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서집 제32권 / 묘갈명(墓碣銘) - 조긍섭(曺兢燮,1873~1933)
이군 묘갈명〔李君墓碣銘〕 / 판윤공파
이군(李君) 종기(鍾紀)는 효우와 신의로 알려졌는데, 나를 볼 때마다 정성스럽고 후한 뜻을 생각하여 부탁할 것이 있으나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비슬산 서쪽으로 와서 살게 되었을 때, 하루는 그 선친의 유사(遺事)를 손수 지어 와서 나에게 보이고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저의 부친이 불행히 장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마쳤으나, 자손들이 사모할 만한 한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불초가 태어난 지 여덟 살에 부친을 여의어 하루도 부친을 봉양할 수 없었으니, 참으로 아첨하지 않는 사람의 글을 얻어 묘소 앞에 새겨서 후인에게 보이려 합니다.
이 글이 저의 부친과 함께 불후하게 되고 불초가 유감이 없도록 감히 이 일로 누를 끼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사양할 수 없으니 그 유사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군의 휘는 규일(圭逸), 자는 치유(致有)이다. 그 선계는 경주(慶州)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익재(益齋) 문충공(文忠公)이 널리 알려진 조상이다. 4대를 내려와 휘 지대(之帶)에 이르러서는 세종조의 한성 판관이었으니,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로 경주에 물러나 살다가 후에 또 다시 이사하여 대구에 이르렀다.
고조의 휘는 영대(英大)이니 증 호조 참의이다. 증조의 휘는 문한(文漢)이니 증 호조 참판이다. 조부의 휘는 유상(有祥)이다. 부친의 휘는 의영(義榮)이다. 모친은 목천 상씨(木川尙氏)이니 우용(佑容)의 따님이고, 철종 무오년(1858) 9월 22일에 군을 낳았다.
군은 어릴 때 총명하였으니, 4세에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모친이 곡하는 것을 보고는 문득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다가 모친이 그치면 따라 그쳤다. 장성하여 부친의 기일을 만나면 제사에 반드시 그 정성을 극진히 하여 일찍이 미처 섬기지 못했던 슬픔을 달랬다.
모친을 봉양하는 데는 그 기쁨을 지극하게 하였다. 한 아우를 대하는 데는 그 우애를 지극하게 하였다. 가산을 많이 베풀어 친족 가운데 곤궁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의로 삼았다. 대구부(大邱府) 남쪽 치산(稚山: 現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 아래 집을 정하여 살면서 치봉거사(稚峯居士)라고 자호하여 책을 읽고 뜻을 구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26세에 질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서 모친에게 불초한 자식을 염두에 두지 말라고 부탁하고 드디어 눈을 감았으니, 계미년(1883, 고종 20) 8월 모일이었다. 모월 모일에 수성면(壽城面) 효목동(孝睦洞: 現대수시 수성구 효목동) 못가 오좌(午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연일 정씨(延日鄭氏)이니 증 공조 참판 만수(晩秀)의 따님이다. 2남을 낳았으니 장남은 곧 종기(鍾紀)이고 다음은 종택(鍾宅)이다. 종기는 4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수우(洙雨)ㆍ창우(彰雨)ㆍ석우(錫雨)ㆍ지우(之雨)이고, 딸은 현풍(玄風) 곽재기(郭在琦)ㆍ영양(永陽) 최성구(崔性昫)에게 출가했다. 나머지는 어리다. 종택은 4남을 두었으니 병우(昞雨), 정우(廷雨), 재우(載雨), 성우(成雨)이다.
명(銘)을 붙인다.
자신은 조금 받고 / 受其嗇
후손에게 후함을 돌렸네 / 歸厚於後
아들이 있어 유능하니 / 有子而能
군의 이름이 함께 오래 전하리라 / 名與之壽
<끝>
[각주]
[주01] 종기는 …… 어리다 : 종기는 4남 2녀를 두었다고 하고 마지막에 “나머지는 어리다.”라고 하였는데, 3녀를 두었든지 아니면 “나머
지는 어리다.”라고 한 말이 연문(衍文)일 것으로 생각된다.
ⓒ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 김홍영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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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李君墓碣銘
李君鍾紀以孝友信義聞。每見余則思欵厚之意。若有所屬而未發也。及余卜瑟西之居。一日手其先人遺事來示余。丐余以銘。且曰吾父不幸不得年以歿。然有一二事可以寓子孫之慕。不肖生八歲而孤。不獲一日就吾父養。誠得不諛者文以刻諸墓道。以示後人。是與吾父不朽而惠不肖無憾也。敢以累子。余不得辭。則据其狀而書之曰。君諱圭逸字致有。其先出慶州。高麗益齋文忠公爲著祖。四傳至諱之帶。世宗朝漢城判官。自 端宗禪位。退居慶州。後又再徙至大丘。高祖諱英大贈戶曹參議。曾祖諱文漢贈戶曹參判。祖諱有祥。考諱義榮。妣木川尙氏佑容女。以哲宗戊午九月二十二日生君。幼穎悟。四歲而孤。見母哭輒抱之啼號。母止乃止。長値父忌辰。祀必致其誠。以塞未甞逮事之悲。奉母極其歡。遇一弟極其愛。多散家貲。以周族之窮者爲義。卜居府南稚山下。自號稚峰居士。讀書求志以爲樂。年二十六得疾。自知不起。囑母以勿以不肖子爲念。遂瞑。癸未八月某日也。以月日葬于壽城面孝睦洞池上午坐之原。配延日鄭氏贈工曹參判晩秀之女。生二男長卽鍾紀。次鍾宅。鍾紀四男二女。男洙雨,彰雨,錫雨,之雨。女適玄風郭在琦,永陽崔性昫。餘幼。鍾宅四男昞雨,廷雨,載雨,成雨。銘曰。
受其嗇。歸厚於後。有子而能。名與之壽。<끝>
巖棲先生文集卷之三十二 /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