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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증언자: 김윤기(남)
생년월일: 1957. 10. 14(당시 나이 24세)
직 업: 대학생(현재 무직)
조사일시: 1989. 2
개 요
1978년 전남대학교 '우리교육지표사건'으로 제적되어 1980년에 복적, 극단 '광대'로 활동하다 5·18을 맞아 유인물을 만드는 등 홍보활동을 하고, 27일 새벽 도청 경비를 서다 체포. 1980년 12월 석방됐다. 이후 기독문화선교원 활동과 현재는 윤한봉귀국추진위원회에서 일을 하고 있다.
평범한 어린 시절
나의 고향은 함평군 나산면 월봉리다. 8남매나 되는 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50-60마지기의 농사를 지은 우리 집의 생활은 남들이 거의 겪은 보리고개 한 번 겪지 않고 자랄 수 있었다.
함평 나산국민학교를 다니다 5학년 때 형과 누나들이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어 광주로 전학을 왔다. 사레지오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할 때 교육제도가 바뀌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중학교도 시험을 봐서 들어갔는데 무시험 추첨제 입학으로 바뀌어 내가 첫 케이스로 숭일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제일고등학교를 시험을 봐 들어갔을 때도 나는 그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물론 나에게 어떤 임무가 주어지면 책임있게 성실하게 잘 해냈다.
아마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10월 유신'이 선포되었을 것이다. 중학생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헌법이 바뀌면서 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보는데 사회공부를 다시 해야만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때는 많이 보는 참고서가 '완전정복시리즈'였는데 10월 유신으로 '10월 유신정복시리즈'를 가지고 공부했다.
1974년 '전국민주학생청년총연합' 사건이 터지고 난 뒤 교련선생님이 '고등학생도 연결되었다는 걸 다 알고 있으니 좋게 자수를 해라'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그 파문은 컸다. 이후 학교에서는 데모가 자주 일어났다. 나는 형과 누나들이 대학생이어서 '민청학련' 사건에 대해서 귀동냥을 하기도 했고 씨알의 소리 라는 잡지를 보면서 유신체제는 잘못된 것이다라는 인식을 했다. 그러나 소박한 차원에서 의식에 눈을 뜬 상태에 불과했다. 나는 관현악반에서 서클활동을 했는데 4월과 11월에는 데모가 자주 있어 나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5년 입시 때문에 서클활동을 그만두고 열심히 공부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동료들이 사회 전반에 관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동료 열댓 명이 제적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들 모두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는 체제에 반대되는 세력은 용공으로 몰고 사형을 선고하는 아주 폭압적인 상황이었다. 나는 같이 공부해야 될 동료들이 제적되어 버리자 정치권력의 폭압을 타도해야 할 대상이라는 저급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
나는 대학진학에 있어서 사회학과나 정치외교학과를 가고자 했으나 아버지는 의대에 가기를 원했다. 50-60마지기의 농사는 형과 누나들 가르치느라 곶감 빼먹 듯 한 마지기 두 마지기 팔았던 것이 거의 반으로 줄어들었다. 나는 재수를 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게을리하다 고3 말기에 법대를 가고자 마음먹고 열심히 공부했다.
운동권 학생이 되어
1976년 전남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 시절은 법대 하면 누구나 고시학원을 떠올렸다. 그런 현실 속에서 법학교육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법과대생의 통상적 생각인 고시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학과공부나 충실히 하여 대학원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1학년 때부터 학과공부에 취미를 잃었다. 1년 선배인 곽재구, 나해철 형들의 권유로 친한 친구들과 'SALT' 일명 '소금'이라는 서클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소금'은 일반적인 교양서클로서 일주일에 한 번씩 독서토론을 했다.
당시 전남대학교 분위기는 민청학련 사건 뒤의 침체기로 주로 하는 일이 술 마시고 토론하는 것이었다. 1년을 그렇게 보내고 2학년에 올라갔다. 학과공부를 게을리해 학점은 엉망이었다. 2학년이 되자 학과공부와 사회과학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소금' 서클을 사회과학 서클로 바꾸고자 시도했다. 나는 1학년말부터 서클내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던 터라 의욕은 왕성했으나 원래 뿌리가 교양서클이라 상당히 어려웠다. 그러던 중 밖에 있던 전남대 민청학련세대들 이 학생운동을 재건하기 위해 전남대학교에 재건그룹을 만들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그룹에 열결되어 소그룹 학습을 했다. 우리 그룹은 예닐곱 명으로 노준현, 박병기 등으로 구성되었다.
숨어다니다시피 1년 동안 운동권 입문서 수준 정도의 서적을 가지고 학습을 했다. 지금이야 사회과학서적이 많이 보급되었지만 당시의 베스트셀러는 단연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그 외에 이영협씨의 일반경제사요론을 가지고 경제사 공부를 했다. 2학년말이 되면서 '소금' 서클에는 안 나가게 되었다.
1977년 겨울이 되면서 소그룹내에서 역할분화가 되었다. 나와 김선출은 문화운동 쪽을 담당하기로 했는데 서울에서는 김지하씨를 중심으로 탈춤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우리도 그것에 자극받아 문화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겨울에 YMCA에서 강사를 초빙해 탈춤 강습을 했는데 우린 자연스럽게 합류해 탈춤을 배우고 그 강사와 함께 저녁에는 토론도 하면서 여관에서 합숙을 하다시피 했다.
1977년 서울대 김상진 열사 추도식 때 탈춤공연이 큰 성과를 거두는 것을 보면서 탈춤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이 폭압적 상황 속에서 굉장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인식했다.
1978년 봄에 윤만식, 김선출, 김정희 등 몇몇과 '민속문화연구회'라는 서클을 등록했다. 기능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우린 열심히 활동했고 봉산탈춤 공연도 했다. 탈춤의 이론에 뛰어난 조동일씨의 책들을 보면서 서사극에 접근을 하고자 했다. 또한 민족양식으로서의 탈춤에 애정을 가지게 되면서 그러한 애정을 운동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
녹두서점을 운영하는 김상윤 선배의 도움으로 연극반과 교류를 갖기 시작하여 박효선 선배, 김태종 등과 인간적인 교류를 갖기 시작했다.
그해(1978년) 봄에 JOC(가톨릭노동청년회) 호남전기 노동자들과 연극을 해보자고 팀을 하나 만들려고도 했으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서울 쪽에서의 시위와 함평 고구마사건의 영향으로 민주화의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우리들도 대부분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978년 4·19 행사 때 누군가 문리대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몇 마디 외치다 학교내 상주하던 형사들에게 잡혀가버렸다. 너무 허망했다. 아무리 서슬퍼런 유신시대이고 긴급조치가 판을 치는 세상일지라도 학생들의 양심마저도 잠자는 것인가, 계기만 주어진다면 크게 한번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6월 29일 우리의 교육지표사건'이 터졌다. 송기숙 교수님을 비롯 해 이상식, 이홍길, 이석연 교수님 등 열한 분의 교수님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전원 연행되었다. 그 사건이 미친 여파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학생들은 그때야 자연스럽게 교수 석방을 부르짖으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사회의 고양된 반독재 열기를 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쪽에서는 그야말로 절호의 찬스였다. 시위를 하려는 사전계획을 녹두서점에서 하기로 했다. 녹두 서점에 갔더니 탈춤반 멤버인 선출이도 와 있었다. 탈반을 위해 둘 중에 하나는 남아서 뒷수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누가 빠지기도 뭣해서 남은 사람이 알아서 잘하겠지 생각하고 그냥 둘 다 참여했다.
나는 법대와 문리대 유인물 배포를 담당했다.
비오는 날의 시위
그날은 비까지 내렸다. 약간의 찝찝함이 있었지만 큰일을 앞두고 그리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안길정이 자췻방에 미리 갔다놓은 유인물을 조봉훈 선배가 정부미 부대에 담아 택시를 타고 상대 뒤의 선배 자췻방으로 옮겨 분배를 했다.
나는 유인물을 들고 먼저 법대로 갔다. 각자 맡은 유인물을 맡은 장소에 뿌리고 2시간 후에 도서관 앞에서 집결하기로 했다. 시간이 상당히 촉박했다. 법대 내에 일고 동기들 중 재수, 삼수생을 중심으로 소그룹을 형성했는데 다행히 그 친구들 도움으로 쉽게 유인물을 배포할 수 있었다. 문리대에 나머지 유인물을 뿌리고 도서관으로 갔다. 그런데 도서관은 생각 외로 조용했다. '어찌 된 일이다냐?' 하고 둘러봤더니 도서관을 맡기로 했던 친구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 다.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유인물을 도서관내에 뿌리면서 큰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거의 학생들을 밖으로 내몰다시피 했다.
도서관 앞에서는 노준현 선배가 주동을 하기로 했다. 우리는 선배의 연행에 대비하여 주위에서 보호하고 서 있었다. 그때 이슈는 '교수석방', '민주교육실시', '긴급조치 해체' 등이었다. 애국가를 부르고 유인물을 낭독했다. 예상외로 많은 학생들 앞에서 교수와 형사들은 손을 쓰지 못했다.
우리는 도서관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다 오후에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나왔다. 학교 안은 밀고 밀리는 접전이 되풀이 되었다. 페퍼포그와 적들의 물리력 앞에서 문리대 앞의 내가 있던 대열은 해산되어 버렸다. 나는 잡히지는 않았지만 휘두르는 형사들의 곤봉에 허리를 많이 맞았다.
나는 얼마나 급하게 도망을 갔는지 신발도 잃어버리고 친구집으로 갔다. 집으로 전화를 해보니 아직까지는 아무 일 없다고 하면서 동생이 옷이랑 신발을 가져 다줬다.
도바리생활이 시작되다
이후 친구집을 전전하는 생활을 했다. 학내시위 후 3일 정도는 허리가 운신도 할 수 없게 아팠으나 내가 처한 현실 앞에서 나는 한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
시골 동창집을 돌아다니다 7월 중순 순천에 사는 작은매형 집에서 한 달 반 정도 고시공부하러 왔다고 하고 기거했다. 그러나 동네사람들의 눈치가 이상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에 서울로 도망을 갔다.
서울에서는 장기하사로 근무하는 친구집에서 지냈다. 그 친구는 대학을 가야겠다며 입시공부를 위해 오후에는 학원을 다니고 나는 노가다를 했다. 그러나 그것도 허리가 아파 오래 하지는 못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동료들은 다 잡혀 평균 3-4년의 형을 받았다.
나는 1979년 가을까지 도망생활을 하다 9월에 서울시경 형사들에게 검거되었는데 그때는 워낙 살벌한 때였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이 터져 대규모의 사람이 구속되었고, 전남대학교에서는 전남대 방화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나는 윤한봉(방화사건관련자) 선배와 같이 옥살이를 하다가 12월에 긴급조치가 해제되면서 출감했다.
극단 광대의 멤버가 되어
출감해 보니 학교는 이미 제적되어 있었고 내가 학내에서 일할 만한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효선이 형, 태종이, 지금의 내 처와 밖에서 팀을 만들자고 해 극단 '광대'를 만들었다. 곧바로 '돼지풀이'라는 돼지파동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 창작극을 준비했다.
1980년 봄이 되면서 제적생들의 복학문제로 내부에서는 논란이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복학을 하는 것으로 결정을 해서 나도 복학을 했지만 광대활동 때문에 학내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3월 YWCA에서의 돼지풀이를 성황리에 끝내고 농촌으로 공연을 다니기로 하고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탈춤강연을 하기도 했다. 별 다르게 장소도 없는 우리들은 YWCA 안의 마당을 이용하기도 하고 소회의실에서 연습을 하기도 했다. 황석영씨와 같이 일을 하면서 '한씨연대기'라는 소설을 공연하기 위해 연습을 했다.
5월에 접어들면서 광대는 장동 로터리에 있는 위산부인과 건물 지하실을 얻어 '동리소극장'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공사를 하고 있었다. 경신여고 선생이었던 효선이 형은 아예 사표까지 쓰고 광대일에 매달려 있었다.
계엄령이 확대되다
5월 17일 저녁 함석헌씨가 와서 YWCA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강연이 끝나고 식사를 하는 자리에 합석을 했다. 그날은 또한 박석면(박석무 선생님 동생)이 휴가를 나왔다.
그날 저녁 나, 석면, 태종, 선출이와 코가 삐뚤어지도록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는 박석무 선생님 댁으로 갔다. 시간은 이미 12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우리는 들어가자마자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다.
"때가 어느때인데 술 마시고 다니는 거냐. 선배들 다 잡아가버렸다. 12시를 기해 계엄령이 확대, 발표되었다."
술이 확 깼다. 이미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올 것이 드디어 오고야 말았구나 생각하니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우리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러나 아무런 대안도 마련할 수 없었고 일단은 사태를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는 8시경 시내로 나왔다. 시내는 분위기가 어제하고는 판이하게 달랐다. 나는 석면이와 가톨릭농민회에 가서 노금노씨와 몇 마디 이야기를 하고 연습장으로 갔다.
다른 때 같으면 신명나게 놀고 있을 사람들이 계엄확대 소식에 다들 짚이는 데 있는지 코가 석 자나 빠진 모양으로 앉아 있었다. 효선이 형이 겨우겨우 연습을 하자고 추스려 연습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와'하는 함성 소리와 함께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와 보니 학생들이 전경들에게 얻어터지고 피를 흘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상황에서 연습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나, 태종, 선출이 셋은 이 상황에서 뭔가 해야 된다고 판단해 농대 쪽문 부근에서 자취하고 있는 후배 방으로 갔다. 그 후배 방에는 등사기가 있어 유인물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인물을 만들다
8절지 종이를 사다가 유인물을 만들었다.
'드디어 전두환의 마각이 드러났다...... 광주 민주시민 총궐기하자......김대중씨 등 전민주인사 잡아감......'
그사이에도 시내에서는 살벌한 상황이 계속됐던 모양이었다. 사전에 한일은행 맞은편 건물 지하의 남선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동료들에게 늦어질 것 같다고 전화를 했더니 공수부대들이 대검으로 찌르고 난리가 났다고 했다.
유인물을 만들어 정부미부대에 넣고 등사기도 함께 넣어 택시를 탔다. 중흥동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부근의 다리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가 우리가 택시를 타고 오는데 중간에 우리 택시를 세웠다. 아주 기적적인 상봉이었다. 그 친구가 하는 말이 '한일은행 앞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도저히 들어오면 안 될 것 같아 우리들이 분명히 택시를 타고 올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곳에 서 있었다고 했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앞도 이미 계엄군이 쫙 깔려 있었다. 시내 중심가는 이미 그런 상황이 돼 있는 것 같았다.
유인물을 가지고 시내로 들어간다는 것이 무모하다고 판단한 우리는 계림동 주택가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산장 쪽으로 올라가면서 집집마다 유인물을 넣어주고 가게에 뿌리기도 했다. 보는 사람마다 자기들도 뿌려주겠다면서 가져가 우리들은 수월하게 일할 수 있었다.
고향 아저씨 뻘 되는 분이 하고 있는 쌀가게로 들어가 신발을 갈아신었는데 아저씨가 돈이 필요하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산장 입구의 허름한 식당에서는 유인물을 손님들에게 나누어줬더니 주인이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다.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잔악한 만행을 눈으로 귀로 전해 듣고 흥분해 있거나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일을 모두 끝내고 광주상고 앞 정류장 부근의 목재소에서 다시 모였다. 통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우리는 각자 요령껏 피하고 그 다음날 증심사 근방의 마을에 사는 친구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나는 산수동 공무원 아파트 밑에 사는 큰누나 집으로 갔다.
다음날 누나가 집으로 연락을 했는지 어머님이 마침 일찍 구탕을 끓여가지고 오셨다. 허리 때문에 약을 먹고 있는 상태였는데 구탕이 허리 아픈 곳에는 좋다고 끓여 오신 것이었다. 친구들과 약속을 했기 때문에 나가야 하는데 어머님이 옆에 앉아 꼼짝달싹도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머님은, "집집마다 공수들이 수색해서 젊은이들을 전부 잡아가는 판국인데 더구나 너는 복적생이니 나가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집에 머물러 있었다.
20일,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어 시내에 나갔다가 손남승을 만났다. 함께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고민했지만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찹찹해지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차량시위대가 움직이다
산수동 공무원 아파트 시장 앞에서는 여러 시민들이 김밥과 달걀을 가지고 나와 지나가는 시위대 트럭을 세워 너도나도 올려주고 있었다. 저렇게 시민들도 나서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자책감에 앞으로 일이 어찌 되든 일단 시내로 나가자고 결정했다. 친구들을 만나야겠는데 이미 연락은 어려웠다.
골목길을 따라 MBC 방송국 앞을 지나 전신전화국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전화국 밖으로 나 있는 계단으로 어떤 사람이 올라가면서 전화국을 폭파해 버리겠다고 했다. 곧 폭파시켜 버릴 것만 같았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전화국도 우리의 재산이니 그냥 내려오라고 만류하여 그 사람이 내려왔다.
나는 그곳에서 있다가 중앙국민학교 후문에서 병원을 하는 '김원기내과' 형한테 갔다. 고등학생이었던 막내동생 정기는 시내에 나왔다가 지나가는 차를 타고 화순으로 총기를 탈취하러 갔다 오기도 했다.
그 형의 병원에 탈반 후배 한 명이 열병에 걸려 입원을 하고 있었다. 그 후배랑 같이 있자니까 광대 팀 사람들이 병문안을 와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 있었다. 나는 병원에 있으면서 총상 환자를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형 말에 의하면 이마에 유탄이 박혀 들어온 사람 등 형 병원에도 많은 환자들이 왔다 갔다고 했다.
홍보팀에 합류하다
도청을 접수하고 난 뒤 거리는 죽음과 공포가 서서히 가시기 시작했다. 23일부터 궐기대회를 했다. 나는 궐기대회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YWCA에서 광대팀이 모여 시내 질서유지와 도청 앞 집회를 홍보하는 데 홍보역할을 맡았다. 나는 가두방송 차를 타고 홍보를 하기도 했고, 대자보를 써서 시내 곳곳에 붙이러 다니는 일을 하기도 했다.
밤에는 형 병원에 가서 잠을 잤는데 방송에서는 연일 거짓보도만 일삼아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전체적으로 번지지 않고 광주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집에 있을 때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으나 밖에 나가서 일도 하고 사람들의 활기 차고 질서 있는 모습을 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홍보를 하는데 차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나는 김상집 형과 책임을 맡아 전남대로 스쿨버스를 가지러 갔다. 그러나 대강당 앞에 있는 스쿨버스는 모조리 시동이 안 걸리게 선을 잘라놓고 가버린 뒤였다.
하는 수 없이 그냥 올려고 하는데 누군가 온 김에 식량이나 가지고 가라고 했다. 말인즉 매점에서 빵이나 가져가자는 소리였다. 그러자 한쪽에서 아이스크림도 놨두면 다 녹으니 가지고 가서 사람들이나 먹게 하자고 했다. 우린 그때 도둑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매점문을 열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빵과 음료수, 아이스크림을 가져와 차에 실었다. 모두들 손에 아이스크림 하나씩 물고 있는 것을 보고 웃기도 했다.
도청내에 경비를 맡다
5월이었지만 밤에는 쌀쌀해 형 집에서 겨울잠바를 입고 나왔다. 학생들은 궐기대회시 방송을 하여 YWCA 앞으로 모이라고 했다. 많은 학생들이 모였다. 나는 총을 쏠 줄 몰랐지만 YWCA 1층 강당에서 자세와 격발에 대해서 총기교육훈련을 받았다. 그러고는 총을 지급받았다. 이미 도청 안에서는 수습대책위원 가운데 투항파의 무기회수 때문에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었다.
저녁 무렵 결사항전을 할 사람만 나오라고 해 비장한 각오로 도청으로 들어갔다. 도청으로 들어갈 때 수습위원들을 몰아내기 위해 위압적으로 큰소리로 번호를 붙여가면서 들어갔다.
도청에 들어간 우리는 3층 회의실에서 늦게까지 결의대회를 가졌다. 김종배, 정상용, 박남선씨 등이 나와서 이야기를 했다. 계엄군이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는 상황이었다.
그날 저녁에는 시내에서 제과점하는 사람이 케이크를 많이 가져와 마음껏 먹었다. 나는 위성삼 형과 같은 조로 편성되었다. 처음에는 도청 1층 계단 중간에서 복도 경비를 맡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경들이 도망가면서 버리고 간 방석모와 방석복을 입고 있었다.
저녁, 느닷없이 계엄군이 쳐들어온다고 하여 비상이 걸렸다. 우린 신속하게 탄약창고에서 실탄을 지급받았고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실탄을 지급받고 나서 윤상원 형의 명연설이 있었다. 농촌진흥원까지 계엄군이 왔다가 후퇴했다는 소리와 함께 비상이 해제되었다. 26일 나는 아침밥 먹기 전까지 계단에서 경비를 봤다. 우리에게는 무전기가 한 대 있었는데 예비군 차림의 남자가 주파수를 맞춰 무전을 도청하기도 했다.
아침에 밥을 먹는데 입맛이 하나도 없었다. 식은밥을 뜨거운 물에 말아 먹었다. 식당 주방장은 구성주씨였다. 구성주씨는 항상 우비를 걸치고 다녀 인상이 남아 있다.
아침밥을 먹고 다시 조편성을 하였다. 도청은 정문에서 들어가면 두 개의 건물이 나란히 있었다. 신관건물과 구관건물로 두 건물은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고 구 관건물 옆에는 별도로 민원실이 있었는데 그곳도 구관건물과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민원실 2층의 강당을 식당으로 이용했다. 구관건물 1층에는 상황실이, 2층에는 홍보실이 있었으며 홍보실 옆을 대변인실로 사용하였다. 대변인실에는 윤상원 형이 있었는데 기자회견 등을 하여 우리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처음에 기자들은 내신·외신 구분하지 않고 전부 들어오게 했으나 기껏 입 아프게 이야기하면 앞에서는 열심히 받아적는 척하면서 단 한 줄도 제대로 보도를 하지 않자 투쟁본부에서는 강경한 방침을 세워 외신기자만 들어오게 했다.
대변인실에서 근무하다
나는 2층 복도를 통제하다가 대변인실로 옮겼다. 대변인실에서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했는데 문 입구에 책상을 두고 총을 한쪽 구석에 세워둔 채 근무했다. 한 번은 어떻게 정문을 통과했는지 외신기자들 틈으로 우리나라 사람 한 명이 따라 들어왔다. 내가, "당신은 뭐요?" "좀 들어갑시다."하면서 어영부영하는 것이었다. 내가 인상을 쓰면서 나가라고 해도 말을 안 듣더니 옆에 세워둔 총을 들자 뒷걸음치며 나갔다.
대변인실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외신기자들 때문에 여간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니었다. 기자들이 한꺼번에 오는 것이 아니라 각자 따로따로 오는 통에 한 말을 또 하고 또 해야만 했다.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오전, 오후 시간을 정해 놓고 그 시간에 기자들을 들여보내 브리핑을 해주는 것으로 결정을 했는지 내 기억에는 없지만 그날은 기자회견을 한 번 한 것 같다.
브리핑은 투쟁위원회의 입장과 전투상황, 계엄분소와의 협상결과를 해주었는데 중심적으로 이야기했던 것은 상황실을 통해 들어오는 외곽전투상황이었다. 우리는 우리 쪽의 피해상황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일방적인 연락만 받을 뿐이지 직접 가서 확인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체계적이지 못해 중복된 보고도 있었을 것이고 과장되게 발표된 보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청내에서는 낮에는 총에 장전을 하지 않고 총알을 빼 호주머니에 넣어두기로 했다. 만약의 사고에 대비해서 였다.
초저녁 무렵이 되면서 오늘밤(26일)에는 분명히 들어올 것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날(26일) 낮에는 가족들이 찾으러 와 간 사람들과 지금이라도 갈 사람은 가라고 하는 도청지도부의 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도청을 빠져나갔다.
나는 결국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판단했지만 명예롭게 희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도청내 분위기는 활기 찼으나 저녁에는 긴장감마저 돌았다. 나도 기분이 착찹해지면서 밥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상황 속에서도 식당에서는 왁자지껄 웃기도 했다. 사람 심리란 참 묘해서 위급한 상황일수록 여유를 갖고자 하는 본능이 강해지는 모양이었다. 전투태세에 대비해 전경들이 쓰던 각반을 차는 사람도 있었고 방석을 목에 거는 사람, 헬멧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총알이 뚫지 못한다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각반을 차면 좋다더라'는 말이 나돌면서 너도나도 각반을 차려고 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는 마음을 자기 나름대로 통제하기 위한 행위였던 것 같다.
저녁에는 복도근무를 할 필요가 없어 나는 사람들과 함께 식당에 모여 이야기를 했다. 11시경 식당에서 선배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대변인실 안이던가 그 옆방인지 잘 모르겠는데 행정전화가 가설되어 있는 곳이었다. 선배 한 명이 그 전화로 내무부와 통화하고 있었다.
단 한 방의 총도 쏴보지 못하고
새벽이 되었을 때 멀리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복도로 뛰어나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으나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즉각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외곽에서 들리던 총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차량이 출동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총을 움켜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총소리는 '드르륵' 갈기는 소리와 미약하게 '콩콩'하는 소리로 구분되었다. 드르륵 갈기는 소리는 저쪽에서 쏘는 총소리이고, 약한 총소리는 우리 쪽에서 응사하는 소리인 것 같았다.
나는 총구를 도청 앞으로 향한 채 긴장해 있는데 느닷없이 도청 뒤편에서 M16 긁는 소리가 났다. 순간 나는 힘이 쑥 빠지면서 겁이 나기 시작했다. 차라리 눈에 적들이 보이면 좋겠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앞뒤에서 드르륵 총 긁는 소리는 나를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래도 계속 그곳에서 버텼다.
조금 있자 총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사람도 나와 같이 겁이 났던지 무조건 총을 쏘았다. 나도 총이라도 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총을 잡아당겼으나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분명히 총을 쏘았는데도 총알이 나가지 않자 겁이 덜컥 났다. 총은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카빈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탄창에 이상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뒤쪽으로 다 들어온다." 하면서 뒤쪽으로 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듣고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뒤쪽 창을 방어하던 사람 중 한 명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누구인지 모름). 유리창은 다 깨졌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 날아온 총알은 벽에 팍팍 박혔다.
위력적인 M16 소리에 우리 모두는 아예 응사할 생각을 못 했다. 계엄군들은 상황실 쪽과 구관건물과 신관건물 사이의 계단 쪽으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저벅저벅 걷는 발소리와 드르륵 갈기는 총소리에 우리 방 사람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어렴풋이 동이 틀 무렵이었다. 계엄군들은 복도에 대고 총을 막 쏘아대더니 우리가 응사를 안 하자 복도에 병력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계엄군들이 외쳤다.
"너희들만 남았다. 밑에는 전부 항복했다. 너희들도 항복하라. 총을 복도에 던지고 손을 머리에 얹고 나와라."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어떤 선배가 물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것냐??"
"이미 상황은 끝난 것 같소. 여기서 개죽음당하느니 다음을 기약하고 항복하고 나갑시다."
모두들 그 의견에 동의했다. 한 사람이 총을 복도로 던지자 계엄군은 다시 총을 드드륵 갈겼다. 그 사람이 나가자 워커발로 지근지근 밟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몇 사람 있냐고 묻는 소리 가 들렸다.
나는 그 순간에 방석복을 벗어던지고 탄창을 구석에 던졌다. 계엄군은 복도로 올라와 방을 향해 총을 드르륵 갈겨댔다. 이러다 다 죽겠다는 생각에 일제히 총을 복도로 집어던졌다. 복도는 어느 정도 훤했다.
우리들이 나가자마자 계엄군들은 두말 없이 워커발로 지근지근 밟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못 들게 하고 2층 신관건물과 연결된 곳으로 집결시켰다. 계엄군은 우리들 몸을 수색해 탄창이 나오면 등에 극렬폭도라고 썼다.
그 시간에도 3층에서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머리 위로 총알이 핑핑 날아다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한참 후, "다 끝났어." 라는 소리와 함께 도청은 계엄군에게 완전히 진압되었다. 나와 같이 잡혀 있던 20-30명은 엎드려 배를 땅에 대고 뱀같이 기어서 도청 앞 마당으로 갔다.
고개를 살짝 들어 보니 탱크, 헬기 등이 눈에 들어왔고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우리는 굴비 엮듯이 포승을 당했는데 계엄군들은, "너희들은 다 총살감이다." 라면서 윽박질렀다. 포승줄에 묶여 고개를 숙인 채 상무관과 분수대 사이에 있는 상무대 군용버스에 올라탔다. 군용버스는 한쪽에 세 명이 앉게 되어 있어(보통 버스는 양옆에 두 명씩 앉는데) 통로가 굉장히 좁았다.
나는 그 와중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옆에 누가 탔는지 보려고 고개를 들다 계엄군에게 들켜 개머리판으로 얻어맞기도 했다. 내 앞자리에는 이양현 형이 앉아 있었다.
버스가 상무대에 도착했을 때 연병장에는 벌써 책상이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연병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독침사건의 주범이었던 장계범과 몇 명이, "저 놈이 주동자다." 라고 가리키고 다녔다.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심하게 맞았다. 지근지근 밟혀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조사내용은 총을 들었냐 안 들었냐로 간단하게 물었다. 그리고 한바탕의 매타작이 끝나고 전교사 영창에 들어가는데 군인들이, "느그 새끼들은 다 죽여버린다."고 하면서 곡괭이 자루로 또 두들겨팼다.
5방에서의 영창생활이 시작되다
나는 일반 폭도로 분류되었다. 안에서 조사는 대개 '누구누구 나와'라고 호명하면 두 줄로 서서 조사를 받으러 갔다. 조사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상윤이 형이랑 같이 수사내용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
한번은 수사를 받다 담당이 좀 쉬자고 해 창가에서 쉬고 있는데 상윤이 형 동생 현주가 앞으로 지나갔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어이 어이'하고 불렀더니 현주는 손을 휘저으면서 알은 체하지 마라고 했다.
나는 5방에서 생활을 했다. 5방에는 정해직, 김영철씨 등이 있었고 YWCA에서 잡혀온 길정이와 한정만 등이 있었다.
나는 분명히 도청에서 잡혔는데 어쩌다 보니까 YWCA에 있었던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내가 그 순간에 판단해 보니 도청에서보다는 YWCA에서 잡힌 것으로 정리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안길정과 같이 있다가 총도 못 쏴보고 잡혀 온 것으로 정리했다.
5방에 있으면서 누가 불려나가는가를 지켜보고 수사받고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기도 했다. 그들은 잡혀온 우리들을 팀별로 분류했다. 나는 다행히 홍보를 담당했던 광대팀이 한 명도 잡혀오지 않아 한시름 놓았다.
내가 처음으로 수사를 받았던 곳은 전교사 매점 옆의 조그마한 건물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야, 이 새끼야 너 복적생이지." 하면서 30여분간을 죽도록 맞았다. 그때야 내가 복적생이라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수감자들 모두가 많은 구타와 고문으로 처음 불려갈 때부터 초죽음상태로 들어 왔다. 수사관들은 내가 생각해도 일관성이 없는 진술을 함에도 불구하고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맞을 만큼 다 맞고 본격적으로 조사만 받을 때는 처음처럼 무조건 많이 맞지는 않았다.
내 담당은 보안대 직업군인이었다. 내가 조사를 받으면서 담배 하나 달라고 하자 순순히 주기도 했다. 내가 담당에게 어디서 왔냐고 묻자 담당은, "야, 새끼야 알아서 뭐 하려고 그래. 서울에서 왔다." 고 대답했으나 실제로 조사받을 때는 심하게 대하지 않았다.
수사가 대충 마무리되었을 때 전용호가 자수를 했다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제 조사가 새로 시작되겠구나'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또 선출이가 들어왔다. 나는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와 그 지긋지긋한 매타작을 되풀이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였다. 그러나 의외로 쉽게 정리가 되었고 '광대'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영창내의 생활은 밥이 부족해 항상 허기진 상태였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점이었다. 이후 수감자들의 단식투쟁도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고역스러웠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든다.
상무대에서 재판받은 일은 아마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조서내용은 엉망이었을 뿐더러 국선변호사가 변호한답시고 '총들고 그런 것 잘못했지?'라는 식으로 우리들에게 묻는 것이었다. 우린 재판은 전부 포기했고 법정투쟁 대신에 최후진술까지 거부한 채 오로지 묵비권행사만 하였다. 한꺼번에 재판장소로 끌려가 간단히 끝나는 것이 상례였다.
나는 '계엄포고령 위반'과 '총포화약류 단속법 위반'에 걸려 3년을 선고받고 교도소로 이감됐다. 교도소에서는 광주투사들 왔다고 하면서 일반 재소자들이 밥 남은 것을 모두 보내줬다. 상무대 영창에서 얼마나 곯았던지 우리 방에 있는 사람들은 밥 먹기 시합을 했다. 나는 '가다밥'을 두 덩이 먹었더니 밥이 목까지 차면서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한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동안 식사량이 적어 위가 줄어들었는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우리 방 사람은 최고 네 그릇까지 먹은 사람도 있었다. 모처럼 밥을 실컷 먹고 다들 벽에 기대고 숨도 제대 로 못 쉬고 있었다. 그러나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을 먹어 속에서 놀랐는지 모두들 설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 방에는 수습지도파였던 정해민, 안길정 등 학생그룹과 화순무기고 사건의 주범인 김정권, 김인권 등 화순팀이 같이 있었는데 서로 갈등이 생기면서 티격태격 싸움을 하기도 했다.
내가 책을 보면서는 막연히 민중에 대해서 당위적으로 민중은 모든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상황에서는 아주 약삭빠를 수도 지혜로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생활 속에서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민중의 실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운동의 방향에 대해 깊게 생각했다.
나는 형량확정 과정에서 형량면제를 받고 10월 1차 석방 때 석방되었다. 그 석방되던 날도 교도소에서 상무대로 가 보안교육을 받고 각서까지 썼다.
나는 영창 안에서 빈혈증세로 쓰러진 적도 있었는데 내 몸은 이미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또한 그 동안 내가 얼마나 관념적으로 운동을 했는가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석방된 지 열흘 만에 영장이 나왔다. 학교는 이미 무기정학상태였고 1980년 봄에 신검을 받았는데 징집연기가 안 되었다. 살아 남았다는 죄의식, 좌절감, 초토화된 운동권 상황에 대해 깊은 절망감을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정용화 형한테 연락이 왔다. 구속된 사람들 명단을 입수해 5·18 기초자료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나는 교도소에서 화순팀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화순 쪽 자료수집을 하기로 했는데 워낙 그때는 상황이 살벌해 이야기 꺼내는 것조차 두려워해서 거의 성과가 없었다.
1980년 12월 9일 죽으러 가는 것 같은 처참한 기분으로 입대를 했다. 그해 겨울은 눈도 많이 오고 엄청나게 추웠다. 자대배치는 전방 28사단으로 경기도 연천과 파주에 걸쳐 있는 부대였다. 나는 행정반에 배치되어 그것도 본부에서 근무한 덕분에 그리 어렵게 군대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1980년 '광주 사태'라는 국가변란을 군부가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했다고 1980년 봄 이전에 입대한 전장병에게 동으로 만든 '국난극복기장'을 주었다.
우리 부대에서는 나까지 받았는데 군대라는 위계상황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개중에는 그것이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것마냥 휴가 나갈 때 차고 나간 사람도 있었다. 나는 아마 그것을 술 마시면서 술집에다 던져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군대생활 3년은 너무나 답답했다. 휴가 때나 겨우 선배 동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는 정도였다. 보안대 검열이 심해 책보기도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1983년 4월, 제대를 3개월 정도 남겨두고 교육계 고참이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나에게 물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 대학교 다니면서 데모했냐?"
"왜 그러십니까?"
"보안대에 특수교육을 보내는데 데모했던 경력이 있는 애들의 명단이 넘어왔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제대를 얼마 안 남겨놓고 무슨 일인가 하여 고참한테 책임지고 빼달라고 부탁했다. 말년 휴가를 나왔는데 녹화사업을 한답시고 운동권 학생들을 잡아다 훈련시킨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마 특수교육이라는 것도 녹화사업에 보내는 것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운이 좋게도 그 고참 덕분에 무사히 제대를 했다.
'광대'는 1980년 5·18 이후 풍지박산이 났다. 그때의 멤버들이 다시 모여 광대 재건을 이야기하면서 '일과 놀이'라는 소극장을 만들었다. 첫 작품으로 '당제'를 기획했는데 나는 주도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고 옆에서 조금 거들어주는 정도였다.
그 후 '광주 기독교민중문화선교원'(기문선)에서 3년 정도 일했다. 기문선은 농촌 두레작업이 주된 일이고 전통적인 문화프로그램을 개발해 내는 등 농민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그 후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독교민중문화선교원' 일을 정리하고 지금은 '윤한봉귀국추진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