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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이동석
이영준(큐레이터, 김해문화의전당 전시교육팀장)
2015년 1월 4일. 양산 석계 공원 묘원의 바람은 차갑기만 했다. 함께 대안공간 섬을 만들었고 생전에 그와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 그림이야기를 했던 친구 이동석이 묻혀 있는 곳이다. 그의 기일은 1월 9일이지만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 이곳을 찾는다. 매년 그와 나는 이렇게 만난다. 동석씨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함께 온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보고 여전히 흐느낀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심경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하지만 또 그렇게 스산한 풍경 속에 그를 두고 와야만 했다.
이동석에 대하여
이동석은 1964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교직공무원이었던 부모님을 따라 통영으로 이사를 했으며 그곳에서 통영초등학교와 통영중학교를 나왔다. 마산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 82년에 검정고시를 쳤다. 인하대학교 전자계산학과에 입학하여 1991년에 졸업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취직도 했다. 아마 그가 직장생활을 계속했다면, 혹은 그림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면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과거 그가 그린 통영풍경을 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유화로 그린 그의 그림은 상당한 재능을 확인 할 수 있었으며, 결국 그가 미술판에 몸을 담게 된 이유를 짐작 할 수 있었다. 이동석은 직장을 그만두고 1994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에 입학한다. 그의 대학원 졸업논문은 <시각매체에 있어 테크놀로지의 문제>였다. 공대생 전력이 있었던 그는 테크놀로지의 문제를 항상 사유의 중심에 두었다. 가령 <디지털 환경의 대두와 미술의 진로>, <매체와 테크놀로지의 현상학적 이해>, <하이-테크놀로지 미술의 위상과 전망> 등과 같은 글은 이러한 그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이 글들은 지금 읽어도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 전혀 없다.
그리고 졸업 후 1997년에 <시각의 세계와 전자 테크놀로지의 오로라>라는 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미술평론가로 비평활동을 시작하였다. 글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원고 청탁은 줄을 이었고 거절을 못하는 성품 때문에 짧은 시간 참 많은 글을 남겼다. 그해 이동석은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사로 근무하게 되면서 조현화랑 큐레이터로 일하던 나와 자연스럽게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사실 상업화랑 큐레이터는 큐레이터라기보다는 갤러리리스트에 더 가까웠지만 그 당시에는 큐레이터라는 말 자체가 생소한 시절이었기에 이에 대한 섬세한 구분이 없었다. 지금은 전문적인 전시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당시에는 전시를 기획한다는 개념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큐레이터란 말은 매우 생소한 단어였다. 그리고 부산시립미술관은 서울시립, 광주시립 다음에 만들어진 전국 3번째 국공립 미술관이었으며 전시관람 문화도 없었고 화랑도 몇 개 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어쨌든 이동석은 1998년 시립미술관 개관 기념전인 <미디어와 사이트>를 비롯해 <한국단색회화의 이념과 정신>, <영화와 미술>, <도시와 미술-부산의 시간과 공간>, <그리드를 넘어서>, <센스&센스빌리티> 등 여러 전시를 기획하였다. 그의 전시들은 지역 미술계 뿐 아니라 전국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동석이 기획했던 부산시립미술관 개관전 <미디어와 사이트>는 매체미술에 있어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었으며 조덕현, 김수자, 박현기, 육근병, 안규철, 최정화, 전수천, 홍순명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의 동시대 미술에 있어서 선구적인 존재들이 되었다. 그리고 <영화와 미술>은 부산 국제영화제가 모티브가 되어 기획되었지만 영화와 미술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분석한 매우 흥미로운 전시였다. 가령 캔버스와 프레임을 대비시키고, 필름․테이프․애니메이션․카메라 등 영화적 요소들로 작업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함으로써 두 장르의 상호영향 속에서 투영되고 반영되는 양상들을 드러내는 전시였다. 이 전시는 지금이라도 다시 만들어 이동석의 생각대로 “특색있는 국제적 영상미술제”로 성장 시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리드를 넘어서>에서는 그리드를 모더니즘 미술을 태동시키고 전개시킨 이념의 근간으로 해석하여 이를 넘어서는 작가들을 재조명하였다. 이동석의 전시기획적 특징 중의 하나는 디자인(간판), 영화, 도시(건축), 만화 등 인접 장르들과 미술의 상호소통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또한 이들 장르들을 미술관으로 끌어들이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사실 이동석이 재직하던 시절 부산시립미술관의 전시가 가장 많은 호평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초창기 지역공공미술관의 큐레이터로써의 이러한 그의 성취는 그저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술행정이라는 개념이 전무했던 시기 학예실은 그야말로 미술관의 가장 약한 고리였다. 예를들어 지금은 전시장 벽면에 색을 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벽면 채색은 불가능한 일이다. 전시연출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무엇보다 시설팀에서 허가를 해주지 않아서다. 학예적인 일보다는 전시기획에서 발생하는 행정적인 일이 더 많은 업무를 차지하고 있었고 학예사에 대한 사회적 의식은 그야말로 ‘듣보잡’일 뿐 이었다. 이에 대해 대전시립미술관 김준기학예실장은 이동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가 있다.
“이동석은 미술관에 종사하는 지식인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연구자로서 살기를 갈망했다. 그는 학예연구사(學藝硏究士)가 행정적 절차에 치어 산다는 점을 비꼬아서 ‘잡예사(雜藝士)’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그는 20세기 말에야 비로소 본격화한 대한민국의 공공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서의 정체성을 심으려고 노력했다. - 중략 -미술관 큐레이터는 인류사적 유산을 다루는 지식인이다. 미술관 종사자로서의 큐레이터는 홀로 빛나는 별이기 보다는 미술관 제도를 통해 소통하는 ‘집단지성’의 일원이다. 이동석은 미술관 큐레이터로서 희망을 찾았고 공무원 큐레이터로서 절망했다. ”
이러한 절망은 이동석의 글 <학예연구사 구보씨의 하루>에 잘 드러나 있다. 포럼A에 실려 당시 전국적으로 커다란 화제가 되기도 했던 글이다. 그의 글 마지막 무렵에 이런 대화가 등장한다.
“구보, 요즘 집에가서 연구 좀 하나? 오늘 당직인 학예사 S가 퇴근을 준비하는 구보씨에게 묻는다. 연구? 물론 자조섞인 농담이다.
“아니 대신 시집이나 소설을 읽지.”
“누구 꺼?”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그러믄 연구는 언제하냐?”
“응 그래도 심리적 보상이라도 돼.”
“구보, 우리는 언제쯤 연구를 하는 연구사가 될 수 있을까?”
“달나라 미술관에 가서 알아봐라. 담배나 줘.”
“구보 담배 좀 줄여.”
“내비두어. 나 그냥 이렇게 살다 장렬하게 전사할래.”
“죽지마 구보”
연구를 할 수 없는 학예사의 자조가 섞여있는 이글은 이제 막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국공립미술관 학예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교육을 담당하는 educator, 소장품을 보존 처리하는 conservator, 미술품 대여 및 구입 업무담당은 registrar 등 업무가 세분화되어 있지 못했던 초창기 큐레이터들은 이러한 업무 외에도 행정적인 처리까지 도맡아야 했다. 이동석이 그토록 치열하게 학예실의 입장을 대변한 것은 그의 성품이 유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학예실의 위상을 제대로 세우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는 경직된 행정과 관행으로 인해 늘 벽에 부딪혔고 심한 업무적인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그러다 1999년 이동석은 김성연과 필자와 함께 한국 최초의 대안공간인 “섬”을 출범시킨다. 197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대안공간 운동은 90년대 말에 아시아 전역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대안공간들은 이 시기에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는데 그 시작이 부산의 ‘섬’에서 출발한 것이다. - 서울에서는 대안공간 풀과 루프가 만들어 지기도 하였다. - 모더니즘에 대한 뚜렷한 저항의식을 가졌던 미국의 대안공간들과는 달리 한국의 대안공간들의 성격은 매우 다양했다. 어쩌면 미술계의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했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했다. 부산은 1980년대 ‘사인화랑’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대안공간이라는 이름이 없던 시절 이미 충분히 대안공간스러웠던 사인화랑은 예유근, 박은주, 김응기, 정진윤이 설립한 공간이다. 이 전통을 이어받은 섬은 운영하는 동안 신진작가 발굴, 큐레이팅의 개념이 들어간 전문 기획전시의 시도, 학술세미나, 전시기획공모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이 활동은 이후 ‘반디’가 계승하게 된다. 그런면에서 이동석은 부산에서 대안공간의 탄생에 가장 커다란 역할을 했던 장본인이다.
뿐 만 아니라 글을 청탁 받으면 거절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이제 막 큐레이터 시대를 열었던 부산에서 이동석에 대한 미술비평적 기대는 매우 컸었다. 수많은 작가들이 그에게 글을 청탁했으며 신문과 미술전문지에 하루가 멀다하고 그의 글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이우환, 박서보, 정상화, 곽덕준, 김기린, 김정명, 허황 등 원로작가들 뿐 아니라 이용백, 이정진, 최석운, 박재현 등 많은 중진작가들도 그에게서 글을 받았다. 미술을 넘어 동시대 문화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그 많은 삐삐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참여를 통한 변화와 도약>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으며, 미술관이나 미술제도에 관한 글로는 <시립미술관의 위상확보를 위한 실천방안>, <도시, 현대미술, 그리고 비엔날레>, <또 하나의 미술관 또 하나의 큐레이터> 등이 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고 그의 글을 정리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지만 이동석은 틈틈이 시를 쓰고 있었다. 문학적 감수성이 남달랐던 그는 <눈물보다 작은 세상>, <바다로 가는 엽서>, <조르주 루오의 동판화에 관한 연구> 등의 시를 남기고 있다. 그의 시중에 <바다로 가는 엽서>라는 시가 있다. 이 시의 마지막 단락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해도, 꿈을 꾸면
어김없이 잠을 깨는 바다
달아와 척포,
눈물에 절어 더 아름답던 통영의 바닷가
밀물에 머리잡힌
해조처럼 더불어 흔들리는 법을 배우고자
지친 뼈마디에 파도가 인다
또 바람이 분다 모두 멀리서 왔다
찌들어 엉긴 가난의 추억
따갑던 젊은 날의 불볕도 지나
가슴에 섬 하나 품고
다시 물길을 간다
꿈길을 간다
깊은 슬픔이 내재되어 있는 이 시에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통영의 아름다움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동석과 나는 간혹 통영에 가서 그가 그렇게 자랑하던 통술집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거의 밤을 새워 마신 술의 취기로 인해 바다에 입수한 적도 있었는데 그 때 바다위에 빛났던 윤슬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랬던 그가 2004년 1월 우리 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 송년회를 하고 헤어진 지 며칠 후 그가 의식불명 상태라는 연락을 받았다.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의료기기의 도움으로 겨우 호흡을 이어가고 있었다.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사로 재직하던 7년 동안의 부산생활을 통해 그는 수없이 많은 글들을 써내려갔고 주옥같은 전시들을 기획했다. 대안공간 섬을 만들어 실험적인 문화활동을 전개했으며 국공립미술관 초기 학예실의 위상을 만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했다. 하지만 너무도 짧았던 그의 삶. 무엇이 그리 급해서 이처럼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 갔을까?
큐레이터 이동석이 남긴 것들
대전시립미술관 김준기 학예실장의 언급대로 “이동석은 미술관 큐레이터로서 희망을 찾았고 공무원 큐레이터로서 절망” 했지만 이는 한국에서 초기 국공립미술관 큐레이터들이 공통으로 겪었던 현실이었다. 그 척박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건강도 돌보지 않고 일했던, 사명감 깊었던 공무원 큐레이터였다. 그는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실천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대안공간 섬은 다시 반디로 부활했고 오픈스페이스 배나 비아트처럼 다양한 대안적 실천들로 발전했다. 그리고 그를 추모하기위해 만들어진 “이동석 전시기획상”은 전국에서 큐레이터들을 위한 거의 유일한 수상제도이다. 2008년부터 이경민, 김종길(경기도 미술관 큐레이터), 김학량(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 교수), 조선령(부산대 교수), 김재환(경남도립미술관 학예사), 채은영(우민 아트센터 학예실장), 김희진(독립큐레이터) 등 유수의 큐레이터들이 이 상을 수상했다. 이 수상자들은 자신만의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전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큐레이터들이다.
비록 큐레이터 이동석은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갔지만 그가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은 생각보다 많다. 그래서 김준기(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는 그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이동석이라는 한 큐레이터가 있었고 그가 남긴 위기의식과 절망을 기억하며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절망 너머의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다. 이것이 기억의 힘이다. 비록 집단관음증의 아이콘으로 큐레이터라는 직종이 오르내리고, 학예연구사가 아니라 잡예사로서 일하느라 연구는 못하고 잡무에 골몰하고 있고, 해마다 수많은 큐레이터들이 계약직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독립큐레이터로 독립해야만 하는 현실이지만, 우리에게 이동석이라는 멋지게 살다간 큐레이터에 대한 기억이 있다는 것. 고마울 따름이다. 큐레이터 이동석의 삶에 존경과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