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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 北 朝 時 代
梁 王 朝 世 家
梁(양, 남량. 소량) AD. 502∼AD. 557 漢族(한족) 위치 중국 남부 성 蕭(소)
代數 | 在位期間 | 位 | 姓名 | 關係 | 首都 | 現地名 |
文皇帝(문황제) | 蕭順之(소순지) | 建康(건강) | 江蘇省 南京市 | |||
제 1대 | AD. 502∼AD. 549 | 武皇帝(무황제) | 蕭衍(소연) | 소순지의 삼남 | 강소성 남경시 | |
AD. 549∼ | 폐제 | 蕭正德(소정덕) | 무황제의 조카 | |||
제 2대 | AD. 549∼AD. 551 | 簡文皇帝(간문황제) | 蕭綱(소강) | 무황제의 삼남 | ||
昭明皇帝(소명황제) | 蕭統(소통) | 무황제의 장남 | ||||
安皇帝(안황제) | 蕭歡(소환) | 소명황제의 장남 | ||||
제 3대 | AD. 551∼AD, 552 | 廢帝(폐제) | 蕭棟(소동) | 안황제의 장남 | ||
AD. 552∼AD, 553 | 정헌왕 | 蕭紀(소기) | 무황제의 8남 | |||
제 4대 | AD. 552∼AD. 554 | 孝元皇帝(효원황제) | 蕭繹(소역) | 무황제의 7남 | ||
제 5대 | AD. 555∼AD, 555 | 閔皇帝(민황제) | 蕭淵明(소연명) | 효원제의 사촌 | ||
제 6대 | AD. 555∼AD. 557 | 敬皇帝(경황제) | 蕭方智(소방지) | 효원황제의 9남 | ||
AD. 557∼AD. 560 | 永嘉王(영가왕) | 蕭莊(소장) | 효원황제의 손자 |
유송에서 벼슬을 지낸 蕭道賜(소도사)의 셋째 아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친척 형인 소도성과 친하게 지냈 으며, 소도성이 북위와 전투할 때 같이 참전했고 그가 암살 당할 위기에서 구해 줬을만큼 사이가 가까웠 다. 이러한 공으로 AD. 477년, 소순지는 형 소도성이 유송의 전권을 장악했을 때 각종 벼슬에 임명되었 고 최종적으로는 소도성이 남제의 황제로 즉위했을 땐 임상현우에 봉해진다. 그 후에도 여러 벼슬을 지 냈고 남제에 충성하다가 죽은 뒤엔 진북장군에 추증되고 懿(의)의 시호를 받았다.
제 1대 무황제(AD. 464∼AD. 549)
소순지와 張尙柔(장상유)의 3남으로 태어났다. 남제 융창 원년(AD. 464년), 중서시랑에 있던 소연은 당시 황제였던 명제 소란에 의해서 다음에 AD. 495년에 황문시랑이 되었다. 영원 2년(AD. 500년), 소보권이 소연의 큰 형이었던 상서령 蕭懿(소의)를 살해하자 소연은 형을 무고하게 죽인 일로 소보권에게 불만이 생겼다. 거기에 소부권은 곤대를 보내 소연도 죽이게 했는데 토벌군을 막아내고 이듬해 AD. 501년, 강능 에서 남강왕 소보융을 황제에 즉위시키고 10월에 건강을 포위했다. 12월 건강을 수비하던 장직과 왕진국 이 소보권을 시해하고 그의 머리를 바쳤다. 소연은 군사들에게 국고를 봉하게 하고 궁녀 2000천 명을 풀 어 장병들에게 시집보냈으며 여러 관직을 갖고 대권을 장악했다. 중흥 2년(AD. 502년), 3월 화제 소보융 이 강압에 의해 제위를 양위했다. 건강 남교에서 황제에 즉위하고는 선양이란 이름으로 소보융을 폐하고 제나라를 멸망시켰다. 소연은 국호를 양으로 정하고 소보융을 비롯한 제나라 왕족을 남조의 전통적인 풍 습에 따라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모두 죽였다. 시작은 피바람이 몰아치는 상서롭지 못했지만 그 피바람 은 황족에게만 국한된 것이었으며,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풀었다. 게다가 무제의 치세는 48년이란 긴 세 월이었다. 그동안 내정을 정비하여 구품관인법을 개선하고 불교를 장려하여 문화를 번영시켰다. 대외관계 도 비교적 평온하여 약 5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하여 남조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31살의 젊은 나이 에 죽은 무제의 장남 昭明太子 蕭統(소명태자 소통)이 편찬한 文選(문선)은 후세에 까지 전해지는 훌륭한 문헌이었다. 소연은 원래 자식이 없어서 임천왕 소굉의 아들 소정덕을 양자로 키웠지만 태자 소통이 태 어나자 소정덕을 자기 집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소정덕은 황제가 되지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보통 3년 (AD. 522년), 북위로 달아났다. 하지만 북위에서는 그의 망명에 의아해하며, 야박하게 대하자 다시 양나 라로 돌아왔다. 태청 원년(AD. 547년), 동위의 장수 후경이 동위의 권력자 고징과의 알력으로 하남을 점 령하고 서위에 투항했다. 또한 동시에 하남을 양나라에 바치고 투항하겠다는 서한을 건강에 보내왔다. 이 에 그를 하남왕 대장군에 봉했다. AD. 548년, 후경이 동위군에게 패배하자 구원을 요청해 소연이 보낸 구원군은 일격에 무너져 지휘관인 소연명이 사로잡히는 참사가 났다. 이후 후경은 정예병을 이끌고 건강 으로 진격했다. 이때 까지만 해도 후경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는데 당시 양나라는 오랜 세월 태평세월이 지속되고 내부는 썩어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소정덕이 몰래 수십척의 큰 배들을 보내 후경의 군대가 강을 건너는 것을 도와주었고 그를 건강으로 안내했다. 1월 후경은 승상이되고 소정덕은 허수아비 황제가 되어 자신의 한을 품었다. 태청 3년(AD. 549년), 소정덕은 후경에 의해 폐위되고 살해 당해서 자신이 저지른 대가를 그대로 돌려받았다. 후경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자 소연은 정거전에 유폐되 었고 모든 것이 후경의 의해 통제되었다. 최후에는 꿀물을 요구 했다가 거절당하자 울분이 터져 죽었다.
소정덕(AD. ?∼AD. 549)
무황제의 6번째 동생인 臨川靖惠王 蕭宏(임천정혜왕 소굉)의 삼난으로, 자는 公和(공화)이다.
무제의 조카였으나 젊어서부터 아들이 없던 무제가 양육하며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하지만 어려서 부터 험악했으며 무제가 양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되자 황태자가 되기를 원했고 무제도 생각이 있었으나 AD. 501년, 무제의 친아들인 소명태자 소통이 태어나게 되자 무제는 소정덕을 다시 소굉에게로 돌려보 냈고 대신 502년 서풍후로 봉했다. 그런 후로 항상 불만이 쌓여갔다. AD. 548년, 8월 옛 동위의 무장으 로 양나라에 투항했던 후경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인 건강을 향해 진격했는데 당시 건강은 소정덕이 지키 고 있었다. 그런데 후경은 반란을 일으키기에 앞서 황제자리에 욕심을 내고 있던 소정덕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에 소정덕은 후경에게 내통하기로 약속했고 몰래 길을 안내했기 때문에 그 뒤로부 터 후경은 토벌군을 쉽게 피하면서 남하 할수 있었다. 이후 건강 외성이 함락되자 후경이 소정덕을 황제 로 추대했고 마침내 소정덕은 황제에 즉위했다. 이어서 연호를 정평으로 했고 자신의 아들인 임하세자 蕭見理(소견리)를 황태자로 높혀 삼았으며 후경을 승상으로 삼고 자신의 딸을 후경에게 시집보냈다. 이듬 해인 AD. 549년, 건강의 내성이 함락되었다. 그 전에 소정덕과 후경은 서로 내성이 함락되면 무제와 황 태자 소강을 없애버리자고 약속했다. 소정덕이 군사들을 이끌고 궁문으로 들여가려고 했는데 후경이 다 른 군사들을 시켜 소정덕을 들어올 수 없게 막았다. 이후 후경은 소정덕이 더 이상 쓸모가 없어 폐위시 켜 시중 대사마로 격하시켰다. 이에 격분한 소정덕은 후경을 없애려고 파양왕 蕭範(소범)에게 군대를 이 끌고 건강으로 들어와 후경을 죽이라고 밀서를 보냈으나 오히려 이를 알아챈 후경에게 밀서가 발각되어 그 다음날 즉시 소정덕을 교살했다.
제 2대 간문황제(AD. 503∼AD. 551)
천감 2년(AD. 502년), 10월 건강에서 소연과 정령광의 3남으로 태어나 4살에 진안왕에 책봉되고 보통 4 년(AD. 523년), 옹주 자사가 되었다. AD. 531년, 장남 소명태자 소통이 뱃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져 익사 하고 차남 애장왕 소종마저 잃은 소연은 5월에 소강을 태자로 책봉했다. 태청 3년(AD. 549년), 건강에 입성한 후경을 영복전에서 만났을 때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이에 후경은 얼 굴에 땀투성의 된 채 말을 못하고 절만 연신 했다. 5월에 황제 즉위했지만 후경이 대권을 장악하고 소강 을 엄격하게 지켜서 외부 사람들이 그를 알현하지 못하게 감시하였다. 대보 원년(AD. 550년), 시흥태수 진패선이 후경의 잔혹한 통치에 맞서 시흥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6월 상동왕 소역이 파릉에서 후경을 격파하고 평남장군 왕승변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파릉전투에서 후경이 대패하자 소강을 진안왕으로 폐 하고 애장왕 소동을 황제로 세웠다. 소강은 감금되었고 종이가 없어서 벽과 판자에다 시와 글 수백 편을 써서 자기의 슬픔을 토로했다. 10월 후경은 사람을 보내 소강에게 술을 먹이게 했다. 그가 취하고 잠들 자 흙자루에 담아 그 위에 눌러 앉아 죽였다. 그의 나이는 49세였으며, 문짝으로 관을 만들어 안에 담고 건강 북쪽에 있던 술 창고에 두었다. 숭성 원년(AD. 552년), 소역에 의해 장릉에 안장되었다.
소명태자(AD. 501∼AD. 531)
무황제와 무목황후 정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복형제로 그들의 삼남 간문제 소강. 오남 여릉왕 소속이 있다. 훗날 삼남 소찰이 후량을 건국하자 묘호를 고종, 시호를 소명황제로 추존되었다. 아버지가 즉위한 AD. 502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이미 논어와 효경을 읽어냈고 5살 때 오경을 독파했다고 전해진다. 태자가 성인의 의복을 착용하면서부터 황상은 바로 조정의 정사를 살피 고 관장하도록 시켰는데 백관이 올리는 업무가 태자 앞에 쌓이고 맡겨지면 잘못된 것을 분별하였고 송사 를 평등하게 결단하여 조정의 대소 신료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뱃놀이를 하던 도중 배가 전복되 어 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해 병을 얻었고 AD. 531년, 향년 31세로 사망하였다.
안황제(AD. ?∼AD. ?)
소명태자 소통과 蔡氏(채씨)의 장남으로 후에 아들인 예장홍문왕이 안황제로 추존했다. 무황제의 장손으 로 화용현개국공으로 봉해졌고 동중랑장과 남서주자사를 맡았다. AD. 531년 아버지 소통이 사망하자 무 황제가 소환을 황태손으로 삼기 위해 건강으로 징소했다. 그러나 소환이 이전에 무제와 소명태자 간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에 대해 원망하고 있었고 또 무제도 그를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오히려 삼남인 진안왕 소강을 더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에 마침내 한달 뒤 소환을 돌려보내고 이어서 소강을 황태자로 세웠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건 옳지 않다고 여겼고 의심하자 마침내 무제가 소환을 황태손으로 삼지 않 는 대신에 그의 봉지보다 더 큰 땅인 예장군에 예장군왕으로 높여 봉함으로써 불만을 잠재웠다.
사망한 후 시호를 안왕으로 하였고 장남인 소동이 습작하여 예장왕이 되었다. 이후 AD. 551년, 소동이 황제로 즉위한 뒤에 안황제로 높여 추존했다. 아들들로는 소동. 소교. 소규가 있었으나 모두 숙부였던 원 제 소역에 의해 일부러 구멍낸 배에 탔다가 익사당했다.
제 3대 폐제 소동(AD. ?∼AD. 552)
소명태자 소통의 장손이며, 소환의 장남이다.
후경의 대란을 피해서 농부로 변장한 채 농사를 지으며 숨어지냈는데, 후경이 간문제 소강을 폐위한 뒤 허수아비 황제로 옹립하였다. 소동의 즉위는 후경이 찬위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고 과연 불과 3개월이 지나서 후경에게 선양할 것을 강요받았다. 퇴위한 소동은 회음왕으로 격하당했고 동생들인 소교. 소규와 함께 유배당했다. 그 이후 원제 소역이 후경이 주이고 난을 평정하자 소동과 그 동생들은 풀려났다. 하지 만 소역이 강능으로 천도할 때 그 역시 배를 타고 강릉으로 롦겨지게 되었으며, 소동이 복위할 것을 경 계해 일부러 오는 도중에 배에 구멍을 내 침몰 시켰고 소동은 동생들과 함께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부 인인 張皇后(장황후)는 그의 사망 후 기록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무릉인왕(AD. 508∼553)
무황제와 修容 葛氏(수용 갈씨)의 8남이다. 소기는 미모는 뛰어났으나 배움에 근면하지 않았고, 호화로움 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AD. 514년에 무제가 소기를 무릉군왕으로 봉했고 영원장군과 팽성태수, 양주 자사 등을 겸직하게 하였다. 소기는 뒤에 나와서 익주자사를 맡았다. AD. 549년, 후경의 대란이 일어났 을 때 소기는 촉에 있으면서 난을 평정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아버지인 무황제가 죽은 뒤 AD. 551년 그 제야 후경을 토벌한다고 동쪽으로 가서 荊陝(형섬)을 포위하려고 했다. AD. 552년, 소기는 장남 무릉세 자 소원조의 제의를 받아들여 成都(성도)를 수도로 즉위하였고 연호를 천정으로 개원하였다. 한편 동쪽에 서는 이복형 원제 소역이 AD. 552년 후경을 죽이고 난을 평정하고 즉위하였다. 소기의 군대는 西陵峽(서 릉협)에 이르러 원제가 있는 강릉의 여러 군대와 대치했다. 그러자 원제는 서위에 원조를 요청하니 서위 가 군대를 보내 촉을 공격하였고 동시에 원조의 군대도 서릉협으로 진공했다. AD. 553년, 드디어 서위가 성도를 포위하자 소기의 군대는 사기도 떨어진데다 강릉에 닿기도 전에 후방이 이미 무너졌으므로 전투 에서 계속 패하였다. 마침내 원제의 부장인 반맹에게 서릉협에 포위되어 樊猛(번맹)에게 피살되니 향연 46세였다. 소기가 죽은 후 소역은 소기와 그의 가족의 속적을 끓었고 성씨를 도찰씨로 바궈버렸다.
제 4대 효원황제(AD. 508∼AD. 555)
천감 7년(AD. 508년). 무황제소연과 원여영사이에서 태어난 7남이다. 7살에 상동왕에 책봉되었다.
태청 3년(AD. 549년), 하남왕 후경이 대란을 일으키고 소연을 유폐시켰다가 소연이 굶어죽자 소역은 작 은 아들을 우문씨가 권력을 잡고있던 서위에 볼모를 보내고 고씨의 북제와 화의를 맺었다. 6월 소역은 후경을 토벌할 목적으로 군대를 모집하고 하동왕 상동자사였던 소예에게 3번이나 사람을 보내 식량을 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소예가 모두 거절하자 소역은 무력으로 소예를 공격했다. 이에 소예의 아우인 악양왕, 옹주자사 소찰은 소역의 근거지였던 강릉을 공격해서 형 하동왕 소예를 구원하려다가 오히려 패배하고 도망쳤다. 그래서 소찰은 서위에 구원을 보내 번국이 되기를 원했다. 대보 원년(AD. US), 평 남장군 왕승변이 장사를 함락시키고 소예를 죽였다. 대보 2년 AD. 551년), 후경은 파릉에서 대패하고 건강으로 도주했으며, 소역은 군사를 이끌고 계속 추격했다. 7월 후경은 간문제 소강을 협박하여 예장왕 소동에게 양위하게 하고 소동을 황제로 세웠다가 11월 소동을 폐하고 스스로 한나라 황제가 되었다. 대 보 3년(AD. 552년), 왕승변과 시흥태수 진패선의 공격을 받고 후경은 가죽 주머니에 두 아들을 넣어 동 쪽으로 달아났다. 배를 타고 장강을 건너 북쪽으로 도주할 생각이었지만 추격병이 계속 쫓아왔다. 이에 빨리 도주하기 위해 자기 자식들을 강물에 집어넣고 도망갔지만 지쳐 잠든 사이에 부하들에게 살해되었 다. 후경의 난은 평정되었으나 양나라의 국력은 크게 쇠약해지고 영토의 반 이상이 서위와 북제에 넘어 갔다. 4월 황제를 칭했던 무릉왕, 태위 익주자사 소기는 소역에게 화해를 구걸했으나 거절당하고 7월에 토벌당한 후에 다음해(AD.553년), 피살되었다. 11월 소역은 강능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폐허가 된 수도 건강 대신에 자신의 근거지인 강능으로 천도했다.
승성 2년(AD. 553년), 서위의 사신을 접견했다. 하지만 대우가 북제의 사신보다 못하다는 구실로 서위 의 승상이자 권력자였던 우문태는 불만을 품고 이를 구실로 살해당한 소예의 동생인 옹주자사 소찰의 지지와 지원하에 5만 명을 출병시켜 원제 소역을 공격했다. 소역의 조카뻘인 소찰은 강능과 가까운 요 충지 양양을 서위에게 스스로 바치고 서위군과 함께 형주 강능을 공격해 왔다. 승성3년(AD. 554년), 강 능이 포위되고 외성이 열려서 서위군이 들어오자 소역은 절망하며, 만권의 책을 읽고 오는 이렇게 일생 을 마치는 구나, 하면서 그동안 수집하였던 고금도서 14만 권을 불살라 버리고 내성으로 퇴각하였다. 결국 12월에 사로잡혀 궁중 구의고에 구금되었다가 머지않아 소찰의 지시에 의해 피살되었다.
제 5대 민황제(AD. ?∼AD. 556)
양무제의 형인 장사선무왕 蕭懿(소의)의 5남으로 원제 소역의 사촌 형제이다. 아버지 소의는 제나라의 상서령이었으나 동혼후 소보권에 이해 살해되었다. 이 후 무제가 소보권을 죽이고 화제 소보용으로부터 선양받아 양나라를 세운 뒤 정양후에 봉해졌다. 후경이 동위에서 양나라로 항복해오자 무제는 동위를 공격하기 위해 후경과 소연명에게 군대를 이끌게 했다. 그러나 양나라군은 패배하였고 소연명는 동위에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소연명은 작위를 받았지만 공위에 계속 억류되었다. 동위에서 소연명과 후경 을 바꾸자는 서한을 보내오자 무제는 동의하고 정양후를 보내주면 후경을 저녁에 보내주겠소. 라고 답 신을 보냈다. 그러니 이것은 후경이 고징의 명으로 위조하여 보낸 가짜 편지였으며, 무제가 자기를 버릴 것이라는 확신을 얻은 후경은 정예병을 데리고 건강으로 진격했다. 이후 후경의 난에 의해서 양나라는 쇠약해졌고 난을 평정한 양원제도 서위에게 붙은 소찰에게 살해되었다. 그러자 원제의 신하인 왕승변과 진패선은 진안왕 소방지를 옹립하려 했다. 그런데 동위를 멸망시킨 북제는 서위에 대항하기 위해서 억 류되어 있던 소연명을 군대와 함께 보내 즉위시킨 뒤에 후방을 튼튼히 하고자 하였다. 북제의 군세에 밀린 왕승변은 그를 즉위시키려고 했으나 이에 반대하는 진패선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제와 왕승변의 군대에 밀리기 시작한 진패선은 마침내 소방지를 황태자로 세우는 조건으로 소연명을 즉위시 키는데 찬성했다. 소연명이 즉위하자 북제의 근대는 물러갔고 이 틈을 노린 진패선이 왕승변을 공격해 죽이고 그 일당 까지 모두 제거하였다. 이어서 소연명을 폐위하고 소방지를 즉위시켰다. 이 후 진패선은 소연명을 북제로 쫓아내려 했지만 그 전에 소연명이 병사하였다. AD. 557년 소장이 황제에 즉위하자 소연명을 숙종 민황제로 추존했다.
제 6대 경황제(AD. 543∼AD. 558)
대동 9년(AD. 543년)에 원제 소역과 하씨의 9남으로 태어나 승성 원년(AD. 552년)에 진안왕으로 책봉되 고 이듬해 강주자사에 임명되었다. 소방지의 형제들은 대부분 요절하거나 서위군의 강능 습격때 소역과 함께 사망했다. 승성3년(AD. 554년), 태위 왕승변. 사공 진패선에 의해 태재로 옹립되었다. 소태 원년 (AD. 555년), 정월 서위군이 강능을 깨뜨리고 소역을 죽이며 소찰을 황제로 세우고 괴뢰 정권인 후량을 건국했다. 거기에 북제는 8년전에 사로잡았던 정양후 소연명을 석방시켜 양나라 황제로 세우고 강남을 뺏을 작정을 했다. 2월 소방지가 황제에 올랐으나 북제는 소방지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왕승변에게 서한을 보내 소연명을 황제로 세우라고 했지만 왕승변은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북제의 군대가 침공해오 자 왕승변은 겁을 먹고 소방지를 황태자로 세우는 조건으로 소연명의 동의하에 황제로 세웠다. 원래 진 패선과 왕승변은 후경 토벌부터 대권장악까지 함께 한 사이라서 서로의 자식들을 정략 결혼시켰다. 그후 견해 차이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9월에 진패선은 군대를 보내 왕승변을 죽였고 소연명은 스스로 퇴위했 다. 10월 진패선은 다시 소방지를 다시 황제로 추대하고 대권을 장악했다. 소태 2년(AD. 556년), 북제는 서사위. 임약과 함께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다시 건강을 공격했지만 진패선이 북제군을 대패시키고 서사 위를 사로잡은 다음 죽였다. 이로 인해 진패선은 여러 관직을겸임했다. 태평 2년(AD. 557년), 9월에는 상 국이 되고 10월에는 진왕이 되었다. 10월 소방지는 진패선의 협박을 이기지 못해 그에게 선양하고 강음 왕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이듬해(AD. 558년),4월 진패선은 사람을 보내 소방지를 죽였는데 이때의 나이 가 16세였다. 그래도 진패선은 양나라 황족 소씨를 몰살시키지는 않았다.
영가왕 (AD. 548∼AD. 577)
소역의 손자이며, 소방등의 아들이다. AD. 552년, 조부 원제가 즉위한 뒤에 소장을 영가왕에 책봉했다. AD. 554년, 서위가 소찰과 함께 강능을 점령하고 소역을 죽였을 때 당시 7세에 불과했고 추격을 피해 민가에 숨었다. 이후 왕림이 소장을 찾아 건강으로 보냈다. 그러나 건강에 도착한 소장은 경제 소방지가 즉위한 후 인질이 되어 북제로 보내졌다. AD. 557년, 진패선이 소방지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양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건국하자 왕림 등은 양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북제에 소장을 돌려보낼 것 을 요청했다. 왕림 등은 소장이 도착하자 그를 郢州(영주)에서 양나라 황제로 옹립했고 소장은 이듬해인 AD. 558년 연호를 천계로 개원했다. 소장은 장강 중. 상류의 땅에 의지하여 진나라와 싸웠다. AD. 560 년, 王琳(왕림)과 진나라의 후진이 무호에서 싸웠다. 그런데 이 때 북주에서 군사를 보내 영주를 공격하 자 결국 왕림이 패배했고, 영주는 함락되었다. 이 때 소장은 북제로 도망쳤으며 이로서 양나라 부흥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소장이 북제로 달아나자 북제는 소장을 양왕으로 봉하고 양나라를 다시 일으키도록 허 락하고 도왔다. 하지만 이미 북제가 망해가던 시기라 크게 성과는 없었다. AD. 577년 북제가 북주에게 멸망당하자 소장은 분통해하다가 옛 북제의 수도 업에서 병으로 죽으니 향년 30세였다.
사료 출처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과 司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 그리고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