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우리 봉우리에 둘러싸여 첩첩산중인 박달재. 고개를 넘기 위해 거쳐 가던 마을 백운면. 산에 얽힌 사연은 박달재를 유명하게 했고 산속의 나무들은 사람들의 터전으로 가꿔졌다.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지나 38번 국도에 올랐다. 박달재 터널이 있는 제천시 백운면까지는 서울에서 120km, 불과 1시간 30분 거리다. 제천시의 명물 박달재에는 터널이 뚫렸다. 넋 놓고 달려가다간 그냥 지나치기 십상. 길가에 표지판을 따라 재를 오르는 차들은 관광버스거나 일부러 한적한 드라이브를 즐기려는 차들이다. 꼬불꼬불 언덕길은 한산하다. 박달재의 전설은 제쳐두고라도 가을을 맞은 산속 풍경은 알록달록 아름답다. 고개 아래 자리한 마을 백운면은 박달재의 봉우리 사이에 들어앉았다. 박달재 휴양림과 덕동계곡, 영화 박하사탕에서 설경구가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던 철도가 인근에 자리했다.
‘울고넘는 박달재’는 누구 이야기?
봄에는 벚꽃으로, 가을엔 단풍으로 물든 박달재 (이다일기자)
1945년 작곡된 ‘울고넘는 박달재’는 누구나 한번쯤 불러보거나 들어본 노래다. 덕분에 박달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조금 더 아는 사람들은 박달재가 원래는 천등산과 지등산이 이어진 ‘이등령’이라 불리는 고개였지만 박달선비와 금봉낭자의 로맨스가 전해 오면서 박달재가 됐다는 얘기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울고넘는 박달재’의 주인공이 바로 이들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노래와 전설은 서로 다른 얘기다. 노래의 배경은 박달재에서 이별을 하던 촌농부의 모습을 작사가 반야월 선생이 보고 만든 노래인 것이다. 반세기 전의 박달재의 모습이 노래로 전해오니 고개 정상에 마련된 조각상과 해설을 통해 그때를 회상해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촌농부의 이야기 ‘울고넘는 박달재’가 국민가요가 되어 불리니 제천시를 알리는데 톡톡히 한몫했다. 박달재 정상에는 휴게소가 있다. ‘울고넘는 박달재’노래는 여기서도 울려 퍼진다. 관광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도토리묵에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며 따라 부른다. 박달재는 조각공원도 있고 몇몇 휴양시설도 있지만 번듯한 신작로에 밀려 이제는 관광객들만 찾는 길이 되었다.
박달재 아랫마을 사람들
백운면길가에 늘어선 단층 상가가 이곳이 중심지임을 말해준다. 예전엔 버스도 많이 다니고 사람들도 많던 거리지만 지금은 한산하다. 길을 걷는 사람들도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떠났고 마을을 지키는 노인들은 추수마저 끝나면 노인정에 모여 옛날 얘기로 시간을 보낸다. 그래도 면 소재지라서 슈퍼마켓, 약국, 대포집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것을 구할 수 있다. (이다일기자)
박달재를 오르려면 제천시 백운면을 거치거나 봉양읍 원박리를 지나야 한다. 사람들은 고개아래 마을에 모여 살았는데 그곳이 바로 백운면이다. 예전엔 서울로 가는 도로를 끼고 있어 오고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여느 농촌처럼 젊은이들은 빠져나갔고 아이들이 뛰어놀던 학교는 문을 닫아 폐교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백운면의 나무들. 수십년 전 모습 그대로 사과 나무엔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고 일제강점기 송진을 채취했던 상처가 남은 소나무들은 지금도 푸르게 그 자리에 서 있다.
마침 백운면을 찾았을 때 사과 수확이 한창이었다. 이 마을에서 47년을 살았다는 이영숙(여, 69)씨는 “그전에는 박달재 가려면 여기를 꼭 지나서 갔어요. 그 땐 여기가 장사도 잘 되고 좋았는데 지금은 자랑할 것이 사과농사밖에 없죠”라고 말한다. 남편 김귀성(81)씨는 “터널이 생기니 버스들도 박달재를 지나지 않고 우리 마을은 이제 지나가지도 않아. 휴양림도 있고 콘도도 들어선다니 앞으로 발전하겠지. 대신에 공기가 좋고 계곡도 좋고 그만큼 깨끗한 자연이 있다”며 자랑한다.
백운면의 자연환경과 나무들은 이미 유명하다. 1992년 박달재자연휴양림이 개장됐다. 수령 100년에서 170년의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늘어서 여름철이면 캠핑하는 사람들이 몰려온다. 완만한 등산로를 오르면 백운산, 구학산과 함께 제천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다. 또한 7월에서 11월의 사과 수확철에 이곳을 들르면 길가에 늘어선 사과나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박달재 농원의 김영만(39)씨는 “이곳 사과는 일교차가 크고 해발 400m가 넘는 고지대에서 자라기 때문에 당도가 높다”고 전했다.
개발과 자연보호, 어떻게 조화될까
박달재 입구 왼쪽 38번 국도가 새로 뚫려 오른쪽의 박달재 입구는 간간히 관광버스만 올라가는 길이 됐다. 박달재를 넘는 대신 터널을 지나면 되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넘지 않는다. 박달재 고개는 차로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옛날에는 이곳이 영남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박달재 아래 마을에서 하루 묵고 힘을 충전해 지나갔다. (이다일기자)
길이 뚫려 교통이 편해지니 사람들이 몰려온다. 이곳 토박이인 김호연(80)씨는 “예전에는 서울에서 버스타고 4시간이 넘게 걸렸지. 지금은 길이 잘 뚫려서 금방이야”라고 말한다. 취재를 위해 찾았을 때도 1시간30분 남짓 걸렸으니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다. 지척에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있으니 사람들이 찾는 것도 당연하다. 곳곳엔 귀농을 위해 들어온 사람들이 터를 잡았고 손님을 맞으려는 펜션들도 하나둘씩 생겨났다. 20년째 이곳에서 음식점을 운영한 한 주민은 “예전에는 길도, 휴양림도 없는 산 아래 한적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대로가 뚫리고 리조트가 들어서는 개발을 하고 있다”며 변화의 모습을 설명했다.
이쯤 되면 자연과 개발 속에 조화가 걱정될 터. 해답은 ‘나무사랑’에 있다. 지역 관계자는 리조트 건설과 관련해 “산에 있는 소나무를 그대로 살리면서 자연과 리조트가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구성을 기획했다”고 설명한다. 휴양림 앞 펜션들도 마당 가득 나무를 심어 백운면의 ‘나무사랑’를 실천하고 있다. 사과나무는 주민들의 소득원이고, 소나무는 휴양림의 주축이다. 백운면의 자산이 나무이듯이 미래의 소망도 나무에 있다.
〈경향닷컴 이다일기자 cam@khan.co.kr〉
가는길/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여주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갈아탄다. 감곡IC에서 나와 제천시 방향으로 38번 국도를 타고 가면 박달재가 나온다. 버스는 동서울터미널에서 백운면으로 가는 노선이 있다.
기타정보/ 박달재자연휴양림 http://www.cbhuyang.go.kr/bakdaljae 2010년 12월31일까지 휴식년 기간동안 시설운영 및 입장이 불가능하다. 숙박은 인근지역 펜션을 이용하는것이 편리하다. 나무이야기 043-648-0206, 박달재자연휴양림 정문앞에 위치했다. 깨끗한 시설이 장점. 박달재민박 043-644-0594, 백운면 평동리에 위치했다.
박달재 노래비 박달재 정상에 오르면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온다. ‘울고넘는 박달재’가 반복해서 틀어진다. 해방직후 반야월선생이 전국 순회공연을 위해 이곳을 지나다가 비오는 박달재에서 촌농부의 이별모습을 본 후 작사했다는 노래가 이제는 비석으로 남아 있다. 박달재에 가보지 않았어도 노래를 통해 너무나 익숙한 곳이 바로 제천시 백운면 박달재다. (이다일기자)
참전용사 백운면에서 평생을 함께해온 전우들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6.25참전 전우회 회장님의 가게가 이들의 사랑방이다. 노인들은 ‘지금은 평생 일궈온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지만 요즘의 농사가 빚지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했다. 그래도 백운면은 공기 좋고 살기 좋은 곳이라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이다일기자)
박달재의 유래 원래 ‘이등령’이라 불리다가 영남에서 서울로 가던 박달선비와 고개아래 마을에 살던 금봉낭자의 로맨스가 고개의 이름을 ‘박달재’로 바꿔 버렸다. 돌아온다던 박달선비를 기다리던 금봉낭자가 상사병으로 죽자 뒤늦게 이곳에서 금봉낭자의 환영을 본 박달선비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다는 비극적 이야기다. 박달재 정상에는 조각상과 함께 글로 유래가 설명돼 있다. (이다일기자)
고갯길 박달재의 길은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아 나뭇잎이 그대로 늘어져 있다. 게다가 단풍까지 들었으니 경치는 알록달록 아름답다. 꼬불꼬불 고개길을 천천히 창문을 열고 달리면 상쾌함이 밀려온다. 덕분에 박달재는 울고 넘지 않고 웃으며 넘는 고개가 됐다. (이다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