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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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성요셉
축일 : 5월 1일
요셉은 히브리어로
'하느님께서 더하신다'이란 뜻이다.
교황 비오 12세는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의 날'에 대한 뚜렷한 응답으로
1955년에 노동자들의 수호자 성요셉의 축일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요셉과 노동자들과의
관계는 이보다 휠씬 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을 평범한 인간 생활로부터 떼어 놓지
않으려는 계속적이고 필연적인 노력의 하나로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목수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강조했다. 이 목수의 일에 따른
만족과 고통은 모두 요셉에게서 이어받은 것이
분명하다. 인간은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뿐
아니라 창조하는 것에서도 하느님을 닮았다.
인간이 탁자를 만들든지 대성당을 세우든지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손과 마음으로 결실을
거두라는 소명을 받은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설명 :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
"(창세2,15)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이 창조 사업을 계속하도록
명하셨다. 인간은 가정을 이루거나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는 그들의 노동 안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발견한다.
노동자인 요셉은 우리가 창조의 가장 깊은
신비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 활동에 참여하도록
도와준다.
비오 1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를 강조했다.
"세상의 구세주이시며 신인(神人)이신 분으로부터
그대와 모든 사람에게로 영이 스며들어 온다.
그러나 그 어떤 노동자도 예수님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노동의 공동체를 이루며
가정 생활을 했던 예수님의 양아버지 요셉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완전하게 창조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한 것이 명백하다. 따라서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고자 원한다면
우리는 오늘날에도 '요셉에게로 가자.
'(창세41,55)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다."
인용 : 예수의 작은 형제회 소속인 르네 브와이욤은
그의 저서 '사람의 서리에서'에서 일상적 노동과
성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예수님의 성덕은 가장 일반적인
생활 환경 안에서도 하나의 실재가 되었다.
언어 생활,가정 생활,한 마을의 사회 생활이
성덕이 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이것은 가장 암담하고 단조로운 인간 활동도
하느님 아들의 완덕에 온전히 적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신비와 관련해서
하느님의 아들에게만 고유했던 이 복음의
성덕은 생계를 위해서 노동을 해야만 하는
가난한 사람의 일상 생활환경에서도 가능하다는
확신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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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그라타(Grata)
축일 5월 1일
성녀 그라타는 이탈리아 베르가모의 성 루포(Lupo)
공(公)과 그의 아내 성녀 아델라이드(Adelaide)의
딸로, 그녀의 남편과 사별할 때까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성녀 그라타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
그녀의 부모를 개종시켰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에서 거룩한 부인으로 신망을
얻었고, 특별히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전하게
그리스도교 전례에 따라 매장하는데 큰 열성을
지니고 있었다.
성녀 그라타는 테반 군단의 군인 순교자인
성 알렉산데르(Alexander, 8월 26일)의 유해를
천으로 정성껏 감싸 영예롭게 매장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성녀 그라타는
지혜와 자비심으로 베르가모를 다스렸다.
그녀의 생애에 관한 증거는 분명하나 활동 연대에
대해서는 일치하지 않고 있다.
그녀는 베르가모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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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리카르두스 팜푸리
(Richardus Pampuri, 또는 리카르도)
축일 5월 1일
성 리카르두스 팜푸리
(Richardus Pampuri, 또는 리카르도)는
1897년 8월 2일 이탈리아의 파비아(Pavia) 근처
트리볼지오(Trivolzio)에서 태어났다.
안젤라(Angela)와 인노첸테 필리포
(Innocente Filippo)의 아들인 에르미니오(Erminio)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어머니는 세 살 때
돌아가셨고 7년 후 아버지 또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1915년 에르미니오는 파비아 대학의 의대에 들어갔고,
1921년 졸업과 함께 밀라노(Milano)에서 일을
시작하였는데 환자들을 돌보면서 그의 신앙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의
후원아래 가톨릭 액션(Catholic Action)의
본당 젊은이들의 성장을 도왔다.
1927년에 브레시아(Brescia)에 있는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에 입회하여 자신의 의학 기술과 신앙을
조화시켰으며 리카드두스를 수도명으로 받았다.
그리고 다음해에 첫 서원을 했다.
그의 성덕에 대한 명성은 브레시아에 있는 수도회의
병원에서 일하면서 날로 늘어갔다.
많은 어머니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데려와 만져주고
축복해주기를 바랬다.
성 리카르두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 군인으로
참전했을 때 얻은 병으로 인해 일종의 폐병을 앓고
급속히 건강이 악화되었다. 밀라노로 치료를 받으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030년 5월 1일 32살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고향에 돌아와
묻혔으며 그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졌다.
그는 1981년 10월 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9년 11월 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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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르쿨프(Marculf)
축일 5월 1일
마르쿨(Marcoul)이라고도 불리는 성 마르쿨프는
프랑스 바이외(Bayeux)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30세 때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처음에 그는
교구 내의 선교사로 일했지만, 항상 고독한 생활과
하느님과의 보다 친밀한 일치생활을 동경한 나머지
어떤 외딴 섬으로 은거하여 은수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 얼마 후 그는 국왕 킬드버트로부터
낭테이유의 거대한 토지를 하사받아 큰 공동체로
발전시켰다. 어떤 이들은 은수자로 또 어떤 이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도록 안배했던 것이다.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분들은
성 도마르두스와 성 카리울푸스이다.
성 마르쿨프는 피부병을 앓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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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브리옥(Brioc)
축일 5월 1일
성 브리옥은 웨일즈(Wales)의
카디건셔(Cardiganshire)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의
트레귀엘(Treguier) 수도원의 설립자로,
그 도시는 오늘날 생 브리외(Saint-Brieuc)가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세르푸스(Cerpus)와 어머니 엘드루드(Eldrude)는
아들의 사제 수품 뒤에 개종했다고 한다.
그는 브르타뉴로 이주하기 전에 영국의 남서
지방에서 활동하였으며, 콘월(Cornwall) 지방에
세인트 브리옥(Saint Breock)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중세의 성 브리옥의 전기에는 다수의
특별하고 놀라운 이야기들이 전해지지만
역사적으로 그 근거는 희박하다.
예를 들어 브리옥이 프랑스 오세르(Auxerre)의
성 게르마누스(Germanus, 7월 31일) 주교에 의해
훈련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성 게르마누스 주교는
448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야기이다.
성 브리옥은 유명한 그랑드 란(Grande-Lann)
성당을 지어 좋은 평판을 얻었으며 다수의
제자들을 모았다. 트레귀엘(Treguier)에서 부유한
귀족 코난(Conan)을 개종시켰으며, 그 귀족은
아르모리카(Armorica) 북부의 수도원의 건설을
후원하였다. 그런 후 성 브리옥은 영국 땅으로
되돌아와서 그의 친척인 돔노니아(Domnonia)의
리갈드(Rigald) 왕자의 후원을 받아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성당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1210년에 지어진 성 브리옥 성당의 대리석판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그는 주교로 호칭되었는데
그가 주교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아마도 그는 켈틱 전례의 대수도원장이었으며
수하에 주교를 두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844년까지 기록된 어떠한 전설도 그의 후계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 브리옥의 유해는 9세기 중엽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 앙제(Angers)에
있는 성 세르기우스(Sergius) 대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성 헨리쿠스 2세(Henricus II, 7월 13일)가
1166년에 유해의 이동을 증명했다. 1210년에 팔과
갈비뼈 2개와 경부의 뼈는 성 브리옥 성당으로
되돌아갔다.
교회 미술에서 성 브리옥은 불타는 기둥 밑에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는 트레귀엘과 브르타뉴 그리고 콘월 지방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또 그의 엄청난 자선 활동에 대한
전설 때문에 기부금을 조성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불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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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시지스문도(Sigismund)
축일 5월 1일
프랑스 남동부와 스위스의 남서부는 부르고뉴 왕의
휘하에 있었고, 그 당시의 통치자는 아리우스파
(Arianism)에 속한 군네발드(Gunebald)였다.
그가 죽기 전 왕위를 계승한 아들
성 시지스문두스(Sigismundus, 또는 시지스문도)는
그 후 정통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이것은 비엔(Vienne)의 주교 성 아비투스
(Avitus, 2월 5일)의 노력 때문이었다.
한때 그는 전쟁에서 패한 뒤에 은수자 생활을 하며
생모리스(Saint-Maurice) 수도원을 세웠으나
결국은 체포되어 오를레앙(Orleans)으로 끌려갔다.
성 아비투스가 중재하였으나 프랑스 국왕은 그를
처형하고 우물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의 유해는 나중에 발굴되어 보헤미아(Bohemia)의
프라하(Praha) 주교좌 성당에 안장되었고,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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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마토르(Amator)
축일 5월 1일
오세르의 최고 명문가의 외동아들인 성 아마토르는
마르타(Martha)라는 처녀와의 결혼식에서 그의
장래를 예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즉 그 결혼식을 주례한 발레리아누스 주교는
모든 예식을 마치고 혼인 축복 기도문을 외우는
대신에 부제 서품식 때의 기도문을 바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부는 결혼식을 하자마자 서로
동정을 지키자고 약속한 뒤 마르타는 수녀원으로
들어갔고, 아마토르는 얼마 뒤에 사제가 된 후
오세르의 주교로 착좌하였다. 믿을만한 근거에
의하면 성 파트리키우스(Patricius)를 사제직에
올린 사람이 곧 아마토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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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사포(Asaph)
축일 5월 1일
성 아사푸스(Asaphus, 또는 아사포)는 영국 웨일즈
지방의 첫 번째 주교였다. 그는 홀리웰(Holywell)
부근에서 은수자로 살았다고 믿어진다.
그는 또한 성 켄티게른(Kentigern, 1월 13일)의
생애에서 등장한다. 그는 젊었을 때 성 켄티게른을
모셨다. 어느 날 성 켄티게른이 불을 붙이기 위해
나무를 좀 가져오라고 하자, 성 아사푸스는 자신의
앞치마에 불타고 있는 석탄을 담아왔다.
이 일로 성 켄티게른은 그의 거룩함을 깨닫게 되었다.
573년 성 켄티게른이 그 지역을 떠날 때 성 아사푸스는
주교로 축성되었다.
성 아사푸스는 성 다니엘(Daniel, 9월 11일)과
성 티실리오(Tysilio, 11월 8일) 그리고 성인으로
존경받는 다른 여러 사람들과 관계가 있었다.
그에 대한 여러 전설에 따라 중세의 저술가들이
성 아사푸스의 덕을 찬양하며, 놀라운 기적으로
많은 이들을 개종시켰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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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데올로(Andeolus)
축일 5월 1일
스미르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 Izmir)의
차부제인 성 안데올루스(또는 안데올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성 폴리카르푸스
(Polycarpus, 2월 23일) 주교에 의해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그의 행전에
의하면 그는 세베루스의 명에 의해 프랑스
론(Rhone) 강 유역 비비에르(Viviers)에서
참수를 당해 순교하였고, 그곳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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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야고보(작은)-james-알패오의 아들
축일 : 5월 1일
야고보는 '발꿈치를 잡다'란 뜻이다.
알패오의 아들인 그는 복음서에
그리스도의 12사도로 기록되어 있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같은 인물로
가끔씩 등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승천후에 예루살렘의 어느 이층방에 모였던
11제자 중의 한분이다(사도 1:13).
야고보는 분명히 주님의 형제로 언급되고,
(마태 13:55), "주님의 동생"으로 불린다(갈라 1:19).
베드로는 자신이 기적적으로 감옥을 빠져나온
사실을 알려주라고 이른 사람은 야고보이다
(사도 12:17).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야고보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우두머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하느님께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힐 것 없이", 유다인-크리스챤에게는
4가지 관행만 실천하기를 요구하였다
(사도 15:13~21).
2세기의 교회사가인 헤제시뽀에 따르면,
야고보는 바리사이파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떠밀렸다고 한다.
그 다음에 그를 돌로 쳐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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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예레미야(Jeremiah)
축일 5월 1일
성 예레미야(Jeremias)는 구약성서 예언서 중 하나인
예레미야서의 저자이다. 만일 성서에 이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는
그 종교적 본질을 아주 달리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마음과 인격의 종교를 주창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 이사야보다 1세기 뒤에,
그러니까 기원전 650년경 예루살렘 근교의 어느
사제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성서는 예레미야의
생애와 성격을 그 어느 예언자들 보다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예레미야를 3인칭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들이 성서에 다수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 그러니까 요시야 왕
치세 제13년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젊은
예언자로 나섰다(예레 1,2). 그는 유대왕국의
멸망이 예견되었고 드디어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초래한 비극적 시대를 살고 있었다.
요시야왕의 종교개혁과 주권회복은 유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609년에 그 왕이 므기토에서 전사하게 됨으로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고대 중동의 세계는 또다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으니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612년에
함락됨으로써 바빌론제국이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은 팔레스티나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집트는 유대왕국을 사주하여
바빌론의 지배에 항거하도록 하였으니,
느브갓네살은 59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하였고
주민의 일부를 유배지로 끌고 갔다. 이집트의 조종에
끝내 놀아난 유대는 또다시 바빌론 세력에 항거하였다.
587년에 바빌론 군대는 한 번 더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전을 깡그리 파괴하였고 저항세력의 지도자들을
또다시 유형지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는 이 어두운 시대의 역사적 비극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가 이 비극을 좌시한 것은 아니었다.
예언자는 지도자와 민중에게 하느님 말씀의 대변자로
나서서 맹렬히 설교했고 위협했으며 왕국의 몰락을
예고했던 것이다. 다윗의 왕좌를 차지했던 유대의
왕들은 예언자의 이 불칼 같은 경고를 아예 무시했으며
또 군인들은 예레미야가 패배주의를 선동한다고
비난하며 그를 박해하고 고문하며 투옥시키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강기슭에 유배가 있던 사람들
(시편 137)에게서 희망을 보았지만 망명하는 것을
끝내 거부하고 고국 땅 팔레스티나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그의 보호자는 바빌론인들이 임명한 총독
게달리야였다. 하지만 유태인의 한 무리가 총독을
암살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은 바빌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레미야를 인질로 삼아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이집트에서 소리 없이
죽어간 것 같다.
이 험난한 운명의 사나이의 드라마는 단순히
사건들만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전 생애가 일종의 비극이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끝까지 그 말씀에 충실하다 보니, 예레미야는
그야말로 ‘말씀의 고독한 예언자’가 되고만
것이다. 그는 성품이 온순했고 사랑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야훼는 그에게 ‘무너뜨리고 파괴하며
전복하고 없애버리는’ 사명(1,10)을 주셨다.
그의 예언은 끝없는 불행만을 예고하였다(20,8).
예레미야는 평화를 원했건만 자기 가족과 왕들과
사제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과 모든 민중을
반대하여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예레미야는 “온 나라 안에서 싸움과
불화의 사나이로 통한 것”이다(15,10).
그가 이 같은 사명을 수행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예레미야는 말씀에 의해 완전히 가루가 될 뻔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20,9). 하느님과의
내적인 대화는 온통 고통의 외침이었다.
“무엇 때문에 나의 고통은 끝이 없나이까?”
(15,18) 욥의 저주를 예고한 예레미야의
그 외침은 고백론의 절정이다.
“내가 태어난 그날은 저주받을지어다!”
(20,14 이하).
하지만 이 고통은 예레미야의 영혼을 정화시켰으니
하느님과의 내밀한 친교를 가능케 하였다.
우리에게 이 예언자가 그토록 귀중하고 가까운
인물로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계약을 성문화시켜
예고하기에 앞서(31,31-34) 자신이 먼저
마음의 종교와 내적인 종교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인격적 종교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심화시켰다.
하느님은 마음과 콩팥을 꿰뚫어 보시는 분(11,20)
이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분이다(31,29-30).
하느님과의 우정은 인간의 거짓스러운 마음의
소산인 죄에 의해 끊어진다.
거짓말이 모든 죄의 뿌리란 것을 예레미야만큼이나
강조한 사람은 없다(4,4; 17,9; 18,12).
이 점에 관한 한 예레미야는 호세아 예언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율법은 그에 의해
내면화되었으며 또 하느님과의 모든 관계는
마음의 소산임을 그가 밝혔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인간의 개인적 인격에 큰 관심을
둔 것으로 보아 신명기(申命記)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물론 그가 신명기에 바탕을 둔 요시야왕의
개혁을 처음에는 환영하였으나 마음의 회개가 없는
제도적 개혁이 무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민중의 윤리적 종교적 삶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내적 인간의 개조 없이는 불가능함을
예레미야가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사명은 살아생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으나 죽은 뒤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마음의 종교에 기초를 둔
‘새로운 계약의 사상’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유다이즘의 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우리는 에제키엘서와 제2 이사야서(40-55)와
시편들에서도 그의 영향을 찾아 볼 수가 있다.
마카베오 시대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민족의
수호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꼽았다
(2마카 2,1-8; 15,12-16).
예레미야는 힘과 물질보다는 영성적 가치를 더
중대시하였고 또한 영혼이 하느님과 맺은 내밀한
관계를 밝혔다 하여 이 예언자는 그리스도교의
새 계약을 준비한 인물로 통한다.
말씀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과 말씀 때문에
당한 그의 고통은 이사야서 53장의 야훼의 종의
모습을 예고하였으니,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형상(形象)을 앞질러 보여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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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오렌시오(Orentius)
성녀 파티엔티아(Patientia)
축일 5월 1일
성 오렌티우스(또는 오렌시오)와
성녀 파티엔티아(Patientia)는 에스파냐
아라곤(Aragun) 북부 지방 우에스카(Huesca)
근교에서 살던 부부로 신앙 때문에 순교하였다.
고대 에스파냐의 전승은 그들을 성 라우렌티우스
(Laurentius, 8월 10일)의 부모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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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오리엔시오(Orientius)
축일 5월 1일
성 오리엔티우스(또는 오리엔시오)는 프랑스 남서부
타르브(Tarbes) 인근 라벤단 계곡에서 은수자로
남고자 했으나 오슈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목자가
되어야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마지못해 주교가 되었다.
그는 40년 이상 오슈 교구를 다스렸다.
그는 오렌티우스(Orentius)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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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테오다르도(Theodard)
축일 5월 1일
프랑스 몽토방(Montauban) 태생인
성 테오다르두스(Theodardus, 또는 테오다르도)는
툴루즈(Toulouse)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변호사
생활을 하던 중 툴루즈 대주교의 명에 따라
시제볼드(Sigebold) 대주교의 부제가 되었다.
그리고 스승의 서거 후에 그 자신이 나르본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주교좌를 복구하고
오소나 교구를 부활시켰으며 사라센인들에게
잡혀 있던 그리스도인 포로들을 많이 석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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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페레그리노 라치오시(Peregrine Laziosi)
축일 5월 1일
이탈리아 포를리(Forli)의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성 페레그리누스 라치오시
(Peregrinus Laziosi, 또는 페레그리노)는 젊어서
한때는 로마냐의 반 교황당에서 적극 활동하다가
성 필리푸스 베니치(Philippus Benizi)를
만나면서부터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는 시에나(Siena)의 ‘마리아의 종 수도회’에
입회하여 고향으로 갔으며 그곳에다 수도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설교, 고행,
성덕 그리고 고해신부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의 발에 있던 암이 기적적으로 치유된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암환자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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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프란치스코 드 폴(francesco di paola)
(혹은 바올라의 프란체스코)
축일: 5월 1일
아버지 쟈코모 알레시오와 어머니 비엔나
사이에서 바올라(코센자)에서 1416년 3월 27일에
탄생. 부모들의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에게 행한
봉헌 서약을 통해서 태어난 성인이다.
성인은 어릴적부터 뛰어난 영적 수덕적 자질을
보여주었다. 13세부터 부모 곁을 떠나
수도승 생활을 하였다.
후에 탁발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많은 기적을 행하였으며, 병약자와 궁핍한 이들을 위해
애긍의 기적을 많이 행하였다. 가난한 이들을
권력자앞에서 크게 변호하였으며, 정의와 박애를
부르짖는 예언자의 역할을 크게 하였다.
당시의 나폴리 왕의 폭정의 불의를 고발하였다가
왕의 미움을 샀다. 왕은 성인을 체포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성인은 '바올라의 프란치스코 수도승 형제 수도회'라는
이름으로 성인이 창설한 수도단체를 인가받게 되었다.
당시의 교황 시스토 4세의 부탁을 받아
프랑스의 폭군 루이지 11세왕의 불치병을 치유시켜
주기도 하였다. 프랑스에 성인이 설립한 수도회가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고, 가톨릭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자세로 바뀌었다.
성인은 1507년 4월 2일에 임종하였다.
평소에 예수의 수난 신심이 특별히 강하였던 그는
성금요일에 임종하였던 것이다. 그는 특별난
기적능력을 가지고 수많은 기적을 생전에 행하였다.
1519년 5월 1일에 시성되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43년 3월 27일에 그를,
이태리의 '바다사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