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대안을 언급하며 촉구했다. 또다시 바보로 손가락질 당할 것을 감안하고서 이 글을 쓴다. 노파심에서 미리 말하건데 이런 대안 시도를 통해 사익을 추구한다거나, 어떤 단체의 장이 된다거나, 헤게모니를 쥐려는 얄팍한 뜻이 없음을 미리 밝힌다. 웃지 못할 사실은 이런 시도를 ‘돈’을 쳉기려고 한다는 자칭 리포머인 리모델러의 우려를 접했다. 돈? 개혁인이라고 자칭하는 그 한 없는 가벼움에 절래 절래....
여하간 지금 나의 이 어리석은 첫 걸음이 본격적인 교회개혁에 대한 대안의 격론장으로 들어가는 문고리를 여는 행위가 되었으면 좋겠다.
1.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구분
[율법은 요한의 때 까지요 그 후로는 하나님나라가 열려 사람들이 그리로 짓쳐 들어간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이 둘은 적극적 측면에서 사람이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는 성질을 묘사한다.
교회로 선언된 베드로를 보면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어 가는 과정은 베드로가 깨달음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있기 전에 불러냄(에클레시아)를 먼저 받는다. 이는 세례 요한을 따르던 안드레가 예수 그리스도를 시몬(베드로)에게 ‘메시아’라고 소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도 메시아를 소망하던 일면이 있음을 본다(무식쟁이 뱃사람이지만).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하겠다’는 특별한 부르심을 입는다. 물론 베드로는 몇 번씩 예수님의 곁을 지키지 못하는 일면을 보이기도 한다.
여하간 에클레시아를 통해 베드로는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하나님나라로 초대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에클레시아(교회)는 (목적이 아닌) 과정이다. 그 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깨달음 곧 거듭남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하여도 그에게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았으므로 불충분한 것이었다. 임마누엘이 완성되는 것은 ‘성령의 내주’가 전제 되어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와 제자들에게 ‘약속한 것이 올 때 까지 기다리라’ 하셨다. 베르로의 하나님나라 자격에 대한 선언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나라를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막 8:11)에서 확실시 된다.
베드로의 일련의 과정을 보면 에클레시아(교회;부르심)-깨달음-성령이 그에게 임함-예수증인이 되는 순서를 밟는다. 어떤 사람이든지 부르심 없이는 성령께로 인도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양태는 각 사람에게서 천변만화로 나타나며 어느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고 거듭남으로써 성령께서 임마누엘 하게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이유는 ‘예수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예수를 증거하는 일과 종교의 터를 확장하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어갈 것이다”. 땅 끝까지 이르러 예배당 세우라는 것이 아니다. 이는 명령이 아닌 예언적 선언으로 성령이 임하면 자연히 예수를 증거하게되는 지구적 확장성을 이야기 한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종교심을 심화시키게 하려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증인”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예수 증인’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나라 방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
※ 참고 하나님나라와 교회의 다른점
구분 | 교회 | 하나님나라(천국) |
설립(행동)주체 | 예수님(사람편에서는 수동적) | 믿는자(거듭난 후 능동적이 됨) |
자격요건 |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 | 부르심 후 성령이 임하시면 누구나 |
내면 또는 외면 | 내면에서 성령이 보혜사로 | 외면 예수증거의 삶 카테고리 |
유무형 여부 | 무형, 지역을 퉁쳐서 지칭(집합대명사) | 유형. 믿는자의 몸(거룩한 나라요) |
시기 | 세우리니-기다려라-성령이 옴 | 율법시대 종료 후 바로시작 |
상호관계 | 예수증거의 원동력 |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묶는 끈 |
숫자 | 단수 : 오직 하나 뿐(Only ONE) | 복수 : 다수의 나라들 |
가시성 | 내면에 차지한 비 가시적 영역 | 삶으로 표현되는 가시적 영역 |
하나님나라를 영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된 부분은 전통적으로 개신교에서 중시조로 취급받는 칼빈에게서 그 연원을 둘 수 있다. 칼빈은 종교적 현실에서 나타나는 부조리들을 설명하기 위한 부분에서 “하나님 나라는 영적 개체로 이해 되어야 한다. 부패하는 약한 요소들은 하나님 나라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이므로 결코 부패하지 않는다”라고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구분 지으려 했다. 또한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찾는 것은 현세 가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 실체인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어 성경이 말하는 것을 오해한 부분이 크다. 이런 시각 때문에 실체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영적 세계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칼빈은 그의 책 내내 하나님나라는 영적 세계라고 표현한다.
하나님 나라야 말로 예수 증거의 형태로 표현되는 삶의 지배(통치) 방식이다. 이것은 전혀 영적인 세계가 아니며 삶의 부분이다. 그러나 지금 신학교에서는 여전히 그들의 교과서에서 칼빈의 입장을 앵무새처럼 외울 뿐이다. ‘삶’이라는 측면에서 성경은 우리를 ‘백성(국민)’이라고 지칭한다.
하나님나라의 훌륭한 교과서는 곧 예수님의 삶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었으니까. 예수님이야말로 생활속에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내놓아 자신의 백성들을 사랑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예배요 우리가 닮아야 할 과제다.
2.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 수 있는가?
가능하다. 성경은 그것을 사도행전을 통해 보여준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므로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초월적 현상들이 나타났다.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기적이 일어나고, 질병을 치료하며 감옥문이 저절로 열리기도 하고 독사를 맨손을 집어 물렸으나 죽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영위하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있으면 가능하다. 뒤집어 말하면 성령의 감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나라 삶을 살지 못한다는 말과 다름 없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사망의 율법이 지배되는 부조리함을 재편성시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하신 것이 성령의 법으로 지칭되는 새로운 산상수훈의 법 체계에 규정된 하나님나라다. 법이란 자신이 우주 및 이웃과의 관계 방식을 결정짓는 규정을 말한다. 율법이 과거 유대교 체제에서의 삶의 관계 방식을 규정했다면 하나님나라에서는 그보다 더 포괄적이고 적극적인 산상수훈의 법을 제시하면서 율법의 불완전한 부분(세상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정죄만 하는)을 보완하여 완전케 하신 것이다. 잘 아시겠지만 산상수훈법은 율법보다 훨씬 까다롭고 차원이 높은 상승법이다. 이런 면에서 율법과 산상수훈의 법은 상대적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가르침 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러한 방법으로 가장 먼저 잃어버린 하나님나라를 되찾으라‘고 강요하신다. 자신의 욕심에 따라 선악과를 따먹어 타락하게 된 그것을 이웃 사랑을 통해 회복하라는 것이다. 이웃사랑이 산상수훈의 요결이다.
산상수훈적 이웃 사랑의 삶이 구체화되고 카테고리화 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통치 방식이다. 그것이 하나님나라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란 전혀 영적인 영역이 아니다.
3. 대안적 방향성
사람의 내면은 규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무형적이며 무한한 변화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하루에서 수천번씩 내면의 상태는 변한다. 우리를 규제할 수 있는 것은 산상수훈적 목록과 같은 리스트들을 따르는 실제적 삶에서다. 물론 둘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성과 같다. 마음으로 비롯되는 것의 한계적 일면은 “여자를 보고 음심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한 것과 같다”는 예수님의 지적에서 엿보인다(반어적 표현). 그정도 고난도로 자신의 내면을 규제(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거의 없다.
물론 산상수훈적 삶은 결코 쉽지 못하다. 예수님도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를 돕는, 보호하는 보혜사 성령을 오게 하셔서 산상수훈적 삶이 가능케 하도록 하셨다. 그 흔적이 사도행전에 사도들과 성도들이 한뭉텅이 되어 삶을 나누는 장면들에 진솔하게 배어있다. 예수님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매우 간단했다. 우리를 교회로 선언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열쇠를 쥐어준 사람은 베드로였고 그를 중심으로 교회가 완성되기 까지 기다리게 하신다. “내 교회를 (어느 시점, I will build my church. 로 미래의 시점으로 미룸) 세울것인데 베드로는 이 무리들을 통솔해 가라(마태복음). 그리고 약속한 것이 올 때 까지 기다려라(사도행전)”고 하셨다. 그것을 얼마나 사모하며 기다렸는지에 대해서는 마가의 다락방 사건을 통해 이해 할 수 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세우시겠다고 하는 교회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완전히 우리 내면에 세워진 단회적인 하나뿐인 예수님의 주권 가운데 세우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부분 때문에 장황한 설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아야 할지 전통적으로 유전되어 온 종교적 ‘개신교인’으로 살아야 할지에 대하여 방법 제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안적 삶이란 하나님나라의 삶의 방법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매우 시급하고 당연하지만(“너희는 먼저 하나님나라를 찾아라”) 이것을 이야기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배척한다. 하나님나라야 말로 궁극적 차세대 교회의 대안이다.
종교로서의 그릇 안에 하나님을 담고 예수님을 담는 것은 더 이상 미래 세계에서 설득력이 발휘되지 못한다. 수많은 잡신들 중 하나인 여호와 하나님이신가? 개신교는 이제 서서히 끝물로 가고 있다. 설마 종교적 부흥을 꿈꾸며 허황된 천년왕국을 노래하는가? 동안 우리는 종교적 관점에서만 하나님을 대해왔기 때문에 하나님나라를 제시하면 몹시 생경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나라적 삶에 대한 요구는 성경 4복음서를 가득 채우고 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경고하는 달란트의 비유를 보자. 달란트 비유는 직무유기형 신앙인을 지칭한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임무가 주어졌지만 산상수훈의 법이 까다로워(또는 이기적이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우리들의 상태를 꾸짖는 장면이다.
이어서 그 ‘임무’란 다름아닌 이웃 사랑임을 뒤이어 나오는 양과 염소 비유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마태복음 25장 후반은 하나님나라 백성들이(25장 시작에 하나님나라 비유라고 못 박고 있음) 하여야 할 임무에 대해 매우 소상하고도 알기 쉽게 표현해 놓았다.
거기에는 두 개의 그룹이 분명하게 대비된다.
주여주여 하던 자들과
이웃 사랑을 묵묵히 하던 자들로 대비된다. 이웃 사랑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는 별 문제가 아니다. 능력(달란트;임무)이 약하면 조금 할 수 있을 뿐이지 그것으로 문제 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이웃 사랑을 통해서 예수 증거를 몸으로 묵묵히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실체이며 예수님의 요구이며, 미래 교회의 대안이다.
반면 이웃사랑을 외면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종교 행위에 몰두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을 귀신을 쫒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마태복음 7:21) 라고 변명을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외면하신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종교행위 말고 무엇으로 표현 할 수 있을까?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였느냐”(누가복음 6장 46절) 하는 장면과, 마태복음의 25장, 마태복음7장은 모두 예수님이 외면하는 장면이 있는데 “종교 행위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천국) 백성이 되지 못한다”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어두운 데로 내어 쫒긴다라고 하는데 이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지만 빛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말과 일맥 상통한다. 종교행위에 몰두 할수록 세상에서 빛이 되기가 힘들다. 고차원의 종교인을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수님 편에서는 ‘무익한 종’ 쓸모없는 존재일 뿐이다. 이렇게 성경은 두렵고 무섭다. 눈과 귀가 열리지 못하면 도무지 같은 말이라도 이단 삼단이 씨부리는 것처럼 들릴 뿐이다.
4. 대안의 실행에 대한 거대 담론
요한계시록의 후반부는 치열한 진리싸움이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책망받는 교회들, 칭찬받는 교회들, 부끄러운 모습의 교회들, 안일무사하며 스스로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교회들.......이 묘사된다. 오늘의 나 자신을 비추어보면 그 가운데 스스로 경계할만한 지적들이 나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 이상 이러한 상태들이 허용되지 않는 시점이 오고 드디어 전쟁은 시작된다. 음녀와 거짓선지자와 짐승이 그 만행을 처벌받는 장면이 나온다. 거짓선지자는 마지막 심판이 있기 천 년 전에 이미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진다. 지금 거짓선지자가 이 땅에 많다는 것은 하나님나라가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시록적 하나님나라(세상나라가 바뀌어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왕노릇 한다)라고 해서 어떤 거창한 정부기구가 세상나라처럼 조직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혹자는 저의 주장을 보고 그런 우려를 한다. 666적 음모다.....뭐 어떤 그런 말도 안되는 음해를 한다.
내가 꿈꾸는 하나님나라란 지극히 소박한 것으로서 산상수훈적 요결에 따라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연합체다. 그것 이상이 없다. 그것을 소망한다고 해서 ‘궤변이다. 이단적 요소가 있다. 666적 음모다. 비성경적 세계관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려 한다’며 별의별 상상력과 방해를 하는 사람들과 충돌해 왔다. 산상수훈적 삶을 통해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 비성경적인가?
바로 이런 전통적 유전과의 깨달음을 통한 충돌은 계시록적 현상에서 본다면 진리전쟁이다. 진리전쟁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교회 내부의 전쟁이다. 계시록은 전쟁의 양상으로써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연합한 편이 있고 자신의 부요한 것을 모두 팔아서 안약(눈을 뜸)을 사고 흰 옷을 사 입은 무리들과 싸운다. 총과 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검(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운다.
이 진리 전쟁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진리 편에 선 사람들이 계속 이기고 이기고 이긴다. 요즘 개혁싸이트들의 현상도 그것과 일맥 상통한다. 전통과 유전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이 던지는 검이 승리를 이끄는 것이다. 불과 20년 전 만해도 십일조나 의전예배나 예배당이나 헌금이나 주일성수 같은 것들을 언급하면 즉시 이단으로 찍혀 외면당하고 매장당하고 목이 잘렸다. 그러나 결국 진리는 이긴다. 성경이 보증하니까.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교회는 더도 덜도 아닌 스스로 부요(그러나 실제로는 벌거벗은)한 현재 교회를 묘사하고 있다. 다른 교회는 옷을 거져 주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만 ‘사 입으라’고 하는데 이는 자신의 부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모두 내다팔아 가난하게 되어 그 댓가로 안약과 옷을 사 입으라고 충고하시는 것이다. 안약은 못 보던 것을 보라는 것이며, 옷을 입으라는 것은 있던 낡은 것을 벗고 새로운 신분을 입으라는 것이다. 종교인으로서 삶을 살아갈 것이냐 하나님나라의 군대로써 분투할 것이냐에 대한 선택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다.
굳이 계시록을 언급한 것은 일곱교회(어떤 사람은 시대적 흐름으로 풀이하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우리 다양한 내면의 교회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됨)를 끝으로 계시록에서는 더 이상 교회의 역할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다. 그리고 순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장면이 그 뒤에 나와서다. 이것은 예수님의 시도를 우리가 현 시대에 다시 복구하고 회복하는 임무를 촉구하는 메시지라고 본다. 그러므로 최종적 대안이란 결국 하나님나라다. 그러기에 다음 시대의 교회의 흐름을 하나님나라에서 구현해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것을 ‘거대 담론’이라 말한 것은 ‘민주적 방법’에 의한 다양한 토론과 합의에 의해 결론을 도출하되 화석화된 유전적 교회보다는 계시록적 기대를 앞당기는 ‘하나님나라’에서 시작점을 맞추어 보자는 제안이다. 하나님나라를 터부시 하거나 무시하거나 이단시 한다면 도대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하나님나라 구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이 제안이 매우 온당함에도 불구하고 숱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 바보 취급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전혀 불쾌하지 않다. 하나님나라란 나의 신앙 방법이며 예수증인을 실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족
타 싸이트에 이러한 취지로써 ‘협동조합’이라는 그릇을 통해 시도하자는 제안을 했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종교 구조 속에서만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반대는 상상 이상이었다. 또는 이러한 시도가 성경적으로 해답을 낼 수 있기만 하다면 동참하겠다는 적극적인 기대 심리 또한 적지 않았다. 거사(?) 날자를 정하고서 모임을 시도했지만 그것에 동의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카톡과 문자로 모이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메시지로 방해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래도 예수님이 침벹음 당하고 돌팔매질 당하고 십자가 진 것에 비하면 그리 억울할 일도 없지만 대안적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대화를 하려한다는 그것 자체에 대해 폭력적 경향을 보이고 불쾌한 반응을 역력히 드러낸다는 사실은 한편 이것이 진리 싸움의 일면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개혁 싸이트를 드나드는 많은 이들이 이제 진단만 하는 것에 지쳐있다. 개신교 심층 내부는 온갖 곰팡이와 바이러스들이 침투하였다. 그 현상을 진단하고 치료법에 대한 대안 제시로서 나는 하나님나라를 소망한다. 그러나 일면에서는 그 ‘소망’ 자체를 이단시하고 ‘대안의 시도’ 자체를 경멸하는 분위기에서 또다시 이면적이고 소극적인 개혁인들의 뒷모습들이 읽혀진다. 주저앉기 보다는 피를 흘리더라도 싸우고 나아가고 달리고 이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예수님처럼 왕노릇 하는 세상을 나는 소망한다.
by 하나님나라 빌더 -iDeaRush-
ps. 될수록 격렬한 토론을 희망한다. 그렇지만 어떤 편견과 감정 싸움이 아니라 성경적 토대를 놓고 그 안에서 내일을 조명하려는 시도 속에서의 토론이다. 또한 위의 글에서 비성경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가열차게 꾸짖어 주기를 원한다. 나는 성경의 박사가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 올바로 알려고 하는 사람 중 하나다. 내가 잘못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잡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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