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릇
석촌호수에핀 꽃무릇 많은 사람들이 상사화로 알고있으나 조금다르다
꽃무릇은 가을에 붉은꽃이 피고 상사화는 여름에 분홍색으로 핀다
모과
의자왕을 사로 잡아 당에 투항한 예식이라는 인물은 우리 기록에는 없는 인물 인데 낙양 십리 북쪽 에서 최근에 발견된 묘지석에 백제인 예식진이라는 이름으로 자세한 내용이 기록 되어 있고 당에서 대장군의 지위에 까지 올랐다.
.사비성에 있던 의자왕은 5만의 신라군의 공격을 5천의 계백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결사 항전으로 시간을 끄는 동안 웅진산성으로 피신 하였다가 예식의 안내로 항복하여 다시 사비성에 끌려와 소정방앞에 무릅을 꿇고 항복식을 치루고 당에 끌려 갔는데 의자왕은 다음해에 죽을때까지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고 하며, 아들인 부여융은 벼슬을 하였고 집안은 멸망하지 않았는지 부여융의 손녀는 황족인 괵지방의 왕비가되었다.
흑치상지도 백제를 버리고 투항하여 당의 대장군 지위에 올랐으나, 당의 전무후무했던 여자황제 측천무후에 의해 퇴출 되었다.
흑치란 검은 이빨을 뜻하는데 당시에는 살던 지역이나 생김새등에 따라 왕이 성씨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우리지씨 선조 중에서도 옆구리에 비늘이 있다 하여 고려시대에 고기 어짜 어씨성을 제수받아 어씨가 되었으며 우리 지씨와는 동성이다.
흑치는 필리핀이나 남만계 였을 것으로 보거나 중국 남부의 묘족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묘족들이 사용하는 도구나 생활 방식등이 백제 시대 생활상과 매우 흡사하다.
백제가 요서지방과 황하 유역잋 남만 지역에까지 세력이 뻗쳐 있었다는 설은 상당히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위서에는 북위가 5만의 기병으로 백제를 침공 하였으나 이기지 못 히였다고 쓰여 있다.
이는 매우 이상한 일이다. 북위가 백제를 치기 위하여 육로로 이동 하려면 반드시 고구려를 통과 해야만 했는데 불가능한 일이고 기병 5만을 바다를 건너 온다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 한 일이다.
당시의 기병 1기는 현대전의 탱크 한대와 맞먹는 전력이다.
장수왕이 송나라에 말800마리를 배를 태워 보낸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말을 배에 태우는일이 보통 어려웠던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말을 배에태우는일은 힘든일이다.
그렇다면 백제는 중국땅에 있었어야 되는것이다.
백제는 생각보다 넓은지역에 세력을 뻗쳤고 정치 문화적으로 강성했던 나라인데 현제 남아 있는 기록이 적은 것은 아마 패전국으로 신라가 역사 문화를 많이 말살 하거나 축소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작성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일연이나 김부식 모두 통실신라계 고려인이었다.
일제36년간 우리 역사와 문화를 얼마나 말살하고 왜곡 하였는지를 보면 짐작이 간다.
제가 몇년 전에 전곡리 구석기 유적 답사 안내때 일본의 구석기 유적 조작 사건에 대해서 말씀 드린 적이 있는데. 후지무리신이치라는 일본 고고학자가 주먹도끼를 땅에 묻어 놓고 발굴 장면을 생중계하여 세상을 떠들석하게 하였는데 마이니치신문에 주먹도끼를 몰래 매장하는 장면이 찍혀 개망신을 당하였고 70만년적 구석기 유물이라고 발표한 31점의 유물도 모두 가짜로 판명되어 일본은 완전히 고고학계에서 왕따를 당하고 세계 고고학 학술 대회에서는 일본학자들을 초청도 하지 않는다.
이놈들은 아직도 우리 전곡리 선사유적보다 앞서는 구석기 유물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다.
올해에는 최고 오래된 글씨가 발견 됐다고 학계에 떠들석하게 보고 하고 난리 부르스를 치더니 올9월에 학계에서 정밀 조사를 해보니 글씨를 쓴 도료가 유성펜 성분으로 밝혀졌다.
참 대단한 족속들이다.
--2022년 9월 23일(금) 지 덕 영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