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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으로의 여행 크로아티아, 발칸을 걷다]
Balkan
01 전략적 요충지, 발칸반도
“발칸”이라는 지명은 발칸 반도 북동부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걸쳐 있는 발칸 산맥에서 유래한다. 중세 터키어로 ‘산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산이 많아 푸르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오스만 제국 이래 산맥의 이름으로 사용되다가 19세기 이후 발칸 반도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어떤 지역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복합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 발칸 반도는 다른 지역보다 더 그러하다.
발칸 반도는 아직까지 한국 여행자들에게는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은 낯선 곳이다. 유럽을 크게 나누어 볼 때 서유럽, 동유럽, 북유럽으로 구분하지만 발칸 지역만은 발칸 반도로 또 다르게 구분하는 것은 다른 지역과 달리 정체된 느낌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유럽에 있지만 유럽이 아닌 것 같은 땅, 그래서 조금은 색다른 느낌을 주는 곳이다.
발칸을 지리적으로 보면 발칸 산맥의 북쪽은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 경사는 도나우 강의 저지대까지 이어지고 남쪽은 복잡한 모양을 이루는 여러 개의 산줄기가 그리스까지 뻗어 있다. 반면에 발칸 반도의 북서부는 율리안 알프스 산맥의 연장으로 아드리아 해를 따라 그 산맥의 지류가 펼쳐져 있다. 이곳은 산세가 험하고 해안 지방과 내륙 지방을 나누면서 멀리 남쪽의 크레타 섬까지 이어진다. 발칸반도의 크기를 보면 총 길이는 동서로 1,300km, 남북으로는 1,000km이며, 북쪽으로는 도나우 강 하류와 사바 강, 동쪽으로는 흑해, 남동쪽으로는 에게 해, 남족으로는 지중해, 남서쪽으로는 이오니아 해, 서쪽으로는 아드리아 해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발칸 유럽의 나라를 보자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가 중심이 된다. 면적은 633,046평방 킬로미터, 인구는 현재 약 6,000여만 명에 이르고 있다. 영토의 크기를 숫자로 이야기하니 크기의 감이 안잡히는데 발칸 반도의 크기는 프랑스보다 조금 작다고 생각하면된다. 참고로 프랑스의 면적은 643,801평방킬로미터이다.
발칸 반도에는 지중해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가 같이 나타난다. 아드리아 해와 흑해를 중심으로 한 해안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에 속하며,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은 산악 지대가 많아 대륙성 기후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정학적 특징은 이곳에 역사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발칸 반도, 이곳은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라는 지정학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은 고대 이래로 여러 민족들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말하잠녀 유럽, 러시아, 소아시아 등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 각축전을 시작으로 로마시대 이래 비잔틴제국인 동로마와 이슬람제국 간, 합스부르크제국과 오스만 제국 간, 러시아와 오스만 간, 오스티리아-헝가리제국가 러시아 간 이외에도 발칸 토착 세력들 간의 영토 싸움이 치열하게 이어져 왔던 곳이다.
발칸 반도는 395년에 로마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된 이후 15세기 전까지 약 천년의 세월 동안 문화적으로 동양과 서양 문화가 혼재되는 특징을 보여 왔으며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과 정교회가 혼재되는 모습을 보여 왔으며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과 정교회가 혼재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이후 15세기를 전후로 소아시아로부터 유럽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오스만 투르크의 발칸 지배가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발칸이 유럽의 다른 지역보다 문화적으로 나 경제적으로 정체되는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는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
오스만 투르크의 발칸 지배는 러시아-오스만 투르크 전쟁 이후 맺어진 1878년 3월 산스테파노 조약과 6월의 베를린 조약에 의해 이 지역 민족들이 독립하기 전까지 지속된다. 이 기간 동안 발칸 유럽에는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동양적 문화 요소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기존의 크리스트교 외에도 이슬람교가 유입되고 이러한 것이 현재 발칸 유럽 지역에 가톨릭, 정교, 이슬람교가 서로 혼재되어 나타나는 배경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종교를 나라별로 구분하여 보면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가톨릭 문화권에 속하며 정교 문화권으로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있다. 이슬람 문화권으로는 알바니아, 정교와 이슬람 혼재 문화권으로는 북마케도니아, 그리고 가톨릭과 정교, 이슬람 혼재 문화권으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들 수 있다. 아주 오래전으로 돌아가 이야기하면 발칸 반도는 기존의 토착민과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이 있었고 기원전 165년을 시작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으며, 동로마제국인 비잔틴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6-7세기에는 슬라브족이 남하하여 정착하였다. 현재 발칸 반도의 나라를 보면 크게 오스만 투르크와 합스부르크 왕가, 그리고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으며, 그중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지배와 베네치아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지리적으로 가까워 로마 가톨릭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현재까지도 가톨릭의 세력이 강하다. 그리고 티토가 국가의 롤 모델로 삼았다는 보스니아는 동서 로마에 의해 나누어진 가톨릭과 정교가 혼합된 양식을 가지고 있다.
발칸 지역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오스만 투르크의 발칸 반도 진출은 언제부터일까? 그것은 오스만 투르크가 1354년에 갈리폴리를 점령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그럼 발칸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해는 언제일까?
그 연도는 1389년이다. 왜냐하면 각 나라의 민족주의가 대두하기 시작한 연도이기 때문이며, 이때 일어난 전투가 바로 슬라브 민족과 오스만 투르크족의 코소보 전투였다.
코소보 전투는 세르비아어로 ‘지빠귀들의 들판’이라는 뜻의 코소보폴례에서 세르비아의 왕자 라자르 공의 군대와 오스만제국의 술탄 무라드 1세(1360-1389재위)의 오스만 투르크 군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오스만제국이 승리함으로써 세르비아는 무너지게 딘다. 그 당시 상황을 보면 비잔틴제국은 오스만 투르크 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고, 콘스탄티노플 근처의 견고한 요새들을 많이 점령한 무라드는 비잔틴과 슬라브 여러 나라의 내부 불안을 이용해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점령지를 넓히려는 시도를 하게 되며 세르비아를 침범해 코소보까지 진격, 그곳에서 라자르 군대와 맞붙게 된다. 싸움의 초기에 세르비아의 귀족 밀로슈 오빌리크가 무라드를 살해하는데 그때만 해도 세르비아가 승리하는 듯하였다. 밀로슈는 탈영병으로 위장해 투르크 군 진영에 잠입한 후 술탄의 막사로 치고 들어가 독이 묻은 단검으로 술탄을 찔러 그를 살해하였다. 그러나 무라드이 아들 바예지드는 술탄이 죽은 후 벌어진 혼란을 재빨리 수습하고 세르비아 군을 포위해 그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으며 결국 라자르는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이후 세르비아는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공물을 바치고 또한 술탄의 군대에서 군역을 지게 되었다. 코소보 전투는 세르비아가 이슬람과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400-500년간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발칸 반도는 18세기 말에 와서는 크게 세 개의 세력에 의해 분할되었다. 첫 번째는 세력권이 가장 큰 오스만 투르크이다. 이들은 발칸 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두 번째는 베네치아 공화국이다. 그들은 세력을 달마티아 내부에까지 확대, 지배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인 오스트리아제국은 슬로베니아를 계속 영유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는 계기가 생기는데 그것은 바로 나폴레옹의 정복 활동이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 공화국은 1797년에, 라구사 공화국은 1808년에 발칸 반도의 지배권을 상실했으며 오스트리아제국 역시 발칸 반도의 영토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성립된 빈체제에서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았다. 여기에 그들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배하였던 영역과 라구사 등을 새로이 장악하였으나 시르미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등이 그것들이다.
그 후 발칸 국가들이 독립하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
1877년에서 1878년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그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한 후 발칸 국가들은 독립하기 시작하였다.
알바니아에서 발칸 지역 최초의 반 오스만 반란이 일어나며 뒤이어 세르비아, 불가리아, 보스니아에서 역시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와 몬테네그로가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대항하여 발칸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상황의 배후에는 슬라브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러시아가 있었는데 러시아의 발칸 진출을 우려한 오스트리아가 개입하면서 이것은 다시 유럽 열강 사이의 문제가 되었다. 발칸 반도의 전쟁사를 보면서 1차, 2차 발칸 전쟁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전쟁으로 인해 발칸 반도 내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데, 1912년 400년 이상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던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의 연합군이 발칸에 남아있던 오스만 투르크의 세력을 몰아내게 된다. 이것이 1차 발칸 전쟁이다. 이 전쟁은 몬테네그로의 선전 포고로 시작되어 10일 후 동맹국이 참전하는데 결과는 발간 국가들이 승리였다. 이 1차 발칸 전쟁의 결과, 1913년 5월 30일 런던에서 체결된 조약으로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유럽 내의 영토를 거의 모두 상실하게 되고, 이때 알바니아의 독립이 원칙적으로 합의되었으며 나머지 영토는 발칸 국가들이 분할하여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1차 발칸 전쟁의 조약 사인이 채 마르기도 전인 1913년 6월 29일에 시작된 제2차 발칸 전쟁에서는 마케도니아 정복지를 두고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 3국이 불가리아를 상대로 싸우게 된다. 불가리아가 자국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마케도니아 지방이 런던 조약으로 그리스와 세르비아에 합병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된게 전쟁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실수는 불가리아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때 동맹 국가였던 나라를 어리석게도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이틈을 이용해 오스만 투르크는 발칸 반도 끝자락인 트라키야 지역을 회복하였다. 결국 2차 발칸 전쟁에서 불가리아는 패전하고 1913년 8월 10일 부쿠레슈티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불가리아는 1차 발칸 전쟁에서 획득한 모든 영토를 상실하였고 약 7,500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를 루마니아에 빼앗기고 마케도니아 지역의 대부분은 그리스와 세르비아에 분할되었다. 한편 1,2차 발칸 전쟁을 통해 발칸 반도에 강력한 국가가 등장하였으니, 그 나라가 바로 세르비아이다. 세르비아가 발칸 지역에서 강력한 국가로 등장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된다. 이 두 전쟁의 결과로 발칸 지역의 민족주의가 전성기를 맞게 되고 반면 과거 이 지역을 지배했던 오스만 투르크제국과 오스트리아의 힘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특히 이 전쟁을 통해 오스만제국의 발칸 지배가 실질적으로 종식된 이후 발칸 국가들의 다음 목표가 된 것은 오스트리아제국의 축출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순서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우리가 잘 아는 전쟁이다. 그런데 이것의 발발 원인 또한 발칸 반도였다. 1914년 6월, 1차 세계 대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일어나는데 당시 오스트리아는 인근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1908년에 합병한 상태였다. 여기에 슬라브인들의 반감은 아주 컸다. 단순히 보스니아 민족주의자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발칸 지역 슬라브주의의 본거지인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에 대한 적개심이 증대하고 이것은 러시아와 독일로 대변되는 범슬라브주의 대 범게르만주의의 대결 양상을 띠게 되었다. 사실 당시 세르비아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차지하려고 오스트리아와 대립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대립이 지속되었고 그러는 가운데 6월 28일 오스트리아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다. 그런데 황태자 부부가 차를 타고 시내 거리를 행진하던 중 세르비아 청년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한 달 후인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때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던 독일과 세르비아를 지원하던 러시아가 개입하면서 전쟁이 확대되었으며, 그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하자 이 지역의 슬라브 민족이 결집해 보스니아,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코라아타아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한 나라를 이루었으나 1941년 4월 독일의 침공으로 사라지게 된다.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은 ‘남 슬라브족의 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변천을 보면, 먼저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45년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 즉 빨치산의 유격 활동으로 해방을 맞이한다. 그리고 1945년 11월 티토를 수반으로 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공화국이 수립하였으며 1963년 신 헌법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이후 발칸 반도에서는 또 다른 역사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니 그것은 1980년 티토 사망 후 민족주의가 대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7년 슬로보다 밀로셰비치가 코소보에서 행한 강력한 세르비아 민족주의 연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때의 배경 상황을 보자면 당시 코소보에서는 소수 민족이면서도 경제와 정치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던 세르비아인들과 다수 민족이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 살고 있던 알바니아인들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끊이지 않고 있었는데 인종 비율을 보면 세르비아인 10퍼센트, 알바니아인 90퍼센트 정도였다. 1989년 세르비아 대통령으로 당성된 밀로셰비치는 코소보 독립을 주장하며 시위와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던 알바니아 반군들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과 함께 코소보에 대한 세르비아의 영향력을 확대하여 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세르비아의 의도는 79일 동안 지속된 나토(NATO)군과의 코소보 전쟁으로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의 여파는 2000년 10월 세르비아의 시민혁명과 밀로셰비치의 헤이그 전범 재판소 소환을 불러온다. 하지만 4년을 끌어오던 밀로셰비치의 전법 재판에 관한 논쟁은 결론이 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외세의 공격으로부터 세르비아와 민족을 지켜내려 했다는 국가안보 수호자로서의 시각과 인종 청소와 소수 민족 학살의 주범이라는 시각이 서로 충돌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운데 밀로셰비치는 2006년 4월 헤이그 교도소에서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