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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원문보기 글쓴이: isadora
★ 서울의 새로운 물길, 淸溪川(제 1구역: 청계광장~오간수교) ★ 시청과 광화문, 종로로 이어지는 서울의 심장부는 오랫동안 잿빛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공간이었다. 그런 서울의 모습이 드디어 10월 1일, 새롭게 탈바꿈했다. 답답한 뚜껑을 걷어내고 하늘을 향해 몸을 드러낸 청계천에 다시금 맑은 물길이 돌아와 누구나 도심 한가운데서 여유로운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청계천의 새로운 변신은 환경친화적인 도시로 변모하는 서울의 발자취다. 1960년대만 해도 종로통에는 북한산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광화문에는 콘크리트로 덮이지 않은 청계천의 물줄기가 졸졸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청계천은 세월과 함께 콘크리트 아래에 묻혔고, 복개되기 전의 청계천을 추억에 담고 있는 세대도 이제 서서히 사라져 간다. 번잡한 잿빛 상가 지역으로만 각인되어 있는 청계천이 한때는 아낙네의 빨래터였고 아이들의 놀이터였으며, 생활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을 지금의 젊은이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으로 서울의 서북쪽에 위치한 인왕산과 북악의 남쪽 기슭, 남산의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도성 안 중앙에서 만나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연장 10.92km의 도시 하천이다. 1938년에 출간된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에는 그 시절 청계천변 사람들의 일상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빨래하는 아낙들의 수다, 천변의 노름판, 천변길을 요란스레 지나는 자전거와 인력거, 개천을 놀이터 삼아 하루종일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읽노라면 광교 근처에서 태어나 살아온 작가의 진한 청계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간 조선시대에는 청계천변이 서울 사람들의 흥겨운 놀이 공간 이기도 했다. 19세기에 쓰여진 세시풍속서 "동국세시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장안 남녀들이 온통 저녁 종소리를 들으려고 열운가의 종각으로 몰려든다. 종소리를 다 들은 다음 흩어져서 여러 곳의 다리를 산책하는데 밤을 새워 행렬이 끊어지지 않는다. 이것을 답교라 한다. 혹 어떤 이는 말하기를 교(橋)가 우리나라 말로는 다리(脚)로 발음되므로, 속담에 이렇게 하면 1년 동안 다리에 병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답교는 큰 광통교와 작은 광통교, 수표교에서 가장 성했다." 그러나 청계천변의 낭만은 시대와 함께 사라져 가고 고단한 생활의 흔적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워 나갔다. 전쟁 이후 천변에는 피난민과 월남민들이 모여들면서 얼기설기 엮은 판자집이 들어찼고, 제방 위로는 군부대에서 나온 물건을 파는 고물상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1970년대 판잣집은 허물어지고 "똥물"이 흐르던 개천은 복개되었다. 청계천변은 대규모 상업, 경제의 중심지로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성공 신화를 낳은 청계천은 근대 도시화 과정이 낳은 찌거기들까지 함께 안고 오늘에 이르렀다. 청계천 복원 사업은 1990년대 초 "청계천 살리기 연구회"라는 전문가 포럼이 생겨나고 이 모임에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가세하면서 모닥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박경리 선생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서울이 우리의 얼굴이라면 청계천은 그 중심인데 우리는 그 주변을 쓰레기통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지역을 문화와 경제가 함께하는 서울의 상징 거리로 만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맑은 물과 나무가 있고 그 속에 물고기가 뛰노는 청계천변에 공연장, 미술관, 전시장을 만들어 우리의 특색 있는 문화를 보여 주고, 유명 상품들을 취굽하는 상점들도 들어선다면 외국인들이 와서 일도 보고 여가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청계천이 복원된다면 서울 시민들이 숨쉴 수 있는 휴식 공간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기도 하고요."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청계천 살리기"는 차량의 소통 문제, 60만 톤에 달하는 건축 쓰레기 처리 문제, 광교와 수표교의 복원 문제 등 수많은 난제와 마주쳤다. 그러나 서울시의 추진력과 서울 시민들의 자발적 협조에 힘입어 드디어 10월 1일 준공되었다.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번에 완공된 청계천은 새롭게 복원될 전체 모습의 10~20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재개발이 더 진행되고 새롭게 거리가 조성되면서 청계천은 지금 눈에 보이는 모습은 물론, 머릿속에 그려지는 모습과도 달라질 것이다. 지금은 도로들이 있는 자리와 심지어는 건물 아래의 청계천까지 드러나면 진정한 자연 하천의 복원과 역사 복원에 대해서도 또 다른 논의가 가능 할테고. 그것은 서울 르네상스의 진정한 시작을 의미할 것이다.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고 수많은 사연이 숨쉬는 만화경 같은 이름 청계천. 이제 곧 청계천에는 도시의 하수를 담은 구정물이 아니라 그 어느 시절보다도 더 맑은 물이 흐를 것이다. 청계천변의 풍경이 세월과 함께 앞으로 또 어떻게 변모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의 눈물과 한숨과 환희는 변함없이 그 곁에서 함께 흘러갈 것이다. 우리는 꿈을 꾸어 본다. 머지 않은 어느날, 밝은 하늘 아래 다시 흐르는 청계천변에 서울 시민들이 모여 연을 날리고 다리를 밟으며 정월을 맞는 풍경을. 어서 빨리 물 위에 비친 그 훈훈한 표정들을 즐겁게 만나고 싶다. *글: 조광권* *제 1구역 청계광장에서 오간수교까지: 2.9Km, 48분 소요 *제 2구역 청계6가 맑은내 다리 - 청계7가 다산교 - 영도교 - 황학교- 비우당교 - 무학교 - 두물 다리 - 고산자교 - 신답철교까지/ 총 22개 다리, 5.8Km, 1시간 44분 소요 청계천이 시작되는 세종로에 조성된 청계광장. 삼색 조명이 어우러진 캔들 분수와 4m 아래로 떨어지는 2단 폭포가 장관을 연출한다. 밤이면 빛과 물이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폭포 양 옆에는 전국에서 돌을 가져온 8도석으로 제작된 ‘팔석담’을 깔았다. 모전교 - 옛 교량 명칭으로 길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과일을 파는 과전(果廛)을 "모전[隅廛]"이라고 불렀는데, 이 다리가 바로 그 모전 부근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광통교 - 옛부터 서울에서는 큰 다리로 알려져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도성의 많은 남녀가 이 곳에 모여 답교(踏橋)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남녀가 답교를 즐기고 있다. 이 다리에 놓여진 돌들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묘를 황화방 정동에서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기고 당초 묘에 썼던 돌들을 옮겨 다리를 건설하는 데 사용하였다. 태종 이방원이 자신의 계모인 강씨의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묘에 사용되었던 돌들을 다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당시 이방원의 강씨에 대한 미움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모전교와 광통교 사이 문화 전시공간 - 청계천이 새로운 문화의 핵심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복원이후 하루 평균 15만여명이 찾아들면서 도심에는 사랑의 향기가 피어난다. 삭막한 콘크리트 더미가 걷힌 청계천에는 비로소 시원한 바람이 빌딩 사이로 스며들고 청계천변은 매일 문화마당이 펼쳐진다. 청계천 복원은 각박한 일상에서 잊고 살아온 문화에 대한 갈망을 일깨워 주웠다. 서울의 주인이 결코 빌딩이나 도로를 점령한 차들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직시케 만들었다. 서울문화재단의 공개 오디션을 통해 엄선된 제1기 아티스트 36명이 청계광장, 광통교, 세운교 그리고 황학교, 두물다리 등 10여 곳에서 활동 중이다. 석고마임, 클래식 연주, 거리 댄스, 풍물, 힙합 같은 공연 예술부터 캐리커쳐, 오색혁필화, 서예 등 다양하다. 영국, 호주, 미국 출신 전문 거리예술가들의 분장 퍼포먼스, 코미디 퍼포먼스, 키다리 서커스도 인기 만점이다. 광교(주황색 다리)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班次圖)" 벽화 - 광교, 장통교, 삼일교 사이에 걸쳐 설치되어 있다. 이 반차도는 1795년(정조19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이하여 화성과 현륭원에 다녀와서 만든 8일간의 행차보고서이다. 벽화는 1,779명의 인물과 779필의 말의 행진하는 모습을 담은 63쪽의 그림이다. 김홍도 지휘 아래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 쟁쟁한 화원들이 합작으로 그린 작품으로 문화적 예술성이 매우 높다. 이 반차도는 왕의 행차가 창덕궁을 떠나 광통교를 건너 화성으로 가는 모습이다. 왕조의 위엄과 질서를 장험하게 표현하면서도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인물묘사가 돋보인다. 청계천에 설치된 정조 반차도 벽화는 원본 그림(가로 15m, 세로 18cm)을 확대·모사한 백자 도판(30cm×30cm) 4,960개를 이어 붙여 만든 것으로 길이 186m, 높이 2.4m로 세계 최대 규모다. 장통교 - 관철동과 장교동을 잇는 다리. 이 다리 근처에 ‘장찻골’로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 하여 이 부근에서는 ‘장찻골 다리’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원명은 중부 장통방에 있던 다리이므로 장통교, 혹은 줄여서 장교라 하였다. 삼일교와 임시 보도교 사이에 설치된 대형 잠자리 모형 임시 보도교는 수표교 터에 위치하고 있으며,시민과 주변 상인들의 편의를 위하여 수표교 복원 전까지 사용되어질 임시 다리다. 관수교(觀水橋) - 전통 대청양식을 도입한 아치교. 관수교는 1918년 일본에 의해 지금의 청계 3가 사거리에 놓여있던 다리이다. 이곳에 청계천 준설사업을 위한 준천사가 설치되어 있었고 준천사에서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옛 교량 명칭으로 현 관수동에 위치 함. 세운교가 보이고 오른쪽 건물이 세운상가. 옛 효경교 터 - 효경교는 영풍교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부근에 맹인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맹교 또는 소경다리라고도 하였다. 청계천 복개시 철거되었는데 다리의 기초 부분에 해당하는 석조 구조물을 발견하여 현재 위치에 보존하고 있다. 새벽 다리 - 방산시장 앞에 있으며 시장 천막의 이미지를 막구조로 적용하여 동대문 재래시장의 역사성 및 향수를 연출하였다. 마전교 - 인근 옛교량 명칭으로, 다리 부근에 우마(牛馬)를 매매하는 마전(馬廛)이 있었다. 나래교 - 평화시장 앞,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편 형상의 다리로, 동대문 의류상권의 중심지역에 위치하는 교량이다. 인근 동대문 의류상권이 세계 패션 1번지로 비상하는 의미를 담았다. 버들 다리 - 과거 오간수문 상류에 왕버들이 많았었다는 데서 명칭을 인용하였다. 오간수교 부근의 분수대 - 오간수교는 동대문에서 을지로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다리이다.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 나가는 지점에 놓여 있던 다리로 홍예문(紅霓門)으로 다섯 칸으로 되었다 하여 "오간수 다리" 또는 "오간수문" 이라 하였다. 문화의 벽 - 버들 다리와 오간수교 사이에 설치되어 있다. 문화의 벽은 "미래로 가는 길"이라는 주제로 전갑배 서울시립대 교수 등 도자작가 5명의 작품들로 청계천 맑은 물 속에서 아이들이 물고기, 자라, 개구리 등과 함께 노는 모습 등을 표현하였다. 작가별 작품은 각각 가로 10m, 세로 2.5m 규모로, 이들 작품들은 석기조합토, 백자토 및 자기질점토 등을 재료로 20∼40㎝ 크기의 도판을 만든 뒤 이를 벽화로 구성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했다. 청계천의 새로운 물길 따라 평화시장의 간판들도 말끔하게 바뀌었다.
첫댓글 지난 일요일에 아이들이랑 갔다왔는데 아이들이 뛰고 노는사이 그냥 지나쳐서 온 곳도 많았는데 덕분에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