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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아름다운 교회 | |
연합의 3가지 목표 비전 Vision |
①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과의 연합(요15:5,17:11) ② 주님처럼 섬김의 본을 위한 연합(요13:14-15) ③ 선함과 아름다운 실현을 위한 연합(시133:1-3) |
1. 교회 행사 및 소식
➊ 다음주일에는 당회원, 교사모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일축하행사가
있습니다.
➋ 10월부터 구역예배가 시작됩니다. 다음주일부터 구역장‧부구역장 모임이
있습니다.
-모임장소: 목양실
-모임시간: 오후 예배후
펠라 펠라는 로마시대의 데카폴리스 가운데 한 도시였다. 이곳 펠라는 풍부한 물과 좋은 기후로 고대로부터 거주 문명이 발전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구석기 시대를 비롯하여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이 도시는 투트모세 3세의 원정 기록을 비롯한 고대 이집트 자료에 피힐루(Pihilu) 또는 펠렐(Pelel)로 언급되고 있는데 구약성경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기원전 13세기경의 파피루스에는 펠라가 이집트에 병거 부품을 공급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이집트 룩소 카르낙 신전의 세티 1세의 기록에 보면 이 도시가 이집트를 대항하여 벧산을 공격하였다가 세티 1세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기 청동기 시대의 무덤에서는 도시 거주자들의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후기 청동기 시대부터 도시는 점차 쇠퇴한 것으로 밝혀졌다. 페르시아 시대에 약간의 회복의 기미를 보이나 그렇게 괄목할 만큼은 아니었으며,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되면서 도시의 중요성이 되살아 나기 시작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출신지인 '마케도니아의 펠라' 에서 이름을 따서 이곳을 '펠라' 로 명명하였다.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동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하고 있던 펠라는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며, 기원전 64년 로마의 폼페이 장군에 의해 점령된 후에는 데카폴리스 연맹에 가담하였다. 잘 정돈된 집, 거리, 상가와 목욕탕등이 건설되었으며, 기원 후 82년에는 도시의 이름이 새겨진 동전을 주조하기도 하였다. 주교가 이곳에 머물던 451년경까지 이곳은 절정기를 맞이하였다가 635년 야르묵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에 패배함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747년에 있었던 큰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한때 13, 14세기 마멜룩 이슬람 왕조의 통치를 받기도 하였지만 거의 19세기에 이를 때까지 빈 도시로 존재하였다. 1967년 봄 오하이오 우스터 칼리지의 스미스에 의하여 발굴이 시작되었으나 6일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79-81년 호주의 시드니 대학교와 함께 다시 발굴을 시작하였으며, 아직도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펠라 지역의 고대 이름은 그리스어로 '피힐루' 또는 '펠렐' 이었다. 이것이 뒤에 '펠라' 로, 아랍어로는 '파힐' 로 바뀌었다. 이집트 중부 아마르나 지역에서 발굴된 중요한 고고학적 문서인 텔 엘 아마르나 문서 256에 의하면 펠라의 영주 '무트 발루(Mut-ba'lu)' 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기원전 18-19세기의 이집트 저주문서에는 이곳의 통치자 이름을 '아피루 아누('Apiru -'Anu)' 로 적고 있다. 펠라 지역은 다음의 세구역으로 나누어진다. 키르벳 파힐, 키르벳 남쪽의 텔 엘히슨, 북동쪽의 제벨 아부 엘 카스 지역이다. 오늘날 로마식 기둥들과 고대 무덤, 비잔틴 극장 및 교회터등 많은 유적이 발굴, 보존되고 있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기원 후 67년부터 시작된 제 1 차 유대인 반란 중에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유대-기독교인들이 이곳 펠라로 도망쳐 나왔다고 하며, 이러한 행위는 마가복음 13장에 기록된 소위 '소묵시록' 에서 예수가 예고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예수는 "재난의 징조 - 멸망의 가증한 것들이 서지 못할 곳에 서거든 - 가 보이거든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초대 유대-크리스천들은 펠라를 그들의 피난지로 삼았다. 당시 펠라는 비유대인 도시였기에 반 로마 항쟁에서 살아 남기에 적절한 도시로 판단 되었을 것이다. 로마와 비잔틴 시대 때 펠라는 강력한 기독교인 도시의 하나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펠라에는 풍성한 물이 솟아나오는 두개의 샘이 있어, 항시 흐르는 물을 볼 수 있다. 관련 성경 : 마 24:16, 막 13:3-37 |
➌ 다음주일에는 재건마산교회를 위한 건축헌금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관
심과 기도, 후원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➍ 예배시간 10분 일찍 와 주시고, 오후찬양 예배시간에도 일찍 오셔서 다함께 찬양해
주시기 바랍니다.
➎ 예배 후 사용한 곳 정리정돈 및 전원상태를 꼭 확인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라시(거라사) 고대 제라시는 헬라어로 거라사라 불리워 지는 길르앗 지방 언덕의 헬라 도시였다. 기원전 332년쯤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세워진 이 도시는 이후 로마에 점령당하여 로마의 속주 중 10대 도시(데카폴리스)의 하나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곳에서는 석기 및 청동기 시대의 층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3천년 이상의 긴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다. 그리스 시대에 큰 도시로 성장한 제라시는 왕의 대로와, 기원 후 112년에 건설된 트라야나 노바 길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으며, 근처에 좋은 철광이 있었던 지정학적인 요인으로, 당대에 로마 제국 전체에서 아주 부유한 도시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기원전 103년에서 76년까지 이스라엘의 하스모니안 왕가에 의해 통치를 받기도 했던 고대의 거라사는 로마의 폼페이에 의해 점령당하였고, 기원 후 129년에는 하드리안 황제가 이곳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거라사의 번영은 서기 4∼7세기에 걸친 비잔틴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기독교를 공인했던 비잔틴 시대 에는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었고, 약 300년 동안 거라사에도 15개가 넘는 대규모의 교회들이 세워졌다. 약 500여년 동안 트랜스 요르단의 문화와 상업을 이끌어 오던 거라사는 628년 페르시아의 침공과 635년 아랍의 공격을 받고 파괴되고 말았다. 발굴된 동전을 보면 774년까지 도시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잔틴 교회도 이 때까지는 그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8세기 중반에 있었던 대규모의 지진으로 인하여 웅대한 석조 건물들이 대부분 무너져 거라사의 영광은 모래와 흙더미 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아랍 시대 이후로는 이름도 제라시로 바뀌었다. 성경에는 '거라사인의 땅' 또는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언급되었고, 예수께서 정신병자를 고쳐주신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 마태 4:25, 마가 5:20, 7:31의 배경이 되는 이곳은 예수님 당시에는 아마도 18,000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번성기 때의 제라쉬는 현재 발굴된 20만평 크기의 2배 이상이었을 것이다. 시젠에 의해 처음 발굴이 시작된 이래 192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 졌으며, 지금도 꾸준한 발굴 작업과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행히 지진으로 무너져 내린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흙속에 잘 보존되어 고고학자들의 복원작업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제라시에는 20만평이 넘는 넓은 언덕에 웅장한 석조건물 유적이 펼쳐져 있다. 성벽에는 모두 101개의 탑이 17-22m 간격으로 설치되었으며, 3m 두께의 성벽에는 모두 6개의 성문이 있었다. 성문은 납북에 각각 1개씩, 동서에 각각 2개씩 설계되었다. 도시의 중앙에 설치된 카르도는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길이가 800m에 이르고, 동서로는 2개의 거리가 수직으로 나있다. 동서남북의 교차로에는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타원형 광장이 펼쳐져 있으며, 광장에는 신상이 세워져 있었다. 지하의 완벽한 하수도 시설과 두 개의 야외 원형 극장, 여러 신전들(제우스신전, 술과 포도주의 신-디오니소스를 위한 신전, 거라사의 수호여신 아데미(Artemis)를 위한 거대한 신전들)과 1천평이 넘는 대규모의 목욕탕이 두 개 발굴되었다. 또한 대형 경마장(Hippodrome)도 발굴되었는데 길이가 2백60m, 폭이 80m에 이르는 이 경마장은 대도시의 풍모를 느낄 수 있는 규모이다. 남쪽 성문으로부터 400m 가량 떨어진 곳에는 한개의 이취가 세워져 있는데 하드리안 황제의 방문 이후에 세워진 하드리안 황제의 개선문으로 확인되었다. 과거 디오니소스 신전을 교회로 전환시킨 대성당(Cathedral)은 비잔틴 시대의 대표적인 교회이며, 대성당 뒤의 성 테오도르 교회와 529년에 세워진 성 조지 교회, 531년의 성 요한 교회, 533년에 세워진 성 코스마스와 다미안 교회를 비롯해 15개 이상의 비잔틴 교회터도 발굴되어 있다. 9세기에 일부 아랍인들이 살았고 11세기에 그나마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1122년 십자군의 볼드윈 3세에 의해 파괴되었던 곳을 19세기에 이르러 한 탐험가에 의해 발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2. 노회․총회 행사 및 소식
➊ 제95회 총회
-일시 : 9.23(월). 오후 7시
-장소 : 광주재건교회(한수하 목사 시무)
* 김가연 장로님 총대로 참석하십니다.
페트라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서남쪽 150 Km 지점에 페트라의 유적이 있다.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 라고 영국의 시인 존 버곤 신부는 페트라를 묘사하였듯이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의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갑자기 웅대한 건물의 정면이 나타난다. 궁전 아니면 신전으로 생각되는 헬레니즘 양식의 건물 정면은 커다란 암벽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정면에 있는 문으로 들어 서면 복도가 나타나고, 이 복도를 따라가면 암벽을 파서 만든 방들이 나타난다. 페트라 시는 대부분의 건물들을 이와 같이 암벽을 파서 만들었으며, 결코 좁지 않은 지역에 펼쳐진 이곳에는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 않은 도시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다. 천연의 요새로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된 이 도시는 마치 지하에 구축된 지하 왕국이 연상될 만큼 신비롭다. 나바티안 이라고 불리우는 민족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는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수많은 대상들이 들러가는 상업의 요충지로 한때 크고 번창했었으나, 대상 무역의 쇠퇴와 함께 폐허가 되어 여러 세기 동안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옛 기록에 나오고 있지만 소멸한 많은 도시들이 그렇듯이 이 도시의 위치도 잊혀졌다. 그러던 중 1812년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라는 스위스의 한 젊은 탐험가가 현지인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 이 웅장한 유적을 발견한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유대 민족을 이끌고, 당시로는 최강의 파라오의 땅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긴 여행 중, 당시 에돔 왕국의 수도이던 이곳의 통행 허가를 못 받아, 멀리 우회하여 느보산으로 갔다는 전설의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이곳에는 모세가 지나 갔다고 하여, '무사와디' (모세의 계곡) 라고 불리우는 곳과 '모세의 샘'이라고 불리우는 우물이 여러 곳에 있어 현대의 순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대의 수수께끼 유적의 하나로 남아있는 이곳은, 이집트의 피라밋과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이며, 최근에는 영화 '인디아나 죤스 / 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 졌다. 이곳의 고대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것들이며, 유럽 문명의 골간을 이룬 성서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지구상의 변방에 불과한 곳이 되어 버린 곳이며, 황량한 광야에는 남루한 베두윈들이 염소떼를 한가히 몰고있는, 마치 고대세계에서 시계가 멈춰 버린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
***** 식사 및 설거지 봉사자
<금주> 이명순, 나명자, 정석연, 자원자
<다음주> 서은영, 임소을, 자원자
▶ 페트라(Petra) : 셀라 페트라는 요르단이 세계에 자랑하는 국보 1호의 역사적 유적이다. 이곳은 기원전 1400-1200의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역에 자리한 곳으로 구약에서 에돔의 셀라(Sela)로 언급되고 있다. '셀라'는 히브리어로 바위를 나타내고,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지역은 또한 '바위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호리 족속'의 거주지였으며, 사사기 1:36에서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로 언급된다. '바위' 라 불리우는 이 도시의 이름은 시실리의 디오도루스에 의해 최초로 언급되는데, 그는 나바테안들이 기원전 312년 안티고누스 1세의 공격을 받고 그들의 생명과 음식과 가재들을 이 도시에 숨겨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약의 셀라와 이곳을 같은 장소로 본 사람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였으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다섯 왕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때 처형당한 미디안의 왕 레켐을 페트라의 왕과 동일인으로 보았다. 1950년대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발굴 작업으로 이 지역에 적어도 기원전 7000년 경에 문명이 존재했었음이 드러났다. 당시에 농경 문화를 간직한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에돔이 이 지역을 다스리던 기원전 1200년 사이의 역사적인 정보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이후 형성된 에돔 왕국은 셀라를 수도로 하고 있었으며, 이 에돔 왕국의 실체는 성경을 통하여 추정해 볼 뿐이다. 무엇보다도 페트라는 나바테안들이 남긴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인해 그 명성을 얻었다. 유목 생활을 하던 서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해 온 부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의 일이다. 이들은 기원전 580년경 에돔족과 혼합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서 주후 106년경까지 페트라를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이곳을 나바테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나바테안들은 왕의 대로를 장악하고 이 지역의 무역과 상권을 주도하였으며, 페트라를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후 106년 로마에 점령당하기까지 문명의 절정을 이룩하였다. 기원 후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당하였고, 131년에는 하드리안 황제가 페트라를 방문하고 이곳 이름을 '하드리안의 페트라' 라 불렀다. 로마 시대에 아라비아 사막에 새로운 상업로가 개척되면서 페트라의 중심적 역할은 점차 쇠퇴하였으며, 후기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는 도시의 상업적 역할보다는 트랜스 요르단과 남부 시리아의 종교적 중심 도시로 자리하게 된다. 주후 4세기에는 콘스탄틴에 의하여 기독교화되었고, 언제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주후 6세기에 있었던 큰 지진으로 인하여 함몰되어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아랍 이슬람이 요르단을 점령한 7세기에서 1812년까지 이곳은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이곳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이다. 1812년 젊은 유럽 탐험가인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카이로로 가는 그의 행로중 이곳에 엄청난 유적들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해 8월 아랍인으로 위장한 부르크하르트가 우여곡절 끝에 페트라를 찾아내었고, 그의 여행기가 출판됨으로 유럽인들은 비로소 페트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 연구소의 도미니칸 수도사가 발굴을 시작하면서 1896년에 최초의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그후 1897-1898년에 걸쳐 독일의 부른노우와 도마츠브스키에 의해 무덤과 건물들이 발굴되었으며, 다른이들에 의해 로마시대의 나바테안 도시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페트라의 본격적인 발굴은 1929년 콘웨이와 호스필드에 의해 이루어 졌고, 그후 1982년에 이르기까지 성 입구의 문을 비롯해 로마 극장과 여러 유적들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나바테안들은 불후의 문명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역사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널리 사용되던 아람(Aramaic)문자를 사용하였으며, 지금까지 약 4천점에 달하는 나바테안들의 문자 기록이 수집되었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지극히 단편적이어서 그들의 역사와 관계된 내용은 거의 없다.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던 나바테안들이 문자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와 문학, 사상과 종교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고대 문명이 앉고 있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다. 나바테안들은 돌을 깎아 웅장한 건물들을 만들었다. 이곳 페트라에는 암벽을 깎아서 만들어 놓은 거대한 암벽 도시의 유적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변의 경관은 아주 대단하다. 이곳에 나타나는 건축 양식은 초기의 단순하고 투박스러운 나바테안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시작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건축양식을 거쳐 후기의 세련되고 건축미가 넘치는 그리스, 로마식 건축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건축양식의 변천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손은 거칠고 투박한 석공의 손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출토되는 질그릇의 문양은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었고, 토기의 두께는 2㎜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해 '계란껍질 토기(egg-shell pottery)' 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다. * 시크 : 하늘을 가릴 듯한 높은 암석들 사이로, 미로와 같은 균열 부분을 따라 2km 정도를 걸어 들어간다. 이 암벽 사이의 좁은 통로를 아랍어로 협곡이라는 의미를 가진 '시크(Siq)' 라고 부른다. 이 시크를 따라가면서도 고대 수로가 벽면을 따라서 이어진다. * 보고 : 페트라의 유적 중 대표적인 것으로 '보고' 라고 부르는 건물을 손꼽을 수 있다. 전면에 6개의 고린도식 석주가 서있는 높이 약 25m의 그리스식 건축 양식의 건물로 기원전 1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출입구 좌우의 벽면에는 그리스의 이시스신을 상징하는 식물이 조각되어 있고, 2층에 장식된 6개의 고린도식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여인 모양의 양각이 새겨져 있다. 건물 정면 제일 윗부분에는 항아리 형태가 조각되어 있는데, 그 속에 나바테안들이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속설이 전해져 [보고]라는 이름이 생겼다. * 수도원 : [수도원]이라고 부르는 건물은 페트라의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전면의 폭이 50m, 높이가 45m에 이른다. 수도원으로 불리게 된것은, 이 건물 내부 벽면에 십자가 몇 개가 새겨져 있는데서 유래했다. 나바테안들이 이 건물을 세웠던 원래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바로의 궁전 : 이집트의 나바테 문명에 대한 영향은 이집트의 건축 양식의 특징인 거대한 탑문에서 볼 수 있다. 페트라의 한복판에 있는 바로의 궁전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곳에 시집온 그의 딸을 위하여 지은것으로 생각된다. 1927년에 이곳에서 있었던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었다. * 로마 원형 극장 : 바위산 자체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나바테안들의 기발한 독창성과 우직한 추진력이 마음껏 발휘된 작품이다. 약 3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너비가 40m에 이르는 로마 원형 극장은 2세기 경의 유적으로, 33층의 계단식 의자가 모두 바위를 그대로 깎아 만들었다. 이 극장은 각종 예술 행사나 오락적 행사를 위한 기능보다는 하나의 제의적 기능을 갖춘 장소로 여겨지며, 왕의 장례식은 물론 각종 회의 및 종교 의식을 치룬 것으로 여겨진다. * 희생 제물의 언덕 : 원형 극장 뒷편 언덕으로 나바테안들이 희생 제사를 드렸던 산당이다. * 왕족 무덤 지역 * 열주로 : 기둥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거리로 로마시대의 유적이다. * 두 사자 신전 : 험한 산허리에 위치한 이 신전은 출입구가 병모양을 하고 있으며, 양쪽 벽면에 사자 형상이 새겨져 있어 두 사자의 신전으로 불리운다. 관련 성경 : 민23:9, 민 24:21, 민 31:8, 수 18:19, 수 13:21, 삿 1:36, 대하25:11-12, 욥14:18, 욥18:4, 욥24:8, 욥28:9, 욥30:6, 욥39:28, 시18:2, 시27:5, 시 60:9, 시31:2, 시61:2, 시71:3, 시74:15, 시89:26, 시92:15, 시104:18, 시141:6, 렘 4:29, 렘 48:28, 렘49:16, 암 6:12, 욥 1:3-4, 나 1:6, 삿 1:36, 왕하 14:7, 왕하 14:7, 고후 11:32 |
**** 주일오전예배 /사회자 / 한용균 목사
묵상기도 ᠁᠁᠁᠁᠁ /늘은혜 성가대
예배의 부름 ᠁᠁᠁ / 요15:10
신앙고백 ᠁᠁᠁᠁᠁ / 사도신경
기원 ᠁᠁᠁᠁᠁᠁᠁ / 사회자
※. 찬송 ᠁᠁᠁᠁᠁ / 44장
성시교독 ᠁᠁᠁᠁ / No. 16
찬송 ᠁᠁᠁᠁᠁᠁᠁ / 302장
기도 ᠁᠁᠁᠁᠁᠁᠁ / 김가연 장로
성경봉독 ᠁᠁᠁᠁ / 사사기 3:07-11 (구약.364)
특송 ᠁᠁᠁᠁᠁᠁᠁ / 늘은혜 성가대
▶ 아론의 산 (자발 하룬) : 호르산 관련 성경 : 민 20:22, 민 20:23, 민 20:25, 민 20:27, 민 21:3, 4, 민 33:37-39, 민 33:41, 민 34:7, 8, 신 1:44 ▶ 아인 무사 : 모세의 우물 ▶ 타윌란(Tawilan) : 데만 |
설교 ᠁᠁᠁᠁᠁᠁᠁ / “잊지 말자”
봉헌찬송 ᠁᠁᠁᠁᠁ / 314장
봉헌기도 ᠁᠁᠁᠁᠁ / 한용균 목사
교회소식 ᠁᠁᠁᠁᠁ / 김가연 장로
※. 찬송 ᠁᠁᠁᠁᠁ / 619장
아카바:에시온 게벨 아카바와 에일랏은 홍해변에 자리하고 있는 쌍둥이 도시이며, 이 중 아카바는 요르단의 유일한 해변 도시로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항구 도시이다. 이집트에서 연결되는 배편이 이곳을 항해하고 있으며, 걸프지역에서 아프리카 지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항구이기도 하다. 아카바는 고대의 에시온 게벨에 해당하는 곳으로, 오늘날 이곳에는 고대 에시온 게벨에 있었던 솔로몬의 구리 제련소의 흔적이 있다. (신 2:8, 왕상 22:48)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에시온 게벨은 출애굽 여정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쳤던 지역이며, 솔로몬 때에는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 - (민 33:34-35, 신 2:8, 왕상 9:26) 10세기 말엽 애굽의 시삭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아사왕 때에 에돔을 점령하면서 여호사밧왕 때에 이르러 다시 복구되어 해상 무역을 재개하였으며 주전 6세기까지 홍해를 통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고대에는 왕의 대로가 연결되는 교통로로 이용되었고, 로마시대 때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와 암만, 페트라를 연결하는 도로망이 건설되어 이 길을 통하여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오가도록 하였다. 요르단이 아랍화된 7세기 이후에는 아카바 주교청이 자리하기도 하였으며, 십자군 시대에는 십자군들에 의해 요새화 되기도 하였으나. 1170년에는 살라딘에 의해 점령되었다. 1250년 마멜룩이 이 지역을 차지하였고 16세기에는 오토만 터어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후 아카바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까지 평범한 어촌 마을로 자리하였다. 1차 대전후에는 아랍 혁명의 과정에서 이곳을 점령하여 오토만 터키의 세력을 몰아내나 곧 영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요르단이 독립한 후, 후세인 요르단 국왕에 의하여 1965년에 해안선이 조정되었다. 후세인 왕은 6000 sq km의 요르단 사막을 사우디 아라비아에 제공하는 댓가로 12 km 의 해안선을 요르단의 영토로 영입함으로 바다로의 출구를 확보하였다. 요르단과 이스라엘간의 국경 지역 오른쪽, 아카바 서쪽에 자리한 '텔 엘칼리파'(칼리프들의 언덕)의 유적 발굴 결과 고대 에시온 게벨에 있었던 솔로몬의 구리 제련소의 흔적을 발견하였으며, 이곳에서의 구리 제련 작업은 기원전 10세기에서 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현재는 홍해를 이용한 휴양 도시로 발달되어 있다. 관련 성경 : 민 33:34-35, 신 2:8, 왕상 9:26 |
※. 축도 ᠁᠁᠁᠁᠁ / 한용균 목사
폐회 ᠁᠁᠁᠁᠁᠁᠁ / 성도의 교제
※. 표는 일어 서시기 바랍니다.
**** 주일오후예배 ****
오후3시 사회/ 한용균 목사
찬양 ᠁᠁᠁᠁᠁᠁᠁᠁᠁᠁᠁᠁᠁᠁ 주사랑 찬양
기도 ᠁᠁᠁᠁᠁᠁᠁᠁᠁᠁᠁᠁᠁᠁ 윤차선 권사
성경 ᠁᠁᠁᠁᠁᠁᠁᠁᠁᠁᠁᠁᠁᠁ 신명기 10:12-22(구약.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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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디 람 : 와디 룸 '와디 람' 지역은 아카바 북동쪽 35㎞ 지점의 위치한 사막 지역으로, 사막길을 따라 이어지는 경관이 빼어난 지역이다. 사막 전용 지프를 이용한 여행과 요르단 군대의 낙타 부대에 의한 낙타 여행을 즐길 수 있으며, 베드윈들의 전통 식사 및 민속춤을 경험할 수 있다. 해질녘의 와디룸 지역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
가족창 ᠁᠁᠁᠁᠁᠁᠁᠁᠁᠁᠁᠁᠁ 전용환 성도
설교 ᠁᠁᠁᠁᠁᠁᠁᠁᠁᠁᠁᠁᠁᠁ 한용균 목사
요구하시는 것
기도 ᠁᠁᠁᠁᠁᠁᠁᠁᠁᠁᠁᠁᠁᠁ 한용균 목사
찬송 ᠁᠁᠁᠁᠁᠁᠁᠁᠁᠁᠁᠁᠁᠁ 보혈을 지나
주기도문 ᠁᠁᠁᠁᠁᠁᠁᠁᠁᠁ 오직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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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요 1:28)로 언급되는 곳으로, 그 본래 이름은 '베다바라(Bethabara, 건넘의 집)' 라고 일컬어 진다. 관련 성경 : 요 1:28, 요 10:40, 삿 7: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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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예배 및 기도회 2013. 9.25 저녁7시 30분>
설교자 : 한용균 목사
성경본문 : 에베소서 3:14-21(신약. 312)
설교 : 충만하라!
움카이스 : 가다라
이 도시는 성경의 가다라 지방이다. 골란 고원과 헬몬산은 물론이고 갈릴리에서 사해 바다까지 바라다 보이는 산지 평원에 위치하고 있는 이 고대의 유적지는 헬라-로마-비잔틴시대를 이어가면서 발전하였다. 기원전 218년 셀루시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가 이집트의 프톨레미에게서 빼앗았다. 기원전 2세기의 유명한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가다라를 가리켜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로 언급하고 있다. 기원전 98년경에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이곳을 정복하기 위하여 10개월 이상을 소요했다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은 가다라가 얼마나 힘있던 도시였는지를 보여준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황제에 의하여 정복되었고, 데카폴리스의 일원이 되었으며, 자체 동전을 사용할 정도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로마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이곳을 헤롯왕에게 제공하였으나 이를 원치 않았던 이곳의 많은 주민들은 헤롯에게 저항하였다. 헤롯이 죽은 기원전 4년 이후에는 시리아에 합병되었다. 3세기에는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디오클레시안 황제 때의 박해로 순교자가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4세기에는 이곳 출신의 주교가 니케아 공의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635년 펠라에서 이슬람 군대에 비잔틴 제국에 패배함으로 이제 가다라는 이슬람 세계의 한 부분이 되었고, 메카 순례의 주요한 교통로가 되었다. 그러나 8세기에 있었던 대규모의 지진과 9, 10세기에 이곳에 창일 했던 전염병으로 가다라는 잊혀졌고, 12세기 이후로는 움 카이스로 불렸다. 아랍 마을이 다시 조성되었지만 그 규모는 작았다. 1806년 고고학자 울리치 시젠(Ulrich Seetzen)이 이곳을 답사하고 가다라 지방 유적지임을 확인하였으며, 1970년대에 이를 때까지 그냥 하나의 폐허로 남아 있었으나, 그후 지속적인 발굴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는 작은 규모의 박물관이 마련되어 있어 이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그중 4세기경의 것으로 보이는 모자이크가 돋보인다. 관련 성경 : 마 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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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주 예배 봉사위원
주일오전기도 : 이덕기 장로
주일오후기도 : 이명혜 권사
주일오후찬양 : 나명자 성도
**** 중보기도하기
이 지역은 요세푸스에 의하면 알렉산더 얀네우스(103-76 B.C.)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하는 고대 마케루스(Machaerus) 궁전 지역이다. 건축 광으로 알려진 헤롯 대왕에 의하여 그의 여름 궁전으로 재건되었고, 그의 아들 헤롯 안디바가 이 지역을 통치하던 시기에도 헤롯 안디바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주후 41년경에는 헤롯 안디바가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고 후에 그의 머리를 자른 곳으로도 알려진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나이가 늦도록 아이가 없이 지내는 중에도 주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며 의롭게 살므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아들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 회개를 선포하며 광야 생활을 하는 중에 요단강에서 회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성경에 따르면 헤롯 안디바가 그와 결혼했던 나바테 왕국 아레타스 4세의 딸을 버리고 그의 이복 동생이었던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다시 결혼을 하자, 세례 요한은 이러한 유대인의 신앙관에 배치되는 왕의 행동을 혹독하게 비판을 하여, 헤롯 안디바의 미움을 샀을 뿐 아니라, 왕이 세례 요한의 명성을 두려워하여 그를 죽였다고 전해진다. 주후 76년 유대인 반란 이후에 로마는 이곳을 파괴하고 거주민들을 죽였고, 이후에 폐허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의 발굴 결과, 헤롯의 궁전 터와 성채의 흔적들이 발굴되었으며, 헤롯 당시에 건설했던 석조 계단의 흔적과 세례 요한이 1년 가까이 갇혀 지냈던 동굴 감옥이 발견되었다. 이 동굴은 꽤 깊은 동굴로 그 입구에는 당시 문을 걸어 잠그던 돌쩌귀를 해 박은 자국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관련 성경 : 마 14:3-12, 막 6:17-22, 눅 3:19 ▶ 아따룻(Ataruz) : 아다롯(Athroth) |
① 성도들의 삶과 가정과 생업과 재정 가운데 함께 하시고, 늘 하나님의 보
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게 하옵소서.
② 온 성도들이 성령충만하여 주의 뜻을 분별하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며
거룩한 삶에 힘쓰고 능력있는 전도자로 쓰임받게 하소서.
③ 교회안 밖으로 회심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④ 질병으로 고통받는 분들의 치유,건강 회복,믿음과 예배생활의 회복을 위하여
⑤ 교회를 멀리 한 성도와 군복무중에 있는 형제, 유학중에 있는 성도를 위해
⑥ 심방을 통해 모든 가정이 축복되게 하소서.
⑦ 담임목사의 목회사역을 위해
▶ 요단 골짜기 ▶ 십마(Shibmah) ▶ 텔 엣싸이디예(Tell es Saidiyeh) : 사르단 언덕 |
➇ 나라(안보,평화,전쟁 막아주심,경제회복,사회안정)와 북한(무력도발,공산체제,
신앙자유,복음으로 통일)과 한국교회와 재건교단의 신앙의 회복,하나됨,복음능
력회복을 위해
➈ 새로 등록한 교우들이 잘 정착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맛보며
경험하게 하소서.
➉ 임신중에 있는 성도와 태아의 건강을 지키시고, 잘 자라서 순산케 하소서.
***** 2013년 9월 추천신앙도서
이것이 성공이다! / A.W. 토저 / 규장 / 13,000원
▶ 사해(Dead Sea) ▶ 고르 엣 사피(Ghor es Safi) : 롯의 고장 ▶ 키르벳 쉐이크 이사 : 소알 ▶ 카하프 롯 : 롯의 동굴( cave of Lot) ▶ 밥 엣드라(Bab edh Dhra) : 소돔 ▶ 텔 누메이라(Tell Numeira) : 고모라 ▶ 와디 아라바(Wadi Araba) 동쪽의 에돔 산지와 서쪽의 네게브 산지 사이에 위치하는 아라바는 전 지역이 사막 지역으로서 몇 군데 오아시스 지역만을 제외하고는 정착이 불가능하였으나, 대상 무역로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사해 남쪽 36㎞ 지점에는 키르벳 나하스라는 구리 광산의 흔적이 있다. 이 구리 광산은 솔로몬 시대 이후에 사용되었던 것이며, 근처의 키르벳 자리야, 키르벳 네낍 아세이메르 등도 다 구리 광산이었다. 관련 성경 : 신 1:1, 신 1:7, 신 2:8, 신 3:17, 신 4:49, 신 11:30, 수 3:16, 수 8:14, 수 11:2, 수 11:16, 수 12:1, 수 12:3, 수 12:8, 수 15:6, 수15:61, 수 18:18, 수 18:22, 삼상 23:24, 삼하 2:29, 삼하 4:7, 왕하 14:25, 왕하 25:4, 렘 3:2, 렘 39:4, 렘 52:7, 겔 47:8, 암 6:14, 슥 1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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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9월 요절 암송 요절(사랑) *****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
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
<요한일서 4:9>
▶ 모압 산지 ▶ 모압 평지 ▶ 디반(Dhiban) : 디본(Dhibon), 디본 갓 왕국 시대에는 모압의 왕 메사의 고대 수도가 있었던 성경의 '디본' 으로, 한때 모압 왕국의 중심도시로서 번성하였다. 특별히 모압의 메사왕 때에 이스라엘의 지배에서 벗어난 후 기원전 580년경 바벨론 제국이 이곳을 점령하기까지 거의 250여년 동안 모압은 디본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렸다. 느헤미야 때에는 유대의 자손들이 산 곳 (느 11:25)으로 성경에 언급되는 이곳은 현재 작은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의 발굴 작업은 1950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발굴 결과 이 지역에서 초기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3000년경에 문명이 형성되었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이후에도 나바테, 로마, 비잔틴, 아랍 시대에도 도시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나바테 시대의 회당이 발굴되었고, 1868년에는 여호람과 여호사밧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리던 동시대에 디본에서 모압을 다스리던 '메사(Mesha)왕 (왕하 3:4)의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 비문은 현재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원본이 소장되어 있다. 관련 성경 : 민 21:30, 민 32:3, 민 32:34, 민 33:45-46, 수 13:9, 수 13:17, 느 11:25, 사 15:2, 렘 48:18, 렘 48:22, 왕하 3:4, 왕하 3:5, 왕하3:6, 왕하 3:7 |
*****하나님앞에서 열정으로 충만하면....
- E.M 바운즈 목사 -
하나님 앞에서 열정으로 충만하면 기도의 때에 큰 도움을 받기 때문에 풍성한 응답을 속히 받을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왕의 마음이 그의 주께 향했을 때 그분이 그를 위해 베푸신 것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 시21:2’. 또 다른 때에, 그는 하나님께 그의 소원을 아뢰면서 다음과 같이 직접 그의 마음을 쏟아 놓았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38:9’.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의 깊은 탄식과 은밀한 갈망이 하나님의 눈앞에 감추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써 그분을 만나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열정을 품는 마음은 지속적이고 뜨거운 기도를 드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열정이 곧 기도는 아니지만, 열정은 뜨거운 영혼에서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기도의 열정은 하나님께서 기도응답을 통해 베풀어주실 것을 미리 보여 주는 징조이다.
요르단은 지중해의 동남쪽,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조그마한 나라로써, 동쪽으로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 유역의 인류 문명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이락)와 인접하여 있고, 서쪽으로는 고대 인류 문명이 번창하였던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를 접하고 있는 주요 통로의 요지이다. 또한, 세계의 3대 단일신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회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있는 나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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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거된 생명... (갈2:20)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 (78)
죄를 멀리할 뿐 아니라 사물을 보는 전반적인 견해가 바뀔 때까지는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위에서 난다는 뜻은 전에 붙잡고 있었던 것들을 다 내려 놓아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거듭남의 처음 단계는 모든 위선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어 놓길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정직이나 노력이 아니라 참으로 지독한 우리의 죄성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서 가져 가시려는 것은 바로 그 죄성이 전부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완전한 의입니다. 그후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더 제거하여야 할 것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내 자신에 대한 나의 주장과 권한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포기할 의사가 있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오직 주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내려 놓을 수 있습니까? 잘못된 망상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언제나 뼈아픈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시는 관점에서 내 자신을 참으로 보게 될 때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나의 육체의 징그러운 죄악들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항하는 무서운 교만입니다. 만일 당신이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하는 순간에 있다면 그 위기를 뚫고 지나가십시오. 모든 것을 내려 놓으십시오.
2013년 9월 22일 창원 아름다운교회(055-283-3450)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49-7
아름다운교회/한용균목사
아브라함과 이삭의 고향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듯,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는 신앙고백이 있었다. 아람사람(Aramean)의 본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아람(Aram)이요, 아람은 오늘날 시리아(Syria)가 된다. (성경에는 [수리아]로 표기됨) 또한 성화유적으로 유명한 듀라 유로포스(Dura Europos), 사막 한 가운데 신기루와 같이 세워진 로마시대 대도시 팔미라(Palmyra), 십자군 시대의 성채가 원형 그대로 가장 잘 보존된 클락 데 슈발리에(Krakdes Chevaliers)는 시리아가 자랑하는 역사적 유적지들이며, 성지순례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다. |
마라나타(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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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아:시리아의 지리적 요충
지리적으로 시리아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세 대륙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일찍부터 국제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시리아에 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의 하나는, 그곳이 기독교 전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아랍국가인 시리아에서 기독교인의 수가 인구의 13%나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시리아의 교회 전통은 초대교회시대로 소급해 올라간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은 다마스쿠스(성서상의 다메섹)근처에서 신앙적 회심의 체험을 했고, 그 도성으로 들어가 세례를 받고 사도 바울로 새사람이 되었다. 시리아의 안디옥에 있던 안디옥 교회는 사도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했고, 교회역사상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라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또한 안디옥 교회는 많은 신학자들을 배출하였고, 이그나시우스, 크리소스톰 등은 이 교회가 자랑하는 위대한 신학자들이다. 오늘날 안디옥은 터키에 속하고 있으나, 본래 이곳은 시리아에 속한 도시였다. 세계 1차 대전 후, 프랑스가 시리아를 위임통치할 때, 프랑스는 안디옥을 터키에 할양하였다. 오늘날까지 시리아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오늘날 시리아에서 발행된 지도는 예외 없이 안디옥을 시리아에 속한 땅으로 표시하고 있다. 비잔틴 시대(서기 4∼7세기) 기독교는 시리아에 널리 전파되었고, 이 기간동안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이때 건축된 대표적인 교회는 성 시므온 교회다. 38년 동안 기둥 위에서 살며 고행했던 주상성자 시므온을 기념하는 교회로, 당시에는 교회 건물 중 최대의 규모였다. 구약성경과 관련하여 시리아의 알레포(Aleppo)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구약사본 중에서 가장 귀중한 사본 가운데 하나인 벤 아셔사본이 보존되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현재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에서는 이 알레포의 사본을 토대로 하여 구약 히브리 원문 성경을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특징은 바로 ‘기도’이다.”- E.M 바운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