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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리쥔이 일본 가요계에서 단단하게 지위를 차지한 때에, 그녀가 부른 중국어 노래도
함께 개혁과 개방 노선을 달리는 중국사회에 유행하였다. 대륙의 텔레비전에서 덩리쥔
이 중화체육관에서 15주년기념 콘서트를 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될 때,마치 덩리쥔이
해금되는 조짐 같아 보였다.
1985년 1월 29일. 덩리쥔은 싱가포르의 집에서 혼자 32살의 생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는 30일 새벽이었는데, 한통의 전화 벨이 고요함을 깨뜨렸다.
덩리쥔인가요?
그래요, 실례지만 어디신가요?
베이징 청년보의 关键기자입니다.
무어라고요? 베이징?
기자가 말한 것은 인터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뒤에, 덩리쥔이
입을 열어 말을 하였다:
베이징에서 걸어 온 전화는 솔직히 말하자면, 매우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28일 도쿄에서 돌아 왔고 마침 생일이라서, 싱가포르에서 1주간 기다린 뒤에,
대만으로 돌아가 그곳의 부모님을 만날 예정입니다.
당신이 그렇게나 만다린어(북경어)를 잘 할 줄은 몰랐어요.
그래요? 덩리쥔이 웃으며 말을 하였다:
우리는 모두 중국인이니까. 어찌 자기 나라의 말을 못 할 리가 있겠어요?
덩샤오졔 당신은 北京青年报 일요일판에 실린 당신의 고모할머니를 인터뷰한 기사를 보셨나요?
오늘 아침에 막 보았어요. 기사가 아주 잘 쓰여져서, 사람들이 감동을 하였을 것예요.
이것은 두번째로 내가 고모할머니의 소식을 얻게 된 것이네요,첫번째는 지난 해로,
역시 중국의 신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지요. 이번 갑작스럽게 소식이 있는 것도,
찾을 수 있는 출처는 마찬가지 같아 보이네요.비록 고모할머니를 만난 적이 없지만,
두 분이 매우 건강하다는 것을 알고 나니 매우 기쁩니다. 앞으로 만일 여러분을 만날 기회
가 있다면 반드시 여러분께 아버지와 관련된 당시의 수많은 일들에 대해 도움을 바라겠습니다.
《故乡在黄河古道边——邓丽君故乡访问记:황하 옛길가의 고향--덩리쥔 고향 방문기》의
기사는 1985년 1월 20일에 《北京青年报 일요일판》에 실려있었다.
河北省 大名县 邓台村을 방문한 기자는 韩磊이었다. 그곳에는 덩리쥔의 아버지가 태어난
초가집이 남아 있었다. 덩리쥔의 두분의 고모할머니를 찾아 보고서 덩리쥔 아버지(邓枢)가
일찍 어머니를 여윈 것을 알게 되었는데, 고모할머니는 일찍이 대만으로 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덩리쥔의 아버지에 보내는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
기사 한가운데에 덩리쥔과 부모이 함께 찍은 사진과, 오른쪽 아래에는 두분의 고모할머니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关键기자는 덩리쥔과 계속 이야기를 하였는데, 기자는 대륙에서는 특히 젊은이들이 덩리쥔
의 노래를 매우 좋아한다고 말을 하였다. 마치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 같이 덩리쥔이 대답을 하였다:
"3,4년전 대륙에는 내 노래를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들었어요,미국 텔레비전의 기자가 이 소식을
보도하는 것을 보았어요.처음에는 반신반의 하였어요.그러나 이후에는 홍콩에서도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던 사람을 만났는데, 대륙에는 내 노래 팬들이 많다는 것을 이야기 하였기에,
비로소 믿게 되었지요.
오늘 베이징에서 걸려온 전화를 나로서는 일종의 격려이고 기쁨이고, 또한 흥분이었어요.
대륙의 젊은 친구들에게 감사합니다."
기자가 젊은이들에게 바야흐로 국가 건설을 위하여 필사적으로 일을 한다고 이야기할때,덩리쥔은
매우 열심히 이야기하였다.:
중국을 잘 세우는 것은 해외의 모든 중화인과 해협 양안에 사는 중국인민의 공동 소원이지요.
해외의 중국인도 모두 대륙의 건설에 관심이 있어요.나는 홍콩에서 지금 대륙은
현대화 된 문명 예절과 국가 건설을 외치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덩샤오졔, 당신은 현재 하시는 일의 근황과 이후의 계획에 대하여
이야기 해 줄 수 있나요?
덩샤오졔는 기자에게 대답하였다: 물론이지요!
" 일본과 계약을 3년하였기에 반드시 일본에 늘 가야합니다.
가수의 활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일본에 가는 것은 녹음 때문이고, 끊임없이
일본어를 공부하여야만, 신곡을 위하여 홍보를 하는데 적절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단지 텔레비전 라디오의 프로그램에 가서, 잡지의 인터뷰를
받아드리는 것은 모두 다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요. 작년 거의 대부분을 일본 활동에
썼습니다.
깊은 밤의 이야기는 쭉 이어져서, 나중에는 덩리쥔의 본래의 경계심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였다.
" 바쁜 활동이외에, 한가한 때는 어떤 일을 주로 하시나요?"
" 활동이외의 시간은 무슨 일을 하지 않고, 보통은 집에서 아침을 먹고 그 이후에는
방을 정리해요. 오후에는 대체로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어요.
저녁무렵 6시 경에는 30분간 걷기도 하고 지금은 《唐诗三百首》을 가장 좋아하고,
또 옛시 또는 소설을 좀 보기도 합니다.
가끔은 영양학과 관련된 책을 좀 보기도 합니다. 최근 다 읽은 책은 마오둔(茅盾)이
쓴《子夜:한밤중》입니다. 이책은 매우 재미가 있고 내용이 매우 심오해요.
1856년 출생한 마오둔(茅盾)은 1928년부터 1930년 까지 일찍이 일본에 살았던
사실주의 작가이에요.
뤼신(鲁迅)의 후계자라고 불리우며 건국이후 문화부장에 임명되었어요.
《子夜:한밤중》1933년 에 완성된 책인데, 마오둔(茅盾)은 문화 대혁명 때
공산당에서 제명이 되었고 이 뒤에 쭉 은거하며 숨어 지내다 1981년 사망하였어요.
이 뒤에 당적이 회복되었지요. 심야의 인터뷰의 끝날 때가 다가오자,덩리쥔은 이렇게
말을 하였다.:
나는 당신과 만난 적이 비록 없지만 이야기를 하는 음성과 태도가 낯선 사람같아 보이지
않고 마치 오랜 친구같아요 게다가 더욱 더 나를 의아하게 한 것은 내 생일에 베이징에서
장거리 전화를 걸어 온 것이예요.정말로 기쁩니다. 내가 고모할머니와 고향의
친척들에게 인사를 할 수있게 도와 주세요.또한 저 대신에 당신의 동료들과 모든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해 주세요.나는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하루빨리 행복한 날을 보내기를 바랍니다.
베이징과 싱가포르의 연결은 53분이 되었다. 덩리쥔이 또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들은 좋은 친구가 되었으니, 나중에도 늘 연락하길 바랍니다.
몇년 전까지도 덩리쥔은 또한 "정신오염"을 제거하는 운동으로 인하여 배척되어 제외
되어 있었다. 바로 1985년 2월 1일에 덩리쥔의 음성이 《中国青年报》의 첫페이지 우하방에
실렸다. 关键 기자가 소속된 《北京青年报》와 《中国青年报》는 모두 공산주의
청년단 북경시 위원회에 소속된 기관지 이었다. 조직 계통을 말하자면,
《中国青年报》는 북경시 정부 관할하의 《北京日报》의 계열이었다.
1980년 이후, 정부의 보조금이 감소되었기에, 여러 신문들은 반드시 독립하여야 하여서
예산을 따 와야 하였다. 80% 이상의 지출을 획득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시장원리를 도입한 각 신문들은 이로 인하여 경쟁이 생기게 되었다. 특히 《中国青年报》와
《北京青年报》는 늘 특종기사을 실었기에 매우 환영을 받았다.
关键 기자가 썼던 기사는 매우 커다란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덩리쥔이 대륙 기자의 인터뷰한
소식은 AP 통신과 共同통신을 통하여 두루 전세계로 전파되었고, 100개가 넘는 보도매체가
이소식을 이어서 보도하였다. 이어서 신화사와 아울러 中新社라고 부르는 보도 매체도
《接受中国记者采访: 중국 기자의 인터뷰를 받아 들이다》라는 제목으로 "덩리쥔이
싱가포르에서 베이징과 국제전화 통화를 받아 드렸다"는 단신을 보도하였다.
그리고 북경 31일자 발생 신문에 실었다.이 기사에는 《中国青年报》에는 미처 실리지
못한 다른 내용이 실려있었다.关键 기자가 쓰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또한 신문 지면관계로
삭제가 되어 있었다.기사에는 덩리쥔이 말한 것이 쓰여 있었다:
" 이처럼 젊은 팬들이 나를 지지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감사합니다.
만일 기회가 있으면 대륙에 가고 싶어요. 젊은 친구들을 위하여 콘서트를 열고 싶은 것이
저의 바람이에요."
关键기자가 콘서트가 실현 가능한지를 물어 보자, 덩리쥔은 자기의 심정을 직접적으로 기자에게
대답하였다." 일주일 뒤, 편찮은 아버지를 뵈러 돌아 가려고, 대만으로 돌아 갈거예요.
이뒤에는 신곡 녹음을 하러 일본으로 갑니다. 지금은 매우 바쁘다고 할 수 있어요.
만일 여러 팬들 앞에서 좋지 않게 노래를 부른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여러분께 죄송
한 것이지요. 그래서 준비하는데 좀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그래서 나는 몇년 동안 내내
이 일만 생각할 것입니다."
그녀가 말한 이 신곡음반은 일찍이 바로 런던의 ABBYROAD 녹음실에서 녹음한 《爱人》과,
게다가 飞鸟涼가 작사 작곡한 노래《如今也!》라는 번안 노래로 만들어진 《经典名盘系列2》
이었다.中新社의 보도도 역시 홍콩,마카오로 보도가 되었기에, 더욱 더 정치적인 대파란이
일어났다. 홍콩의《明报》등 여러 신문사 모두가 덩리쥔이 북경의 기자와 인터뷰를
받아 들였다고 실었다.
이것도 대만의 정치가와 매체들의 곤혹을 불러 일으켰다. 영향력이 있던 덩리쥔이
대륙신문의 인터뷰를 받아 들였고, 또한 장차 대륙으로 가서 콘서트를 열것이라고
밝혔기에, 중국관계와의 긴장과, 계엄령하에 있던 대만에 대하여 말하자면,
이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덩리쥔은 보도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난뒤,
곧 대만에 살고 있는 모든 집안 사람들의 안전이 걱정되기 시작하였다.
《中国青年报》에 보도가 실린 다음날 2월 2일에 대만의《中国时报》도 "덩리쥔
이 북경과 통화를 하였나?,"불가능!밝힌 내용은 "오보", 이것은 중공의 통일전선전술 책략"
"이라고 보도하였다.
中新社의 기사속에는 덩리쥔이 "싱가포르 호텔방에 있는 그녀가 전화를 받고서 매우
놀랐다" 라고 실려 있었다.그래서 《中国时报》는 곧바로 덩리쥔의 개인비서를 맡았던
동생 长禧가 나와서 중국의 보도를 반박하는 것을 실었다.누나는 싱가포르의 자기 방에
있었기에, 애초 호텔에서 인터뷰를 한 일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때마침 사람들과 방콕에 있던 덩리쥔을 확인 한 뒤에, 그녀가 말한 것은 단지 도쿄에서
프로그램을 홍보하러 갈때 때마침 대륙기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러 왔지만, 덩리쥔은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댔고,두세마디 말을 나눌 생각이었으나 기자는 " 대만이 지금은
아주 진보하였기에, 대륙은 대만과 함께 공부하여야 한다" 고 말을 하였다.
단지 이처럼 접촉하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北京青年报》의 关键기자를 전면적으로
부인하였다."도쿄에서의 일"은 그가 스스로 만들어 낸 보도라느 것이었다.
대만과 홍콩의 보도를 본뒤에, 덩리쥔은 자기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였다는 것을
크게 깨달았다.뿐만 아니라 심야의 인터뷰에서 关键기자는 다시 전화를 걸어 와서,
"직접 나서서 인터뷰가 정말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기"를 바랬다.
덩리쥔이 대답하였다." 나는 이미 이 문제로 다시는 어떤 관련이 있기를 바라지 않아요"
만일 더많이 말을 한다면 더큰 잘못이 생길것 같으며 이미 이로 인하여 좋지 않은
영향이 생겼어요."
덩리쥔은 이미 친구들에게 설명을 하였다. 아마도 1985년 1월 말 도쿄에서 싱가포르로
돌아 오려고 할떄로, 일광욕과 매운 음식 먹기를 좋아하였기에 태국을 경유하려고
2,3일 간 기다리고 있었다.어느날 호텔의 홀에서 한무리의 대륙 단체를 만났는데,
아마도 그 가운데의 어떤 사람이 방번호를 묻고는 《北京青年报》의 기자에게
연락을 하였던 것 같다.이런 전화를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예의상 몇 마디를 나누었지만, 이렇게 커다란 소동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이 견해는 사실상 진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덩리쥔은 어쩔 수 없이 전화가 싱가포르의 집에
걸려 온 것을 부인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녀는 베이징의 신문기자와 서로 특별한 연락통로
를 가지고 있지 않나하는 의혹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만의 관련 기관에서는 아주 여러번 대만으로 돌아 와서 정황을 설명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덩리쥔은 모두 응답하지 않았다. 1985년 1월 29일 부터 싱가포르에서 지내는 동안
내내 사정이 조용해질 때 까지 침묵을 유지하였다. 대체로 1개월 뒤 2월 21일에야 마침내
일본으로 출발하였다.바로 《爱人》음반이 출시되는 그날이었다.이날 이후로는 덩리쥔은
다시는 매체와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럼 关键기자는 도대체 덩리쥔의 싱가포를 집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을까?
반드시 시간을 일년전으로 되돌려야 하는데, 1984년 음력설에 베이징은 《春节晚会》라는
종합 프로그램을 방송하였다. 이것은 처음으로 홍콩의 예술인 연출한 것으로
매우 커다란 반응을 일으켰다. 그때, 홍콩의 아마츄어 남자가수 张明敏이 부른 《我的中国心:
나의 중국 마음》이 매우 인기를 끌었다. "친중국파" 张明敏이 그해의 설날과 8월에 북경에서
열리는 개인 콘서트에 참여하였다.
그는 콘서트에서 큰소리로 ;" 나라는 반드시 통일 되어야 한다"
" 대륙과 대만의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한 마음이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中国青年报》의 이런 발언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대만 통일"을 위하여 , 이어서 덩리쥔을 초청하여서 귀국 콘서트를 하게 하자는 의견이
나타났다.
《中国青年报》의 보도부는 토론을 진행하여서, 만일 덩리쥔이 대륙에 와서 콘서트를
개최 한다면,반드시 《中国青年报》의 명의로 초청하여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이 보고는 중국 공산 주의 청년단 중앙위원회로 보내졌다. 중앙위원회 주석을 맡고 있는
邓颖超에게로 전해졌다.邓颖超는 周恩来의 부인으로 “全国政协”을 맡고 있었다.
주된 것은 해외 화교를 결속시키는 업무를 하는 것이고 , 이로서 통일 목적의 전선조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邓颖超지시는 《中国青年报》가 해외 청년의 단결을 위하여
노력하기를 바랬다.
张明敏는 1984년 12월 하순에 山西省 省都太原에서 콘서트를 열었는데, 关键기자는
张明敏와 인터뷰를 하기 위하여 서둘러 太原으로 갔었다. 가던 도중에 홍콩의 대표 신문사
(大陆系列:대륙 시리즈)기자를 만났다.당시에 그들의 화제가 덩리쥔에 관한 것일때,
关键기자는 홍콩 기자에게 " 인터뷰를 할 수 있을 까요?"하고 물었다. 홍콩기자는 대답하길
" 1월 29일이 덩리쥔의 생일이므로,만일 그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关键기자 그래서 홍콩기자에게 덩리쥔과 연락할 방법에 대해 알려 줄 수 있는지를
부탁하였는데,홍콩기자도 매우 흔쾌하게 " 내가 한번 알아 보겠다"고
대답하였다.홍콩으로 돌아 온뒤에, 기자는 매우 빠르게 기본 자료를 대륙의 关键기자
에게 보냈다. 1985년 关键기자는 중국 공산당 북경시 위원회의 조직부,선전부,북경시
국가 안전회의 허가를 얻은 뒤,북경시 朝阳区 颈松의 집에 전화를 놓았다. 1월 25일
홍콩 기자의 연락을 받고는, "이미 덩리쥔의 주소와 전화 번호를 찾는데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하였다. 26일 关键기자는 홍콩으로 전화를 걸어서 "찾았나요?" 라고 물었지만
얻은 대답은" 아직 찾지 못했어요" 이었다. 덩리쥔의 생일이 점점 다가 오자,
조급해진 关键기자는 또 다시 27일에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 찾았나요?" 라고 물었다.
홍콩의 기자는 " 좀더 기다리세요"라고 대답하였다.
1월 28일 기자는 关键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 29일밤에 내 전화를 기다리세요,
나는 반드시 덩리쥔의 전화를 당신에게 보내 줄 수 있어요:라고 그에게 알려 주었다.
덩리쥔의 생일인 1월 29일이 되자 关键기자는 일찌감치 퇴근하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매우 긴장한 상태로 전화 곁에서 기다렸다.마음속으로 불안하여 내내 "전화가 오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 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덩리쥔에게 전화를 걸어서 거절당하면
어떻게 하지?" 그럼 단지 팬으로서 그녀에게 생일을 축하하려고 전화를 건 것으로 하자!"
이미 묻고 싶은 문제는 다 썼는데, 그러나 전화는 오지 않았다.
평상시는 언제나 업무로 전화가 아주 많았지만, 오늘 밤은 오히려 이상하게 조용하였다.
11시가 지나자 아내와 딸이 잠에 들었다. 정적을 깨뜨리는 전화벨 소리가 마침내 울렸다.
关键기자는 날듯이 전화를 받았다." “××씨 인가요?" 关键기자가 물었다.
상대방이 대답하였다:" 덩리쥔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어요, 어서 펜을 가지고 받아 적으세요"
"싱가포르의 733——××××××. 전화는 이미 당신에게 전해졌으니 이어서는 오로지
당신 자신에게 달려 있어요,关 선생님, 덩샤오졔가 만일 당신에게 어떻게 전화 번호를
알았는지를 물어 보면, 제발 내 이름은 말하지 마세요 네!"
홍콩의 기자는 이상의 이야기를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밤 11시 4분 关键기자는
입속으로 "정말로 너무나 좋다"라고 되뇌었다. 그러나 곧 고민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 성공할 수 있을까 ?"
이같은 이외에도, 또한 지도부와 어떠한 상의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만일 정말로
덩리쥔과의 인터뷰를 할 수 있다면 원고 내용도 편집장에게 가져가야할 것이다.
关键기자는 끊임없이 거듭하여서 수화기를 잡았다 놓았다를 하였다.
아내와 딸의 잠든 얼굴을 보면서 내린, 그의 결론은 "위험하기는 하지만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关键 기자는 국제 전화를 요청하였는데, 30일 새벽 0시 9분으로, 교환원이 물었다:
" 关선생님, 张明敏씨를 연결하기 바랍니까 그렇지요?" 아주 여러 차례 张明敏에게 전화를
걸었기에, 그래서 교환원은 이번도 역시 홍콩으로 걸려고 한다고 생각하였다.
关键 기자가 대답하였다:" 아니요. 싱가포르의 덩리쥔을 연결 해주세요."
关键 기자는 고심을 한끝에 이름을 다 대지 않았으며, 싱가포르와 전화를 한 것은 0시 20분이었다.
전화가 북경에서 걸려온 것을 안 덩리쥔은 30초 동안 아무말도 않고 침묵하였다.
비록 조금은 망설이면서 천천히 입을 열어 이야기를 하였다.
" 무엇때문에 북경에서 전화를 걸 었으며,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关键 기자가 자기의 주소를 말하였다. 덩리쥔은 이어서 다시 물었다.
: " 어떻게 내가 이곳에 있는 지와 이 전화번호를 아십니까?" 关键 기자가 대답하였다.
급하게 일년 동안 찾아서, 마침내 당신과 연락되는 전화를 알게 되었습니다."
덩리쥔은 조금은 의심스러웠지만 대화를 이어 갔다. 53분간의 이야기가 끝나도
关键기자는 흥분을 그치지 못하였다.마침 자고 있던 부인을 깨워서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 당신은 내가 지금 막 누구와 이야기를 했는 지 알어요?"
《北京青年报》의 기자 关键이 쓴 원고가 《北京青年报》의 첫 페이지에 실린 것은
사실은 덩리쥔을 초청하기 위하여 《中国青年报》가 쓴 보고서 때문이었다.
이미 중국 공산당 주의 청년단의 최고 간부 王兆国과 "전국정협(全国政协)" 주석인
邓颖超의 허가를 받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첫댓글 我的家在山的那一边의 第四章 중문 번역을 제공한 분의 블로그에서 뒤져봤는데도 찾을 수가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