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질 수 없는 연결고리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29-30).
본문은 28절에서 언급한,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 대한 상세한 해설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증거한 다음에 ㉡ “끊어질 수 없는 연결고리”에 대해서 말씀하고, ㉢ 마지막으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① 먼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의미합니다.
㉠ 모든 일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主權) 하에 그 뜻대로 이루어져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임기응변(臨機應變)이라든가, 즉흥적으로 되어지는 일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예지 예정”하신 그 뜻대로 이루어 나가십니다. 이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절대주권을 돌려 드린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요점입니다.
㉡ 사도가 하나님의 주권을 얼마나 앞세우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사도는 로마에 가기를 무척이나 원했습니다. 그런데 서두에서,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1:10) 한 사도는 말미에 이르러서도,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기를”(15:32) 원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점을 에베소서 1장에서 더욱 확인할 수가 있는데,
㉮ 첫 말씀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1) 합니다.
㉯ 5절에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합니다.
㉰ 9절에서는,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합니다.
㉱ 11절에서도,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하고 말씀합니다.
㉢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신” 시점을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하고, 창세전에 계획되어진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② 주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받드셨습니다.
㉠ 그 점을 요한복음을 통해서 상고해 보면,
㉮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4:34) 하십니다.
㉯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6:38) 하십니다.
㉰ 주님은 심지어,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 하고까지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 사도는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받들어 드리는 것,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 중심인 것입니다.
③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이 가장 어렵고도 중요합니다.
㉠ 사도는 교리부분을 마치고 실천 윤리(倫理)를 말씀하는 서두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하고, “하나님 뜻 분별”이라는 말씀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열심”은 도리어 방해(妨害)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④ 논란이 많은 예정교리가 어느 기초(基礎) 위에 세워진 말씀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예정교리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라는 점입니다.
㉠ 이 순서를 바꾸기 때문에 예정교리에 대한 거부감과 곡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 앞에 복종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자신의 이성(理性)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려 들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서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
㉡ 인간이 “증명”해서 보여줄 수 있는 분이라면 그 분은 이미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조(人造) 하나님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절대주권을 돌려 드린다면, 예정교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 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⑤ 다음으로 본문에는 “황금의 연결고리”라 불리는 다섯 개의 고리가 있습니다.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가 그것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 것은 세 번째 고리인 “부르심”에서입니다. 부르심을 중심해서 앞에는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이 있고, 뒤에는 “의롭다 하심과 영화롭게 하심”이 있습니다. 앞으로 남아 있는 하나의 고리는 “영화롭게” 하심뿐입니다. 영화롭게 하심이 구원의 최종목표인 것입니다.
⑥ 사도가 28절에서,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한 선은, 결국 우리가 누리게 될 “영화롭게 하심”임을 알게 됩니다.
㉠ 다시 말하면, “황금의 연결고리”는 중단(中斷)되거나 끊어지지 아니하고 결국은 “선”, 즉 완성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택하시기는 했는데 부르심이 없다든지, 부르시기는 했는데 의롭다고 여겨주시지를 못한다든가, 의롭다고는 하셨는데 영화롭게 하시지 못한다는 그런 일이란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계획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⑦ 다섯 개의 고리 중에서 인간이 담당해야 하는 고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모든 사람들은 그 고리에서 낙오(落伍)하고야 말 것입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진행되어 나아가는 것이 구원계획이라면, 시작하신 것을 성취하시고, 반드시 완성이 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다섯 가지 서정(序程)들이 모두가, 이미 되어진 양 과거시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화”는 분명 미래(未來)에 되어질 일인데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고, 벌써 영화롭게 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일이기 때문에, 벌써 이루어진바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볼 때 그것은 벌써 받은 것입니다.
⑧ 예정교리가 로마서 앞부분에 나오지 않고, 8장에서야 등장한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 이 예정교리는 불신자나 초신자에게 필요한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는 1장으로 돌아가 “죄론”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초신자는 “하나님의 의”에 굳게 서는 “복음”으로 견고해지는 것이 선결문제입니다.
㉡ 그러므로 예정교리는, “저 사람은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았나 봐” 하고, 불신자에게 써 먹으라고 주신 교리가 아닙니다. 이렇게 한다면 당신이 하나님 노릇하려는 것입니다. 예정교리는 사도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苦難)은”(18) 한 문맥의 연장선상에서 한 말씀임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즉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과 고난과 시련 중에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최종적인 위로요, 확신인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와 구원의 확신을 주는 말씀은 달리는 없습니다.
⑨ 다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신 뜻대로 부르신 목적(目的)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아들의 형상(形象)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29) 라고 말씀합니다.
㉠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이것은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가 상실한, 그 형상을 회복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여,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신다”(빌 3:21)는 그 영화는, 아담 하와의 범죄 하기 이전까지의 회복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形象)을 입으리라”(고전 15:49) 하십니다.
㉡ 이것이 창세전에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신 하나님의 목적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형제를 의롭다 하시고, 머지않아 주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화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즉 삶도 주님 닮은 삶을 살아가기를 사모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끊어질 수 없는 연결고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