가 막강한
실력까지 생각해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지."
"하지만 드래곤이 어떻게 인간의 검술을 쓸 수가 있죠"
"아마 마법을 사용한 것 같아. 드래곤이란 존재는 워낙 마법에 능통한 존재라서,
우리의 눈을 속이고 마법을 사용해서, 페르넨을 격퇴시킨 것 같아"
그러자 일레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녀가 반박하기에는 루크의
추리가 너무나 이치에 맞고 정연했던 것이었다. 문득 그녀는 살기를 띠고 루크
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복수를 하는 것이 어때요. 그 마룡으로 인해 지금까지
수많은 로세니아의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이번이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요?"
그러자 루크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
아니야. 드래곤이란 존재는 그렇게 쉽게 볼 것이 아니야. 만약 실패라도 하는
날이면, 그날로 우리 로세니아 왕국은 끝장이야. 드래곤의 위력이면 왕국 하나를
멸망시키는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야. 블랙 드래곤이 그 맹독의 브레스를
우리 왕국의 수도에 대고 뿜어내는 일을 상상해 보라고............"
그 말을 들은 일레인은 입을 다물었다. 문득 그녀도 새삼 루크의 추리가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앞으로 그를 어떻게 대하죠?"
"그는 캇셀도르프의 수도로 간다고 하니까,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그를 대하는게
좋을 것 같다. 만약 그가 제국의 수도인 카르마고에서 난동을 부린다면, 그것은
우리로써는 좋은 일이니까"
"알았어요"
불쌍하게도 한성이 블랙 드래곤 카르보네스로 오인된 사건은 그렇게 시초가 되고
있었다. 루크의 추리를 들은 벨레로크와 토머스는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별다른
이견은 내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루크의 추리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날 저녁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지금까지 만 명이 넘는 인간의 목숨을
끊은 흉폭한 블랙 드래곤이 자신의 파티에 끼어 있다고 하니 그들은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 졌던 것이다. 마을을 나서겠다는 루크의 요구를 들은 성문의
수문장은 측은한 시선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자신들을 죽은 목숨쯤으로 생각하는
병사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은 서둘러 마을을 빠져 나왔다. 물론 저
드래곤이 오거에게서 자신들을 지켜준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사는 로데인 마을에서 발작하는 것만은 피해야 했기에, 그들은 길을 재촉해
시틀레안 산맥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문득 일행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을 느끼자 한성은 무척 의아해
했다. 그러나 한성은 도무지 그들의 태도가 바뀐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드러내놓고 자신을 박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눈치를
슬슬 피하며, 심지어는 일레인도 자신과의 대화를 회피하려고만 했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한성은 단지 눈만 멀뚱멀뚱 뜨며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한성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면서, 그들은 시틀레안 산맥의
북쪽 능선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일행의 선두에 서서 말을 몰던 루크는 문득
말을 세웠다. 어디선가 역겨운 냄새가 풍겨왔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 냄새의 정체를 골똘히 생각해 보던 루크는 바로 그것이 피비린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조심해 뭔가가 있다."
루크가 경고성을 발하자, 일행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일레인도 다급하게 공격마법을 캐스팅하며 주위의 동태에 신경을
기울였다. 그때 앞의 풀숲에서 뭔가가 빠른 속도로 뛰어 나왔다. 그러자 그 쪽에
있던 벨레로크는 엉겁결에 손에 든 검을 거세게 휘둘러 그 물체를 베어갔다.
"안돼!"
황망간에 루크의 경고성을 들은 벨레로크는 다행히 내려치던 검의 방향을 틀어
가까스로 옆의 나무둥치에 검을 박을 수 있었다. 나무둥치에 깊숙히 박힌 검을
뽑아내려고 낑낑거리는 벨레로크를 한 번 쳐다본 루크는 천천히 말에서 내리더니
풀숲에서 나온 물체를 향해 걸어갔다. 뜻밖에도 풀숲에서 뛰어나온 것은 어린
소녀였다. 무척이나 예쁜 용모를 가지고 있는 그 소녀는 바닥에 웅크리고 오들
오들 떨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귀가 사람의 그것보다 월등히 크고, 피부가 유난히
하얀 소녀는 발목에는 쇠로 된 족쇄를 차고 있었다. 그것을 본 일레인이 눈에
이채를 띠고 말했다.
"어린 엘프로군요"
루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다가가서, 자신의 겉옷을 벗더니
그녀에게 살포시 덮어 주었다. 그러자 그 어린 엘프소녀는 겁에 질린 눈을 들어
루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루크는 슬며시 그녀를 안아 올려,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 엘프 소녀는 무척이나 겁에 질린 듯, 루크의 목을 꽉 끌어안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보다못한 일레인이 엘프 소녀에게 다가가서, 그녀가 당한
일에 대해서 물어 보았으나, 그녀는 도무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일행
들은 루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 시선을 느낀 루크는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왜야? 왜 내 얼굴만 쳐다보는 거지?"
"그 훌륭한 추리력으로 이 소녀가 처했던 상황을 추리해 보라는 거지, 루크
어르신"
벨레로크가 빙글빙글 웃으며 이죽거리자, 루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그
엘프소녀의 전신을 흝어보기 시작했다. 소녀의 몸은 많이 더러워져 있었으며,
발에 찬 족쇄의 쇠사슬이 달린 부분은 엄청난 힘에 의해 뜯겨져 나갔다. 그것을
본 루크는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이내 루크는 자신이 추리한 것을 일행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내 추측으로는 이렇게 생각해. 아까 경비대에서 들은 것에 의하면, 오늘 오전에
경비병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자르 왕국의 노예상인들이 마을을 나섰다고
들었어, 그리고 초원 국가인 세자르 왕국에는 엘프가 무척 비싸게 팔리지,
그렇다면 이 족쇄를 봐서 이 엘프소녀는 그들에게 노예로 끌려가는 처지로
보인다"
그러자 벨레로크의 노기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다면 이 소녀는 그들에게서 도망치는 길인가?. 나쁜 놈들 이곳으로 오기만
해 봐라.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지. 나쁜 놈들, 어떻게 이 어린 소녀를 노예로
팔아먹을 생각을 할 수 있지?"
물론 로세니아 인들은 엘프 등의 유사 종족을 노예로 삼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크레아 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자르 왕국에서는 의외로
엘프의 여인을 무척이나 선호하였고, 그들은 그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성격이 급한 벨레로크는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루크는
신중한 표정으로 그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소녀의 발에 채워져 있는 족쇄의
끝 부분을 들어 올렸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내 생각에는 그들이 바로 오거의 습격을 받았어. 오거
정도의 힘이 아니라면 쇠사슬을 이렇게 뜯어버릴 수는 없어"
루크가 들어올린 쇠사슬의 끝 부분은 엄청난 힘으로 뜯겨져 나가 있었다.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그 강한 쇠사슬을 그렇게 만들 수 없었기에, 그들은
루크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한성만이 그들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고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었다.
"요행히 이 엘프 소녀는 노예상인들이 당하는 틈을 타서 도망친 것 같아. 다들
알겠지만 숲에서만은 엘프 보다 빠른 종족은 없으니까, 아마 오거들도 이 아이를
추적하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아"
사실 오거들은 먹을 것이라면 아무 것도 가리는 것이 없었다. 인간의 고기를
특히 좋아하기는 했지만, 엘프의 고기도 마다하지 않는 오거였기에, 그 엘프
소녀가 오거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온 것은 정말 천운이었다. 다행이라는 눈빛
으로 일행들은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소녀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문득 피투성이가
된 소녀의 발목을 본 일행들은, 그 엘프 소녀의 발에 차인 족쇄를 풀 방법을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열쇠가 없었기에, 그 족쇄를 풀 방법은 현재로는 없었다.
그때 생전 처음 보는 엘프를 지켜보고 있던 한성이 앞으로 나섰다. 눈치가 빠른
한성은 이미 그들의 고민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한성이 나서자, 일행들은
그의 태도를 의아하게 주시하기 시작했다. 문득 한성이 장검을 빼어 들고는
소녀의 발목을 겨냥하자, 일행의 안색이 일시에 하얗게 질렸다.
"안돼!"
경악한 일레인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으나, 이내 한성의 검은 소녀의 발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순간 소녀는 두 눈을 찔끈 감았다. 그러나 발목에서 어떠한
통증도 느껴지지 않자, 소녀는 다시금 겁에 질린 눈망울로 자신의 발목을 내려
보았다. 한성의 검은 정확하게, 엘프 소녀의 발목에 차인 족쇄를 두 조각으로
잘라 버렸다. 그의 태도에 노기를 띠고 있던 일행들도, 결과를 보더니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랍군, 소녀의 발목은 건들지도 않고, 족쇄만을 두 조각으로 만들어
버리다니...."
벨레로크가 경악해서 중얼거렸다. 자신이 아무리 중급의 팔라딘이라고 해도,
그것만은 자신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고있던 일레인이 자신의 손수건을
풀어, 그 엘프소녀의 피투성이가 된 발목을 조심스럽게 감싸주었다. 그들의
태도를 본 소녀는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숲의 종족
이라고 하는 엘프 소녀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자, 그들은 마음이 포근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숲에서 소름이 끼치는 괴성이 들려왔다. 그것을 들은 엘프
소녀는 극도로 겁에 질리며 다시금 일레인의 품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어느새
루크와 벨레로크는 장검을 뽑아들고는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일레인은 오들
오들 떨고 있는 엘프소녀를 감싸안으며, 다시 공격마법을 캐스팅했고, 토머스는
핼버드를 꼬나쥐고는 일레인의 앞에 버티고 섰다.
"다들 조심해"
루크의 경고성이 끝나기도 전에 숲에서 두 개의 거대한 실루엣이 튀어 나왔다.
그것들은 이내 일행을 발견하고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괴성을 지르며 다가오는 괴물은 바로 오거였다. 4.5미터가 넘는 키를 가진 그것은
다 자란 오거였다. 오거는 단독 행동을 좋아한다는 상식을 깨어 버리기라도
하듯이, 두 마리가 함께 나타난 오거는 새로 발견한 사냥물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무시무시한 모습을 본 일레인도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오거는
떡 벌어진 어깨에, 사람의 몸통보다 두 배는 두꺼울 것 같은 팔뚝을 가지고 있었고,
그 팔뚝에는 울퉁불퉁한 근육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왼쪽 오거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일레인은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오거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엘프 소녀를 끌고 가는 노예상인의 것으로 보이는 인간의
잔해였으며, 오거들의 입가에는 아직도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그것들은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웅얼거리더니, 이내 일행을 덮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헤르시온을 착용한 루크와 벨레로크가 그들을 막았으나, 이내 그들은 오거의
무지막지한 힘에 밀리기 시작했다. 오거들은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몽둥이를
사용해서 그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말이 몽둥이이지, 아름드리 나무의 줄기를
그대로 꺾어서 만든 듯, 오거들은 파공성을 내며 그 엄청난 통나무를 휘둘렀고,
여지없이 루크와 벨레로크는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웃"
오거 한 마리가 휘두른 몽둥이를 방패를 이용해서 가로막은 루크가 비실비실
뒤로 물러났다. 몽둥이에 실린 오거의 강대한 힘에 의해 방패를 차고 있던 팔뚝이
시큰거렸기 때문이었다. 힘으로 오거를 상대하는 것은 어렵겠다고 판단한 루크는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치고 빠지는 작전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오거는 그 육중한 몸집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엄청나게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루크는 팔라딘의 경지에 오른 인물답게, 오거의
약점을 노리며 막상막하의 격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벨레로크는 비교적
편하게 오거를 상대하고 있었다. 2미터가 넘는 엄청난 거구를 가진 벨레로크는
오거의 몽둥이에 실린 힘을 어느 정도 받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캐스팅을
끝낸 일레인이 마법을 날렸다.
"파이어 볼"
그러자 두 개의 불덩어리가 쏜살같이 날아가더니 루크를 상대하던 오거 한 마리의
등판에 명중했다.
"크르륵"
그러자 그 오거는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은 듯,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오거의
등은 벌겋게 익어 있었다. 그것을 본 일레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자신이 날린
파이어볼은, 사람이라면 뼈도 남지 않을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잠시 주춤한 오거는 이내 사나운 기세로 일레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을 가만히 보고있을 루크가 아니었다. 오거와 일레인의 사이를 가로
막은 루크는 이어 매서운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고, 다시금 오거는 덤벼드는
루크와 치열한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법이 일격에 오거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일레인은 마법의 강도를 낮추었다. 그렇다면 위력은
떨어지지만, 파이어 볼의 정확도와 연사속도는 빨라졌고, 오거의 주의를 끌
정도는 충분히 되었기 때문이었다.
캐스팅을 마친 일레인이 틈틈히 파이어볼과 라이트닝 볼트를 날려 오거의 정신을
분산시키자,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용기
백배해서 오거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 때, 일행의 뒤쪽에서 또 다른 오거의 거친 표효성이 들려왔다. 그것을 들은
일행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젠장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이것들 오거가 아니고 덩치만 큰 오크아냐?"
벨레로크가 농담으로 지껄였으나, 아무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들이 살아
남으려면 일단 눈앞의 오거를 먼저 처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루크와 벨레로크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상대하던 오거들을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그 오거들은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였고, 어느새 괴성과 함께, 5미터가 넘는 거대한 오거 한 마리가
일행의 뒤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오거는 천천히 일행의 뒤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젠장 이 숲에는 도대체 몇 마리의 오거가 살고있는 거야?"
투덜거리던 벨레로크는 자신을 향해 내려쳐지는 오거의 방망이를 피하며 몸을
날렸다. 일레인과 토머스는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고, 루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젠 한성만 믿는다는 눈빛으로 루크는 한성에게 지긋이 시선을 보내왔다.
가만히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한성은 이제 자신이 나서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는 천천히 뒤쪽으로 다가오는 오거에게 걸어갔다. 헤르시온도 걸치지 않고
걸어가는 한성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루크는 이내 그 생각을 지우고
덤벼드는 오거를 상대하는데 전념하기 시작했다.
한성은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오거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못생긴
얼굴을 하고 있는 오거는 벌린 입 사이로 침을 질질 흘리며 한성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오거는 벌써 한성을 좋은 먹잇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제 저녁밥이 될 생각은 없다"
천천히 장검을 뽑아든 한성은 먼저 선제공격을 가했다. 뜻밖에도 눈앞의 먹이감이
순순히 자신에게 먹히지 않고 발악을 하자 오거는 방망이를 들어 한성을
내려쳤다. 그러나 한성은 이미 부신수형을 펼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오거의 뒤로 돌아간 한성은 검에 기를 불어넣어, 오거의 등을 얇게 떠냈다.
아무리 오거가 빠르다고 해도, 부신수형을 극성으로 펼치는 한성의 속도를 따라
잡지는 못했다. 순식간에 등의 피부가 얇게 떠지며 피가 자욱하게 배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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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4권이후 구했어여,,
강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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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1.11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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