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지난 겨울동안 추위 때문에 중단했던 한강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바람은 아직 조금 쌀쌀했지만 상쾌했습니다
강 바람에서도 봄 내음이 불어 오는 것 같았습니다
먼저 살던 "신정동" 에서 이곳 "염창동"으로 이사온 지도 2년이 되어 갑니다
2 년전 이사올 때 블로그에 쓴 글이 생각나서 옮겨 실어봅니다
"셋방살이" 하면 웬지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1997년도 IMF 가 나던 해에 경영하던 회사가 부도가 나고 , 아파트까지 경매로 넘어갔지요.
그 때부터 시작한 셋방 살이가 15년 째입니다.
이제는 자력으로 집을 살 능력도 안 되니 평생 셋방살이로 끝내야 하나 봅니다.
부도 직후 보증금 천만원에 월 200,000원의 13평 짜리 아파트로부터 시작해서 이번이 5번 째 이사입니다.
처음 시작한 부산의 13평 짜리 아파트에서는 양 쪽에서 햇빛이 들어오면 피할 공간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거처할 공간을 예비해 주신 것" 에 감사했지요.
길거리에 나 앉아야 할 형편이었으니까요.
그 때 기도 제목이 "거처할 공간을 주십시요" 였어요.
두번 째는 경산(진량)으로 옮겨와서 시골 동네의 2층 옥탑 방 생활을 2년 했지요.
먹고 살기 위해 전 직장의 부하 직원이 운영하는 회사의 공장장으로 취업을 했어요
나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자기도 불편할 텐데, 전직 상관을 써 주는 것 만도 감사했습니다.
부도 나고 제일 힘든 것이 재산을 잃은 것 보다
실직자가 되는 것과 월급쟁이로 전락한 것을 정신적으로 수용하기 힘든 것입니다.
아이들 셋이 차례로 서울로 올라갔는데, 아이들 방을 얻어 줄 보증금이 없어서,
우리 부부는 보증금도 없는 시골 집 옥탑 방 생활을 했습니다.
시골 옥탑방이지만 전망은 좋았어요.
창 밖을 보면 넓은 과수원이 보이고, 뒷 집의 잘 가꾸어진 정원이 우리집 앞마당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내는 이 곳에 있을 때, 한글 성경 필사를 마치고,영어 성경은 반 이상 필사를 했어요.
창 밖의 전망도 좋고, 조용한 시골이라 차분한 성격의 아내는 하루 10 시간 이상 성경 필사를 하더라구요.
그 때 저에게 암이 발견되어서 경북대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장루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도 후 6년 째 되는 해입니다. 부도로 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인 듯합니다.
세번 째는 경산 시내로 옮긴 것입니다.
시골 옥탑 방이 경관이 좋다고 하지만 생활은 불편할 수 밖에요.
무엇보다도 장루를 하게 되니, 화장실 때문에 이사를 했습니다.
2천만원을 1부 이자로 사채를 얻어서 전세로 옮겼어요,
결국 월 200,000원(이자)의 월세나 마찬 가지가 된 셈이지요.
그 곳에서 2년 정도 더 살다가,
다니던 회사 경영이 안 좋아져서 그만 두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아이들과 합쳐야 하는데, 전세는 꿈도 못 꾸고, 월세도 보증금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큰 딸이 치대를 막 졸업하고 인턴 생활을 시작할 때라
닥터 론으로 3천만을 신용 대출 받아서,
지금까지 살던 신정동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네번 째 집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6년을 살았습니다.
4천만원에 200,000 원으로 시작해서,
2년 전에 6천만원에 300,000원이 되었습니다
보증금 1천만원으로 시작해서 6천만원으로 늘었어요.
다 큰 딸이 부담해 왔지요.
다행히 대출은 다 갚아서 마음은 가벼워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세를 올려 달라고 해서 핑계겸에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월 큰 딸이 아들을 낳았어요.
딸이 출근을 하기 위해 외손주를 봐 주러 아내가 딸 집으로 8시까지 출근을 해야 합니다.
딸이 사는 곳이 여의도 셋강 역 근처라 9 호선 이용이 편한 곳을 찾다 보니 염창동으로 옮겼어요
이 번이 다섯 번째 이사입니다.
보증금 4천만원에 월세 700,000원의 23평형 아파트 입니다.
보증금을 늘리고 월세를 줄이려고 수소문해 봤는데 못 찾아서 할 수 없이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처음 13평에서 10평이나 늘었습니다.
월세 부담도 늘었지만, 밑의 아이들 둘이 분담하기로 했습니다.
큰 딸이 생활을 다 책임져 왔는데, 동생들도 조금이나마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이사 비용과 식탁, 소파, 정리장등 오래된 가재도구 교체하는 것도 부담했어요.
짐은 나누면 가벼워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고,
이제는 자기들의 몫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 고마웠고,
남매들간에 서로 배려해 주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한강 까지 5분 거리 밖에 안 됩니다.
가양대교와 양화대교의 중간 쯤입니다
선유도 공원까지 왕복 한시간 반 걸립니다.
워킹 코스를 남산 둘레길에서 한강으로 옮겼습니다.
"셋방살이" 하면 서글퍼집니다.
그러나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생각이 바뀌어집니다.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가족들이 하나가 되는 모습이 더 아름다웠습니다
긍정적으로 현실을 받아 들이고 살면
행복해집니다.
좋은 것만 생각하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삶이 즐거워집니다
"셋방살이"라도 즐겁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셋방살이"와 마찬가지 인데도
우리는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자기 것인양,
착각하고 살지요.
움켜지고 살려고 하지요.
지키고, 늘리기 위해
남들과 다투지요.
혈육끼리 조차도...
성산대교 입니다 집에서 왕복 1시간 걸립니다 오늘밤 걷기 하면서 휴대폰으로 찍은 겁니다
선유도 다리밑에서 여의도 6.3 빌딩을 휴대폰으로 찍은 것인데 화질이 안 좋네요
선유도 다리 까지는 한 시간 반 걸립니다
첫댓글 신정동 친구,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것 자체가 나그네살이라고 하는데
나그네가 짐만 되게 너무 많은 것을 끌어안고,
업고, 들고, 다니는 거 보셨나요?
죽장에 삿갓쓰고는 못 될망정 가벼이 살아야지요.
사는 날이 아름다우니
사는 동안은 아름답게 향기를 품으며
우리에게 허락된 것을 마음 껏 누리자구요.
"우리의 연수가 70 이요, 강건하면 80 " 이라 했습니다
얼마남지 않은 나그네 삶
하나씩 내려 놓고 사니까
홀가분하고 좋습니다
"무소유의 행복"을 만끽하고 살고 있답니다
마음을 열어준 신정동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시 합니다,쉽지않은 이야기를 들려줌에 우리의 삶속에
묻어 있어야할 순수함을 보았기에 과연 친구다운 면모를 보여줘서 말입니다,
나 역시 IMF때 모든것을 읽었지만 천신만고 끝에 일어설수 있었던 기억이 생각나기에 더욱 공감합니다
없을때 더욱 식구들간에 정겹고 돈독해지는 것을 느꼈던 그 시절~~친구님의 아이들이 착하게 자랐군요
앞으로의 세월를 지금과 같이 살아간다면 더욱 좋은 날이 올겁니다, 올린 글에 감사드림니다,
재물이 없는 것, 장애를 갖고 사는 것 - 수치수러운 일이 아닙니다
1) 어느 걸인이 며칠 굶다가 빵 한 조각으로 끼니를 해결할 때
2) 셋방살이를 하다가 자지 집을 사게 될 때
3) 생활이 풍요로워져서 크루스 여행을 다닐 때
어느 경우가 느끼는 행복감이 제일 클까요?
요즘 적은 비용으로 큰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 감사한 일이지요
같은 삶을 살아보지 않았기에 절대 공감은 못하지만 친구가 담담하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많은 교훈을 얻고 갑니다. "재물이 없는 것, 장애를 갖고 사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란 것에는
저 역시 그런 사람들과 30년을 함께 살아왔기에 많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참 행복했었다는 생각을 지금도 간간이 하고 삽니다.ㅎㅎ
빈곤이나 장애는 받아들이고
적응하면 문제가 안 되는데
숨기려고 하면 더 문제가 됩니다 - 우울증, 정신질환에 걸리지요
신정동 친구의 글을 읽고 고개를 푹 숙여봅니다
만나면 꼬~옥 무언의 쇠주한잔 드리리라
친구를 처음 보았을때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귀감이 되는 글 감사합니다
벌써부터 취합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려다 보고만 살아서
이제는 고개 숙인채로 삽니다 - 잘익은 벼 이삭도 아니면서 ,, ㅋㅋ
마음에 꽁꽁 쌓아두었던 삶에 짐을 담담하게 풀어놓을수 있다는것 많으로도 친구는 인생을 성공했다고 봅니다.
인생 뭐 별거 있습니까 ~죽으면 동전세입 물고 갈것을 ~ 사는동안 친구들과 어울져 값지고 당당하게 남은 삶을 하루 하루가 복되고 즐겁게 살아가자구여
신정동친구님의 글에 많은 교훈얻어 갑니다.~~늘 건강하시고요 ~감사 합니다.~~~~~^^*
그렇지요
내가 부끄럽다고 만 생각하면
어찌 글을 쓰겠습니까?
재물은 없어도 마음은 부자랍니다
부자처럼 살고 있고요
이번 정모에 얼굴 보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