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병원
나, 동백처럼 마음 둑둑 부러뜨리며
응급실 침대에 눕고야 보았네
선운사 도솔암 흘려읽은 글자들
아니온 듯 다녀가십시오
눈동자에 번져서 동백처럼 붉어지던
꽃잎처럼 얇아서 희미하게 미끄러지던
누가 걸어놓았을까 아니온 듯
다녀가라는 말, 응급실 침대에서 꽃잎 흐르듯
몸 흐느적거리며 주사도 마다하고 약도 밀어내며
병원 밖으로 걸어나오네
불안이나 발작 자살충동까지도
병원에 버리고 돌아오는게 아니라
꽃 피듯 꽃 지듯 내 마음 진창 어딘가에
동백꽃 무너진 자리처럼 비밀로 간직하는 것,
아니온 듯 다녀가십시오 그 전언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는 주사액처럼
혈관에 스미네
갈 곳도 없지만 나, 눈 자박자박 밟으며 터미널로 걸어가네
선운사 동백이 아니온 나를
다녀가라고 다녀가라고 부르고 있네
그 환청, 하, 음악 같아 아니온 병들도
죄다 다녀가시라고 나 응급실 불빛처럼
붉어지고 밝아지고 있었네
나, 동백처럼 눈밭 굴러다니며
무너진 마음들 궁글리고 불러들여
이 세상에 꼭 하나뿐인 병원이고 싶었네
- 『현대시』2008년 3월호.
대숲으로 가다
- 1996년
눈을 감으면 보였다 병원 근처 대나무 숲
또 밤이 오면 눈발이 대나무에 달라붙었다
나는 詩人이 될 거야, 간호사들은 비웃었지만 나는
대나무에 달라붙어 옹이가 되었다
그 해 겨울, 칼날 같이 빛나던 빙판길에서
어머니는 울었다 거리가 온통 병실이구나
마구 자빠지는 사람들은 편안해 보였고
아침의 빛다발 속에서 아무것도 부활하지 않았다
환자복에 가죽점퍼 걸치고 버스를 타면
금강의 물빛이 달려들었다
대청호가 여기서 멀지 않은데… 그 해 겨울,
대나무를 깎아서 竹刀를 만들었지만 간호사가 자꾸만
빼앗아갔다 나는 詩人이 될 거야, 날카롭게 빛나는
주사바늘 끝에서 아침 빛다발이 쏟아졌다
또 밤이 오면 눈발이 침대에까지 쏟아졌다
窓門을 닫지 말아요 나는 금강으로 가야해요,
대숲의 바람소리 병원에 부려놓으면 의사는
나보다 작아졌다 작아져서 흰 알약이 되었다 어머니,
나는 詩人이 되야 해요, 책갈피를 견디지 못한 종이가
침대 밑으로 쏟아지면 어머니는 종이들을 내 몸에
덮어주었다 네가 입을 옷이란다
또 밤이 오면 바람 부는 대숲으로 갔다
날카롭고 뾰족한 대나무는 스스로 칼이 되고 있었다
발작 이후, 테오에게
- 생 레미 요양원에서
오후에 발작, 지금은 비가 내리고 있다
간호사들은 대체로 친절하지만
캔버스를 자꾸만 치운다 팔레트와 물감도
훔쳐간다 도대체
그림 그리는 일 말고 내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
튜브를 먹으면서 빨간색 물감만
집요하게 빨았다 입술에 묻은 물감은
피처럼 내장으로 번지고
내 영혼이 측백나무처럼 통째로
하늘로 올라갈 것만 같았다
저 나무의 뿌리라든가
보이지 않는 물관을 팽팽하게 부풀려주는 일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다
떠오르고 싶은 자 떠오르게 하라
죽음으로도 별에 닿을 수 없다면
내 영혼에 구멍을 내어주마
구멍 틈새로 별빛이 빛날 테고 너는 놀라서
이곳으로 달려오겠지만,
침대 밑에서 자고 싶은 자 침대 밑에서
자게 하라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벌레처럼
침대 밑을 기어다니더라도 그것은, 테오야
낮은 곳을 그리기 위해 내 영혼을 대어보는 거란다
누군가 나를 독살하려 하고 있어
새벽에 몰래 그림 그리는 데 빗방울 사이
권총이 쇠창살로 들어오고 있었어 창문 틈으로
소용돌이치는 측백나무의 흔들림이 들린다
저 나무도 나처럼 발작,
하고 싶은 거겠지만
나도 안다 이 비 그치고 난 후에 맺혀 있을
이파리마다 맑은 물방울들.
캔버스 안에서 낯선 사내가 나를 보고 있다
측백나무 속이란다 테오야…
뼈를 추스르다
가족 납골당을 한다기에 경주 金氏 증조할머니 무덤을 들어냈다 뼈를 물고 있는 마지막 흙무더기 몇 점 걷어내자 가지런히 누운 유골, 팔십년 고요가 입을 쩍 벌렸다 죽음의 바깥이라고 쓰려는 잡념 사이로 끼어드는 송곳니. 입 안 흙 긁어내다 송곳니에 손가락이 닿았다 정정하시다 뼈를 추스러서 삼베에 얹는데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찔려 진달래 피었다 시집 와서 몇 해 만에 병으로 죽었다는데……무덤 헤치느라 뼈도 못 추린 작은 나무 몇 뿌리를 가만히 만져주었다 淸明 햇살 속에 던져놓으면 스스로 분신하겠지 흙을 잔뜩 머금은 뿌리가 꿈틀, 뼈 무더기 쪽으로 꿈틀대는 거였다
나비가 몸으로 들어와
어려운 호흡이 몸으로 들어와, 빗소리만 듣는데도 주사바늘이 꽂혀 간호사 누나, 키스할래? 자꾸 엉덩이만 만지지 말고…… 나비바늘이 필요해요 나비야 나비야 내 몸을 찌르고 너는 죽잖아, 내 영혼도 찔러줄 수 있니 죽기 전에 핏방울 매달고 춤추는 나비야 거즈는 너의 무덤, 내가 줄 수 있는 건 피 밖에 없구나…… 그런데 어디서 자꾸만 바람 소리가 들려, 어려운 호흡이 몸으로 들어와, 주치의는 춘천으로 가고 아버지는 일 나갔지요 비오는 날 나비는 어디서 잠자나, 내 몸 안에서 자지, 근육이완제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나비가 팔딱거리기 때문이잖아 나는 피우다 만 꽃이야 뿌리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고 꽃망울 터트리기엔 毒이 너무 많잖아 당신, 기이이인 하아루 지나아아고, 언덕 저편에서 나비 떼 몰고 당신 올 때면 나는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고 아 아 간호사가 몸 만질 때마다 신음소리, 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나비무덤 간호사 누나, 창녀야? 마음은 딴 데 두고 몸만 만지니? 당신이나 나나 지루한 새벽 지친 바람 줄기처럼.
큰엄마
잠자는 약을 먹은 아침에는 가지 끝에 알약만한 이슬이 맺혔다
夢遊 속에서 퉁퉁 부은 어머니 다리가 고름을 빨아내는지, 는개 내리는 봄날이었는데
곱게 화장을 한 어머니가 약 기운에 지친 내 얼굴을 몇 번이나 씻어내는 아침이었다
배롱나무가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당집 들어서서 어머니는 버선발로 몇 번이고 절을 올렸다 부르르르 관절이 떨었다
거기 웬 중년여자가 이 세상엔 없는 웃음으로 母子를 맞이하였는데 큰엄마, 어머니가 점지해 준 그 여자 웃음의 넉넉함이 나는 싫었다
울화鬱火의 뼈가 부러질 때까지 나는 배롱나무를 걷어차고 걷어찬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밥 짓고 있는 어머니에게 그 웃음이 달라붙는 거였다 그 봄날에 내가 열아홉이었으니 이제 어머니 스스로 큰 엄마가 된 거였다 배롱나무를 쓰다듬은 지가 벌써 그리 되었다
까따리나는 없다
까따리나가 없다 러시아 갔다
우리는 비 오는 날 술집 구석에서 레닌 흉상을 가지고 놀거나 바카디 알코올에 기대어 백만 송이 장미를 틔워 올리는 장난을 했다 女, 23세, 모스크바 출생, 가족 부양의 異國 여자는 만료된 비자 갱신하러 러시아 갔다 이번에는 정말 돌아오지 않을거라고, 까따리나는 긴 주소를 적어주었다 레닌 이즈 마이 히어로; 내 서투른 영어가 그녀의 조국을 흔들 때마다 까따리나는 어머니 선물로 시계가 필요하다며 브래지어끈을 풀곤 했다 그녀는 확실히 唯物論者였다
내가 한 번은 [제국주의 -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책 구석구석을 살피는 그녀는 한국어판 레닌의 저서가 다다른 都市의 피로를 어루만진다 레미 마르땡과 보드카와 로얄 살루트 사이에서 출렁이는 그녀의 한국 밤, 어메리카, 어메리카를 연발하는 스물세 살 러시아 여자에게서 나는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나 까따리나는 없다 러시아 갔다
가난한 까따리나의 의자에 앉아 보드카를 마시는 밤, 클럽 러시아 지붕으로 슬라브, 슬라브 백동전처럼 빗방울은 부서지는데, 새로 온 나타샤가 레닌의 흉상을 잡아 채 가는 거였다
나는 아버지보다 늙었다
내 몸은 아버지보다 늙었다 아버지
앞에서 자주 눕다 보면 그걸 안다
아침녘에 그이가 내 방문을 열 때
나는 밤새워 뒹굴다가도 쌔근쌔근 숨을 쉬며
잔다, 자는 척 한다 어떤 날은 십 분씩 이십 분씩
아버지가 내 몸 구석구석을 만지는데 그럴수록 몸이
뻣뻣해진다 그러다 잠들기도한다 病과
같이 지낸 9년이 아픈 것이 아니라
내 몸 안에 저희들의 첩첩산성을 쌓아둔 안정제의
안정한 성곽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한약 팩을 울분으로 잘라내는 습관적 손놀림이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오늘 아침은 아버지 핏발 선 눈이 아프다
아침인데도 그리로 해가 지고 있다
응급실에서 돌아온 아침에 그이는
蘭이 겨울을 나는 법이라든가
癌에 걸렸다가 살아났다는 윗말 김씨 얘기를 한다
그 얘기를 하는 이유를 나는 안다 당신도 안다
그이의 아버지 朴龍文씨(1918~1997) 주민등록증을 지갑 속에
아직까지 넣어 다니는 걸 나도 안다
생몰 연대가 없는 금강에서 아버지는 나를
껴안는다 스물일곱의 내가 바라보는 錦江 노을,
스물일곱에 아버지는 나를 낳으셨다 내 몸을 죽어라
껴안고 있는 그이의 심장이 펄떡거린다
비단강에 몸 푸는 목숨이여,
비단 같은 탯줄을 끊고 비단처럼
아름다운 나라로 가라,
처음 세상 나실 적처럼 우는 아버지,
나는 건강한 産母로 강바람에 오래 달궈진
버드나무 잎들을 미역대신 따 먹으리라
아버지, 불쌍한 내 자식,
아라리가 났네
아라리가 난거랑께 의사 냥반, 까운에 환장허겄다고 달라붙는 햇살이 아라리가 나서 꽃잎을 흔들자뉴 오메 發病 원인은 불안 강박 우울 공황 발작, 이런 게 아니라 아라리가 나서 그렇탕께 왜 심전도는 찍자 그러는규 술판서 언 눔이 아리랑을 불러 재끼는디 아라리가 헉 하고 피를 토해내능규 복분자가 요강을 뒤집어엎는 것 맹기루 아라리가 내 몸도 이렇게 뒤집어서리 환장허겄다고 나도 아라아리가 나아안네 부르고 있는디 내 몸이 꽃이파리마냥 바르르 떨고 있는디 그 냥반들이 응급실에다 나를 쳐 넣은규 숨이야 아라리가 쉬겄지 심장이야 지 혼자 팔딱팔딱 하는 거구 긍께 의사 냥반 이 담에 병원 와서 불안하고 우울하담서 뒤집어 자빠진 사람 있으믄 아리랑 한 번 불러주슈 아라리 땜시 잠시 잠깐 그랑깅께, 저 꼰잎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는 아라리 몸 좀 보소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믄 아라리 한번 재껴부리믄 되쥬, 나 갈라유!
- <현대시학>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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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약력 : 1978년 출생
2002년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 졸업
2001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2005년 시집 『목숨』(천년의 시작) 출간 2008년 "아라리"(랜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