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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미질부성(포항소재) 와적. |
<학성지>에는 학성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선조 30년 정유년에 왜(倭)가 읍성(울산읍성)을 훼손하여 돌을 가져다가 증성(甑城)을 쌓았다. 증성은 부(府, 즉 울산읍성)의 동쪽 5리(里)에 있는 필봉(筆峯)이며….(중략)…신학성(神鶴城)은 계변성인데 증성의 북쪽에 있다. 김극기가 소위 계변신이 학을 타고 신두산에 내려왔다는 곳이며 지금은 유지만 남아 있다.’
이를 보면 신학성은 울산부(성종8년·1477년에 완성한 울산읍성을 뜻함)의 동쪽 5리(里) 쯤 떨어진 증성(울산왜성, 현재의 학성공원)의 북쪽에 있다는 말이 된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770년의 증보판, 1908년 간행)에도 기록되어 있다.
‘계변성은 곧 신학성인데, 부(府)의 동쪽 5리(里)에 있으며, 다만 그 유지만 남아있다. 증성은 부(府)의 동쪽 5리(里)에 있는데 일명 도산(島山)이라 한다.’
이 기록은 <학성지>의 기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당시의 울산읍성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거의 같은 지점(동쪽으로 5리)에 학성과 증성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이 외에도 울산 관련 여러 고문헌의 학성 관련 자료는 거의 대부분이 울산읍성의 동쪽 5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울산왜성(증성)의 북쪽에 학성이 위치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그 내용들에 주목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학성은 점차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고지도에 의한 위치 확인
고문헌이 아무리 학성의 위치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하더라도 문자언어의 특성상 우리는 머릿속에서 그것을 그려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도는 당시의 지형과 지세를 직접적으로 표현해 놓은 만큼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학성 와적. |
여기서 살펴볼 울산 관련 고지도의 대부분은 조선 중후기의 것들이기는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수 백 년 전의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현재에 비하면 학성에 관한 보다 자세한 정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몇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고지도 상에 표시한 화살표 중 위의 것이 학성이다.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해동지도(海東地圖, 1724~1779)와 여지도(輿地圖, 18세기 중·후기)에는 증성(甑城)의 위쪽에 학성이 별도로 표기되어 있고, 그 사이로 울산부(蔚山府)에서 좌병영(左兵營)으로 가는 길이 나있다.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여지도(숙종~영조조)도 규장각 소장의 여지도와 유사하며, 증성과 학성이 구분되어 있다.
지면이 제한되어 더 많은 사례를 열거하기는 어렵지만, 조선후기 울산 관내의 도로를 면밀하게 묘사한 ‘학성각면도로총도(鶴城各面道路總圖, 1800년대 중반, 규장각소장)’와 좌병영을 위시하여 주변을 자세하게 표현한 ‘영좌병영지도(嶺左兵營地圖, 1800년대 후반, 규장각소장)’에도 학성은 앞에 열거한 지도와 동일한 위치에 표기되어 있다.
◇아직도 살아있는 학성
앞의 문헌과 지도들은 학성이 축조되었던 나말려초(羅末麗初)로부터 훨씬 후대인 조선후기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남긴 선조들이 그 선대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와 함께, ‘그 터가 남아있다.’등 당시의 모습을 보고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그 중요성은 매우 높다.
▲ 학성 북사면 토성. |
앞의 자료를 종합하여 볼 때, 학성은 지금의 학성동 ‘학성산(鶴城山)’임을 알 수 있다. 현재 학성산 일원에는 와편(瓦片)이 다량 산재하여 있고, 그 중 고대 울산의 이름이었던 ‘굴화(屈火)’와 ‘굴정(屈井)’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도 있어 통일신라시대 울산의 치소(治所)가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학성산의 능선부에는 토성(土城)의 성벽이 뚜렷이 남아 있다. 한편, 학성산 북사면(北斜面)에는 경작과 길의 개설 때문에 곳곳에 토성이 절개되어 있어 판축법으로 쌓은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판축법은 일정한 간격마다 고정시킨 거푸집 속에 흙·점토(粘土) 등을 다져 물이 스며들지 못할 정도의 콜로이드 상태로 만드는 방법이다. 울산에서 이렇게 쌓은 토성으로 학성 이외에 울주군 온산읍의 화산리성(華山里城)이 있다.
학성의 판축은 보다 견고하게 쌓기 위하여 백토(白土)와 황토(黃土)를 번갈아가며 다졌고, 나뭇잎 같은 유기물도 확인된다. 그리고 판축할 때 신라시대의 와편을 줄지어 쌓아 넣은 것(와적·瓦積)도 볼 수 있어 주목된다.
▲ 이창업 울산과학대학 공간디자인학부 교수 울산시 문화재전문위원 |
이처럼 와적한 신라시대의 토성 중 대표적인 사례로 남미질부성(南彌秩夫城·포항 흥해 소재)이 있다. 이 성은 신라의 동북방지역을 방어하였던 성으로 산정(山頂)을 감싼 테뫼식이다. 고려의 남하로 930년 고려에 병합되었고, 고려 현종 2년에 흥해읍성이 축조되면서 성의 기능은 읍성으로 완전 이관되었다.
이 남미질부성은 나말려초 신라가 고려로 흡수되면서 읍성에 자리를 내준 것이나, 판축과 와적(瓦積, 기와를 쌓아 토축하는 방식) 등 많은 부분에서 학성과 닮아 있다. 이처럼 학성산에 남아 있는 토성은 축성(築城) 방법과 시대적 상황 등 여러 측면에서 그것이 곧 학성임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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