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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774년, 다비할 때 내쏘는 빛이 뭇사람 눈에 비치니, 추파당
영조 50년(1774)
추파당대사 탑비기(秋波堂大師塔碑記)
경남 산청군 산청읍 웅석봉로 495(내리 산158) 심적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추파당 대사 탑비에 새긴 글(秋波堂大師塔碑記)
고개의 남쪽(嶺南)에 이름난 승려들이 많은데, 유독 회당晦堂 문하가 매우 성하다. 회당은 나의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가까이 대하고 알아주셨고, 아버님께서 한결같이 늘 그를 칭찬하셨다. 뛰어난 제자가 있어 한암당寒巖堂이니, 회당은 곧 (추파) 대사 스승의 스승이다.
스님은 숙종 무술년(1758) 5월 20일에 나서 지금 임금 갑오년 (영조 50년, 1774) 5월 13일에 생을 마쳤다. 성은 이씨, 법명은 홍유이며, 본은 완산이다.
스님은 사물의 근본을 아는 학문과 깊고 넓은 재주를 겸했으니 가르침을 받아 마루에 오른 사람만 해도 지금 열넷이나 되니 어찌 그리 성대한가.
죽음에 맞이해서도 두려운 마음(怛意) 없었으니 (임종)게를 보면 알 수 있고, 다비할 때 내쏘는 빛이 뭇사람 눈에 비치니 꾸밈이 아니다(闍維射光十目不誣), 또 입적(示寂)한 해와 달이 회당晦堂과 똑같으니 더욱 기이하다.
지난날 돌아가신 아버님이 회당의 비문에 새긴 글을 지었으니 내가 어찌 사양하겠는가. 이에 기문을 쓴다.
숭정 기원뒤 세 번 째 병신년(1776) 3월 ○일
풍성군豐城君 조재득趙載得 글을 짓고
남원부사南原府使 서무수徐懋修 쓰다.
▣ 「추파집 후서」, 『추파집』 권3.
임제하 32세 추파秋波 홍유泓宥 공은 나와 사이가 좋았는데 일찍이 같은 산에서 살았다. 어쩌다 길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은근하게 대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학식이 넓고 깊어 내가 참으로 공경하고 어려워하였다. 갑자기 서둘러 떠나니 늘그막에 좋은 벗을 잃고 말았다. 생을 마친 지 10년이 채 못 되어 문인 관식慣式이 탑과 비석을 세우고 진영을 조성하였으며, 문집 작업을 마쳤다.
또 나에게 책의 끝에 붙일 말을 채워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옛적 서로의 우의를 생각하고 슬프고 또 그리운 나머지 그릇되지나 않을까 하여 사양하였으나, 삼가 소매 속에 갖고 온 초고에 의하여 글을 쓴다.
우리 선조대왕 때 부휴浮休 선수善修 공이 있었고, 부휴의 문하에서 벽암 각성覺性이 나왔으며, 벽암의 문하에서 모운 진언暮雲 震言이 나오고, 그 아래 보광 원민葆光 圓旻 · 회당 정혜晦堂 定慧 · 한암 성안寒巖 性岸이 배출되니, 추파는 곧 한암의 훌륭한 제자이다. 추파는 처음에는 용담 조관龍潭慥冠에게서 공부하였다.
용담이 하루는 일하다가 말하였다.
“너는 훌륭한 이들이 투자投子 스님을 찾아 세 번이나 산에 오르고 아홉 번이나 동산洞山 스님을 찾아 나섰다.”라는 옛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는가. 화엄경의 선재 동자는 53명의 선지식을 찾아다녔는데 선재의 스승이 아닌 이가 없었다. 너는 이곳에서 머물지 말고 두루 참례하고 다니는 것이 좋겠다.“
추파 스님은 이 말을 따라 두루 훌륭한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마지막에 한암寒巖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법을 잇고 옷과 발우를 전해 받았다. 추파는 종사宗師가 되어서는 거의 30년 남짓 찾아오는 납자를 받아 가르쳤으나 뜻이 말 밖에(言之表)에 있었기에 늘 경전 강의에만 빠져 살며 선정을 닦는 업(定業)에 전념하지 못함을 개탄하였다. 문집에 있는 스님의 임종게를 보면 연꽃 나라(蓮國)에 가 태어났음을 알 수 있으리라.
스님은 숙종 무술년(1718) 5월 20일 광주廣州 묵동墨洞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완산完山 이씨로 조상은 유력 가문이었다. 영조 갑오년(1774) 5월 13일에 돌아가셨다. 추파집의 글이 건실하고 단아하니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했는데 종이가 귀해졌다. 공의 심정으로 미루어보건대, 비록 오랜 세월 동안 곁에서 모신 사람일지라도 나만큼 알지 못 하리니, 나는 스님의 타고난 성품이 ‘곧고 공손하였다(直愻)’는 두 글자를 꼭 말하리라.
성상(종조) 4년 경자년(1780) 9월 가야운인伽倻雲人 유기有璣 쓰다.
▣ 임종게(臨終偈) (『추파집 권1』)
衲子平生慷慨志 (납자평생강개지)
납자 평생의 의분과 결기로
時時竪起般若刀 (시시수기반야도)
때마다 슬기의 검을 곧추세워라.
好從一念彌陀佛 (호종일념미타불)
한결같이 아미따불 염불 잘 따르면
直往西方極樂橋 (직왕서방극락교)
서녘 극락의 다리 곧장 건너리라.
卍 보정의 꼬리말
추파 홍유(1718~1774)는 처음에는 용담 조관慥冠에게 배웠으므로 삼문을 아울러 공부하면서 염불문을 공부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스승의 추천에 따라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선종과 교종을 도루 통하였으나 마지막에는 결국 나모아미따불 염불 법문으로 돌아왔으니 추파도 ‘도로아미따불’을 실행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추파 홍유는 임종게로 보나 탑비에 새긴 글로 보나 극락 간 사실이 뚜렷하다.
20. 1790년, 하루 1만 번 10년 염불하고 극락 간 화엄대가 설파당
정조 14년(1790년)
「설파 대사 비문(雪坡大師碑銘)」 『조선불교통사』
『번암선생집(樊巖先生集)』 권57 「雪坡大師碑銘(幷序)」
이 글은 정조 20년 병진년(1796)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원임의정부영의정原任議政府領議政 겸兼 영경연 홍문관 · 예문관 · 춘추관 관상감사검교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檢校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짓고 썼다.
내가 일로 인해 마침 성문 밖을 나가게 되었는데 해진 옷을 입은 어떤 스님께서 ‘물렀거라(呵道)’ 소리를 듣지 못한 듯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채 앞에 엎드렸다. 그 차림새를 보니 고민이 있어 급한 것 같았다. 나는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무엇 하는 사람인가?“
”소승은 호남 사문 성연이라 합니다. 법사 설파 화상을 위하여 대인께 한 말씀 얻어 거듭 시방 중생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국가의 금령이 있어서 소승은 도성에 들어갈 수 없으며, 재상의 가문에도 사정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성 밖 객점에서 먹을 것 빌고, 여름 지나 가을 되고, 가을 지나 겨울 되어 조석 간에 쓰러져 죽더라도 소원을 이루지 못하면 죽어도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 성의에 저절로 감동하여 그들이 지은 행장을 올리도록 하였다. 그 행장은 다음과 같다.
대사의 법명은 상언尙彦이며, 호남의 무장현茂長縣 사람으로 우리나라 조정 효령대군 11세손이다. 아버지는 태영泰英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스스로 생활할 수 없었다.
나이 19세에 선운사에 몸을 맡겨 희섬希暹 장로에게 머리를 깎았으며, 연봉蓮峯과 호암虎巖 두 화상에게서 게偈를 받았다. 또한 회암晦庵 스님에게 배웠다. 선종의 계보로 말하면, 스님은 서산의 7세손이며 환성喚醒의 손자뻘이 된다. 33세에 대중들의 간절한 청으로 용추판전龍秋板殿 강좌에 올랐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무척 총명하였으며, 이름 있는 스승을 찾아 예를 올리고 3승 5교에 대한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곧 깨달아 묘하게 들어맞고 신기하게 이해하였다.
화엄에 더욱 돈독하여 반복하기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하고, 강송하면 가릉빈가가 한차례 지저귀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그 귀의를 하나로 하여 근세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꿈 이야기 같은 견해를 씻어 냈다. 배움을 원하는 자가 나날이 떼지어 모여들었고, 각자에게 뛰어난 깨달음의 길을 보였는데, 그 설법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옛날에 청량 대사께서 소과疏科 10권을 찬술한 것이 있는데, 그 뜻이 많이 숨겨져 있어 책을 풀어 밝히려는 자들이 어렵게 여겼다. 대사가 한 번 보고 방점으로 표시하여 소疏라 하고 과科라 하니 각기 주主 된 바가 있어 마치 나그네가 돌아갈 것을 얻은 것 같았다.
조금 있다가 승제勝濟, 부영扶潁 등이 대사에게 아뢰기를, ”큰 경을 베낀 것 가운데 인용한 것에 잘못되고 쓸데없는 것이 없지 않습니다. 어찌 해인사로 옮겨가서 여러 판본을 고증하여 같고 다름을 보완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사가 그곳에 가서 머물면서 자세히 고증하고 교정하여 이내 마쳤다. 이로부터 금강산에 간 것이 두 번이요, 묘향산에 간 것은 한 번이며, 두류산에는 늘 면벽(좌선)을 하였다.
경인년(1770)에 징광사澄光寺에 불이 나서 간직하고 있던 80권 화엄경 경판이 모두 타 버렸다. 대사가 한숨 쉬며 말하기를, ”여기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감히 여래께 예배할 수 있겠는가?”하고 재물을 모으고 다시 판각하였는데, 사람과 하늘이 도와 봄에 시작하여 여름에 마쳤다.
분명하지 않은 부분은 오직 대사의 구송口誦에 의지하였다. 경판이 완성되자 영각사 옆에 각(장판각)을 새로 세우고 보관하였다. 그 며칠 전에 호랑이가 울부짖고, 또 승려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아뢰어 말하기를, ”여기는 여래 대장경을 소장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경판을 장판각에 봉안할 때, 서광이 하늘에 서렸는데 모인 사람들이 다 기이하게 여겼으나 대사는 이를 보고 우연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후에 영각사靈覺寺에 머물렀는데, 하루는 절 주지에게 이르기를, ”절에 옮겨 짓지 않으면 반드시 물에 무너질 것인데 어찌 대책을 세우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큰물이 져서 절이 과연 무너지고 승려들도 함께 빠져 죽었다. 그제야 대중들이 그 신통함에 감복하였다.
늙어서 영원사靈源寺에 들어갔는데 죽을 각오를 하고 염불로써 일과를 삼으니, 하루에 1,000번씩 염불하는 것을 10번 되풀이하였는데 10년 넘게 하였다. 경술년(1790)에 가벼운 병세가 보이더니 신해년(1791) 정월 3일에 기쁜 낯으로 입적하시니, 세수가 85세요, 승랍이 66년이었다. 이날 제자 27명이 열반을 받드니, 여러 대덕들이 서둘러 와서 통곡하였고 비록 하계의 중생들이지만 또한 서로 알리며 탄식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스님이 일찍이 근세에 화장하여 사리가 나오는 것을 논하며 마음에 달가워하지 않으셨는데, 열반하자 상서로운 빛이 7일 밤을 끊이지 않았으나, 끝까지 하나의 사리로도 영험을 나타내지 않았다.
붇다의 이치를 살펴보면, ‘유(존재)’는 진실로 애초에 없음이 되지 않음이 아니고, 무無도 또한 애초에 있음이 되지 않음이 아니다. 있으나 없다고 이르는 것이 가하며, 없으나 있다고 하는 것 또한 가하지 않음이 없다. 참된 있음(眞有)과 참된 없음(眞無)을 또 누가 능히 분별하겠는가? 여러 제자가 그 정성을 붙일 곳이 없어 영원사에 탑을 세웠다. 선운사 스님 또한 그렇게 하니, 이것은 옛날 머리 깎았던 때를 잊지 못한 것이었다.
슬프다! 대사를 한마디로 말하면 화엄의 충신이시다. 성연聖淵 또한 스님의 충신과도 같아 섬기는 대상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유교나 불교나 일찍이 다르지 않다. 내가 글(銘)을 짓지 않는다면 어떻게 1천 집의 후인들에게 권선하겠는가!
이에 글을 짓는다. 글은 다음과 같다.
佛有華嚴 正法眼藏
불법에 『화엄경』이 있으니 정법안장이라
誰其抱持 雪坡心長
누가 품어 가질까 설파가 마음 길렀네.
鬱攸何物 敢爾跳踉
막는 자 어떤 놈이기에 감히 날뛰는가
移諸腹笥 登彼文梓
뱃속 상자에 옮겼다 저 책판에 올렸도다.
如來色笑 曰余嘉爾
여래 웃으며 가로되 “너 참 갸륵하구나”.
雪坡功德 我聞如是
설파의 공덕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
卍 보정의 꼬리말
3승 5교를 통달하고, 화엄을 꿰뚫었으며, 두류산에서 늘 면벽 좌선했던 설파 대사가 말년에는 영원사에 들어가 죽을 각오를 하고 하루 10,000번 염불을 10년 동안 이어가 극락 가는 씨앗을 심고, 기쁜 낯으로 입적하니 상서로운 빛이 7일 밤을 끊이지 않았다. 어찌 사리 몇 알 남겨 신줏단지 모시는 듯한 선사들과 극락에 가서 물러섬이 없이 끝내 붇다가 되는 것과 견줄 수가 있겠는가? 아, ‘도로 아미따불’ 이 얼마나 슬기롭고 값진 깨달음인가!
사실 추파당 스님이 화엄의 정법안장을 이었다고 하는데 화엄경에서 보현보살의 바람(行願)과 관련하여 아미따 정토에 가서 태어나도록 여러 번 권하고 있다. 「보현행원품」 제40에서 보현보살의 10가지 바람을 낱낱이 말하고 난 뒤 마지막에 이렇게 마무리한다.
“목숨이 다할 때 6가지 모든 뿌리(六根)가 무너지고, 모든 친족이 다 떠나 버리며, 모든 위세가 다 사라져 버리며, 값진 보물 같은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지만, 오직 이 (극락 가겠다는) 바람이란 왕은 여의지 않고 언제나 앞에서 이끌어 한 찰나에 극락세계에 가서 태어날 수 있고, 극락세계에 이른 뒤 아미따 붇다와 문수 · 보현 · 관자재 · 미륵 같은 모든 보살을 몸소 만나보며 아미따 붇다의 수기를 받을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은 아미따 정토 가서 태어나는 것이 그 귀결점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의 대가들이 내밀히 정토 염불을 닦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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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무량공덕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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