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18 - 서영남
8월 16일(일)
광주 무등산 자락에서 푹 쉬는 날입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무등산의 품에 안겨 멋진 드라이브 코스로 담양 소쇄원으로 갔습니다.
소쇄원은 1400여 평의 아담한 정원입니다. 공간의 풍요로움에 행복해집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꿈을 꿉니다. 민들레 식구들과 함께 어울려 소쇄원 같은 자연과 멋지게 어우러진 좋은 공간에서 지내면 참 좋겠습니다.
약초와 어우러진 남도의 멋진 음식에 행복했습니다.
저녁에는 생합 수제비를 먹었습니다.
8월 17일(월)
순천교도소로 향했습니다.
요한 형제가 겨우 십 분을 만나기 위해 이토록 먼 곳에 오시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 마음만이라도 고맙다고 했습니다.
십 분보다 긴 삼사십 분이라도 요한 형제를 만나려면 특별 접견을 신청해야 합니다. 미리 특별 접견을 신청했습니다. 겨우 허락을 얻었습니다. 순천교도소에 도착해서 차를 민원 주차장에 주차해 놓고 외정문을 통해 들어갔습니다. 외정문에서 경비교도대원에게 왜 왔는지 이야기하고 신분증을 제시해야 합니다. 총무과에 볼 일이 있다고 하니까 담당 교도관이 누구를 만나러 왔는지, 누구를 접견할 것인지 물어봅니다. 그런 다음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총무과로 가라고 안내를 해 줍니다.
총무과에 가서 총무 계장님을 만났습니다. 신분증을 계장님께 드렸습니다. 직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합니다.
직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면서 커피를 자판기에서 뺀 커피를 마시면서 기다렸습니다.
교도관과 함께 접견실로 갔습니다. 휴대전화와 가방은 보관함에 보관하고 특별 접견실로 갔습니다. 우리에 앞서서 특별 접견을 하는 분들이 있어서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순천교도소의 특별 접견실은 일반 면회실과 조금 달랐습니다. 교도관이 옆에서 대화하는 것을 기록하면서 함께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창살로 막혀있고 50센티쯤 유리로 막혀있었습니다. 창살 사이로 악수는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반 면회실과는 달리 마이크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기에 참 좋았습니다.
사십 분 정도 견우와 직녀처럼 일 년 만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요한 형제는 최고수에서 무기로 감형된 다음에는 양복을 배웠습니다. 십여 년을 했으니 이젠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요한 형제의 여친?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레나 자매입니다. 세레나 자매는 일급 장애인입니다. 지금 전남대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합니다. 몸이 너무 아파서 수술을 하고 입원해 있다면서 걱정을 합니다. 요한 형제가 최고수일 때부터 세레나 자매는 요한 형제의 영혼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불편한 몸으로 면회 오고 편지를 하고 그랬으니... 얼마나 마음의 위안을 받았을지 생각해봅니다.
광주교도소 면회를 한 다음에 세레나 자매 병문안을 하기로 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요한 형제의 마음을 전해주기로 했습니다.
교도관에게 십분 만 더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해서 겨우 사십여 분만에 내년을 기약하면서 이별했습니다.
민원실에서 요한 형제에게 영치금과 간식들 그리고 준비해 간 수건과 칫솔 그리고 티셔츠와 사각팬티와 양말을 넣을 수 있는 만큼 넣어드리고 서둘러 광주교도소로 출발했습니다.
한여름입니다. 온도가 33도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에어컨을 최대한 틀어보아도 덥습니다. 조금 일찍 광주교도소에 도착해서 차를 주차시켜 놓고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된장찌개를 시켰는데 반찬도 참 푸짐합니다.
교도소마다 행정절차가 조금씩 다릅니다. 광주교도소는 외정문을 들어가기 전에 외부 민원실이 있어서 영치금은 이곳에서 넣어야 합니다. 일반 면회신청도 여기에서 하고 화상접견도 합니다.
외정문에 신분증을 제시하고 면회접수증이 없으니 왜 방문했는지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담당 교도관이 전화를 해 본 다음에야 들어가도 좋다고 합니다.
내부 민원실에 가서 구매 음식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준비해 간 물건을 넣으려고 하니 광주교도소는 수건과 칫솔만 반입이 허락이 됩니다.
총무과에 가서 특별접견 신청을 했습니다. 직원 대기실에서 한참을 기다려서야 특별접견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물품보관함이 없습니다. 그냥 접견실로 들어가니 창살만 있고 유리 칸막이도 없습니다. 교도관이 옆에 앉아 기록을 합니다.
무기수인 성갑 형제를 만났습니다. 스물일곱에 징역살이를 시작했으니 벌써 십삼 년이 흘러갔습니다. 세월이 흘러서인지 작년부터 웃기도 합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많이 웃습니다.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았던 사람도 이렇게 좋게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기적입니다. 베로니카가 고생이 많습니다. 옥뒷바라지를 해 주는 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매달 영치금을 보내주고 철따라 옷과 필요한 물건들을 보내주고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 주는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한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자기의 바람을 채워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화를 내는 것을 알면서도 섭섭해 하지 않으면서 도와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청부살인 이야기를 뉴스로 들었습니다. 집 앞에 버려진 어린 아기를 아들로 삼아서 공부시키고 결혼시켜 살 수 있도록 했는데 돈에 눈이 어두워 청부살인을 한 아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이 사랑받을 때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사랑해 주는 사람이 너무도 만만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나중에 아는 법! 나중에 알면 그게 지옥불보다 뜨겁고 무서운데도 모릅니다.
내년에 또 만나기를 기약하면서 광주교도소를 나왔습니다. 교도소는 제가 거의 이십여 년을 들락거렸지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언제나 어색합니다.
베로니카와 함께 세레나 자매님이 입원해 있는 전남대 병원으로 갔습니다. 중증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육층 병실로 갔습니다. 세레나 자매님은 마흔이 넘었지만 어린 아기처럼 해맑습니다. 한 번도 몸을 제대로 가눠본 적이 없답니다. 말하는 것도 참으로 힘이 듭니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몸은 몸대로 움직입니다. 책으로만 봤는데 하면서 기뻐 어쩔 줄 모릅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손을 한 번 잡아보았을 뿐입니다. 베로니카도 세레나 자매님 손을 꼭 잡고 어쩔 줄 모릅니다.
세레나 자매님이 “수술을 마치고 깨어나는 것이 싫었다고 합니다. 그냥 죽었으면 좋은데 또 깨어났다고 합니다. 너무 아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다음 달에 퇴원하면 멀리 순천에 있는 요한 형제를 면회하러 갈 것이라고 합니다. 세레나 자매님의 큰언니가 힘든 병구완을 하고 있습니다.
세레나 자매님이 겪는 고통 덕분에 제가 산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이처럼 대신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삽니다.
세레나 자매님과 이별을 하고 이번에는 공주로 출발했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깨어나는 것이 싫었어요.” 귀에 맴돕니다.
첫댓글 '민들레 국수집'을 만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VIP손님들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