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TV 시대극 '야인시대'에서 일본 야쿠자의 조선 책임자로 김두한과 대결하는 하야시는 조선 태생이었고, 해방 이후 한국 건설업계에서 거물급 인사로 활약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협객 김두한의 유일한 생존 친구로 한때 하야시 수하에 있었던 김동회옹(85)은 "하야시는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4~7세쯤 부모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성장했지만 해방후 선우 영빈이란 이름으로 한국에 남아 건설업체 대표이자 대한건설협회 부회장을 지냈다"고 밝혔다. 대한건설협회의 '한국 건설 반세기, 협회 50년사'를 열람한 결과 선우 영빈씨는 1953년부터 1963년까지 한국건설업회(대한 건설협회 전신) 이사를 지냈고, 60년 7월부터 1년간 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사실이 확인됐다.
건설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선우씨는 해방 전 충무로 대원호텔옆 '혼마치칸'을 활동거점으로 삼았으나 해방 이후엔 명동성당 앞에 17층짜리 빌딩을 세우고 (주)건설산업을 창업했다. 현재 보림빌딩으로 이름이 바뀐 이 건물의 터는 원래 메이지좌 극장의 사장집이 있던 자리로 해방이후 선우씨가 땅을 물려 받았다.
선우씨는 4ㆍ19혁명 여파로 사회전반에 혁신과 정화의 바람이 불던 1960년 건설업회 개혁에 앞장섰고 같은 해 7월 새 협회 출범 때에는 회장에 출마하기도 했다.
선우씨는 또 해방후 일본인 부인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자유당 시절 의원 겸 장관을 지냈던 임모씨의 누이동생과 재혼, 1남 1녀를 뒀으며 가족과 더불어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야시는 두뇌가 명석하고 무사도 정신이 뛰어나 일본 야쿠자의 총두목 두산만에게 발탁돼 그의 수양아들이 되면서 조선 상권 장악에 나섰고, 조선 정무총감(지금의 국무총리)도 부르면 달려올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김동회옹은 의형이자 '오야붕'이었던 하야시에 대해 "대범하고 절도가 넘쳐 차갑게 느껴졌지만 내면에는 조선인에 대한 애틋한 정을 품고 있었다"며 "권력을 잡기 위해 일본인 행세를 했을 뿐 최측근엔 늘 조선인을 기용했고 사석에선 조선 태생임을 감추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아울러 의리를 목숨처럼 여기는 진정한 협객이라고 평했다. 하야시는 일본인 상점 '등천무역상사' 배달원이던 김동회가 유도로 이름을 떨치자 1943년 전격 스카우트했고 이듬해 김동회가 중국 심양에서 죽을 고비를 맞았을 때 직접 달려가 목숨을 구해줬다.
하야시의 두터운 신뢰를 받은 김동회는 혼마치칸의 살림을 맡았다. 당시 재정위기에 몰렸던 김두한은 김동회를 통해 하야시의 도움을 받았다. 김두한의 육성 증언 테이프엔 '하야시와 의형제로 지냈고 매달 1000원씩 받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김동회옹은 "하야시가 당시 '노다지'로 불리던 중앙우체국 자전거보관소 운영권을 김두한에게 넘겨줬다"고 말했다. 하야시는 동갑내기였던 김두한 김동회보다 7~8살 위였으며 10년전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