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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역문첨록
정뇌경 비명 鄭雷卿 碑銘[尹善道]
○신축년(1661, 현종 2)
증 가선대부 이조 참판 행 통훈대부 시강원 필선 정공의 신도비명 병서 /
(贈嘉善大夫吏曹參判行通訓大夫侍講院弼善鄭公神道碑銘 幷序○辛丑)
장횡거(張橫渠)는 말하기를 “어린아이를 가르치되 먼저 안정되고 상세하며 공손하고 공경함을 요한다.[敎小兒 先要安詳恭敬]”라고 하였고, 자사자(子思子)는 말하기를 “군자는 스스로 독실하고 공경하게 행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본받아 안정되게끔 한다.[君子 篤恭而天下平]”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이른바 공경이라는 것이야말로 군자가 처음과 끝을 이루고 위와 아래를 철저하게 하는 도(道)라고 할 것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부모가 비록 돌아가셨으나, 장차 선한 일을 행할 적에는 부모에게 아름다운 명예를 끼침을 생각하여 반드시 결행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하우(夏禹)도 이렇게 했기 때문에 땅이 안정되고 천기(天氣)가 제대로 이루어져서 육부(六府)와 삼사(三事)가 잘 다스려졌으며, 채중(蔡仲)도 이렇게 했기 때문에 법도를 조심하며 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직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워서 모두 전인(前人)의 허물을 덮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른바 선한 일을 행할 적에는 반드시 결행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군자가 선세(先世)에게 아름다운 명예를 끼칠 것을 생각하는 도라고 할 것이다.
자하(子夏)는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면서 자기 몸까지도 바칠 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고, 난공자(欒共子)는 말하기를 “어버이는 나를 낳아 주셨고, 스승님은 나를 가르쳐 주셨고, 임금님은 나를 먹여 주셨으니, 이분들은 나를 살아가게 해 주신 점에서 똑같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같이 섬겨야 할 것이니, 오직 이분들 중 어느 분과 있든 간에 목숨을 바쳐야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이른바 몸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군자가 임금을 섬기는 도라고 할 것이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충신을 위주로 해야 한다.[主忠信]”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다 죽음이 있거니와, 사람은 신의가 없으면 설 수 없는 것이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충신은 또 군자가 귀하게 여기는 도라고 할 것이다.
정진백(鄭震伯)은 바로 나의 고씨(姑氏)의 손서(孫壻)이니 이는 세속에서 말하는 가부(葭莩)의 연분이 있을 뿐이요, 나는 진백에 대해서 사장(師長)이나 부집(父執 부친의 친우)의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왕년에 내가 대군(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을 적에 진백은 남조(南曹 예조)의 낭관(郎官)이었으니, 관등(官等)으로 보면 그가 높고 내가 낮은 처지였는데도 불구하고, 언젠가 통가(通街 대로(大路))에서 서로 만났을 적에 진백이 급히 말에서 내렸는데, 이는 장량(張良)이 노수(老叟)에게 무릎 꿇고 신발을 바친 것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내가 이 일을 기이하게 여기면서 진백이 신실히 공경하는 덕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진백이 대관(臺官)이 되었을 적에, 자기 고조(高祖)가 세상에서 불휘(不諱)의 비방을 받는다는 이유로 진소(陳疏)하여 자신을 탄핵하며 축출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조정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그가 전인(前人)의 덕을 따르는 것을 가상하게 여겼고, 군자는 이를 대단하게 평가하면서 그가 전인의 훈계를 따르는 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내가 이 일을 통해서 진백이 선세(先世)에게 아름다운 명예를 끼칠 것을 생각하여 선한 일을 능히 결행하였음을 알았다.
정축년(丁丑年, 1637, 인조 15) 봄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가 되어 청나라로 갈 적에 종관(從官)이 많이 피하려고 꾀하여 상이 걱정하였는데, 진백이 자청하여 동행하였으므로, 내가 멀리 있으면서 이 사실을 상세히 듣고는 진백이 자기 몸을 능히 바쳤음을 알았다.
진백이 청나라에 있을 적에 사태가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진백은 죽음에 임해서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또 이 사실을 상세히 듣고는 진백이 능히 목숨을 바치고 능히 죽음으로써 신의를 지킨 것을 알았다. 내가 이 때문에 진백에 대해서 탄복을 하면서, 그를 생각하기만 하면 늠름한 기풍이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매번 느끼곤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단지 이록(利祿)이 있는 것만 알 뿐, 오륜(五倫)이 있는 것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오직 권모술수를 일삼기만 할 뿐, 의리(義理)가 어떤 물건인지 알지를 못한다. 그러니 어떻게 원하는 것이 삶보다 더한 것이 있겠으며, 싫어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자기가 계책을 잘 세웠다고 여기고서 혹 진백을 기롱하며 의논하는 자가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정유년(丁酉年, 1657, 효종 8) 겨울에 내가 서울에 왔을 적에, 진백(震伯)의 아들 정유악(鄭維岳)이 가승(家乘)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비문(碑文)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으나, 내가 글솜씨가 졸렬하고 명위(名位)가 무너져서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사양하였고, 그 뒤에도 누차 요청했으나 누차 사양하였다.
그러다가 경자년(庚子年, 1660, 현종 1) 여름에 내가 삼수(三水)에 유배되었을 적에 정유악이 또 글을 보내어 요청하였는데, 내가 공을 의롭게 여기고 공을 슬프게 여기는 한편으로 그 고자(孤子)의 지성(至誠)에 감복한 나머지 감히 다시 사양할 수 없기에, 눈물을 참고서 그 가승을 살펴보았다.
공의 성(姓)은 정(鄭)이다. 휘(諱)는 뇌경(雷卿)이고 자(字)는 진백이며, 계보(系譜)는 온양(溫陽)에서 나왔다. 공의 시조(始祖) 휘(諱) 보천(普天)은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정희(貞禧)이다.
고조(高祖) 휘 순붕(順朋)은 아조(我朝)의 중묘(中廟)와 명묘(明廟)를 섬기며 귀현(貴顯)하였다. 증조(曾祖) 휘 담(䃫)은 경기 도사(京畿都事)로 호가 십죽헌(十竹軒)이니, 북창(北窓 정렴(鄭𥖝))의 아우이고, 고옥(古玉 정작(鄭碏))의 형이다.
조부 휘 지겸(之謙)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 일찌감치 거업(擧業 과거 공부)을 포기하고 향리에 은거하여 염정(恬靜)한 생활을 편안하게 여기며 세상에 알아줄 것을 구하지 않았다. 부친 휘 환(晥)은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으로 일찍 죽었다.
모친 연산 서씨(連山徐氏)는 증(贈) 병조 참판(兵曹參判) 휘 주(澍)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무신년(戊申年, 1608, 광해군 즉위년) 7월 4일에 태어났다. 2세 때에 부친을 여의고 외가(外家)에서 자라며 모친의 교육을 받았는데,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여 성인(成人)과 같은 점이 있었다.
장성함에 미쳐 문재(文才)가 날로 발전하여, 약관(弱冠)에 명성이 다사(多士)의 으뜸이었다. 나이 23세에 장원급제하였는데, 이때 김공 류(金公瑬)와 장공 유(張公維)가 고관(考官)으로 있으면서, 인재를 얻었다고 크게 기뻐하였다. 처음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고, 공조ㆍ예조ㆍ병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ㆍ옥당(玉堂 홍문관)ㆍ춘방(春坊 세자시강원)에 전입(轉入)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 14)에 청병(淸兵)이 졸지에 침입하여 인조(仁祖)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는데, 그때 공이 교리(校理 홍문관의 종5품 벼슬)의 신분으로 호종(扈從)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637, 인조 15) 봄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청나라로 들어갈 적에 종관(從官)이 많이 피하였으나, 공은 개연(慨然)히 동행하겠다고 청하였다.
겨울에 문안관(問安官)의 신분으로 환조(還朝)했다가 이듬해 봄에 세자에게 복령(復令)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639, 인조 17)에 필선(弼善 세자시강원의 정4품 벼슬)으로 승진하였다. 세자가 심양(瀋陽)에 있을 적에 공이 일행의 전곡(錢穀)을 관장하였는데, 세자가 사사로이 청할 때마다 공이 번번이 극간(極諫)하였으므로 세자가 마침내 감히 청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동료 중에 혹 몸단속을 엄히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공이 경계하고 책망하며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렸다. 당시에 청국(淸國)에 정명수(鄭命壽)와 김돌(金突)이라는 자가 있었다. 이들은 실로 우리나라의 천례(賤隷)였는데, 무오년(戊午年, 1618, 광해군 10) 건주(建州)의 전역(戰役) 때에 포로로 잡혔다가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 14) 호란(胡亂) 때에 우리말을 안다고 하여 함께 나왔다.
그 뒤에 높이 되고 총애를 받아 청국에서 권세를 부리게 되자, 우리 진신(搢紳)을 육욕(僇辱)하고 우리 군상(君上)을 능력(凌轢)하였으며, 우리나라를 팔아먹고 우리나라를 해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극력 주장하였으므로, 너무도 분하여 이를 갈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기필코 이 두 놈의 역적을 죽여서 군상의 치욕을 씻어 드리고 국가의 피해를 늦춰 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우리나라에서 청국에 보낸 세폐(歲幣)를 많이 훔친 것을 기회로 하여, 동관(同館)의 몇 사람과 함께 은밀히 계책을 정하고는, 그들 내부에서 두 역적을 좋아하지 않는 자로 하여금 간장죄(奸贓罪)로 발고(發告)하게 하는 동시에, 강원(講院)이 잇따라 그 죄를 증명(證明)하게 되었는데, 고발(告發)하여 안험(按驗)할 즈음에 공이 두 역적의 실상(實狀)을 극구 말하였다.
이때 박로(朴𥶇)가 빈객(賓客)으로 세자(世子)를 심양(瀋陽)에서 오랫동안 모시면서 청인(淸人)과 친하게 지냈는데, 박로가 그 설(說)을 뒤집는 바람에 심리(審理)가 마침내 거꾸로 뒤바뀌면서 사태가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자가 사람 숫자가 많으면 청나라에서 죄다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공으로 하여금 관(館)에 있는 여러 신하들을 끌어들이게 하였으나, 공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혼자서 감당하였다.
인조(仁祖)가 처음에는 구해(救解)하는 방도를 강구하려고 했으나, 박로가 “본국이 엄한 말로 죄를 청하면 그들이 혹 용서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구해 주려고 변호를 하면 그들의 화만 더욱 돋울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치계(馳啓)하자, 재상(宰相) 최명길(崔鳴吉)이 그 말이 옳다고 동의하니, 상이 그대로 따라서 그들에게 해명하지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기묘년(己卯年, 1639, 인조 17) 4월 18일에 심양에서 화를 당하였으니, 그때 나이 32세였다.
공이 죽음을 맞이할 적에 본국을 향해 군친(君親)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는, 붓을 청하여 “자의(子儀)의 해를 꿰뚫는 충성심을 품었어도 나라에 복은 하나도 끼치지 못하고, 끝내 임보(林甫)의 언월(偃月)의 모략(謀略)에 떨어졌으니 이 원한을 누가 풀어 주리오.[雖懷子儀貫日之忠 曾無其福 竟墮林甫偃月之計 孰拯其冤]”라는 말을 적었는데, 사기(辭氣)가 종용(從容)하여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세자(世子)와 대군(大君)이 옷을 벗어서 염(斂)을 하고 제물(祭物)을 차려 제사를 지내었다. 부음이 본국에 이르자,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을 막론하고 오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영구(靈柩)를 모시고 돌아와서 장례 지낼 적에 모든 일을 조가(朝家)에서 보살펴 주며 빠뜨림이 없게 하였다. 처음에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를 증직(贈職)하였다가 다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증직하고 달마다 그 집에 늠료(廩料)를 지급하게 하였다.
한편 강원(講院)의 아전이었던 강효원(姜孝元)도 공과 함께 말을 올곧게 하다가 같은 날에 해를 당하였다. 공의 배필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경력(經歷) 상형(商衡)의 딸로,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그 이름은 유악(維岳)이다. 공이 죽었을 때에 유악은 나이가 겨우 8세였다. 공의 묘소는 광주(廣州) 경안(慶安)의 자좌(子坐) 오향(午向)의 언덕에 있으니, 이는 새로 터를 잡은 곳이다.
공이 화를 당했을 때에 효종(孝宗)이 대군(大君)의 신분으로 심양(瀋陽)에 있으면서 그 일을 알았다. 임진년(1652, 효종3) 가을에 정유악이 진사(進士)에 장원(壯元)으로 뽑히자, 편전(便殿)으로 인견(引見)하여 이르기를,
“네가 이처럼 장성했단 말이냐. 얼굴을 들어 보아라.”
하였다.
정유악이 얼굴을 드니, 상이 이르기를,
“너의 모습이 자못 너의 아비와 비슷하구나. 너는 부디 노력해서 이 정도로 그치지 말고 원대한 목표를 이루도록 하여라.”
하였다.
그리고 입시(入侍)한 승지(承旨) 이일상(李一相)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의 아비가 나라를 위해 몸을 돌아보지 않다가 일이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아무도 구하지 못하였고 나도 힘이 미약해서 구할 수가 없었다.”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는, 이어서 호피(虎皮) 1장(張)과 종이〔紙〕 2권(卷)과 붓〔筆〕 5지(枝)와 먹〔墨〕 5홀(笏)을 직접 하사하고, 주식(酒食)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또 이르기를,
“고아(孤兒)와 과처(寡妻)의 생계가 필시 어려울 것이니, 해당 조(曹)에서 은(銀) 1백 냥(兩), 미곡 10섬(石), 포(布) 10필(疋)을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 그 이듬해에 정유악을 특별히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임명하였으나, 정유악이 바야흐로 유업(儒業)에 독실하게 뜻을 두었기 때문에, 단지 숙사(肅謝)만 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아, 우리 공의 일을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실제의 자취를 전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렇게 기록하는 것이다. 강효원이 머리를 나란히 하여 의(義)를 취하였으니, 사람이 지닌 떳떳한 천성은 귀천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실로 알겠는데, 이 역시 보고 느끼는 사이에서 얻은 것이리라. 사람이 혹 잠거(簪裾 조복(朝服))를 착용하고서 이서(吏胥)보다 못하다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정유악이 무적(無適)하고 무막(無莫)하며 오직 의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면서, 바야흐로 박학(博學)ㆍ심문(審問)ㆍ신사(愼思)ㆍ명변(明辨)ㆍ독행(篤行)의 일에 종사하며 독실하게 노력하고 있다. 이미 다른 길에 현혹되는 일이 없었으니, 끝까지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그 발전 가능성을 어떻게 예측할 수가 없다.
성인(聖人)은 무고(無固)하고 무필(無必)하지만,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선을 쌓은 집안에는 후손에게 반드시 경사가 있게 마련이다.”라고 하였으니, 만고(萬古)의 천리(天理)가 어찌 유독 지금 세상에서만 없어지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어여뻐라 공의 생순사안함이여 / 愛公生順死安
애달파라 공이 시대를 만남이 좋지 못함이여 / 悼公遭時不辰
아들이 있어 말세의 길에 우뚝 섰으니 / 有子特立於末路
하늘의 보답이 응당 이 사람에게 있으리라 / 天報應在於斯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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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張橫渠曰: “敎小兒, 先要安詳恭敬。” 子思子曰: “君子篤恭而天下平。” 然則所謂恭者, 乃君子成始成終、徹上徹下之道也。《記》曰: “父母雖沒, 將爲善, 思貽父母令名必果。” 夏禹以地平天成, 六府、三事允治, 蔡仲以克愼厥猷, 惟忠惟孝, 幷能蓋前人之愆。 然則所謂爲善必果者, 乃君子思貽先世令名之道也。 子夏曰: “事君能致其身。” 欒共子曰: “父生之, 師敎之, 君食之, 生之族也。 故一事之, 唯其所在則致死焉。” 然則所謂致身致死者, 乃君子事君之道也。 孔子曰: “主忠信。” 又曰: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然則忠信又是君子所貴乎道者也。
鄭震伯乃善道姑氏之孫婿也, 是俗所謂葭莩之分。 而余於震伯, 非師長也, 非父執也。 昔年余爲大君師傅, 震伯爲南曹郞, 以官則彼尊而我卑也。 而嘗遇諸通街, 震伯急下馬, 此有似張良之跪進屨於老叟。 余以此異之, 知震伯之允恭也。 震伯爲臺官, 自以其高祖有不諱之謗於世, 陳疏自劾請黜, 朝廷不許而嘉其率德, 君子多之而美其率彝。 余以此知震伯之思貽令名而能果於善也。
丁丑春, 昭顯世子爲質北行, 從官多謀避, 上患之, 震伯自請行。 余在遠詳問, 知震伯之能致身也。 震伯在淸國, 事在不測, 震伯臨死不易辭。 余又詳聞, 知震伯之能致死而能以死守信也。 余是以歎服於震伯, 而思之則每覺凜凜之風起余也。 世人徒知有利祿, 不復知有五倫, 惟事於權謀術數, 而不知義理之爲何物, 焉有所欲有甚於生, 所惡有甚於死者也? 宜乎! 其自以爲得計而或有譏議於震伯也。 丁酉冬, 余來京, 震伯之子維岳奉其家乘, 請余爲碑文, 余辭以文拙名頹不敢承當。 其後屢請, 屢辭矣。 庚子夏, 余謫三水, 維岳又以書來, 余義公哀公, 感其孤之至誠, 不敢更辭, 善道忍淚, 考其家乘。
公姓鄭, 諱雷卿, 字震伯, 系出溫陽。 公之始祖諱普天, 仕麗朝, 官至銀靑光祿大夫、戶部尙書, 諡貞禧。 高祖諱順朋, 事我朝中廟、明廟貴顯。 曾祖諱䃫, 京畿都事, 號十竹軒, 北窓之弟, 古玉之兄也。 祖諱之謙, 成均進士, 早棄擧業, 隱居鄕里, 恬靜自守, 不求知於世。 考諱晥, 成均生員, 早卒。 妣連山徐氏, 贈兵曹參判諱澍之女。
公生於萬曆戊申七月初四日。 二歲而孤, 養於外家被母敎, 髫齡岐嶷, 有同成人。 及長, 文才日長, 弱冠, 名冠多士。 年二十三, 登第壯元, 金公瑬、張公維爲考官, 大喜得人。 初拜成均館典籍, 歷工、禮、兵三曹佐郞, 轉入兩司、玉堂、春坊。
丙子, 淸兵猝至, 仁祖入南漢城, 公以校理扈從。 丁丑春, 昭顯世子北行, 從官多避, 公慨然請行。 冬以問安官還朝, 明春復令。 己卯, 陞弼善。 世子在瀋, 公掌行中錢穀, 世子有私請, 公輒極諫, 世子遂不敢請。 同僚或有律身不嚴者, 公戒責不少饒, 人皆畏憚。
時淸國有鄭命壽、金突者, 實我國賤隷也, 戊午建州之役被虜, 丙子亂, 以解方語出來。 其後得尊寵, 用事於淸國, 僇辱我搢紳, 凌轢我君上。 凡所以賣我國害我國者, 皆力主之, 人莫不切齒, 而莫敢誰何。 公必欲殺此兩賊, 以雪主辱, 以紓國害。 因其多盜我國送淸國歲幣, 與同館數人密定計, 使彼中不悅於兩賊者發告奸贓, 講院仍以證明其罪矣。 告發按驗之際, 公極言兩賊實狀。 時朴𥶇以賓客, 陪世子在瀋久矣, 與淸人䁥, 朴𥶇反其說, 理遂顚倒, 事至不測。 世子以爲人衆則淸亦不可盡殺, 令公引在館諸臣, 公不聽獨當。 仁祖初欲爲救解之道, 朴𥶇馳啓以“本國嚴辭請罪, 則彼或假貸: 若有伸救, 則秖益其怒”。 宰相崔鳴吉以其言爲是, 上從之, 不得與明。 公以己卯四月十八日, 遇禍於瀋陽, 年三十二。 公臨終, 向本國拜辭君親, 仍索筆題 “雖懷子儀貫日之忠, 曾無其福: 竟墮林甫偃月之計, 孰拯其冤” 二十四字, 辭氣從容, 無異平日。 世子、大君解衣以斂, 設奠以祭。 訃至本國, 無賢愚知不知, 莫不嗚咽。 返柩窆葬, 皆自朝家顧護無闕。 初贈承政院都承旨, 再贈吏曹參判, 月廩其家。 講院吏姜孝元同公直辭, 同日被害。 公配坡平尹氏, 經歷商衡之女。 有一子曰維岳。 公之歿也, 維岳年甫八歲。 公墓在廣州慶安子坐午向之原, 新卜也。
公之遇禍時, 孝宗爲大君, 在瀋中知其事。 壬辰秋, 維岳擢進士壯元, 引見便殿, 曰: “爾乃若是其長成哉? 擧爾顔。” 擧顔,
上曰: “爾形頗似乃父。 爾其勉旃, 毋止於此, 期於遠大!” 謂入侍承旨李一相曰: “此兒父爲國不顧身, 事至不測, 人莫之救, 予亦力微不得救焉。” 爲之垂涕。 仍面賜虎皮一張、紙二卷、筆五枝、墨五笏, 命饋酒食。 又曰: “孤兒寡妻, 生理必艱, 自該曹賜銀一百兩、米十石、布十疋。” 其明年, 特除維岳獻陵參奉, 維岳方篤志於儒業, 故只肅謝而不仕。
嗚呼! 我公之事, 可忍言哉? 以其實跡不可不傳, 故爲之記。 姜孝元之騈首取義, 固知秉彝之天無間貴賤, 而其亦得於觀感之間者歟! 人或簪裾而不如吏胥, 則寧無愧乎? 維岳好無適無莫、惟義與比之道, 方從事於博學、審問、愼思、明辨、篤行, 而孶孶慥慥。 旣無他岐之惑, 而終不半途而廢, 則其進不可量也。 聖人無固無必, 而孔子曰: “積善之家, 必有餘慶。” 萬古天理, 豈獨今世而泯也? 銘曰:
愛公生順死安, 悼公遭時不辰。 有子特立於末路, 天報應在於斯人。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