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석주명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1964년에 건국공로훈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 유공 서훈자이다. ‘독립운동’ 하면 저절로 연상될 만큼 대표적 항일지사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독립과 건국에 크게 기여한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1930년에 발표된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를 읽으면 바로 ‘나비 박사’ 석주명이 연상된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아무도 석주명에게 ‘조선 나비’에 대해 일러준 일이 없었다. 그 탓에, 도무지 조선 나비 연구가 얼마나 무서운 과제인지도 모르는 채 그 일에 뛰어들어 삼천리 온 산천을 헤매었다.
그는 1940년 한국인이 펴낸 최초의 영문 과학서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를 저술해 세계적 학자로 인정받았지만, 서울 수복 직후인 1950년 10월 6일 과학박물관 재건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길에서 의문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불과 42세밖에 안 된 젊은 나이였으니 새파란 초생달 그 자체였다.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은 1926년 송도고보를 마친 후 낙농 공부차 유학갔던 일본 고등농림학교에서 농생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는 그에게 일본 곤충학회 회장을 역임한 스승 오카지마 긴지岡島銀次(1875-1955)는 “미개척 분야인 한국 나비를, 한국 학자의 손으로 파고들면 세계적 업적을 남길 수 있다”고 조언했다(한국과학기술한림원,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백과》). 그것이 석주명 나비 연구의 첫걸음이었다.
그 이후 석주명은 20년 동안 75만이나 되는 나비 개체를 표본으로 연구하여 한국산 나비 255종의 학명을 확정짓고, 세계 나비 지도 500종을 완성했다. 또 유고집 8권, 학술논문 128편, 기고문 180여 편을 남겼다. 그는 만국 인시류 학회萬國鱗翅類學會의 회원으로도 선출됐다. 우리말로 ‘세계 나비 학회’라 부르는 만국 인시류 학회는 전 세계를 통틀어 30여 학자만 회원으로 인정한 최고 권위의 학회였다.
“국학이란 국가를 주체로 한 학문이니 국가를 가진 민족은 반드시 국학을 요구하는 것이다. 국학이란 인문과학에 국한될 것이 아니고 자연과학에도 관련되는 것으로 더욱이 생물학 방면에서는 깊은 관련성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에 많은 까치나 맹꽁이는 미국에도 소련에도 없고, 조선 사람이 상식常食하는 쌀은 미국이나 소련에서는 그리 많이 먹지를 않는다. 이처럼 자연과학에서 생물학처럼 향토색이 농후한 것은 없어서 ‘조선적 생물학’ 내지 ‘조선 생물학’이라는 학문도 성립될 수가 있다.” - 석주명이 1947년 발표한 〈국학과 생물학〉 내용 중 일부(이병철, 《석주명 평전》, 그물코, 2011)
석주명은 ‘국학적 생물학’을 정립한 학자답게 조선 나비에 대한 외국인들의 오류를 바로잡는 한편, 일본어로 불리던 한국산 나비 248종의 이름을 우리말로 고치거나 새로 지었다. 흰줄표범나비, 흰점팔랑나비, 모시나비, 지옥나비, 시골처녀나비, 산제비나비, 가락지장사 등 현재 우리나라 나비의 2/3는 그가 붙여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석주명은 나비 연구차 제주도에 2년 1개월 머물렀는데, 그 동안 《제주도 방언집》, 《제주도 문헌집》 등 제주도의 사투리, 민속, 인구, 문헌 등에 관한 ‘제주학’ 저서를 여섯 권이나 펴냈다. 특히 《제주도 방언집》은 우리나라 사람이 펴낸 최초의 방언집으로 국어학적으로도 큰 의의를 지닌 연구로 평가되고 있다.
석주명은 우리에게 치열한 연구자의 자세를 가르쳐준 과학도였다. 우리 국토와 우리말을 사랑한 참된 겨레정신의 실천가였다. 그리고 75만이나 되는 나비 개체를 수집하고 또 면밀히 관찰한 성실성을 보여준 노력가였다.
석주명은 칼과 총을 들고 독립운동을 펼친 항일지사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탓에 고통스럽게 살고 있던 당시의 조선인들에게 ‘조선학’을 통해 희망과 자긍심을 안겨준 위대한 학자였다. 그는 학문으로 세상에 기여하는 길을 확실하게 증명한 봉사자였다.
이 글은 현진건학교가 펴내는 월간 '빼앗긴 고향'에 수록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투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